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는 석가모니 부처가 법을 전한 마하가섭으로부터 달마대사, 그리고 중국의 여러 조사와 선사를 거쳐온 선(禪)불교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참구하는 수많은 선승들로 인해 한국불교의 피가 돌고 맥박이 뛰는 것이다. 그 맥박의 중심은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등 5대 총림의 선방들이다. 이 선방을 거친 고승대덕들은 누구이며 선승들의 법맥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알아본다.≫
홍류동 계곡의 기암과 단풍, 가을 가야산은 지금 절정이다. 붉은 꽃과 단풍이 맑은 물에 떠내려가 홍류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계곡을 한참이나 따라 올라가면 비로소 사하촌(寺下村)이 나타난다. 여기서 걸어서 이삼십분은 올라가야 겨우 해인사 일주문 앞에 다다른다. 일찍이 선원 율원 강원을 두루 갖춘 해인사는 1967년 가장 먼저 총림(叢林)으로 지정받았다. 혹자는 해인사의 중요성을 일러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심장이자 두뇌'라고 했다. 팔만대장경을 장경각에 모신 법보종찰인 해인사는 최고의 수행도량이자 종정이주석하고 있는 선승의 사관학교이다. 총 24교구를 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는 16개의 암자와 130여곳의 말사를 두고 있다.
▲해인삼매(海印三昧)와 해인사=삼남(三南)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가야산에 위치한 해인사는 신라시대 애장왕 3년인 서기 802년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로 창건되어 올해 1,200주년을 맞았다. 해인사의 '해인'은 '일렁임이 없는 바다에 만물의 형상이 그대로 비치는 것과 같이 번뇌가 없는 마음에 만물의 이치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의미로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따온 것이다.
930년 희랑(希郞)대사에 의해 중창된 후 1398년 고려대장경이 강화에서 해인사로 옮겨와 법보종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조선성종 19년 인수와 인혜 두 왕대비의 후원을 받은 학조대사가 크게 중창했다. 이후 순조 18년인 1818년 경상도 관찰사이자 추사 김정희의 부친인 경상도 관찰사 김노경(金魯敬)의 시주로 대적광전이 완성되어 현재의 가람배치가 이루어졌다. 불 화자(火) 모양을 한 해발 1,430m의 가야산은 화기가높다. 그걸 잠재우기 위해 매년 단오날이면 해인사 스님들은 가야산과 마주한 매화산과 경내에 소금을 묻는다.
▲퇴설당과 선승의 자세=경허대사가 1899년 11월 퇴설당(堆雪堂)에서 동수정혜결사를 시작했을 때 전국의 사찰은 그야말로 유명무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경허대사가 나타나기 200년전 사명대사에서 끊겨버린 선맥은 해인사 선방에서 그 불씨를 지피게 되는 것이다. 당시 선방에는 17명의 대중이 결제에 들어갔으며 원주는 제산(霽山)스님이었다. 현재 선원 유나(선원의 최고 책임자)를 맡은 원융스님은 "경허스님의 제자 중 한사람인 방한암(漢巖)스님이 서기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이 해인사 선방에서 용성, 효봉, 고암, 자운, 성철, 일타, 청담, 혜암, 법전 스님 등 쟁쟁한 선승들의 용맹정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선승들이야말로 한국불교의 오늘을 있게 한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 경허스님이 편액을 썼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퇴설당의 당호는 철저히 선(禪)적인 유래를 갖는다. '퇴설'이란 말 그대로쌓여있는 눈 무더기란 뜻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눈 무더기처럼 다른 어느 곳에도 쓸 데가 없는 스님들이 모여야만 공부에 정진할 수가 있다는 뜻"이라고 해인사의 한 스님이 귀띔했다.
▲용맹정진으로 유명=해인사는 가야산의 웅장한 산세만큼이나 스님들의 수행자세와 풍모도 남성적이다. 해인사 포교국장 현진스님은 "아무리 얌전한 스님이라도 해인사에 와서 1주일만 지나면 자세가 꼿꼿해지고 목소리가 우렁차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라고 했다. 또한 해인사의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시간에 울려퍼지는 법고와 염불소리도 어느 사찰의 것보다 크고 높고 우렁차다.
해인사 선방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찰의 선방에 비해 용맹정진(잠을 자지 않고 수행함)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제시대를 거친 이후 생겨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허스님이 문을 연 선방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처승들이 절집을 차지하자 유야무야 명맥만을 겨우 이어갔기 때문이다.
▲'호랑이 노장' 성철=그러나 선맥의 흐름은 퇴설당을 중심으로 도도히 이어졌다. 경허가 한국 근대불교의 중시조라면 성철은 한국 근대불교의 부흥조. 그 성철스님이 1936년 25세의 나이로 해인사 퇴설당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는 것이다. 이어 범어사 원효암, 통도사 백련암, 은해사 운부암, 금강산 마하연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던 젊은 날의 성철스님은 1940년 29세때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중 오도송(悟道訟)을 읊기에 이른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훗날 해인사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이후 줄곧 해인사에서 주석한 성철은 '호랑이 노장'으로 불리며 선방의 서늘한 선풍을 세우고 한국불교의 기틀을 다잡아 나갔다.
해인사 / 이무경 기자 lmk@kyunghyang.com
■한국 근대불교의 시작
'콧구멍이 없는 소가 무슨 뜻입니까'라는 사미승의 질문에 크게 깨달은 경허(鏡虛.1849∼1913.사진)대사는 갑자기 일어나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그리고 오도송(悟道訟)을 지어 깨달음의 세계를 내보였다. 1879년 11월의 어느날이었다.
이 순간은 그의 깨달음의 순간일 뿐 아니라 끊겼던 우리나라 불교의 선맥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527년 달마가 동쪽으로 온 이후, 어언 1,500년 만의 일이다. 만해 한용운은 '경허집(鏡虛集)'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경허스님은 이대로부터 육신을 초탈하여 작은 일에 걸리지 않고 마음대로 자재하여 유유자적하였다'고 적었다.
흔히 원효를 한국불교의 새벽, 지눌은 한국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받아 끝없이 의심해 들어가는 수행법)의 효시, 서산대사는 한국 중세선의 기둥이라고 할 때, 경허선사는 한국 근대선의 중흥조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경허가 되살린 우리나라 불교의 선맥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중국 조사들의 법거량에 수시로 등장하는 선문답에서 달마 동래(東來)는 항상 빠지지 않는 물음이다. 김명국의 '달마도'로 우리에게 눈에 익은 달마대사의 모습은 코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달마대사는 인도 남천축국 향지왕의셋째아들인 인도인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에게 법을 전수받은 뜻으로 금란가사와 바리때를 물려받은 가섭존자는 이 신표를 통해 선맥을 면면히 전수했다. 가섭존자로부터 내려온 선맥은 제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금란가사와 바리때를 받은 달마대사는 스승의 명에 의해 동쪽인 중국으로 떠난다. 중국 선맥의 초조인 달마대사에 의해 법을 전수받은 혜가로부터 전해져 온 법은 도의(道義)선사를 통해 해동(海東)에 이르러 고려말 태고보우(太古普愚)에게로 전해졌다. 그러나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인해 사명대사에게까지 법맥이 간신히 이어졌으나 경허선사가 다시 그 법맥의 불씨를 일으킬 때까지 200여년간 끊어졌던 것이다.
홀로 선사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경계없는 세계를 열고 들어간 경허는 퇴락해가던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고자 전국의 사찰을 돌며 선방을 열었다. 경상도 지역의 범어사.해인사.동화사, 전라도의 송광사.화엄사 등에 선원이 개설됐고, 지리산 천은사, 실상사, 쌍계사, 내원사, 표충사, 대성사, 파계사 등에 선풍이 일기시작했다.
