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60723.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품고 새겨 의미를 살아내야 할 주님의 씨앗과 같은 삶의 화두들...
어떤 미술 서적들은 그림을 분석하려고 삼각형이나 원, 직선 같은 기하학적 도형들을 그림 위에 겹쳐 놓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석이나 설명을 읽다 보면 오히려 그 그림이 처음에 마음에 다가왔긴 했어도 뚜렷이 설명할 수 없었던 그 어떤 감흥을 앗아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명이 복잡할수록 오히려 마음을 울리는 그 무엇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모든 설명이 그렇습니다. 어떤 철학자에 대해 '그의 설명을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지요…. 참 묘한 일입니다.
설명에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확한 이해나 명확한 답을 원하는 우리의 심리를 반영해 주는 그 무엇인가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의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비유를 그대로 남겨 두어, 그것이 스스로 마음 안에서 작용하도록 하셨습니다. 씨앗을 땅에 심기 전에 그것을 잘라 열어 보며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설명하지 않을 때 씨앗은 더 잘 자랍니다. 영적 문제에서도 설명은 대체로 유익보다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의 비유들은 불교의 공안이나 화두처럼 마음에 깊이 품어 그 의미를 살아내게끔 해 주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 13,9; 13,43; 마르 4,9; 루카 8,8; 14,35 등)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묵시록 2장과 3장에 14번에 걸쳐 나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저 단순히 '똑바로 들으라'거나 '제대로 이해하라'는 정도의 말씀이 아니라 마음에 깊이 새겨 들어 그 의미를 살아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영어 explain, 즉 '설명하다'라는 동사는 라틴어 'explanare' 동사에서 온 것인데, 이 말은 ex, 즉 '밖으로'라는 단어와 planus, 즉 '평평한', '명확한'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단어로, 직역하면 어떤 것을 "평평하게 만든다" 혹은 "명확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설명한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것을 신비롭지 않은 상태로 펼쳐서 밋밋하게 만들고 맛이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인 것이지요.
사실 어떤 신비로운 것을 평평하게 만들고 나면 우리는 그 신비로움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게 되고,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거나 도전하게 하거나, 단순한 이성주의를 넘어가게 하는 힘을 잃습니다.
그러니 설명되지 않은 채로 그저 마음에 깊이 품어 새기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때그때마다 싹을 틔우시게끔 해 드리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것입니다.
요즘 들어 제 마음을 귀롭히거나 산만하게 하는 어떤 문제가 올 때마다 그 문제를 주님과 함께 마음에 품으려는 노력을 합니다. 전에는 그저 "도와주십시오!" 하고 무조건 빌었다면, 물론 지금도 분명히 주님께 도움을 청하긴 합니다만, 그저 단순히 '도와달라'고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문제가 제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주님과 함께 깊이 숙고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상황을 이렇게 주님과 함께 숙고하과 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 삶은 참으로 풍요로워질 겁니다.
저는 가끔씩 예전에 소설과 만화로 읽었던 [돈 까밀로와 뻬뽀네]에 나오는 '돈 까밀로 신부'를 자주 떠올립니다. 그는 제 성소에 있어 좋은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늘 주님께 맞갖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늘 주님과 더불어 일어난 상황이나 일어날 상황에 대해 대화하며 숙고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물론 돈 까밀로 신부는 주님과의 대화 안에서 단순히 답을 찾으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의미를 보여주려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도 느끼셨을 겁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 "죠반니노 과레스키"는 그 책의 서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돈 까밀로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제(신부)가 있다면 굵은 양초로 내 머리통을 후려쳐도 좋다.
그리고 뻬뽀네 때문에 기분이 잡친 공산주의자가 있다면 몽둥이로 내 등을 후려쳐도 좋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 양심(내면)의 소리이기 때문이다."라고요….
