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112)/ 파키스탄
모헨조다로 고고 유적(Archaeological Ruins at Moenjodaro; 1980)
모헨조다로 고고 유적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한 곳인 인더스 문명의 주요 유적지로서 현재 파키스탄의 인더스 강(Indus River) 서안 신드(Sind) 주의 라카르나 지구(Larkana District)에 있다. ‘죽음의 언덕’이라는 의미의 모헨조다로 유적은 하라파(Harappa) 유적과 함께 인더스 문명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적으로 인더스 강 유역의 카라치(Karachi)에서 380km 북쪽에 있다. BC 2500년 무렵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며, 1922년 영국인 고고학자 존 마셜(John Marshall; 1876~1938)과 인도인 고고학자 라칼다스 바너지(Rakhaldas Banerjee; 1885~1930) 등의 지휘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므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지만 현재는 일부분만이 발굴된 상태이다. 유적의 크기는 2.5㎢이나 당시에는 약 5㎢에 달했을 것으로 보이며, 7차례에 걸쳐 붕괴와 재건을 거듭한 것으로 추측된다.
모헨조다로는 철저한 도시 계획에 따라 건설된 도시로서 다른 인더스 문명권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부분은 공공 구역으로 성채・광장・공회당・제단 등이 들어서 있는 고지대이며, 그 밑으로는 일반 시민들의 주거 지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주거 지역은 바둑판 형태로 건설되어 있었으며, 각 구획의 크기는 대개 100ⅹ200m이며, 도로의 폭이 넓은 곳은 10m에 달한다. 각 구획마다 공동우물이 있으며, 길가에는 가로등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모헨조다로 유적의 또 다른 특징은 흙이나 나무를 사용해 주거 공간을 건설한 동 시대의 다른 문명권과는 달리 견고한 구운 벽돌로 대부분의 건축물을 지었다는 점이다. 또한 무더운 기후 조건 하에서 대규모 인구가 밀집 생활을 했으므로 도시의 청결과 위생을 유지하기 위해 뛰어난 배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각 가정의 하수가 도로의 하수구로 모여들고, 다시 시 외곽의 강으로 흘러가도록 설비되었다. 특히 대형 목욕탕의 수도 시설은 매우 뛰어나다. 대중을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욕탕은 폭 33m・길이 55m에 달하며, 전체 벽면의 높이는 6m로 벽면에는 물이 흘러나오는 일종의 샤워 시설로 보이는 6개의 구멍이 있다. 이 목욕탕이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종교적 의식에 사용된 것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많은 학자들이 이곳을 종교적 집회 전 공동으로 몸을 씻는데 사용된 일종의 성소(聖所)로 추정하고 있다. 이 건축물 외에도 모헨조다로 유적에서는 수많은 신상・조각・각종 장신구・생활용품 등이 발굴되었으며, 가장 주목할 것은 마치 인장(印章)처럼 보이는 크기 2~3㎝ 정도의 정교한 동석(凍石) 조각물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약 2천 개에 달하는 인장의 용도는 신분증, 통행증, 상품 수령증, 부적 등 여러 가지로 추정되고 있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인장에 새겨진 여러 동물 문양들을 통해 당시 모헨조다로 지방이 오늘날과 달리 습하고 숲이 우거진 환경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인장 중 여러 개에서 삼면신(三面神)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힌두교의 시바(Siva) 신의 원형으로 보이며, 당시의 신앙생활이 오늘날의 힌두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추측할 수 있다.
모헨조다로 유적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리라 추측되는 인더스 문명은 BC 1700~1500년 사이에 몰락했는데 그 몰락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첫째는 모헨조다로 등 대부분의 유적이 강변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홍수 등의 천재를 입어 몰락했을 가능성이다. 다음으로는 강우량의 급격한 감소, 인구 증가에 따른 벌목 등의 삼림 파괴로 인한 환경 변화가 이 지역을 불모지로 만들어 인더스 문명이 몰락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마지막으로는 외부의 침입 가능성이다. 유적에서 여러 연령층의 유골이 구부린 자세로 발굴되고 있으며, 도끼나 칼에 의해 상해를 입은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이 발견된 것은 이민족의 침입이나 전쟁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그러나 어떠한 학설이 타당한 것인가는 앞으로 더 많은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어야만 규명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