또한 경허대사는 '선문촬요(禪門撮要)'라는 선수행 지침서를 발간해 과거 선사들의 어록을 집대성했다. 또한 그에게서 나온 제자들은 이후 한국불교의 선맥을 면면히 이어갈 밑거름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소위 경허의 세 달이라는 만공(滿空.법명은 月面), 혜월(慧月), 수월(水月)은 중부지방과 남부, 그리고 북부 지방에서 각각 선풍을 일으켰다. 경허는 56세 되던 해 금강산과 안변 석왕사에서 법회를 연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부터 64세로 입적할 때까지의 행장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일으킨 선풍은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3보사찰인 해인사와 통도사, 그리고 송광사는 그 절집의 가풍이 주변의 산세만큼이나 확연히 구분된다. 보통 해인사는 남성적이고 활달하며, 통도사는 점잖으면서 여유있고, 송광사는 온화하고 부드럽다고 알려져있다. 화기가 많은 가야산의 산세만큼이나 활달하고 거침없는 해인사의 가풍은 1967년 총림지정 이후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 성철(性徹)스님 이후 더욱 명성을 떨쳤다.
방장은 총림의 가장 웃어른이면서 선승들의 지도자다. 총림 안에서는 `방장이 곧 법'이라 할 수 있을만큼 그 의미는 실로 큰 것이다. 방장은 선수행을 하는 승려들을 할(喝)과 방(棒)으로 채찍질하면서 법기가 되도록 조련할 뿐 아니라 그 스스로 끊임없는 수행으로 몸소 선승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총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둑놈들아 밥값 내놔라"
▲초대.3.4.5대 방장 성철스님(1912∼1993)
'가야산 호랑이' '호랑이 노장'으로 불리운 성철스님은 1967년 총림지정과 동시에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 이후 3, 4, 5대 방장을 역임했다. 성철스님은 동산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해 한국 근대불교사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봉암사 결사'를 1947년부터 3년간 이끌었고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한 이후 주로 백련암에 주석하면서 서릿발 같은 해인사 선풍의 기틀을 다잡았다.
하안거나 동안거가 되면 성철스님은 백련암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선원으로 하루에 한번씩 불시에 점검을 나왔다고 한다. 지금의 선원인 소림원(少林院)이 개원하기 전에는 조사전, 퇴설당, 선열당을 상(上)선원, 중(中)선원, 하(下)선원으로 각각 이용했다. 선열당에서는 하루 10시간 일반정진과 14시간 가행정진을 했고, 퇴설당에서는 14시간 가행정진, 조사전에서는 24시간 용맹정진과 가행정진을 번갈아 했다고 한다.
72년 해인사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한 유나 원융스님은 "보통 성철스님은 하선원인 선열당에 먼저 들르시는데, 한여름 수좌들이 졸고 있으면 영락없이 산이 쩡쩡 울리게 불호령을 했다"고 기억했다. "야, 이놈들아! 해인사 밥이 썩은 밥인 줄 아나! 어디서 졸기를 졸고 있노. 이 도둑놈들아, 밥값 내놔라"하며 죽비로 등짝을 후려치는 소리, 다기상을 뒤집어 엎는 소리가 나면, 퇴설당과 조사전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은 번쩍 정신이 들곤 했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한바탕 선열당에서 난리를 치른 후 퇴설당과 조사전에 올라왔는데, 그때 아무도 조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퇴설당에서 졸던 스님들은 불시에 이곳에 먼저 들른 호랑이 노장에게 날벼락을 맞았던 일이 있었지"하고 원융스님은 웃으며 회고했다.
성철스님은 해인사 방장뿐 아니라 조계종 7, 8대 종정을 역임하면서 한국 근대불교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거듭되는 고사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요청에 못이겨 7대 종정직을 수락한 성철스님은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법문을 내렸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로다'
조계사에서 열린 종정취임 법회는 물론 일체의 외부활동 없이 가야산에만 머물던 스님은 93년 11월4일 퇴설당에서 혜암 법전 원융 원택 스님과 따님인 불필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법랍 59년, 세수 82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가야산 호랑이 성철스님은 임종게에서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친다/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푸른 산에 걸렸도다'고 읊었다.
*양주 소임 자청 '자비보살'
▲2대 방장 고암(古庵)스님(1899∼1988)
1917년 해인사에서 제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스님은 22년 용성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친견하려면 삼천배를 올려야 했던 성철스님과 달리 누구라도 만났던 고암스님은 남성적 해인사의 가풍에 비해 모성적 자애로움으로 가득차 '자비보살'이라고 불리웠다. 또한 용성스님과 직지사 제산스님, 한암스님의 율맥을 고루 이어받아 '율사'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만공스님을 모시고 정진할 때, 이미 고암스님은 선방의 서열상 고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대중을시봉하는 공양주 소임을 자청했다. 엄동설한의 금강산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겨울에도 언제나 남보다 먼저 일어나 다른 스님들의 신발을 남몰래 깨끗하게 닦아놓고, 세숫물을 데워놓았다.
스님은 26년 안변 석왕사 내원선원에서 참선정진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남겼다. '선정 삼매는 단지 속에 일월같고/시원한 바람 부니 가슴 속에 일이 없네'
부처님의 색인 황색을 좋아하고 한문 일색이었던 불교계에서 유독 한글로 쓰는 것을 고집한 스님은 67년부터 조계종 3, 4, 5대 종정을 역임했고, 70년 성철스님의 뒤를 이어 해인사 방장에 취임했다. 88년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법랍 71년, 세수 90세로 입적한 스님은 '가야산색 단풍이 짙어졌으니/이로써 천하의 가을을 알겠네/서리 내려 낙엽이 떨어지면 모두 뿌리로 돌아가고/구월 보름 밝은 달은 허공을 비추나니라'고 임종게를 남겼다.
*좌불와.오후불식 대명사
▲6대방장 혜암(慧菴)스님(1920∼2001)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진'과 눕지 않는 '장좌불와'의 대명사인 혜암스님은 1946년 해인사에서 출가한 이후 47년 성철스님 등이 이끈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다. 제방선원에서 수행하다가 77년부터 해인사에 줄곧 주석해온 스님은 유나, 부방장의 소임을 맡는 한편 하루 한끼씩 먹는 일종식과 장좌불와를 평생 실천했다고 알려졌다. 99년에는 조계종 종정에 추대됐다.
93년 성철 스님 열반 이후 방장에 오른 스님은 몸소 선승들과 함께 선방에서 수행을 함께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선방의 대중에게는 하루 4시간 이상의 취침을 금하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지키게 했다. 또한 방선(放禪, 선수행 도중 잠깐 쉬는 시간)시간에는 108배를 거르지 않고 행하게 했다.
스님은 생사해탈에 관한 법문을 통해 일반인의 수행에 관해서도 일렀다.
'세상 만사는 분별망상으로 하는 일이기에 선악이 꿈속의 일이요 나고 죽는 괴로운 일이다. 그러니 먼저 할 일은 참 나를 찾는 일이다. 주인공을 찾는 일이 내 일이요 남을 돕는 일이니, 무슨 직업이든지 도를 닦아야 한다. 이것을 제외한 모든 인간의 소망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지난해 12월31일 열반한 스님은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철스님도 놀란 '절구통 수좌'
▲7대방장 법전(法傳)스님(1925∼, 현 종정)
한번 앉으면 그대로 땅바닥에 붙은 채 수행에 정진했다고 하여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법전스님은 1948년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47년 백양사에서 해인사로 가던 도중 문경 봉암사에 들렀을 때, 우연히 봉암사 결사를 하고 있는 성철스님을 비롯해 청담 양곡 자운 스님을 만나 결사에 참여하게 됐다. 이것을 인연으로 성철스님을 법은사로 모시게 된 법전스님은 이후 1951년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스님이 수행할 때 시봉을 들며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법전스님은 5척 단구의 작은 키에 말수도 별로 없지만, 성철스님도 '내가 니한테 졌대이. 그만 밥먹고 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선수행 이력을 자랑한다.
해인사/ 이무경 기자 lmk@kyunghyang.com
■해인사 스님들의 법맥 - 융성스님에게서 뻗은 가지, 방장들 조계종 종정 역임
역대 방장들이 모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할 정도로 고승들을 배출해온 해인사는 모두 용성(龍城)스님(1860∼1940)에게서 뻗어나온 가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성문도회는 덕숭총림 만공스님의 제자들과 함께 한국불교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특히 해인사는 용성스님이 출가한 곳으로 해인사 스님들은 가야산 골짜기에 있는 '진디밭골'이라는 지명을 따 '진디밭골 법손'이라고 스스로를 이르며 용성스님의 제자임에 자부심을 느낀다.
