영화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NASA에서 일한 세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당시 그들은 백인과 분리된 화장실을 써야 할 정도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오로지 실력으로 차별을 뛰어넘으며 자질을 인정받았다. 캐서린 존슨의 천부적인 수학 재능은 NASA의 달 탐사 성공에 기반이 됐고 그는 2015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자유 훈장을 받았다. 도로시 본은 다른 흑인 여성을 이끄는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슈퍼바이저가 됐으며, 메리 잭슨은 흑인 여성 최초의 우주공학 엔지니어가 됐다. 하지만 동명의 책과 영화를 통해 재조명받고 있는 세 사람 외에도, 차별과 맞서며 분투하고 성과를 낸 많은 여성 수학·과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애초에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학계에 미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이 불발되거나 혹은 노벨상을 받았음에도 학계에서 석연찮은 대우를 받기도 했다.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처럼 두고두고 이름을 기억할 만한 의미가 있는 여성 수학·과학자들을 소개한다.
DNA 구조의 실마리를 제공한, 로잘린드 프랭클린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낸 데 있어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제임스 왓슨이다. 하지만 많은 과학사 학자들은 그와 영국의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이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연구를 참고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1952년 X선을 이용해 DNA 구조가 나선형이며 X자 모양의 비뚤어진 사다리 이미지라는 것을 발표했다. 다만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DNA가 뒤틀린 사다리로서 이중나선 구조를 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공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DNA 연구에 매달려 있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넘어갔다. 두 사람은 학과장인 로렌스 브래그 경을 화나게 만들 정도로 잘못된 모델을 제시해 DNA 연구를 금지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잘린드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모리크 윌킨스가 로잘린드와 한마디 상의 없이 DNA 나선구조 이미지를 비밀리에 복사해 왓슨에게 넘겨주고, 이를 토대로 연구 자격을 되찾은 두 사람은 새로운 DNA 모델, 즉 이중나선 구조를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DNA의 나선형 구조를 밝힌 업적으로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했지만,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공동 수상의 기회를 놓쳤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공이 인정받지 못한 데 아쉬움을 표하는 과학자들도 있었지만, 당사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제임스 왓슨은 노벨상 수상 후 출간한 ‘이중나선’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시골뜨기이며 곰팡내 나는 바보”라고 묘사하며 심하게 모욕하기도 했다.
노벨상 후보 역대 최다 추천을 받았던, 리제 마이트너
리제 마이트너는 1900년대 초 당시 일반 물리학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방사능 연구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핵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다고 믿었지만, 마이트너는 원자가 분열할 때 핵에서 방사능이 나온다는 새로운 원자이론을 신봉했다. 이때 자신의 연구를 함께할 평생의 동지 오토 한을 만났다. 한이 화학적인 방법으로 방사능 원소들을 정제하면 마이트너는 그 원소들이 내보내는 방사능을 측정하는 식으로 함께 연구를 했고, 두 사람은 방사능 화학원소와 원자물리학을 이해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그리고 원자번호 92보다 더 높은 원자번호의 인공원소를 만들어내는 실험을 시작하며, 조교로 일하던 프리츠 슈트라스만도 참여하게 됐다. 