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폭에 남겨진 비극의 여인들(1)
-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 1577~1599)
지네브라 칸토폴리(Ginevra Cantofoli), 『터번을 쓴 여인(Woman wearing a turban)』, 캔버스에 유채, 64.5x49cm, 국립고대미술관, 이탈리아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와 팔라초 코르시니(Palazzo Corsini), 1650
처연한 눈빛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 속 인물은 16세기 이탈리아 귀족으로 베아트리체 첸치라 불린 여성입니다. 부패한 권력에 맞서 무고하게 희생된 비극적 인물의 상징이지요. 그 아비인 프란체스코 첸치는 도덕심이 없는 데다 폭력적이기까지 한 인물입니다. 끊임없이 가족들을 학대했고, 딸인 베아트리체를 강간하는 추악한 범죄까지 저질렀습니다. 베아트리체가 도움을 청한 당국은 프란체스코가 귀족이란 이유로 그이가 한 신고를 묵살하고 사건을 방치했습니다. 아비 프란체스코는 이미 이전에 악행 탓에 교황에게 처벌 받은 전력까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딸이 신고한 사실을 알게 된 프란체스코는 계모 루크레치아와 베아트리체를 지방에 있는 한 성에 가둔 후 더 심하게 학대했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이를 견딜 수 없었지요. 친오빠와 이복 남동생, 그리고 두 하인까지 끌어들여 모의한 후 프란체스코를 살해합니다. 처음에 독약을 먹였는데 그래도 죽지 않자 망치로 내리쳐 숨통을 끊은 후 시신을 높은 난간에서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사람들에게 실족사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아무도 이를 사고사로 여기지 않았고, 결국 교황청 경찰들이 수사에 착수하게 됩니다. 교황청은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 후 가담자 전원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자 로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프란체스코가 살아 있을 때 끊임없기 가족을 학대하고 베아트리체를 강간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시민들은 베아트리체 일가가 행한 살인이 정당방위라 주장하며 이들을 처형하란 선고에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형 집행을 잠시 미루는 사단이 일어났습니다만, 당시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들에게 아주 자그마한 자비조차 베풀지 않았습니다. 당시 첸치 가문이 소유한 자산은 막대했거든요. 클레멘스 8세는 이 살인을 빌미로 첸치 가문이 가진 재산을 몰수하고 싶었던 겁니다.
교황청은 산탄젤로 다리 위에 사형대를 설치했습니다. 아름다운 야경과 함께 수 많은 역사를 담고 있는 그 다리 말입니다. 먼저 오빠 자코모의 사지를 찢은 후 그걸 네거리에 매달았습니다. 옛날에 소와 말을 이용해 집행한 거열형(車裂刑)과 같은 잔혹한 형벌이죠. 다음으로는 계모 루크레치아 페트로니, 마지막으로 베아트리체를 참수했습니다. 아비와 교회의 더러운 욕심 때문에 고작 스물두 살에 불과한 꽃다운 처녀 베아트리체는 허망하게 죽어야만 했습니다. 막내동생 베르나로만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지요. 교회는 그를 죽이지 않는 대신 어미와 이복형.누나가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지켜보게 하는 또 다른 잔인한 짓을 했습니다. 교황은 첸치가문이 소유한 전재산을 몰수한 후 베르나르도를 다시 감옥에 처넣어 버렸습니다.
베아트리체를 처형한 산탄젤로 다리
.................................................
이들은 베아트리체의 시신을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Church of San Pietro in Montorio)에 매장했습니다. 베아트리체가 겪은 비극을 본 로마 사람들은 그녀를 오만한 귀족 계급에 대해 저항하는 상징으로 여기게 됐습니다. 이후 해마다 베아트리체가 죽기 전날 밤이면 잘린 머리를 든 베아트리체 유령이 산탄젤로 다리위에 나타난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옵니다. 한편, 이 성당은 오랜 세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수제자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된 곳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아벤티노 언덕에서 바라본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
산탄젤로 다리 앞에서 처형한 베아트리체를 유언에 따라 이 성당 중앙 제단 아래에 안치했다. 죄인 신분이라 묘비에는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1798년 로마를 점령한 나폴레옹 군이 성당을 약탈하면서 베아트리체의 묘지를 파헤쳤고, 그때 두개골.유골이 훼손.약탈당해 없어졌다.
성당 오른쪽 옆에 있는 작은 신전이란 뜻의‘템페에토’. 오랜 세월 베드로 처형지로 알려진 장소. 훗날 성베드로 대성당 재건공사를 맡은 브라만테가 설계했다. 15세기 이후 가톨릭 전통은 사도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형을 받아 이 성당 안뜰에서 순교했다 전한다. 성당 이름의 ‘Montorio’는 ‘금빛 언덕(Monte d'Oro)이란 뜻의 야니쿨룸(Janiculum) 언덕에서 유래했다. 현대 역사학계는 실제 순교 장소를 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 네로 경기장(Circus of Nero) 근처로 추정한다.
