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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창세기 1: 26-31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골3:10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42:11, 13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9:1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시145:15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시104:24, 딤전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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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학작품을 읽든지, 교양곡을 감상하든지 그 작품에는 절정(絶頂)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위대한 창조의 역사에도 절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정성과 능력을 다 쏟아 부어 만든 것이 인간입니다. 세계의 어떤 문서도 인간의 가치를 이렇게 숭고하게 표현하고 있는 문서는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의 숭고한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왕자가 있었다고 합시다.
이 왕자는 너무 어려서 왕궁을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왕자의 신분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딱지를 더 많이 딴 것으로 만족하며, 좀 커서는 오늘 나무를 더 많이 해 온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혼해서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이 결코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분을 되찾아야합니다. 지금 정당하지 못한 자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고 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자신은 노는 일이나 나무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지낸다면 그것은 결코 바른 만족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더 나아가 그것은 죄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살고 있다. 내 직장도, 내 가정도, 내 자식들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금 생활이 너무너무 만족스럽다. 그래서 교회에 나갈 필요도 못 느끼고, 종교 따위엔 관심도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최고로, 창조의 극치요, 절정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 밥 먹고, 잠자고, 돈이나 버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기에는 너무나 귀한 존재들입니다. 인간 됨의 위치, 그 가치를 모르고서 우리는 어떤 위대한 일을 한다할지라도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고백 속에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의논했다는 점입니다.
2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이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다른 피조물을 만들 때는 아무런 말씀 없이 그냥 "무엇이 있으라"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들 때는 어떻게 만들까? 그들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할까?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모든 만물의 창조는 하나님 홀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구와 의논하셨다는 것일까요? 천사와 의논하셨을까요? 천사와 의논해서 사람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천사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창조에 천사가 개입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이렇게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첫날부터 "하나님의 영(성령)"은 이미 수면 위에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 의논합니다. 다른 피조물을 만들 때는 의논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있으라" 하면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들 때는 의논했습니다. 신중을 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부여할 특권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함께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특권을 부여하면, 그만큼 위험부담도 큽니다.
하나님께서 특권을 주시면서, 그 한계는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인간이 그 한계를 넘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모든 것을 의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인간이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의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책을 세우고 창조를 결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심해서 천지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인간은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을 만들 것인가? 그들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할 것인가? 그들이 타락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신중히 검토한 후에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연히 만들어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어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설계와 계획이 없이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을 비관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자신의 삶을 저주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막되어 먹은 인생, 아무렇게나 살다가 아무렇게나 죽으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검토하고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신분을 깨닫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어렵게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형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처럼 눈, 코, 입이 있고, 손과 발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①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의 교제할 수 있는 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유사성, 연관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 자신과 연관성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연관성이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교제의 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인간은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마음대로 이야기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들을 수도 있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고, 하나님께 쉽게 이야기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막힌 것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목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컴뮤니케이션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과 교제하도록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들 서로간에도 서로 교제하며 살게 했습니다.
인간 관계를 통해서 인성이 자라고, 사람이 만들어져 갑니다. 어린아이가 혼자 노는 것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놀아야 합니다. 함께 싸우고, 울고, 장난치고, 화해하는 가운데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사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이렇게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교통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사회성의 원형"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결코 혼자서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수도원에서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산 속에 있었다면, 내려와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듯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왔듯이, 내려와서 무지한 사람들을 일깨워 진리로 인도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가운데 영성이 더 깊어지고 거기에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서로 간에 진정한 교제, 교통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진전한 사랑과 나눔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 성도들은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었습니다.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그들이 성령 받고 방언으로 하는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성령 받고 나서는 이런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들의 교제와 나눔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막힌 담, 단절된 관계는 성령 충만함으로 회복됩니다.
②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형상은 본체는 아니지만 본체와 아주 비슷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본체를 모방해서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가끔 초상화를 보게 됩니다. 오래 전에 그린 것이어서 때로는 모습이 조금 변한 것도 있지만, 최근의 것은 본래 그 사람과 똑같습니다. 아무리 본인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초상화 자체가 그 사람은 아닙니다. 단지 그 초상화를 볼 때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저렇게 생겼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고, 이미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성품, 그 사람의 지위, 그 사람의 활동 이런 것들을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공원 같은데 가보면 동상이 있습니다. 그 동상을 그 냥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습니다. 본래 그 동상의 주인공인 사람의 모습을 모델로 해서 그 모습과 똑같이 아니며 거의 비슷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동상을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이 생각나게 만들고, 그 사람의 성품, 위대한 업적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본 따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생각나야 합니다.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이 보여져야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위대한 업적도 기억되어야 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 요셉의 모습 속에서 보디발은 하나님의 보았습니다.