하지만 나치 히틀러가 유대인 차별법을 통해 유대 과학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마이트너는 연구를 중단하고 스웨덴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 남아 있던 한과 슈트라스만이 초우라늄 원소를 추출하는 실험을 계속했고, 그 의미는 서신을 통해 그들과 교류하던 마이트너가 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세 사람이 1930년대 후반부터 발표한 핵분열 관련 논문들은 많은 과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두 사람은 역대 최다 추천 노벨상 후보 과학자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 연구의 수혜는 오토 한에게만 돌아갔다. 1944년 노벨 화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기 때문이다. 수상자 명단에 마이트너가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 성차별 논란이 일었고, 오토 한은 우라늄 핵분열 발견에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이 기여한 바를 언급하며 상금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이후 그는 핵분열 발견 과정에서 두 사람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며 그의 공헌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고, 특히 마이트너가 독일을 떠난 이후 핵분열을 하게 된 것을 근거로 그가 방해가 되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에펠탑이 기록하지 않은 이름, 소피 제르맹
여성이 수학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시기도 있었다. 우연히 아버지의 서재에서 몽뛰시아가 쓴 ‘수학의 역사’를 접한 후 기하학에 호기심이 생긴 소피 제르맹 역시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야 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서재에 있는 모든 수학책을 남몰래 밤새 읽어가며 수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고등교육을 받고 싶었지만 국립 고등기술학교가 여성에게는 입학조차 허가하지 않았고, 그래서 소피 제르맹은 여러 교수의 강의 노트를 모아 그 학교의 르 블랑이라는 남학생 이름을 훔쳐 라그랑주 교수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가명으로 자신의 연구 내용을 가우스에게 보낸 소피 제르맹은 4년여간 편지 내용을 통해 그에게 지도를 받기도 했고, 이후 가우스는 괴팅겐 대학에 제르맹을 추천해 명예 박사 학위를 받게 했다.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며 수학 공부를 이어간 소피 제르맹은 마침내 현대 탄성물리학의 기초를 이룬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하는 업적을 세우게 된다. 이 공을 인정받아 1816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의 에펠탑에 새겨져 있는 철제 빔의 탄성 연구에 공헌한 72명의 과학자들 명단에 제르맹의 이름은 없다. ‘과학계의 여성들’의 저자 모 잔스는 이에 대해 책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탄성 이론의 기반을 닦은 장본인이 리스트에서 빠진 것은 그가 여자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인기 배우의 업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했던, 헤디 라마르
18살의 나이에 구스타프 메커티 감독의 ‘사랑의 심포니’에서 4분간 나체로 호숫가 주변을 돌며 춤을 추는 파격적인 연기로 이름을 알린 배우 헤디 라마르는 이듬해 탄환공장의 총지배인으로서 세계적인 군수산업 기업을 대표하고 있던 프리츠 만들과 결혼했다. 하지만 지배욕이 강한 남편은 그를 집 안에 가두고 배우 생활을 하지 못하게 간섭했고, 결정적으로 남편이 심한 나치 동조자가 되면서 부부관계는 파국에 치닫게 됐다. 헤디 라마르가 결혼으로 유일하게 얻은 것은 남편의 일에서 배운 지식, 즉 원거리 조정 어뢰에 관한 것이었다. 여자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 프리츠 만들은 사업상의 문제를 사람들과 논할 때 아내가 옆에 있어도 상관하지 않곤 했다. 헤디 라마르는 어뢰의 조정신호를 여러 개의 주파수로 분산시키면 적군도 알아낼 수 없으므로 명중률을 100%까지 올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이는 이혼 후 배우 활동을 다시 시작한 그가 음악가 조지 안타일과 함께 주파수 증폭 장치를 발명하는 토대가 됐다. 두 사람은 미연방 특허청에 장비를 출원했고, 그들이 얻은 특허권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전문연구가가 아닌 할리우드 배우의 군사용 장비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들의 발명품은 20년이 흘러 주파수 호핑 법칙이 미사일 기술의 기본 개념이 되고 쿠바 사태에 미군이 투입되는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헤디 라마르의 기술은 디지털 전화접속을 가능케 했고, 이것은 데이터 전송과 무선전기 연결망의 바탕이 됐다. 하지만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그의 아이디어로 엄청난 돈을 버는 동안 헤디 라마르가 대가로 받은 것은 플래카드 형태의 몇몇 인정서뿐이었다.
