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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덴 시 (市) 는 12월 크리스마스 휴가가 시작되기 전 11월에 이미 한차례 큰 축제를 치른다. 바로 랍스터 (lobster) 축제로 내륙의 드라이덴 시민들로서는 동부연안에서 갓 잡은 랍스터를 맛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즐거움 중의 하나다.
이 날은 이곳의 학교 강당을 빌려 약 400여명이 식사를 함께 하고 연이어 댄스파티를 벌인다. 400여명의 참가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한가닥 하는 사람들로 인구 고작 8000여명의 도시에서 한꺼번에 400여명이 모인다는것은 대단한 행사가 아닐수 없다. 서울시에 대비하면 서울시 인구 40만명이 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식사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참가비가 좀 쎄지만 예약 접수를 받기 무섭게 티켓이 팔려나간다. 이후 12월이 시작되면 큰 건물, 관공서, 사업체 그리고 가정집에서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 오색전등의 점등이 시작된다. 시에서는 그 해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을 가장 멋있게 한 곳을 선정해 표창을 한다고 했다.
우리 팀버랜드 모텔도 작년에 쓰고 잘 간직해 두었던 오색 전등을 꺼내 사무실 입구와 2층 객실 난간에 길게 연결해 크리스마스 기분을 맘껏 내 보았다. 투숙객들은 우리의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이 엄청 멋이 있다고 칭찬을 많이 했다.
관공서는 12월 23-4일부터 새해 1월 6-7일까지 크리스마스, 연말, 연시 휴무에 돌입한다. 참으로 느긋하다. 이곳에서 공무원을 하고 싶다. 이에 따라 변호사, 회계사 등등도 거의 업무를 보지 않는다. 같은 사자 (字) 돌림이지만 이 기간중 의사는 평소와 다름 없이 업무를 봐야한다. 드라이덴의 의사 부족은 아주 심각해서 필자는 그곳에 살면서 최초 3년간은 가정의 (Family Doctor) 없이 지냈다. 다행히 치과 가는일 빼고는 큰 병이 없어 응급실 신세를 지지는 않았다.
드라이덴 시에서는 이들 의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와 개업하는 의사들에게 초기 정착금을 주고 일정 소득을 보장 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큰 효과는 없었다. 하는수 없이 경력 몇년이상의 간호사들에게 처방권을 주기도 했다. 연방정부는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나이지리아 출신 의사들을 특수이민으로 받아들여 일정 교육을 수료 시킨뒤 드라이덴 같은 벽지로 발령을 내곤 했는데 그것도 실패했다. 이유는 그들이 의무기간만 지나면 인근 대도시 (선더베이나 위니펙) 로 모두 빠져 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온타리오주의 의대생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들이 계속 나오는데 그것도 쉽지만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비교적 한가한 이 기간중 우리 변호사와 회계사 부부와 함께 크리스마스 겸 연말을 맞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번즈 변호사 부인은 거침없는 호걸 타입의 여성으로 토론토 대학시절 늙은 늑대 (?) 번즈를 만나 그의 꾀임으로 이 깡촌에 와서 사느라고 고생이 심하다고 했다. 그녀가 고생이 심하다는 것은 음악을 전공한 그녀가 이곳에서는 각종 연주회나 공연 등등 문화생활을 누릴 기회가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번즈의 이야기로는 오히려 그런 연주회가 열리는 선더베이나 위니펙으로 여행까지 다니니 오히려 더 좋지 않느냐는 반응이었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또 번즈가 여름에는 조그만 2인용 수상비행기 조종에 미쳐 그걸 타고 인근 수많은 호수로 가서 낚시로 주말을 보낸다고 했다. 같이 가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기는 낚시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한다. 번즈가 수상비행기 타고 낚시가는걸 섹스보다 더 좋아한다고 해서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회계사 마이크의 부인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죽자 그 충격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세상 어디에서 살고 있더라도 부부갈등은 있게 마련이고 각 가정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려움이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어 드라이덴 한인 커뮤니티 (그래봤자 3가구 6명) 도 이국의 깡촌에서 번갈아 가며 식사초대를 하며 함께 모여 외로움을 달래고 한편 우의와 결속을 다지곤 했다. 그리고 가뭄에 콩나듯이 어느 가정에 외지에서 손님이 오면 그 날이 또한 드라이덴의 한인이 모두 모이는 날 이었다. 비록 자식들은 모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지만 열심히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데 대해서도 우리 모두 감사해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낳고 자라 성년이 되었지만 대 도시라고는 선더베이와 위니펙 이외에는 가 본곳이 없는 이들도 많았다. 한번은 교회 팟럭행사 (Potluck: 행사에 쓸 음식을 각 가정이 한 접시씩 만들어 가지고 온다) 때 아내가 김밥을 만들어 갔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손을 대기를 꺼려 했다. 그러자 어떤이가 “ 아! 이거 내가 위니펙 일본식당에서 먹은 스시의 일종이다" 라고 해서야 비로소 몇몇 사람들이 맛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을 보니 그저 그런 음식인듯 했다.