용성스님은 경허스님의 세 달 중 두 달인 혜월스님과 수월스님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879년 해인사에서 화월화상을 은사로 출가한 용성스님은 해인사와 파주 보광사, 순천 송광사 등에서 두루 수행하다가 1919년 만해 한용운과 함께 3.1운동에 앞장서 투옥되는 등의 고초도 겪었다.
해인사 초대방장인 성철스님은 용성-동산스님으로 이어지는 맥을 이어받았고, 2대방장 고암스님도 용성스님을 전법스승으로 모셨다. 6대방장 혜암스님 역시 용성-인곡스님의 제자이며, 7대방장 법전스님은 비록 백양사에서 출가했으나 성철스님을 법은사로 모셨다. 성철스님과 혜암스님은 같은 용성스님에게서 나온 법사촌지간에 해당하며, 혜암스님과 법전스님은 숙질지간이라고 볼 수 있다. 고암스님은 성철스님이나 혜암스님보다 한 세대 위가 되는 셈이다.
이들에게서도 쟁쟁한 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성철스님의 직계제자만 하더라도 천제(부산 해월정사 주지), 만수(대구 금탑사 주지), 원명(서울 연등국제선원장), 원융(해인총림 유나), 원택(전 총무원 총무부장.해인사 백련암 주지)스님을 들 수가 있다.
2. 송광사(조계총림)
전국 사찰의 선방을 돌면서 조선시대에 맥이 끊겼던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킨 경허(鏡虛)스님이 송광사에 나타난 것은 1900년 1월 하순이었다. 송광사 불상의 점안식에 증사로 초청된 경허스님은 잠시 이곳에 머물며 삼일암(三日庵)에 선방을 열었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처승들의 절이 되어버린 송광사는 1937년 효봉(曉峰 1888∼1966)스님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효봉스님이 근대 한국불교에서 송광사의 가풍을 세우고 기틀을 닦았다면, 그 맏상좌인 구산(九山)스님은 해인총림에 이어 호남의 송광사에 조계총림의 문을 열고 초대 방장으로 취임해 송광사 선풍을 진작시킨 양대 거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불교에서 송광사의 역사는 효봉문중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효봉원명스님의 출가와 수행
지금은 '판사스님'으로 잘 알려진 효봉스님이 속세에서 판사였다는 사실은 스님이 출가한 한참 뒤에나 알려졌다. 이전엔 '엿장수 스님'으로 알려졌을 뿐이었다.
2남1녀의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던 판사 '이찬형'이 출가한 것은판사생활 10년째인 36세때였다. 평양 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판사생활을 하던 이찬형은 처음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난 뒤 몇날 며칠을 뜬눈으로 고민한다. 어느날 출근하던 길로 집을 떠난 이찬형은 엿판을 메고 3년간 전국을 엿장수로 떠돈다.
정처없이 떠돌던 스님은 드디어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금강산 도인' 석두(石頭)스님에게 계를 받고 머리를 깎는다.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6개월 정도는 행자생활을 해야 머리를 깎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효봉스님에게 석두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자 "유점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연이어 "몇걸음에 왔는가"라는 스승의 물음에 효봉스님은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며 큰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앉았다. 이에 석두스님은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고 감탄하며 바로 계를 주고 원명(元明)이란 법명을 내렸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머리를 깎은 스님은 이후 무섭게 정진하였는데, 엉덩이 살이 헐고 진물이 나 방석과 들러붙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란 별칭이따라붙었다. 1930년 법기암에서 크게 깨달은 스님은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불 속의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이 집안 소식을 누가 능히 알꼬/흰구름 서쪽에 날고 달이 동쪽으로 뛰누나'하고 오도송을 읊으며 토굴벽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참선 중시 직접 죽비들고 경책
▲ 송광사 조실과 가야총림 방장
효봉스님의 판사전력이 들통난 것은 출가 7년째 되던 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함께 일하던 일본인 판사와 마주친 때문이다. 이후 스님은 금강산을 떠나 제방선원을 떠돌다가 1937년 송광사 조실로 10년을 머물게 된다. 송광사에서 고향같은 편안함을 느낀 스님은 꿈에서 16국사중 마지막 국사인 고봉화상을 만나 "이 도량을 빛내 달라"며 내린 법명 '효봉'을 받는다.
선방인 삼일암에서 납자들을 지도했던 스님은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의 대근기(大根氣)는 참선이요, 중근기는 경을 보고 강사를 하는 것이며, 하근기는 사람이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니 기도와 염불을 하면서 절밥을 얻어 먹는 것이다". 이처럼 참선을 제일 중요시하던 스님은 직접 죽비를 들고 선방에서 경책(졸거나 딴생각 하는 수좌를 죽비로 내려침)을 했다. 스님은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默言)'의 4가지 규약을 정해 이를 엄격히 지켰다.
그리고 늘 조주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들어 "무(無)라, 무라…"하고 입버릇처럼 외워 '무(無)라 스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효봉스님은 1946년 처음 총림을 개설하는 해인사의 방장으로 초빙되어 송광사를 떠난다. 이때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당시 송광사의 주지가 '선방 폐쇄'를 통보해 난감해 하던차에 가야총림의 방장으로 효봉스님이 추대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송광사 대중들은 '효봉스님이 가야총림의 문을 열었으니 결국 총림의 기원은 바로 송광사에 있다'고 은근히 자부심을 드러낸다. 맏상좌 구산스님은 은사인 효봉스님을 따라 해인사로 가서 가까이 모시고 시봉을 했다고 한다. 스님은 통영 용화사, 쌍계사를 거쳐 1957년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어 58년 2월까지 재직하고 이후 종정에 취임했다. 58년 겨울부터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통영 미래사에서 정진했고 62년부터 66년까지 통합종단 초대종정을 지낸 후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열반했다. 스님은 '내가 말한 모든 법은/그거 다 군더더기/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천강에 비치니라'고 임종게를 읊었다.
▲ 송광사의 가풍을 일구다
송광사의 위치는 '승보종찰'답다. 주지 현봉(玄峰)스님은 "스님들끼리 회의를 하거나 의논할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송광사 스님 눈치를 본다고 합디다. 그만큼 여법(如法, 법대로)하게 산다는 이야기지요"라고 말한다. 백장청규(백장스님이 만든 청정하게 살아야할 스님들의 규칙)에 따라 근검절약과 청규적용이 엄격하다. 이는 효봉스님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효봉스님의 상좌였던 법정(法頂)스님이 찬거리를 구하러 갔다가 10분 늦게 돌아오자 효봉스님은 "오늘은 공양을 짓지 마라. 단식이다. 수행자가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 되겠니?"라며 용납하지 않았다. 또 밥알 하나만 흘려도 불같이 화를 냈고, 초 심지가 다 내려앉기 전에는 새 초를 갈아 끼우지 못하게 했다.
또한 울력(공동노동)을 하는 것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음력 4월 보름부터 석달간 하는 하안거에 참여하려면 연등을 만드는 일을 비롯한 사월초파일 울력을 해야 했다. 당시 수행에 힘쓰느라 울력을 소홀히 했던 성철스님이 송광사에 방부를 들일 때 효봉스님이 "책보따리만 메고 다니면 안된다. 울력도 함께 해야지"라고 역정을 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송광사에서는 안거를 쉬는 산철에도 산철결제를 한다. 또한 경내에서 TV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여름 월드컵 때도 거의 TV시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통도사, 중앙승가대 등이 참여하는 스님들끼리의 축구대회에서도 유일하게 유니폼 대신 그대로 승복을 입고 출전한다. 물론 성적은 꼴찌다. 대신에 법고.사경(경전 풀이) 등의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서는 1등을 도맡아 한다.
