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관새해
요 1:9-14
영화 ‘빠삐용’에서 장기수들이 가석방 심사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심사관 앞에서 마음 조리는 장기수 서류에 도장이 찍힙니다. “
거절”(Rejection)하면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
인정”(Acceptance)하면 가석방이 되어 나가게 됩니다.
거절과 인정이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거절하느냐는 것은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영어성경에는 “The Word became flesh and blood”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호 로고스 싸르크스 에게네토)
사도 요한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매우 어려웠습니다.
헬라 철학과 기독교 사상이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헬라 철학과 기독교 사상 안에 공통되는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로고스’, ‘말씀’이라는 개념입니다.
헬라 철학에는 ‘말씀’이라고 번역된 ‘로고스’란 개념이 있습니다.
로고스란 우주 만물 속에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 원리 또는 질서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헬라인들에게 익숙한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건, 이 사건이 성탄 사건입니다.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된 이유는 우리 가운데 계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최고로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주님을 거절한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주님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은혜란 말은 과분한 선물입니다. 봐주는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로레인 뵈트너”(Loraine Beitner)는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
은혜는 무가치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자유롭고 과분한 사랑과 호의를 말한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죄인 된 나를 향한 구체적인 사랑을 깨닫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은혜를 그만 구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성탄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과분하게 주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강퍅하고, 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체험했을 때 인생이 180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 “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은혜를 깨달으면, 진리를 따르게 됩니다.
은혜만 있으면, 무질서가 옵니다.
진리만 있으면, 삭막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시면서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은혜가 충만하여 주님이 좋은 선물을 주십니다.
진리가 충만하여 말씀을 따르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주권을
대한제국에 영친왕이 있었습니다.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이 있었으나, 영친왕에게는 주권, 통치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제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왕이었지만, 유명무실한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에게 주권을 드리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유명무실한 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주권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께 주권을 내어 드려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탄과 새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