아마도 이 책의 저자는 돈까밀로와 뻬뽀네를 통해 주님과 더불어 당시 사회의 사안들을 화두로 풀어나가려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품고 새겨 살아낼 수 있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2세기의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경의 어떤 부분은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은 하느님의 손에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는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그러하여,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가르치시고 우리는 영원히 배우게 될 것입니다."
14세기의 노리치의 성녀 율리안나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앞으로 일어날 큰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무엇인지는 나에게 숨겨 두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 고귀하고 놀라운 신비를 보았는데, 그것은 훗날 하늘나라에서 분명히 드러나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요.
----------------------------------------------------
260723.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워드 써먼(Howard Thurman): 하나 됨의 세계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묻지 말고, 오히려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20세기 관상 영성의 모범적 인물들
하워드 써먼(Howard Thurman): 하나 됨의 세계관
2026년 7월 22일 수요일
레리타 콜먼 브라운 박사(Dr. Lerita Coleman: 1953–2025)는 하워드 써먼 목사(Rev. Dr. Howard Thurman: 1899–1981)의 유산을 되새기며,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계속 전해지는 그의 지혜를 묵상합니다:
써먼의 책을 읽거나 그의 깊은 바리톤 음성을 들을 때,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글과 설교, 강연을 "살아 있는 지혜"라 부르게 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서먼이 선종하신 지 사십 년이 넘었지만, 그의 말씀은 여전히 귀 기울이는 모든 이의 마음과 영혼을 길러 줍니다….
하워드 먼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다른 인권운동 지도자들의 영적 조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표만으로는 그의 기여 전체를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하고, 모든 생명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길을 걸었으며, 이는 미지의 영적 여정을 떠나는 모든 신앙인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써먼은 자신의 삶과 저술, 강연, 설교를 통해 증언하며,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영적 양식이 되어 줍니다. [1]
종교 간 대화의 목회자이자 저자인 리자 J. 랭코우(Liza J. Rankow)는 써먼의 사역과 증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서먼의 신비주의는 세상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깊이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창조적 만남"이라 일컫는 그 신비적 비전을 인간 관계와 사회 제도, 정책, 그리고 우리 일상의 "실질적 삶" 속에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신비주의자는 사회 전체를 품어야 하며, 가장 깊은 통찰의 순간에 자신을 사로잡은 선(善)을 실제로 이루어 내야 합니다…." [2]
신비주의들자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오직 하느님과 일치의 황홀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치 안에는 모든 것과 모든 이에게로 열려 있는 문이 있습니다. 하나 됨의 체험은 우리를 다시 "온전한 일"의 관계성 속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 하나 됨과 온전한 일치는 서로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처 입은 세상의 아픔과, 사람들의 고통과 필요를 깊이 느낍니다. 써먼이 『예수와 소외된 이들』에서 말한 것처럼, "벽에 몰린 이들"—즉 권리를 빼앗기고 주변화된 이들, 억눌린 이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집니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습니다. 신비적 세계관은 윤리적 요청을 만들어 내며, 사회 변혁의 길로 들어가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됨의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이로써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써먼은 종종 사회운동가 유진 뎁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더 낮은 계급이 있는 한 나는 그 안에 있고, 범죄자가 있는 한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며, 감옥에 갇힌 영혼이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3]
써먼은 영적 훈련을, 우리 "내적 제단"—곧 하느님과의 친교 자리—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실천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의 안에 그는 사회적 행동까지도 영적 훈련으로 포함시켰습니다. 그는 모든 이들과 하나 되어, 해방과 화해를 위해 일하는 것이 "사랑받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언했습니다. [4]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심판자로만 하느님을 이해하며 ‘착한 소녀’로 살아야 한다고 배웠던 교회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묵상’은 제 안에 개인적 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 주었고, 하느님을 사랑의 충만, 어머니의 보살핌, 다정한 벗으로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묵상은 제 마음과 영혼을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이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저는 제 창조주와 벗들이 베풀어 주시는 거침없고 관대한, 한계 없는 사랑에 끊임없이 놀라움을 느낍니다.