두 개의 노벨상을 받아도 차별받았던, 마리 퀴리
남편 피에르 퀴리보다 유명하지만 자신의 본명보다 ‘퀴리 부인’으로 더 많이 알려진 마리 퀴리의 업적은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이다. 하지만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이 퀴리 부부에게 수여될 때 피에르 퀴리의 이름만이 거론됐고, 스웨덴의 페미니스트 수학자 괴스타 미타그레플러의 반발이 제기된 후에야 마리 퀴리도 남편 이름 옆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스톡홀롬에서는 남편인 피에르 퀴리만이 연단에 섰다. 심지어 당시 심사위원단은 마리 퀴리가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남자가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 남자에게는 그 곁에서 보조를 맞춰주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1906년 남편이 마차에 치여 죽은 이후 그의 교수직을 물려받아 소르본 대학 역사상 첫 여성 교수가 된 마리 퀴리는 이후에도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1911년 당시 프랑스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은 마리 퀴리를 반유대주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여성, 페미니스트로 몰아붙이고 교회도 반대하는 외국인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마리 퀴리는 무선통신 분야의 남성 브랜리에게 밀려 한 표 차이로 가입이 좌절됐다. 1911년 노벨 화학상까지 받으며 이후 51년 동안 두 개의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과학자가 됐던 마리 퀴리에 대한 대우였다.
대학은 대중목욕탕인가, 에미 뇌터
괴팅겐 대학은 여성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독일 최초의 대학이긴 했지만, 여자에게 교수 자격을 주는 문제에는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에미 뇌터는 훌륭한 자질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수로서의 정식 임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괴팅겐 대학에 남아 함께 연구할 것을 권했던 괴팅겐의 힐베르트 교수는 뇌터에게 대학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는 동료 교수들을 향해 “대학은 대중목욕탕이 아니다”라는 일침을 놓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교수 자격을 얻게 된 이후에도 차별은 계속됐다. 아인슈타인과 헤르만 바일이 프린스턴 대학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뇌터는 펜실베이니아의 한 여학교에서 변변치 못한 자리 하나를, 그것도 간신히 구할 정도였다. 이런 성차별적인 분위기에서도 불구하고 뇌터는 1918년 자연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대칭성이 수학적 결과임을 증명하는 ‘뇌터 정리’를 완성한다. 뇌터 정리는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1935년 ‘뉴욕 타임즈’에서 “현존하는 가장 유능한 수학자들의 판단에 의하면 에미 뇌터는 여성 고등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훌륭한 수학의 천재였다”고 평했다. 이토록 동료 과학자들이 그의 천재성을 극찬했음에도 에미 뇌터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상에는 수학 분야가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수학적 업적이 물리학에 크게 기여했으므로 물리학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시아의 마리 퀴리, 우젠슝
뇌터처럼 대칭성 문제에 큰 업적을 남겼지만 주목받지 못한 여성 과학자는 한 명 더 있었다. 아시아의 마리 퀴리라 불린 우젠슝이다. 1950년대 우젠슝을 포함한 세 명의 중국 출신 과학자들은 패리티보존법칙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리정다오와 양첸닝이 “일부 핵현상에서는 일반적인 모든 물리현상을 지배하는 패리티 대칭성 또는 좌우 대칭성이 깨질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논문을 발표하고, 우젠슝은 이에 대한 실험에 착수한 것이다. 원자핵이 붕괴되면서 방출하는 전자의 수가 음극과 양극으로 똑같이 방출된다면 패리티보존법칙이 성립한다. 하지만 우젠슝은 이 실험을 통해 베타 붕괴가 한쪽 방향에서만 나타나면서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노벨물리학상은 리정다오와 양첸닝에게만 돌아갔을 뿐 우젠슝에 대한 언급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가설을 입증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지 않고 대신 가설을 제안한 두 남성 과학자에게만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다.
참고 서적
페링거 외 2인, 게임 오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노벨과학상 운영 시스템에 대한 연구
니콜라 비트코프스키, 딴짓의 재발견
린 M. 오센, 수학을 빛낸 여성들
달렌 스틸, 시대를 뛰어넘은 여성과학자들
송성수, 한권으로 보는 인물 과학사
https://m.ize.co.kr/view.html?no=2017040400257257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