▲ 효봉스님의 제자들
훗날 조계총림의 초대방장이 된 구산스님이 맏상좌이다. 효상좌로도 유명한 구산스님은 그림자처럼 효봉스님을 시봉했다. "속가의 자식도 그렇게 잘 할 수는 없어"라고 상좌인 법흥(法興)스님(조계총림 동당)은 회상했다.
환속한 제자 중엔 시인 고은씨가 있다. 스님일 때는 일초(一草)라는 법명을 썼다. 전국신도회장을 지낸 정치인 박완일씨도 효봉스님의 상좌로 일관(一觀)스님으로 불렸다. 현재 생존해 있는 효봉스님의 상좌로는 수필집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과 법흥스님이 있다.
송광사/이무경 기자 lmk@kyunghyang.com
■푸근한 조계산에 안긴, 16국사 배출 '승보사찰'
티베트 출신의 세계적인 불교음악가 나왕케촉이 공연을 위해 전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처음 들렀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아마도 전생에 송광사 스님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 왔던 것처럼 편안하다. 일생을 여기서 마치고 싶다".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조계산(曹溪山) 자락에 포근히 자리잡은 송광사는 이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해인사가 남성적이라면, 송광사는 흔히 여성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신라말 혜린(慧璘)선사가 터를 잡아 길상사라고 칭했던 승보(僧寶)사찰 송광사는 법보사찰 해인사, 불보사찰 통도사와 더불어 3보사찰로 손꼽힌다.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 깨우친 뒤에도 계속 수행을 함)'와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음) 가풍, 즉 목우자(牧牛者) 가풍이 면면히 흐르는 송광사는 고려시대 16국사를 연이어 배출한 승보사찰로 이름이 높고, 전국의 어느 절보다 법대로 살고 법대로 수행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보조의 정혜쌍수를 의심했던 경허스님도 이곳의 관음전에 와서 다시 깨닫고 참회를 한 후 선문촬요를 펴냈다. 용성스님도 보조스님의 '수심결'을 보고 깨달았고, 혜울스님과 한암스님도 보조법어를 보고 확철대오했다.
승보사찰이라는 특징은 가람배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승보사찰이기 때문에 대웅전보다도 스님들의 선방이 위쪽에 위치했다. 그리고 선방인 '수선사(修禪社)'에는 문수사리나 달마대사를 모시는 대신 크고 둥근 거울을 놓았다. 이것은 대원경지(大圓鏡智)의 큰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선정을 닦아 마음의 거울을 밝게 비추라는 의미다.
또한 유순한 산세를 가진 조계산 자락의 송광사는 풍취나대(風趣蘿帶) 지형에 자리했다. 바람이 불면 흔들거리는 모양을 한 이 지형에는 무거운 석물이나 커다란 건물은 금물. 그래서 가람 내부에는 보조국사의 '불일(佛日)보조국사 감로탑'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석물이 거의 없다. 이것도 외부로 내보냈다가 근래에 다시 들여온 것이다. 또한 커다란 건물이 없는 금계포란(金鷄胞卵)형 건물배치를 이루고 있다.
호남불교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송광사(松廣寺)에 효봉스님이 조실로 초빙되어 갔던 1937년부터 10년간은 `효봉문중의 송광사 뿌리내리기'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1946년 해인사 방장으로 효봉스님이 떠나면서 송광사와 효봉문중의 인연은 잠깐 끊겼었다. 그러나 30년뒤인 1967년, 효봉의 맏상좌 구산(九山, 1910~1983)스님이 다시 송광사 산문을 들어섰다. 그리고 2년뒤 보란 듯 호남 최초의 총림인 `조계총림'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효봉스님이 일제시대를 거치며 송광사를 장악한 대처승들의 선방폐쇄로 인해 해인사로 떠난 것에서 알수 있듯이 여전히 송광사에는 대처승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송광사로 돌아온 구산스님
구산스님은 제자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대처승들 등쌀에 보따리를 3번이나 쌀 뻔했어. 그래도 내 이를 악물고 꾹 참았지. 효봉문중이 앞으로 송광사를 지켜내야 할 거 아니여"
대처승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송광사에 구산스님이 다시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송광사의 실권자였던 취봉스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다른 대중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취봉스님은 구산스님을 송광사로 다시 불러들인다. 취봉스님의 도움으로 송광사에 들어온 구산스님은 착실히 송광사의 기반을 다져 2년 뒤 '호남 최초의 총림'인 조계총림을 세운 것이다.
이처럼 구산스님이 온갖 어려움을 참아가며 송광사에 자리를 잡은 것은 스님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효(孝)상좌였기 때문이었다. 마음놓고 수행할 수 있도록 송광사에 터를 잡는 일은 효봉문중으로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비록 효봉스님이 해인사의 방장과 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다고는 하지만, 효봉스님은 이후 한곳에 거처를 정하지 못한 채 팔공산 동화사, 통영 미래사, 밀양 표충사 등을 오갔다. 표충사에서 입적한 효봉스님은 "승보종찰 송광사 중흥을 이룩해 종단의 기둥이 될 훌륭한 승려를 많이 양성하라"는 유언을 내렸고, 구산스님은 그 유언을 훌륭히 받든 것이었다.
그러나 구산스님이 뚝심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님의 뚝심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정화불사가 한창이던 1954년 하안거가 끝났을 때, 서울 조계사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비구승들의 승려대회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 경찰들이 행사를 저지하려고 실력행사에 들어가자, 한 승려가 분연히 일어나 정화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500자 분량의 혈서를 써내려 갔다. 그 승려가 결연한 표정으로 혈서를 낭독해 내려가자 법당안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는데, 바로 그 승려가 구산이었던 것이다.
▲구산스님의 출가와 구도
효봉스님은 속가에서 판사출신의 인텔리 계층이었지만 그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이자 맏상좌인 구산스님은 이발사 출신으로 속명은 소봉호였다. 남원 역 앞에서 '명치이발관'을 운영하던 소봉호는 27세에 큰 병을 얻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불법에 귀의한 것이었다. 지리산 영원사에서 100일 기도를 한 뒤, 2년뒤인 1937년 효봉스님을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에서 머리를 깎은 구산스님은 이후 그림자처럼 효봉스님을 시봉하는 한편, 늦깎이 승려로서의 수행에도 힘쓴다.
해인사 가야총림 초대방장이 된 은사 효봉스님을 따라 총림의 도감을맡는 한편 가야산 상봉 아래 토굴 법왕대(法王臺)를 짓고 생쌀과 솔잎만 먹으면서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에 들어갔다. 3년간 용맹정진을 하던 어느날 문득 남아있던 일체의 먹구름이 걷히고 사방이 훤히 트인 경계없는 세계가 홀연히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깨달음의 기쁨, 생사의 굴레를 벗어난 구산스님의 입에서는 저절로 오도송(悟道訟)이 흘러나왔다. '대지의 겉모습은 본래 공한데/손을 들어 공을 가리키니 어찌 뜻이 있으리오/고목나무는 반석 위에 서서 계절이 없는데/봄이 오매 꽃피고 가을에 열매 맺는다'. 스승 효봉은 훗날 애제자 구산의 깨달음을 기뻐하며 '한 그루 매화를 심었더니/옛 바람에 꽃이 피었구나/그대 열매를 보았으리니/내게 그 종자를 가져오너라'라고 전법게를 내렸다. 구산스님을 시봉했던 현봉(玄鋒, 송광사 주지)스님은 "구산스님은 앉아서 조실 때도 앞뒤가 아니라 좌우로 고개를 흔드는 버릇이 있는데, 토굴에서 정진할 때 턱 밑에 날카로운 송곳을 놓고 졸 때마다 턱밑을 찌르도록 해서 부지불식 간에 생긴 습관"이라고 이야기했다. 구산스님의 정진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효봉가풍을 잇고 생활불교 '칠 바라밀'을 세우다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쌍수 가풍, 즉 목우자(牧牛者) 가풍을 이으면서 전국의 어느 사찰보다 엄격한 선풍을 지켜온 효봉가문의 장자 구산스님은 1969년 조계총림의 문을 열고 초대방장으로 취임한다. 구산스님은 1983년 입적할 때까지 15년간 송광사의 웃어른으로서 '가장 여법(如法, 법대로)하게' 사는 효봉가풍을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송광사 선방 수선사에서 안거를 하는 납자들은 석달동안의 안거기간에 최소한 두세번은 방장스님과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할 기회를 갖는다. 이는 다른 사찰의 경우에는 거의 없는 일인데, 구산스님 때부터 내려온 송광사의 전통이라고 한다. 구산스님은 방장으로서 가끔씩 점검을 나오는 것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대중들과 함께 선방에서 수행을 했는데 특히 스님들이 좋아하는 국수가 점심공양으로 나온 날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은 국수가 나와서 많이들 드셨을테니 한 숨 푹 자고 나면 개운하게 정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육(六)바라밀을 딴 '칠바라밀의 생활불교'를 강조한 구산스님의 정신은 송광사의 달력에서 엿볼 수 있다. 달력에는 '월요일은 베푸는 날, 화요일은 올바른 날, 수요일은 참는 날, 목요일은 힘쓰는 날, 금요일은 안정의 날, 토요일은 슬기의 날, 일요일은 봉사의 날'로 정해놓고 있다.