—Kathleen P.
References
[1] Lerita Coleman Brown, What Makes You Come Alive: A Spiritual Walk with Howard Thurman (Broadleaf Books, 2023), 6, 8.
[2] Howard Thurman, “Mysticism and Social Change” (1939), in A Strange Freedom, Walter E. Fluker and Catherine Tumber, eds. (Beacon Press, 1998), 121.
[3] Eugene V. Debs, Statement to the Court, upon Being Convicted of Violating the Sedition Act, September 18, 1918, transcribed by John W. Metz.
[4] Liza J. Rankow, “Mysticism and Social Action: The Ethical Demands of Oneness,” in Anchored in the Current: Discovering Howard Thurman as Educator, Activist, Guide, and Prophet, ed. Gregory C. Ellison II,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20), 120–121, 12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ohn Mccann, untitled (detail), 2017,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관상의 길은 위대한 모범적 인물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앞서 걸어가며, 각기 독특하면서도 서로 연결된 방식으로 관상과 활동의 수양을 살아낸 이들입니다.
----------------------------------------------------
260723.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3,10-17
제자들은 묻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주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같은 비유를 듣고도
어떤 이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어떤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차이는 말씀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눈’에 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비유’를 하느님의 자비로 읽습니다.
비유는 신비를 단번에 쏟아붓지 않고
이야기에 살짝 감추어,
들을 준비가 된 이는 깨닫고
아직 굳은 이는 천천히 다가오도록 ‘기다려’ 줍니다.
그러니 ‘보지 못함’은
하느님의 인색함이 아니라
닫힌 마음의 결과입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일깨웁니다.
참된 행복은
좋은 눈과 귀를 ‘가진’ 데 있지 않고,
그것으로 마음을 열어 ‘알아보는’ 데 있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기를 바랐다.”
우리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그분을
말씀과 성체 안에서 날마다 뵙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문제는 그 행복을
‘익숙함’에 가려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 ‘알아봄’의 모범이십니다.
그분은 평범한 구유와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보시고,
그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하여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성모님처럼 마음으로 새길 때,
우리도 같은 일상에서 하늘 나라를 알아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보면서도 정작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익숙함에 가려 은총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가?
나는 들은 말씀을 마음으로 깊이 새기는가?
나는 성모님처럼 일상에서 신비를 알아보는가?
주님,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무딘 마음을 열어 주소서.
익숙함에 가려진 은총을 새롭게 보게 하시고,
성모님처럼 마음으로 신비를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
260723.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 2.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출처: http://www.ofmkorea.org/ofmkfb
=====================
기도와 영적 여정 1~ 4. 계속 (26. 07. 19 ~ 26. 07:22)
=====================
1914 기도와 영적 여정 4. 육화, 기도의 방향을 바꾸다 2026.07.22
1913 기도와 영적 여정 3. 하느님께로 오르는 사다리와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하느님 2026.07.21
1912 기도와 영적 여정 2. 기도는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발견되는 것이다 2026.07.21
1911 기도와 영적 여정 1. 올라가는 여정이 아니라 내려오신 하느님을 발견 하는 여정 2026.07.19.
=====================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1 ~ 9.(2. 07. 11. ~ 26. 07. 18)
=====================
1910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9. 갈망은 마침내 사랑이 된다. 2026.07.18
1909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8. 갈망을 불꽃으로 바꾸시는 성령 2026.07.17
1908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7 회개, 갈망이 방향을 되찾는 순간 2026.07.16
1907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6.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갈망 2026.07.15
1906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5. 십자가, 두 갈망이 하나되는 자리 2026.07.14
1905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4. 당신도 나를 원하십니다. 2026.07.13
1904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3.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2026.07.12
1903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2.욕망과 갈망의 차이 2026.07.12
1902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1 .갈망(기도하는 영혼의 첫번째 새벽) 2026.07.11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