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회에서 추진하는 “상동 이야기”를 전자책(E BOOK)으로 발간함에 있어 “대한중석 상동광업소”와 텅스텐(重石)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고는 진행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 두 가지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약한 지식이나마 상동광업소에서 생산했던 텅스텐(重石)이란 광물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를 하고, 내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대한중석 그리고 대한중석 초경사업본부 후신(後身)인 “투자의 현자”라고 일컫는 “워렌버핏”이 대주주인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소재한 대구텍(Teague Tec)에서 근무 하면서 보고, 듣고, 알게 된 내용, 상동광업소 폐광 이후 캐나다의 광업회사(Wolfe Mining)에서 상동광산 재개발을 진행할 때, 투자처에게 제공할 “타당성 조사서”(Feasibility study)와 법적인 구속력은 없지만 지대한 “관심과 긍정의 의사 표시”라고 할 수 있는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 양해각서) 체결 시까지 참여
하면서 알게 된 내용, 그리고 1950~1960년대 상동광업소에서 근무 하셨던 선친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격식 없이 허물없는 친구와 마주 앉아 편하고 부담 없이 이야기 하듯 난필이나마 하나하나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자 한다.
◼ 중석 노두(露頭)
노두란 “광맥이 지표에 드러난 것”을 말하는데 우리 고향의 텅스텐(重石)노두는 1916년 4월 “황순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혹 자는 “맹달호”와 공동 발견자라고 하기도 하지만 “황순원”이 발견한 것이 맞는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
그때 황순원씨가 발견한 중석은 “철망간중석(Fe,Mn)WO4”이라고 칭하는 ”흑중석“이다.
1년 후 1917년 ”조선총독부“ 광산 기사가 상동 천주교 뒷산(민골 지역)에서 광물 탐사 작업을 하다가 회중석(CaWO4) 노두를 발견했다.
그 두 곳의 노두에 의하여 흑중석을 채굴하는 순경광산(順鏡鑛山)과 회중석을 채굴하는 ”도엽광산(稻葉鑛山)이 창립된다.
(최초로 중석 노두를 발견한 황순원씨는 당시 봉화군 춘양면 소재 금정광산(일명 우구치 광산)에서 지질조사 업무를 보조했는데 그분은 상동 조태원(상동중 12회)동문의 외조부라고 한다.)
◼ 토록
구래초등학교 운동장 측면 하천 건너에 가파른 바위산이 있는데 그 산은 민골까지 이어지는데 “토록산”이라 부른다. 그 산의 지질은 세송과 같은 석회석이 아니라 꼴두바우와 같은 규암(硅岩)로 된 바위산이다. 양지쪽에 위치한 산이라서 봄이면 바위틈 사이로 분홍색 예쁜 진달래가 다른 곳 보다 빨리 피는 산이다. 토록산은 곳곳에 작은 구멍이 파여 있고 길이가 짧은 갱도도 여러 곳이 있는데 어려서 구래초등학교 앞에 사는 친구를 따라서 수정을 캐러 몇 차례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 산은 푸른 흙이 있는 산(土綠山)도 아니고, 토끼와 사슴이 관계되는 산(兔鹿山)도 아니다. “토록”은 광산과 관계가 있는 용어이며, 순수한 한글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토록”의 뜻은 광석이 지구 활동으로 광맥의 일부가 그 본체에서 분리되어 다른 잡석과 본맥 겉으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본맥에서 떨어져 나간 일부 광석이므로 광석의 량은 그리 많지 않다. 토록산 곳곳에 파여 있는 공동과 갱구는 토록을 캐던 장소다. 그곳에서 캐던 토록은 “흑중석”이다
(토록산은 모래(석영) 성분인 규암으로 되어있고 상동 광업소 텅스텐은 규암 층에서 채굴한다)
◼ 중석(Tungsten) 그리고 중석의 혜택
텅스텐의 원소 기호 는 “W”, 원자 번호 74, 분자식은 “WO3” 비중은 19.3으로 무겁고, 단단하고(超硬), 잘 닳지 않고(耐磨耗), 열전도가 늦고(耐熱), 녹는점이 금속 중에서 가장 높아서(섭씨 3,400도 이상) 텅스텐을 용해하여 제품을 만들려고 해도 3,400도 이상의 초고열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제작할 수 없으므로 텅스텐 제품은 소결(燒結) 과정을 거쳐 제품을 제조한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텅스텐은 포탄, 포신, 기갑 병기의 방열, 방탄판, 로켓 등 군사 무기와 초경합금(超硬合金)을 소재로 제품을 가공, 생산하는 광산공구, 절삭, 내마모 공구와
중합금 (Heavy alloy) 소재 등 여타 산업재로 주로 쓰인다. 근래에는 전자제품. LED, LCD, 반도체 내열(耐熱)에 사용되기도 한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렌지의 열선도 텅스텐이다.