1973년 송광사내에 불일 국제선원을 개원한 구산스님은 해외포교에도 힘써 수많은 해외제자를 길러냈고, 해외 사찰의 문을 열었다. 1983년 송광사 방장실인 미소실(微笑室)에서 열반한 스님은 '온 산의 단풍이 봄의 꽃보다 붉으니/삼라만상의 큰 기틀을 온통 드러냈도다/생도 공하고 사도 또한 공하니/부처의 해인삼매 속으로 미소지으며 가노라' 하고 임종게를 남겼다.
▲뒤를 이은 방장들과 구산의 제자들
구산스님의 뒤를 이어 방장을 역임한 일각(壹覺, 1924∼1996)스님과 현재의 방장 보성(普成, 1928∼)스님은 철저하게 효봉가풍을 이어갔다. 효봉스님의 상좌인 일각스님은 교사출신으로 아이를 때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자괴감과 허무함을 느껴 출가했다고 한다. 일각스님도 24시간의 용맹정진과 14시간 가행정진을 함께 하며 수행에 모범을 보였다. 구산스님에게 사미계를 수지한 보성스님은 율사로 이름이 높다. 구산스님의 상좌들은 대대로 주지와 선원장을 역임하며 송광사의 가풍을 지켜나갔다. 현고스님(전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현묵스님(송광사 선원장), 현봉스님(현 주지) 등이 구산스님의 상좌들이다.
송광사 / 이무경 기자 lmk@kyunghyang.com
■구산스님 시봉한 현봉스님 - "주지는 벼슬 아닌 머슴"
2년전 주지로 취임한 현봉(玄鋒.사진)스님은 '부처님 법대로' 사는 송광사 주지답다. 송광사 주지가 되기 이전 아무런 직책도 맡은 적이 없이 전국의 선방을 떠돌며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했던 스님은 교구 본사 주지임에도 불구하고 승용차 하나 없다. 신도 중 하나가 한사코 사양하는 현봉스님에게 승용차를 마련해 드렸지만 얼른 팔아서 송광사 살림에 보탰다고 한다. 서울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때도 '나 어디좀 다녀온다'고 말하고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주지가 뭐 벼슬인가요? 그냥 머슴이오, 머슴. 남의 살림 해주러 와서 자가용 타고 다니면 어떡합니까. 열심히 살림해야지"
조계산 기슭 송광사에서 1시간정도 산위로 올라가야 있는 토굴인 '일월정사'에서 구산스님을 77년부터 열반 때까지 시봉했다. 하루는 밥을 지으려고 나무를 해서 지게를 지고 들어오는데 구산스님은 "너 화두를 놓치면 안된다. 아무리 나무를 하고 밥을 짓더라도 화두를 놓치면 수행승이 아니라 나무꾼이고 부엌데기가 되는 거야" 했다.
"구산스님은 자정이 되면 일어나 자정수(子正水)를 마시고 앉아서 좌선을 한 채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시자였던 저는 옆방에서 자다가도 그때마다 얼른 일어나 그걸 받아적곤 했지요"
이렇게 받아 적은 게송들과 법당에서 설법한 상당법어(上堂法語)를 묶은 것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이처럼 구산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 현봉스님은 스승의 임종게도 직접 받아적었다.
"스승께서 저에게 늘 말씀하셨어요. '넌 절대 주지니, 방장이니 그런거 하지 말고 평생 공부만 해라. 그거다 쓸데 없다.지 공부 하는 게 최고야'라고 말이죠"
하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고 웃는다.
"송광사에서는 1969년 조계총림 출범과 동시에 '불일회'라는 재가신자 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하려는 스님들이 많기 때문에 늘 살림이 넉넉지 않은 걸 알고 재가신자들이 이를 돕기 위해 만든거죠. 요즘은 '송사모(송광사를 사랑하는 모임)'라는 자발적 모임이 생겼습니다"
다른 총림들은 '방장이 곧 법'이라고 할 정도로 방장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만, 송광사만큼은 사찰내의 대중들이 참여하는 운영위원회와 재가신자들의 의견을 중시하며 '민주적'으로 운영된다. 현봉스님은 "그것은 바로 16국사를 비롯해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한 승보사찰의 자존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3. 통도사(영축 총림)
경부고속도로 마지막 인터체인지 부산을 40여㎞쯤 남겨놓고 만나는 통도사 인터체인지에서 절까지는 아주 가깝다.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동안인데도 '통도 환타지아'라는 다소 이질적인 두 단어가 조합된 사하촌이 형성되어 있다. 어디가 정문인지 모를 정도로 절 앞은 휘황찬란하고 번잡했지만 일단 절안으로 들어서면 '불보(佛寶)사찰' 통도사의 웅장한 면모가 천천히 드러난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으로 난 좁은 차길을 따라 몇분을 올라가야 닿는 통도사는 사하촌의 어지러운 모습과는 달리 우리 사찰들의 맏형답게 웅장하고 의젓하다. 일주문 좌우에는 '불지종가(佛之宗家)'와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는 한국불교의 종가다운 현판까지 내걸고 있었다.
***신라때 자장율사가 세운 고찰
구한말 통도사에 주석하고 있던 성해(聖海)스님의 두 제자, 구하(九河.1872∼1965.사진 위)스님과 경봉(鏡峰.1892∼1982)스님이 일구고 구하스님의 상좌인 월하(月下)스님과 경봉스님의 상좌 벽안스님이 이어받은 통도사는 위계질서가 엄격한 '종가의 가풍'을 그대로 간직한한국불교계의 불지종가 그 자체이다. 통도사는 1986년 영축총림으로 지정됐고 초대방장 월하스님이 현재까지 주석하고 있다.
상편에서는 일제시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통도사의 기반을 튼튼히 한 구하스님을 중심으로, 하편에서는 주로 극락암에 주석하며 선풍을 드높인 경봉스님, 그리고 월하 방장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축총림 통도사의 가풍을 짚어가겠다.
◇통도사의 역사와 선방의 개원=신라 선덕왕 15년인 서기 64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통도사는 원래 아홉 용이 살았던 연못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연못의 흔적은 대웅전 옆 구룡지(九龍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북의 축을 가진 일반적 가람배치와 달리 동서로 긴 통도사는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나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심적인 특징은 부처님의 정골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이기 때문에 대웅전에 불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대웅전 바로 뒤에는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위치해 있어서 불단 뒷문을 열면 바로 금강계단의 탑이 보인다. 또한 통도사에는 대대로 글씨와 그림에 능한스님들이 많은데, 혹자는 영축산의 한 봉우리에 붓의 모양을 한 문필봉이 있어서 그 정기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1,300년 넘은 고찰 통도사도 조선시대 불교의 암흑기를 거쳐 조선말인 1899년 여름이 되어서야 백운암에 선방을 열었다. 경허스님이 해인사에 처음으로 선원을 연 것이 그해 봄이니, 통도사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경허스님이 직접 통도사로 와서 선풍을 떨치는데, 이때 통도사 본사 내의 보광선원이 문을 연다. 이곳에서 성해스님과 그 제자인 구하.경봉스님, 그리고 초대방장인 월하스님이 도를 닦으며 통도사를 떠받치고 나간 것이었다. 이후 1905년 내원암에도 선원이 개설되었고 이후 안양암, 백련암, 극락암 등에 차례로 선원이 개설되었다.