위 그림은 베아트리체 첸치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중에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예전에는 귀도 레니(Guido Reni)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후에는 엘리사베타 시라니의 작품으로, 지금은 지네브라 칸토폴리가 그린 작품으로 추정합니다. 이 그림은 베아트리체가 단두대로 향하기 전 모습을 담은 것이란 얘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명암을 강렬하게 대비하고 파격적인 사실주의를 보여준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가 있지요. 그는 직접 첸치를 그리진 않았습니다만, 1599년 9월 로마에서 집행한 베아트리체 첸치의 공개 참수형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입니다. 카라바조는 그날의 잔혹한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충격이 훗날 그가 그린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참혹한 그림의 묘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지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Judith Beheading Holofernes)』, 캔버스에 유채, 145 x 195 cm, 국립고대미술관, 이탈리아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와 팔라초 코르시니(Palazzo Corsini), 1598-1599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베아트리체 첸치의 이야기가 유럽 전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단순한 모사를 넘어 다른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사건 자체를 다룬 원작 역사화를 다양하게 그려냈습니다. 베아트리체의 비극은 절대권력과 가부장적 폭력에 맞선 슬픈 저항의 아이콘으로 유럽 전역의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로렌조 바예스 (Lorenzo Vallés), 『산탄젤로 다리에 안치된 베아트리체 첸치』, 캔버스에 유화, 43x62.7, Bruno Mantura 컬렉션 ,1865.
위 그림은 스페인 화가 바예스가 그린 대형 역사화입니다. 처형 직후 산탄젤로 다리 위에 놓인 베아트리체의 시신과 그 억울한 죽음에 슬퍼하며 모여든 로마 시민들의 처연한 모습을 담아냈습니다.
해리엣 호스머(Harriet Hosmer),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 대리석, 44.1 × 106.3 × 43.8 cm, 세인트루이스 머컨타일도서관, 1857.
호스머는 사형 집행 직전 감방 바닥에 무기력하게 잠들어 있는 베아트리체를 실물 크기의 정교한 대리석으로 표현했습니다.
흔히 이 그림은 "스탕달 증후군"의 계기가 된 역사적 배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스탕달 증후군"이란 스탕달이 위대한 예술작품을 본 직후 심장이 쿵쾅거리고 어지럼증, 현기증, 탈력감을 느끼며 황홀경에 빠졌고, 정신과 의사 그라치엘라 마게리니가 1979년 이 현상에 "스탕달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인데서 유래합니다.
스탕달은 1817년에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조토(Giotto di Bondone)의 프레스코화와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등의 묘비를 감상하고 나오면서 이 증상을 처음 느꼈다 합니다. 이 증후군의 공식적 기원은 이 성당에서 유래한 게 맞습니다. 스탕달은 로마에서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감상하면서 처형 직전 베아트리체가 보여준 처연하고 아련한 눈빛에 깊이 매료됐고, 그 때 받은 감정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울음을 겨우 그친 듯한 눈과 비극적인 아름다움"이라면서.
스탕달은 이를 계기로 1837년에 단편소설 『첸치 일가(Les Cenci)』를 발표했습니다. 대중들은 이 때문에 스탕달 증후군을 이 그림과 직접 연관이 있다 오인하게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 스탕달 증후군이란 이름이 생겨난 공식 계기는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의 미술품들 감상입니다. 그렇다 해도 스탕달 증후군을 상징하는 대표 사례이자 배경으로 항상 함께 언급하는 것이 스탕달이 베아트리체 첸치 그림을 보고 느낀 강렬한 감정적 동요입니다.
이후로도 이 초상화는 이후 퍼시 비시 셸리 (Percy Bysshe Shelley), 찰스 디킨스, 나다니엘 호손 같은 19세기 대문호들에게 강렬한 예술적 영감을 던져 주었습니다. 이 낭만주의 작가들은 이 그림을 "순수함과 비극적 상처가 공존하는 미학의 정수"로 받아들였습니다. 1818년 로마에서 이 그림에 깊은 매혹을 느낀 셸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고결함을 유지한 얼굴"이라 평했습니다. 그는 이 감흥을 5막으로 구성한 비극 『첸치 가문(The Cenci, 1819)』으로 옮겼습니다. 당대 영국 연극계는 이 낭만주의 연극의 걸작을 무대에 올릴 수 없게 했습니다. 근친상간과 존속살해, 교황청 비판이란 강렬하면서 위험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1886년에야 비공개로 첫 상연을 할 수 있게 된 이 작품은 오늘날 "셰익스피어 이후 19세기 영국에서 집필된 가장 뛰어난 운문 비극"으로 평가합니다.
20세기 프랑스 연극의 거장 앙토낭 아르토(Antonin Artaud)는 자신이 주창한 '잔혹극(Theatre of Cruelty)' 이론을 구현키 위해 이 작품을 재해석한 『첸치 가문』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잔혹'이란 용어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뜻하지 않습니다. 관객의 안일한 이성을 깨부수고 감각과 무의식을 강하게 두드리는 원초적 충격을 말합니다. 이 연극은 당시로선 너무나 파격이어서 상업적으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이 『첸치 가문』은 당시까지만 해도 문학에 종속된 존재에 불과한 서구 연극을 공간과 신체, 감각 중심의 현대 아방가르드 연극으로 전환시킨 역사적 출발점이 됐습니다. 현대 연극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작품이 된 셈이지요.