우리처럼 모텔이나 식당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급할것 없는 조용하고 차분한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사건 사고가 거의 없으니 경찰과 소방서가 평시에 무얼하는지 모르고 살았다. 필자가 기억하기에는 연중 경찰의 큰 행사 중 하나가 드라이덴 지역 퇴역경찰관협회가 주최하는 골프대회가 끝나고 바베큐파티에서 한잔 걸친 참가자들을 경찰차에 태워서 집까지 편안히 모셔다 드리는게 아닌가 싶다.
소방서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사업체에 공문을 보내서 화재진압교육을 받고자 하는 곳은 그들이 날자를 정해 그곳에 찾아가 화재진압 시범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찾아가서 하는 공공 서비스다.
그러나 겨울이 하도 춥고 길다보니 그 부작용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곳은 40대에 이미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를 옆집 엘리는 이렇게 말했다. “겨울에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애들이 집구석에 쳐박혀 있어야 하니 할거라곤 그것밖에 더 있겠어?”
그리고 보니 고등학교 다니다 임신과 출산으로 더 이상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었던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우리 모텔 전 주인 레나도 그 중에 한명으로 전 남편과 사이에 딸이 있는데 그 딸이 얼마전 출산해서 자기도 할머니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 모텔에서 일하던 샌디는 아주 잘못된 케이스로 역시 고등학교 때 임신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홀어머니로 딸을 키우며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다 그 딸은 외할아버지에게 맡기고 재혼을 했는데 당시 남편과 아들 둘을 데리고 극빈자로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근근히 살아가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게 인구증가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좋은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
이 샌디가 어느날 출근 하였는데 앞니 1개가 부러진채 였다. 자기 말로는 부엌 모서리에 부딪혔다고 하는데 전날 밤에 남편과 싸우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그의 형편을 잘 알기에 저 친구가 저 이를 어떻게 해 넣을까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며칠뒤 그가 앞니를 깜쪽같이 치료하고 나왔다.
무슨 돈으로 그걸 치료 했느냐는 나의 물음에 공짜로 했단다. 자기네 같은 극빈자는 치과, 안과 그리고 약값까지 무료라고 했다. 다시 한번 캐나다 정부의 사회복지제도에 감탄을 한 순간 이었다.
이런 환경 덕에 이들은 우리 처럼 절박한 마음에서 하는 은행저축이 없다. 돈이 생기면 우선 쓰고 본다. 돈 쓸일이야 오죽 많겠는가? 그리고는 일년에 한번은 반드시 휴가를 가야하는데 모아논 돈이 없으니 은행에서 휴가비 대출을 받는다. 이렇게 받은 대출은 휴가 갔다와서 일년간 얼마씩 갚아나간다.
고등학교만 나오고 용접공,전기공 혹은 배관공이 되면 평생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누가 고등학교만 나왔다고 혹은 허구한날 때 묻은 작업복을 걸치고 다닌다고 흉 볼 사람도 없다. 토요일 일요일은 가족과 바베큐를 하던가 아니면 모터보트를 타고 와비군호수에 나가 낚시를 즐길수 있다. 번즈 변호사처럼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이 호수 저 호수 날아다니며 낚시를 하지는 못 하지만.
대 도시와는 달리 인구가 적어서 인지 아침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을 내가 알던 모르던 무조건 굿 모닝이다. 그것도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채. 이들의 신조는 인생은 상을 찡그리고 살 만큼 그렇게 길지 않다 (Life isn’t long enough to get mad) 인듯 했다. 그리고 남을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 같다. 옆집 엘리 처럼.
우리네 처럼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그 중요한 초/중/고 시절, 여행을 다니고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시기에, 같은반 친구를 경쟁자로 삼아 주입식 암기교육에 목을 매달고 그 후에는 돈을 벌어 집을 장만하기 위해 거기에만 전력질주 해야하는 사회 분위기만 아니라면 우리도 이들처럼 어리숙해 보일 정도로 순진해 질수 있을런지? 이런 의문을 지니고 필자는 7년 반의 드라이덴 생활을 마감한다.
이곳 밴쿠버로 돌아와 바로 은퇴생활을 시작한지 어언 12년. 지금도 그 때 그 사람 (심수봉의 노래 제목이다) 들의 얼굴이 가끔 주마등 같이 떠오른다. 드라이덴 최초의 한인 마선생, 나를 그곳으로 오게 한 친구이자 이민 선배 C, 옆집 엘리, 회계사 마이크, 변호사 번즈, 몬트리얼은행의 대출담당 마고, 전 주인 에릭과 레나 그리고 팀버랜드 모텔에서 함께 일 했던 우리 종업원들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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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중간에 글자 크기가 갑자기 작아진 줄이 있습니다.
- 제 솜씨로는 수정불가라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 너그러운 이해 바랍니다.
그 곳 생활상을 사진 보듯 자세하게 알 수 있어서 유익했습니다.
- 캐나다가 워낙 큰 나라이며 또 그곳이 밴쿠버와 달리 워낙 깡촌이라서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 새해도 건강하시고 좋은 글도 많이 발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캐나다에서도 모르는 문화를 많이 알게 되었읍니다.
감사드리며 다음편을 기대합니다.
건강하시고 복많이 받으세요.
- 한국에서의 사건, 사고와 지금 계시는 곳의 일상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 힘들때 마다 버킷리스트 생각하세요. 힘이 날 겁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