***書畵 명성은 문필봉 정기 덕?
종가답게 상하의 위계를 존중하고 계율을 존중하며 화합을 중시하는 것이 통도사다. 수행하여 큰 깨달음을 얻거나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해도 사형이나 스승이 있으면 내세우지 못한다. 경봉스님과 구하스님 모두 명필로 소문났으나, 경봉스님은 구하스님 생전에는 결코 자신의 글씨를 자랑한 법이 없었다.
또한 계율을 지킴에 있어서도 통도사 스님들은 남다르다. 40대 후반 이른 나이에 열반한 홍법스님(전 주지, 월하스님 상좌)은 지병 때문에 육식이 필요해 주변에서 아무리 육식을 권해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의 중으로 어찌 부처님 계율을 어길 수 있겠냐'며 듣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통도사는 승려뿐 아니라 대중들의 교화에도 일찍부터 눈을 돌렸다. 경봉스님이 2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대중법회인 화엄산림은 음력 11월 한달간 전국 고승들이 법문을 들려주는데, 현재도 면면히 이어져 전국의 불자들을 통도사로 향하게 한다.
◇구하스님과 일제시대=1911년부터 통도사 주지가 된 구하스님은 사제인 경봉스님과 함께 근세 통도사의 역사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세에 사서삼경을 다 떼었을 정도로 신동이었던 구하스님은 1884년 13세에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해 1889년 18세에 경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이후 전국의 산천을 떠돌며 운수행각을 하던 구하스님은 29세때비로소 통도사와 인연을 맺는다.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은 성해스님을 만나 그의 법제자가 되어 '구하'라는 법호를 받게 된다. 1905년 34세에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던 중 생사가 둘이 아닌 경계를 깨닫고 오도송을 읊었다. '마음에 티끌이 따로 없어 같이 존재하고/오체를 공중에 던지니 함께 귀의한다네'.
특히 기도를 열심히 하기로 소문난 구하스님은 1911년 통도사 주지가 돼 당시 대처승들이 누룩을 절에서 만들어 팔 정도로 심각했던 사찰내 폐습을 일소하고, 즉시 강원과 선원을 복원했다. 1917년 30본산위원장(본사주지회의 의장)으로서 일본시찰을 하기도 했으며 1950년에는 초대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했다.
이처럼 겉으로는 일본의 신문물을 배우러 일본에 드나들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를 눈치챈 일제가 구하스님을 주지에서 쫓아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구하스님 말년에 시봉을 들었던 현재 통도사 주지 현문(玄門)스님은 "독립운동 자금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항상 걸인 행색을 하고 구하스님 방앞에서 행패를 부리면 구하스님이 데리고 들어가 슬며시 자금을 건넸는데, 어찌나 은밀하고 눈 깜짝할 새 건네지는지 그 바로 옆에 있던 시자스님들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구하스님 독립자금 몰래 대기도
'통도사가 독립운동 자금을 댄다'는 소문이 흘러나가자 일본형사들이 통도사 주위를 맴돌며 절의 살림살이를 살폈는데, 그때마다 구하스님은 사제인 경봉스님과 함께 절 밑 사하촌의 기생집에서 일부러 몇날며칠을 머물다가 가곤 했다는 것이다. '기생집에서 거금을 썼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사실 두 스님을 존경하던 기생들은 한푼도 받지 않고 명필로 소문난 구하스님과 경봉스님의 글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구하스님은 1965년 11월24일 한낮 "나 이제 갈란다. 너무 오래 사바에 있었어. 그리고 다시 통도사에 와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94세, 법랍 82세로 열반에 들었다. 통도사/이무경 기자
■구하스님 시봉한 주지 현문스님,"이제껏 소란 한번 없어"
"구하스님은 오늘의 통도사가 있게 한 분이었습니다. 구하스님이 일군 바탕 위에서 경봉스님이나 월하스님 같은 선객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구하스님이야말로 종가(宗家)의 장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14살 어린 나이에 통도사로 출가한 통도사 주지 현문(玄門.53.사진)스님은 출가하자마자 93세의 구하스님 시봉을 시작해 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1년6개월을 모셨다. 월하스님의 상좌로 머리를 깎았으니 구하스님의 손상좌가 되는 셈이다. 구하스님뿐 아니라 월하스님의 시봉을 들고 경봉스님도 가까이서 모셨기 때문에 통도사의 역사를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기로 소문난 구하스님은 '기도로 복(福)을 지었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절 살림에 복이 많았다. 일제 시대에 다른 사찰들은 살림이 매우 어려웠지만 통도사만큼은 구하스님의 기도 때문인지 제후답(절에 제사를 부탁하며 맡기는 전답)이 많이 모였다. 가을 추수철엔 양산지역의 수많은 달구지들이 소작료를 싣고 통도사로 향해 그달구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작료를 모아 구하스님은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던 것이다.
명필로 이름난 구하스님은 필력을 달라고 천일기도를 세번이나 했다. 스님은 통도사내 삼성각에서 기도를 하던 중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작대기를 가져와라. 글씨는 이렇게 쓰는 것이야'라며 마당에 한일(一)자로 큰 획을 긋는 것을 보고나서 필력을 얻었다고 한다. 검소하기로 소문난 스님은 글씨연습을 할 때도 지필묵을 쓰는 대신 돌판위에 물을 찍어 글을 쓰기도 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통도사 가풍은 불지종가답게 웃어른을 깍듯하게 모시고 화합하는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뿐 아니라 사형사제간에도 매우 엄격합니다"
현문스님은 우애가 남달랐던 구하스님과 경봉스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하스님 말년에 경봉스님은 극락암에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려 전국 불자들이 극락암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통도사에서 조실로 주석하던 구하스님은 그 소식을 듣고 "당장 경봉을 불러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러자 곧 걸어서 한시간가까이 걸리는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은 지체없이 달려왔다. 구하스님은 큰절을 하고 앉은 경봉스님에게 "큰절이 잘되면 딸린 암자도 저절로 잘 되지만, 암자가 잘되면 큰절은 안되기 십상"이라며 "네가 큰절 조실을 해라. 그리고 극락암에 붙여놓은 네 글씨 현판은 떼라"고 혼을 냈다. 그러자 경봉스님은 토를 달지 않고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형님 말씀대로 하겠다"고 머리를 숙였다. 이미 경봉스님도 70대였고 전국에서 이름난 고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모시는 일은 남달랐던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가풍은 면면히 이어져와서 이제껏 절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 적이 없습니다". 현문스님은 구하스님과 경봉스님이 몸소 보여준 종가의 가풍이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 통도사에 전해지는 또하나의 보물이라고 강조했다.
조선 말인 1899년부터 다시 선맥을 잇기 시작한 통도사의 근세불교 역사는 '구하의 교와 경봉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양분을 바탕으로 통도사의 역사는 다시 뿌리를 뻗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상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형인 구하(九河.1872∼1965)스님이 통도사 본사에서 사찰의 재정을 튼튼하게 다지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대외적 창구 역할을 했다면, 경봉(鏡峰.1882∼1982)스님은 주로 극락암의 작은 전각 삼소굴(三笑窟)에 주석하면서 전국에 그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불교의 종갓집이라 일컫는 통도사답게 사형사제의 관계가 남달리 가깝고도 깍듯했던 두 사람이 함께 지은 것으로 알려진 '통도사'라는 선시(禪詩)가 전해져 내려온다.