찰스 디킨스 (Charles Dickens)는 『이탈리아의 추억(Pictures from Italy, 1846)』이란 기행문에서 "로마에서 본 그 어떤 예술품보다 가슴을 파고드는 그림"이라 평하면서 처형 직전 베아트리체의 처연한 눈빛과 맑은 피부의 대비가 주는 잔상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기록했습니다. 나다니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은 장편소설 『대리석 묵신(The Marble Faun, 1860)』에서 이 그림을 핵심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은 이들 낭만주의 작가들이 쓴 글을 통해 유럽 전역에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로마를 방문한 수많은 화가와 지망생들은 이 초상화를 모사한 바, 지금까지 드러난 동일한 구도의 모사본과 변형 화작만 수백 점에 이를 정도입니다.
처음에 이 초상화는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가 그린 것이라 했습니다. 현대 미술사학계는 이를 다른 이가 그렸다고 간주합니다. 베아트리체를 처형한 1599년 당시 귀도 레니는 로마가 아니라 볼로냐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처형 직전 베아트리체를 직접 보고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아킬레 레오나르디(Achille Leonardi), 『베아트리체 첸치의 투옥』
이후 평론가들은 귀도 레니의 뛰어난 제자이자 17세기 여성 화가인 엘리사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가 이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미술사학계(팔라초 바르베리니 국립고미술관 등)는 17세기 볼로냐 출신 여성 화가 지네브라 칸토폴리(Ginevra Cantofoli, 1618~1672)가 그린 것으로 추정합니다. 미술사학계가 두 사람을 유력한 실제 화가로 본 이유는 17세기 볼로냐 화파 특유의 기법, 작가들의 주제 경향, 그리고 다른 작품들과 정밀한 양식 비교(Stylistic Comparison)에서 닮은 점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시라니는 귀도 레니 동료의 딸이자 수제자인 사람이지요. 귀도 레니가 죽은 후 시라니는 볼로냐에서 그가 남긴 화풍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한 화기였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광선, 맑고 깨끗한 피부톤, 우아한 구도같은 귀도 레니 그림의 특징들 말입니다. 시라니는 루크레치아와 포르티아, 유딧처럼등 역사 속 비극의 주인공이나 현실에 저항한 여성들을 자주 그렸습니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에서 볼 수 있는 처연하고 부드러운 감정선은 시라니 그림이 가진 전형적 주제의식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터번을 머리에 두른 베아트리체의 정숙한 모습과 천 주름의 부드러운 음영 처리가 시라니가 그린 유화의 필치와 매우 유사했기에 미술사학계는 먼저 시라니를 이 초상화를 그린 작가라 추정한 것이지요.
엘리사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 『루크레치아(Lucretia)』, 1650년경.
현재 이 초상화를 소장한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 국립고미술관을 비롯해 최근 미술사학계는 이 그림을 그린 이를 지네브라 칸토폴리라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학계는 칸토폴리가 서명을 남겼거나 그가 그린 것이라 입증을 받은 다른 작품들인 『시빌라(Sybil)』, 『바다의 님프(Sea nymph)』, 『상상 속 여성 초상화』와 이 초상화를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달걀형 얼굴 윤곽, 아몬드 형태의 눈매, 눈동자 주변의 부드러운 스푸마토(음영) 기법에 한 사람이 붓질한 것이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이 그림은 실존 인물을 감옥에서 보면서 그린 생사화가 아니라 사건 이후 볼로냐에서 유행한 '비극적 여인의 상상 초상화'입니다. 칸토폴리는 이런 우화나 신화 속 여성의 상상 초상화를 전문 제작한 화가였습니다. 팔라초 바르베리니 미술관은 캔버스의 안료, 붓질의 층(layer), 17세기 볼로냐 화파의 소장품 목록(Inventory)을 통합 분석해 이 그림이 칸토폴리의 고유한 붓 터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최종 입증했습니다.
지네브라 칸토폴리(Ginevra Cantofoli), 『시빌라(A Sybil)』, 캔버스에 유채, 26.1/4x19.3/8인치, 1672.
지네브라 칸토폴리(Ginevra Cantofoli), 『바다의 님프(Sea nymph)』,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1600년대.
https://youtu.be/29CVZ570r5o?si=yA8-oJAot-Vbo1Vj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으로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 2악장 아다지오 (Marcello: Oboe Concerto in D minor – II. Adagio)을 바하가 건반 악기용으로 재편곡한 바흐 편곡 버전(BWV 974, II. Adagio).
#미술
#베아트리체첸치
#귀도레니
#스탕달증후군
#지네브라칸토폴리
#유딧
#카라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