상동광업소에서 생산된 텅스텐은 품질이 좋아서 미국 금속학회 및 연구소에서 “세계 표준”으로 인정받았고, 냉전기에는 공산권을 제외하고 자유세계 텅스텐 총생산량의 15%를 상동광업소에서 생산했다. 이렇게 품질 좋은 텅스텐을 생산하는 세계 제 1의 텅스텐 광산이 우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에 있었고, 그 광산에서는 종업원의 복지를 위하여 중, 고등학교를 건립하고 훌륭한 선생님을 대거 초빙했다. 우리들은 모두 산간 오지에 살았으나 도회지에 나가지 않아도 중,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고향에 살면서 받은 큰 복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작은 텅스텐 제품을 휴대하고 있다. 핸드폰을 진동으로 두면 전화가 올 때의 떨림이
발생하는데 그 진동은 녹두알 보다 작은 텅스텐 볼(Ball)이 휴대전화 내부의 벽에 부딪쳐 발생하는 진동이다)
◼ 상동광업소 그리고 전쟁
노두 발견 이후 2개의 광산이 중석을 채굴 했는데 “소림광업주식회사”에서 1941년도에
순경광산(順鏡鑛山)과 ”도엽광산(稻葉鑛山)을 매입하여 두 개 광산의 이름을 통합하여 개칭
하였는데 그 이름이 바로 “상동광업소”이다. 그해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습(41.12.7)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상동광업소에서는 텅스텐을 대폭 증산했고 생산된 중석은 전량 미국과의 전쟁 물자로 쓰였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에서 가져간 중석 가격은 2010년도 기준으로 100억불 이상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6.25 사변 중에 생산된 중석은 전량 미국이 수입했으니 상동광업소는 전쟁 중에도 외화를 벌어 드린 효자 회사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6.25 휴전 전까지 국가의 치안과 질서가 정상적으로 유지되지 않던 시기에
우리나라는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서 극심한 이념 갈등으로 국민들이 이분화 되었다.
그 여파로 상동지역은 물론 상동광업소 근무자들도 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져 폭력 사건이
잦았고 광업소 국기 게양대에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인공기가 게양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국가관이 분명하고 애국심이 강하신 몇몇 분들이 좌경화된 종업원을 설득하고 전향시켜 광업소가 좌익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했고, 젊은 종업원들에게는 국가의 징병 명령을 기피하지 말고 즉시 응하라고 설득해서 입대 시켰다고 한다.
그 훌륭하신 분들 중에는 1980년대에 작고 하셨지만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이 계신데 그분은 1949년11월~1952년9월까지 상동광산 종업원의 권익을 대표하는 노동조합의 지부장 등의 보직에서 근무하신 내 친구의 선친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내가 어린나이에 선친을 여위고 일용직으로 광부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항상 안전하게 작업하고, 희망을 잃지 말고 기죽지 말고 당당하라”고 격려하여 주셨다. 그 말씀이 30년 가까운 나의 대한중석 생활에 큰 기둥이 되었다.)
◼ 6.25와 부모님
나의 부보님은 실향민이시다. 아버님은 고향인 “황해도 벽성군 고산면”에서 태어나셔서 젊어서는 일본으로 징용을 가셨고 징용이 끝나고 귀국하셔서는 황해도 옹진군에 소재한 일본인 고바야시(小林 )소유의 금, 은, 아연, 황동 등을 채굴하여 정제하는 “소림광업소”에서 근무하셨다. 그 광산에서 재직 중에 해방과 6.25 사변을 맞으셨다, 6.25에 의한 피난이 시작되자 정부와 미군이 옹진군 지역의 피난민을 위하여 제공하는 배를 타고 조상들의 선령이 있고 대대로 살아오신 고향을 떠나 자유를 찾아서 피난을 오셨다. 그 당시 병들고 연로한 가족, 논밭 등의 부동산, 선령이 있는 고향을 두고 피난을 갈 수 없다는 등의 사유로 인하여 피난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많았지만 아버님은 그분들과 생각이 다르셨다. 아버님께서는 6.25가 발발하고 몇 개월간 북한 치하에서 살아 보시고 “빨갱이 통치에서는 사람이 살수 없다”라고 판단하시고 본인 자신과 앞으로 있을 후손의 미래를 위하여 피난을 택하셨다고 하셨다. 그때 아버님이 피난을 결정하지 않으셨으면 우리 가족 모두는 지금쯤 김정은 이와 그 집단을 찬양하며 배를 곯으면서도 지상 낙원에 산다고 세뇌된 삶을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 피난 그리고 수용소
부모님이 계시던 황해도 옹진지역의 피난민 수송을 위하여 크고 작은 십여 척의 배가 항구에서 며칠간 정박하면서 무작위로 피난민을 승선시킨 후 큰 배부터 목적지인 목포항으로 출항했다고 한다. 그때 큰 배 몇 척은 빨리 출발하여 무사히 목포항에 도착 했지만 뒤이어 출항한 배는 대부분 작은 배라서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 목적지인 목포항으로 못 가고 풍랑을 피해서 군산항에 입항했다. 어머니는 큰 배를 타고 목포항에 도착 했지만 선친께서는 옹진광업소 출신이 많이 탑승한 작은 배를 탔기에 군산항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아버님은 “군산 피난민 수용소” 어머님은 “목포 피난민 수용소”에 입소하여 두 분은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그때 피난 과정에서 풍랑에 의하여 이산가족이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첫댓글 우리 동문회에서 "고향이야기"를 주제로하는 e-book을 제작하는데 고향에서 40년을 살면서 고향의 텅스텐
혜택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는 내가 침묵하고 있으면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기고 했음.
내가 기고한 내용은 고향 그리고 텅스텐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내가 살아온 나날이라고 할 수 있음.
이 졸작은 장편으로 본 동문회 카페에서 계속 연재할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