'영축산 천연의 성지/쉬어 간 이 그 몇인가/구름은 산 너머로 흘러가고/달은 솟아 동구에 떴네/맑은 눈빛은 바다처럼 푸른데/티끌세상 한갓 헛된 꿈일세/고금의 참 면목이여/벼랑 아래 물 언제나 맑게 흐르네'
▲경봉스님과 극락선원
경봉스님은 24세에 모친상을 당한 뒤 인생무상을 느끼고 통도사로 출가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해인사, 직지사의 선방을 돌며 수행정진을 거듭하면서 '통도사로 돌아오라'는 은사 성해스님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공부가 잘 되어가고 있다고 판단한 경봉스님은 그제서야 다시 통도사로 돌아왔다. 해담화상과 화엄산림 법회의 설주(說主)가 되어 법회를 주재하면서 경봉스님은 밤낮의 구분이 사라지고 시야가 확 트이는 불이(不二)의 경지를 맛본다. '천지를 삼키니 큰 기틀이로다/돌토끼 학을 타고 진흙거북 쫓아가네/꽃 숲엔 새가 자고 강산은 고요한데/칡덩굴 달과 솔바람 뉘라서 완상하리'라고 오도송을 읊었다.
1928년 경봉스님은 통도사 본사에서 걸어서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극락암에 극락호국선원을 개원하고 영축산 자락에 선풍을 크게 떨치기 시작했다. 경봉스님의 상좌 명정스님(61)은 "극락선원에서는 하안거와 동안거 도중에 일주일씩 한잠도 자지 않는 용맹정진을 하는데, 동안거 때는 섣달 초하루부터 일주일간 한다"면서 "용맹정진이 끝나고 나면 쉬지 않고 그 길로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것이 이곳의 전통"이라고 했다.
명필로 소문난 구하스님 못지 않게 필력을 갖추었던 경봉스님은 사형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구하스님 생전에는 글씨자랑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글씨뿐 아니라 글짓는 실력도 뛰어났던 스님은 여러 스님들과 소중한 벗에게 편지로 선문답을 주고받고 안부를 묻는 일을 즐겼는데, 스님이 열반한 후 모아놓은 편지와 일기가 몇가마니분이었다고 한다. 특히 1913년부터 8개월간 통도사에 머물며 화엄경을 강의했던 만해 한용운과 송광사의 효봉스님, 그리고 사형 구하스님을 평생의 벗으로 삼았다.
남녀노소, 유.무식을 불구하고 어느 누구와도 그에 맞게 법문을 들려주었던 스님은 양산에 장이 서는 날이면 직접 커다란 걸개 불화를 가지고 장터 한가운데서 법문을 했다고 한다. 어찌나 재미있고 구수하게 불법을 들려주었던지 지나가던 사람들과 물건팔던 상인들도 한바탕 그 법문을 듣지 않고는 못배길 정도였다.
"사바세계를 무대로 연극 한번 멋지게 해보라"고 호탕한 법문을 즐겨했던 스님은 입적 14년 전 자신의 수의를 짓던 날 '옛 부처도이렇게 가고/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가네/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야반 삼경에 춤을 볼지어다'라고 열반계를 남겼다. 세수 91세 되던 1982년 어느날 스님이 입적을 하게 되자 효상좌 명정이 "스님이 가신 뒤 스님을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는 말을 남기고 이승과의 인연을 접었다. 상좌로는 돌아가신 벽안스님(전 동국대 이사장)을 비롯해 명정스님(극락선원 선원장), 경일스님(동국대 전강원장), 활성스님 등이 있다.
▲방장 월하스님
1984년 영축총림으로 지정된 통도사의 초대 방장 월하스님(1915∼)은 1932년 18세에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해 1940년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오대산 한암스님 문하에서 몇차례 안거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통도사에서 정진하면서 구도자의 길을 걸은 스님은 1954년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함께 사찰정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했고, 이후 총무원 총무부장, 감찰원장, 종회의장을 거쳐 1994년 종정에 취임하기도 했다.
통도사 정변전(正▦殿)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은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방문자들을 맞았고, 손수 자신의 빨래까지 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왔다. 새벽 3시 반 예불에서부터 시작해 간단한 운동을 하고, 대중과 더불어 식사를 하는 등 시골할아버지와 같은 자상하고 소박한 생활을 해왔다. 도승스님(통도사 성전암 주지)은 "월하스님은 격의없이 어떤 자리에서나 법문을 들려주시는 분"이라면서 "예전에 소위 무당절이라고 불리우는 이름모를 작은 절집에도 가시는 걸 보고 시자들이 말렸으나 '여기도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니 법문을 해야 한다'며 아무렇지 않아 하셨다"고 회상했다. 특히 스님의 소식(小食)은 유명하다. 상좌인 주지 현문스님은 "스님들은 국수가 나오면 너무 좋아해 국수를 승소(僧笑)라고 하는데, 다른 스님들은 보통 두세그릇씩 공양을 하는데도 월하스님은 항상 한그릇만 드시고는 젓가락을 놓으셨다"고 하면서 인간의 5욕락인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중 나이 들수록 가장억제하기 힘든 식욕을 철저히 다스리는 월하스님의 일면을 소개했다.
월하스님은 50여년 가까이 본사의 보광선원을 떠나지 않고 조실로 머물면서 눈푸른 납자들을 지도해왔다. 함께 수행하며 늘 수좌들을 자상하게 지도하는 스님은 조는 수좌들을 야단치거나 죽비를 때리는 대신 "졸음이 올 때는 일어나 경행(輕行)하라"고 이르며 자비롭게 대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강이 좋지 못해 일반인들의 방문을 일일이 맞지 못한다. 스님의 제자로는 열반한 전 주지 홍법스님, 현주지 현문스님 등이 있다.
이무경 기자lmk@kyunghyang.com
■경봉스님 시봉한 명정스님 - 누구에게든 자상한 법문 불자들 구름떼 같았다
명정스님(61.극락호국선원 조실)은 19세에 출가해서부터 경봉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군입대 3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곁에서 시봉을 하며 경봉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았던 상좌였다. 명정스님은 경봉스님의 편지와 일기를 비롯한 유품을 모두 물려받아 그 자료를 바탕으로 '편지' '마음꽃' 등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경봉스님은 호방하고 자상한성격의 도인이셨습니다. 일절 걸리는 곳 없이 누구를 대하든 그에 맞는 법문을 들려주셔서 스님 살아생전에 극락암에는 구름떼처럼 불자들이 몰렸더랬습니다"
한번은 경봉스님이 부산 자갈치시장에 수좌들과 함께 들렀다가 횟감을 파는 자갈치아지매에게 "이 생선이 얼마요?"하고 물었다고 한다. 스님이 생선값을 묻는 걸 괘씸하게 여긴 아지매가 "스님이 왜 생선값을 묻느냐"고 차갑게 대꾸하자, 경봉스님은 "네가 생선값 묻는 뜻을 아느냐?"고 껄껄 웃었다. 즉 경봉스님은 자갈치아지매에게 맞는 선문답을 보여준 것이었다. 만약 자갈치아지매가 선기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 길로 깨우침을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봉스님은 늘 '난 천하가 다 아는 대처승이다. 너희들은 나보다 나으니 딴 생각말고 오로지 공부만 해라'고 말씀하셨더랬습니다. 인간적 고뇌를 수행력으로 극복하신 스님의 높은 도력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속가의 아들들이 극락암에까지 찾아와 경봉스님을 괴롭힌 것을 여러번 목격했던 명정스님은 "다른 스님들 같으면 아들에게 멀리 가서 살라고 하거나 외면할텐데 경봉스님은 '모두 다 내 업'이라면서 술취해 행패를 부리는 속가의 아들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스님의 호방한 풍모를 알 수 있는 일화는 이밖에도 많다. 1960년대 중반 극락암 법당에 화재가 났는데 현장을 지휘하던 경봉스님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스님들을 지도해 신속하게 불을 껐다고 한다. 또한 명정스님이 칠순을 넘긴 경봉스님을 모시고 조계사에서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한 후 설악산 계조암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젊은 명정스님조차 힘들어서 앉아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으나 경봉스님은 "내가 이런 성지에서 어찌 잘 수가 있겠느냐"면서 하루종일 걸어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밤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수행을 했다.
