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어느 공기업에 개인적인 일로 서류를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직원들은 일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모니터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무료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깨는 전화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무료한 시간이 끝나고 임금을 받아 가족들을 부양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일한 것에 대한 어떤 자부심도 없을 거 같았다. 자신들의 일에 혐오감을 갖는 것은 아닐까? 임금을 받으면서 미안해하지 않을까? 그들의 임금은 국민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다행히 그 공기업은 노동조합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전산화로 많은 직원이 필요없어졌지만 감히 해고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력이 필요하다.
첫째, 자동화(기계화)를 실현하여 인간노동력이 완전히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
둘째,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노동력이 싼 나라로 생산시설을 옮기는 것
이런 결과로, 국가 전체 GNP에서 임금으로 지불되는 몫이 급속히 감소하고,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100개 이상의 나라에서 1인당 실질 평균소득은 15년전에 비해 낮아졌다. 그리고 인류의 4분의 1 이상, 즉 16억명 이상의 생활이 전 보다 열악해졌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국민 소득 중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1974년 72프로에서 1995년 63프로로 떨어졌다.
좀 더 이야기 한다면, 기계화에 의한 생산 시스템은 두 가지 의미에서 지속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첫째, 기업들은 낮은 생산비를 위하여 점점 더 치열한 경쟁에 돌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실업자는 더욱 늘어나고 임금이 줄어들어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시장은 점점 줄어들어 기업은 자멸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막을 유일한 길은 시장을 확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산업 혁명 후, 영국의 상품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심지어 프랑스 나폴레옹은 쇄국정책을, 각국은 높은 관세를 펼쳤으나, 영국의 상품은 밀수품으로 들어왔고, 각국의 수공업 기반은 철저히 무너졌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그것이 1 차 대전의 원인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다행히 미국이라는 신대륙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로 했고, 제 3 세계의 식민지들에서 더욱 저렴한 노동력과 원료 새로운 시장의 확대로 기업은 연명할 수 있었지만, 다음의 위기는 그들이 그토록 믿어왔던 신대륙 미국에서 위기가 터졌던 것이다. 미국의 공황은 전형적인 기계화에 의한 상품의 증가와 구매력의 하락에 원인이 있었다. 다행히 그것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었던 것이다. 2차 대전은 미국으로서는 위기가 아니라 공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다행한 일었던 셈이다. 일본은 이른 바 미국의 구세주였던 셈이다.
무역 자유화(FTA)는 기업들에게 무한한 시장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 경쟁을 가능하도록 햊주는 것임을 누구나가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시장이라는 것이 과연 무한한 것일까? 지구라는 행성에서 필요한 시장이 더이상 없다면 또 다른 행성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둘째, 기계화를 가능하게 하는 화석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다는 것이다. 2050년을 기점으로 석유 생산량은 1950년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이후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것의 대안으로 저 에너지 친환경 기술 사회로의 이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럼, 남아 도는 많은 노동력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에게도 저 에너지 기술사회의 과실이 돌아갈 것인가?
아마, 수십억명이 지속가능한 경제시스템(저에너지)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
과거, 유럽에서 지속가능한 경제시스템에서의 인구는 5천만명이었다. 지금 유럽의 인구는 7배가 되었다.
근대 농업사회에서 보통 농민 한사람이 비농민 50명 이상을 먹여살릴 만큼 생산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이 시스템은 자본주의 시자 시스템에 의해 작동을 한다. 즉, 소비자가 비불하는 가격에 생산비를 빼고 남은 농민의 소득이 증가를 해야지만 그 매카니즘이 작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농민의 소득은 점점하락하게 되고 그 역할을 기계화된 거대한 농업회사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회사들이 기계화에 필요한 화석 연료의 총 에너지의 합은, 그들이 생산한 식량 에너지의 총 합의 10배에 해당한다. 이런 불합리한 일이 어디있는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영국 노팅엄의 윌리엄리 라는 목사가 양말 짜는 기계를 발명했는데, 그 이유는 사랑하는 여인과 좀더 많은 시간을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뜨개질을 하느라 그와 많은 시간을 같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그 기계를 허용하지 않았다. 무장한 노동자들이 그의 집을 덮쳤을 때 그 목사는 파리로 도망을 갔고 그는 평생 그의 사랑하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이국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영국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신분상승(임금상승)을 위한 운동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노동자의 투표권(정치세력화)를 위한 챠티스트 운동과 기계파괴를 주도했던 러다이트 운동이었다.
그 진행과정의 당위성을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보면, 챠티스트 운동은 성공하였고 러다이트 운동은 실패하였다. 그런데, 어쩌면 러다이트 운동이 진정으로 노동자를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산업혁명이 종말되었다면 유럽의 세계대전은 없었을 것이고 제 3세계의 식민지도 많이 줄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날 미국의 농업은 지금처럼 거대한 농업회사가 아닌,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텔레비젼에서 보았던 미국판 전원일기 '월튼네 사람들' 이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경제학의 아버리라 불리우는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으로 기업가는 자신의 이윤 추구만으로(기계화,노동절약,생산성향상), 의도하지 않는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그가 의도적으로 작정했을 때보다 더 크게 사회에 공헌하게 된다고 했다. 심지어 그것은 제 3세계의 식민지 지배와 유럽의 갈등 조차도 해소할 수 있다고 했다.
아담 스미스는 평화주의자였다. 아담 스미스의 이론은 영국에서 체택이 되었고, 그것은 인간적이고도 점잖은 영국신사의 오판이 전 세계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현대 자동차의 승승장구는 언제까지 갈 것인가? 삼성전자의 막대한 이윤의 증가는 영원할 것인가?
산업사회에서의 노동자의 최소한의 버팀목인 노동조합의 역할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
임금의 최고 피크를 자랑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노동자들의 풍요로움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