이 사실을 창세기 39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은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그의 모습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의 성실한 생활, 그 인품, 그 성격 모든 것에서 이방인 보디발은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품이 내 삶 속에서 나타난다면, 그것보다 복된 삶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고,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증거하고 싶은 하나님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고 우리의 더럽고, 추하고, 이기적인 욕망만 드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고, 그들에게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떤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분의 승천을 통해서 인류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골1:15)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너희 마음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고 했고,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닮으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나고 증명되어집니까?
하나님을 증명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여지고 계시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③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줍니다.
고대 바벨론의 황제는 각 나라에 왕을 세워 통치권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은 반드시 황제의 형상을 자기 옆에 두고 통치를 해야 했습니다. 황제의 형상은 왕이 황제의 대리자임을 보여주는 도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하나님 대리자로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왕들만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은 인간이 인간을 통치하거나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스리고, 어떤 사람은 다스림을 받도록 창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사이에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간은 하나님께서 다스립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요1:46)고 나사렛을 경멸했습니다. 나사렛에 사는 사람들은 계급이나 이름이나 영향력이나 전통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주가 나셨습니다. 인류를 통치할 만왕의 왕이 나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완전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통치와 다스림 속에서 우리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가장 천한 곳에서 섬기는 종으로 이 땅을 다스렸습니다. 사랑으로 통치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형상을 회복했습니까? 여러분이 온전히 그 형상을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 가정, 그 직장, 그 지역이 하나님이 침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한 사람!
그가 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어둠의 세계를 몰아내며 불필요한 두려움을 쫓아내고 사랑과 정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세 번째, 다른 피조물의 창조 때와 구별되는 특별한 점은 "다스리라는 명령을 했다"는 것입니다.
26절 하반 절에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했습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소극적인 의미로 어떤 것에도 무릎꿇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무릎꿇었습니까? 해와 달을 섬기고, 날짜를 지키고, 바다나 강, 큰 바위, 큰 나무 등등 인간이 무릎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해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했는데, 그 통치권을 발휘하기는커녕 다른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고 그것들에 무릎꿇고 있으니 말이나 될 일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것들에게 무릎꿇지 마라. 그것들에게 굴복하지 마라".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특권을 부여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으면, 하나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것들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마귀가 여러 가지 유혹을 하며 시험을 했습니다. "나에게 절하기만 하면 천하 만국을 다 너에게 주겠다"며 유혹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같은 교권주의자들도, 빌라도 같은 권세 자들도, 심지어 성난 물결과 바람도 예수님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가난도, 외로움도, 굶주림도 모두 예수님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공포조차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존심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한 분께만 굴복하고, 어떤 것에도 무릎을 꿇거나 굴복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난도, 질병도, 고통도, 사람들의 비난도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들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②적극적인 의미의 다스림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장악해서 바른 위치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제 본분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하고, 약한 것이 있으면 돌봐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적극적 의미에서 다스림입니다.
예를 들어 돼지는 새끼를 낳을 때 누군가가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련해서 새끼를 깔아 죽이거나 잡아먹어 버립니다. 토끼는 더 그렇습니다. 이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또한 강은 일정한 장소로 흘러야 합니다. 그런데 강이 범람하면 사람도 동물도 물에 빠져 죽습니다. 이것을 방지하려면 강에 뚝을 쌓거나, 땜을 건설하거나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치수(治水)라고 합니다.
여자가 왜 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까?
뱀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뱀이 어디 감히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 "죽지 않는다" 말을 합니까? 뱀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겠다고 거기에 귀를 기울입니까?
야단을 쳐서 좇아 보내야 했습니다. 뱀이 자기의 한계를 넘어 인간을 조정하려고 하는데도 그것을 허용해버린 것이 잘못입니다.
자기 위치를 벗어난 것이 있습니까?
잘못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들을 바르게 다스려야 합니다. 학문은 사람을 돕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학문이 사람을 지배해서는 안됩니다. 학문을 우상처럼 섬기며, 그것에 자신을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보가 요즘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정보 속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컴퓨터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잘못하면 이것이 나를 지배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매몰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스려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알코올에, 어떤 사람은 도박에, 어떤 사람은 증권에 지배당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스리라". 여러분! 이런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창조의 절정, 극치를 보았습니다. 인간에게 부여하신 특권, 그 귀중한 가치, 그 역할을 공부했습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품입니다.
이것을 인식 못하고 살고 있다면, 지금 아무리 잘먹고 잘살고,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크게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되찾아야 할 모습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 권해야 할 권한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세상을 잘 다스려야 하는 권세도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여러분의 가치를 아시기 바랍니다.
>출처/저자| 김문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