"월남전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에는 전쟁 직전단계인 데프콘2 상황이 발령되었습니다. 제가 이 뉴스를 듣고 '시급한 상황'이라면서 경봉스님에게 달려갔더니 스님은 저를 힐끗 올려다 보고는 '네가 이러고도 선방 수좌냐?'고 조용히 꾸짖으셨습니다"
벌써 20년 전 열반에든 경봉스님의 거처였던 '삼소굴(三笑窟)' 툇마루에 걸터앉은 명정스님은 스승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풀어놓았다. '야반삼경에 대문빗장을 만져보라'던 스승의 선기어린 말씀도 가끔은 위로가 되지 않는 듯했다.
4. 수덕사(덕숭 총림)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의 일주문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수덕사의 여승'이란 가요나 일제시대 신여성으로 유명했다가 출가한 일엽(一葉)스님 때문인지 일반인들에게 수덕사는 비구니의 절이라는 이미지를 풍긴다. 게다가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은 자신을 버리고 제자와 프랑스로 떠난 이응노 화백을 그리며 수절한 본부인의 애틋한 사연마저 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수덕사는 5대 총림의 하나일 뿐 아니라 근세 불교의 선맥을 다시 이은 경허스님과 그 제자 만공스님이 주석했던 '선지종찰(禪之宗刹)'로 우리나라 근세 선불교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경허의 선풍(禪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불교가 다시 명맥을 이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수덕사 위쪽에 있는 암자인 금선대는 경허스님과 세 달로 불리는 제자인 만공.수월.혜월 스님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있다. 전국 어느 사찰보다 활달하고 걸림없는 가풍을 지닌 덕숭총림 수덕사는 경허와 만공의 법맥을 잇는 덕숭문중을 이루며 범어문중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양대 맥을 형성하고 있는 당당한 선의 종가이다.
#경허(鏡虛)스님(1849∼1912)의 출가
억불정책을 실시하던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지던 선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고려시대에는 엘리트 계층이던 스님들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성 출입도 금지될 정도로 하찮은 대접을 받아야 했다. 스님들은 사찰에서 스스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했기 때문에, 직접 농사를 짓고 집을 짓는 기술을 익혀 품을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1856년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한양 인근 청계사(淸溪寺)의 주지 계허스님에게 맡겨진 동욱(東旭)의 나이는 겨우 여덟살이었다. 어머니는 형 동석을 마곡사에서 출가시킨 후 막내마저 출가시키려고 청계사로 온 것이다. 스승 계허스님만이 살고 있는 청계사에서 어린 동욱은 밥값을 하기 위해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채마밭을 가꾸면서 5년을 보냈다. 스승 계허는 문자를 전혀 모르는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경이나 외고 복이나 빌어주면서 겨우 연명을 했다. 그러던 중 박처사라는선비가 청계사에 머물면서 동욱은 훗날의 '대선사 경허'가 되는 인연의 끈을 잡게 된 것이다. 박처사로부터 글을 배우게 된 동욱은 환속하려는 스승 계허의 소개로 당대의 강백인 동학사 만화화상의 제자가 된다. 그 밑에서 정진하던 경허는 10년 뒤 다른 제자들을 물리치고 동학사 강원을 물려받는다. 훗날 근세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스님이 강백, 즉 교학(敎學)으로 일찍이 일가를 이루었던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경허스님의 대오와 선풍진작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치던 경허스님은 17년 만에 스승 계허의 소식을 듣는다. 인편으로 온 소식은 '목수일을 하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크게 다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가던 중 경허스님은 전염병이 돌아 아수라장이 된 어느 마을에서 하루를 묵는다. 연신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 생지옥에서 경허스님은 문자공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크게 느끼고 그 길로 다시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철폐하고 깨달음을 구하기에 이른다.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사미승의 말에 확철대오한 후 오도송을 읊는 순간 한국의 선불교는 재 속에서 다시 불씨가 되어 살아난다. '문득 사람들이 콧구멍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즉시 삼천세계가 나의 집임을 알았네/6월 연암산 아래 길에서/야인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스님은 춤을 추며 오도송을 읊었다.
이듬해 형과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서산 연암사 천장암에서 보림(깨우친 후 그 깨우침을 연마함)에 들어간다. 앞은 바다이고 뒤는 산인 천장암은 보림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먹고 용변을 보는 일 외에는 하루 온종일 잠도 자지 않고 천장암 쪽방에 앉아서 깨우침을 연마하던 경허스님의 몸에는 이가 들끓었지만 스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경허스님은 일체의 걸림이 없는 선기 어린 행동과 법문으로 전국의 선방에 선풍을 일으킨다. 술과 고기를 즐기고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종종 보인 경허스님은 1882년 이후 20여년간 개심사.문수사.부석사(서산).수덕사.정혜사를 비롯한 숱한 호서지방의 사찰을 돌며 선풍을 일으켰고, 1899년에는 해인사 조실로 추대되어 영남지방의 사찰에도 선기를 불어넣는다.
2003년 눈이 소복이 쌓인 서산 도비산 부석사에는 100여년전 경허스님이 쓴 현판 '목룡장(牧龍莊)' '심검당(尋劍堂)'과 함께 훗날 칠십이 된 만공스님이 썼다는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 있었다. 수덕사의 말사인 부석사 주지 주경(宙耕)스님은 "만공스님이 경허스님의 시봉을 한 때가 그리 길지 않았는데, 부석사 시절은 젊은 만공스님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밥을 지으며 가장 엄격한 시봉을 들었던 기간일 것"이라고 말했다. 부석사에서 5분 거리의 도비산 중턱에는 경허와 만공이 수행을 했다는 굴이 아직도 남아있어 두 스님의 치열했던 수행과정을 엿보게 한다.
어머니와 형이 있는 천장암에서 보림을 끝내고 어머니를 위한 법문을 하던 날의 일화는 경허스님의 그릇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깨우친 아들을 자랑스러워한 어머니 박씨를 비롯해 구름처럼 몰려든 불자들 앞에서 경허스님은 법상에 올랐다. 좌중을 둘러본 스님은 갑자기 승복을 훌훌 벗어버렸다. 질색을 하는 어머니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경허스님은 "자 보십시오"라고 한 뒤 주장자를 세번 내리치고 법상을 내려왔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 뒤에 가려진 법신(法身)을 보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스님의 걸림없는 무애행(無碍行) 중에는 천장암에 머물던 30대 후반, 속가의 김씨 처자와 사랑에 빠져 1년여간 결혼한 김씨처자를 찾아 그녀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일이 전해져온다. 중생의 어리석은 집착 중 하나인 애욕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 무간지옥의 고통을 몸소 느껴 보았던 것으로 후세인들은 짐작할 뿐이다.
#경허스님의 세 제자와
화광동진(化光同塵)
경허스님의 제자는 흔히 '세 달(三月)과 말없는 학'이라고 불리는 수월.혜월.만공 스님과 말년의 제자 한암스님이다. 수월스님(水月, 1855∼1928)은 1883년 천장암으로 경허스님을 찾아가 허드렛일을 하면서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짚신 삼는 걸 즐겼던 경허스님으로부터 그 기술을 배워 훗날 북간도로 떠나 북녘을 밝히는 경허의 상현달로 일컬어진다. 수월은 백두산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짚신을 삼아 오가는 나그네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짚신을 주어 보내는 무주상보시를 한 것으로 유명한데, 송광사 조실이 된 효봉스님은 한때 수월스님을 찾아가 함께 짚신을 신고 밥을 하면서 약 1년간 말없는 가르침을 전해받았다.
'남녘의 하현달' 혜월 스님은 크게 깨닫고 법인가를 받기 위해 해미 개심사에 주석하고 있던 경허스님을 찾아갔다. 법인가를 받은 후 혜월은 주로 남쪽인 통도사.내원사.범어사.선암사에 주석하면서 아이같은 '천진불'로 불리며 크게 선풍을 떨쳤다. '중천의 보름달' 만공은 주로 수덕사에, 말없는 학 한암은 주로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며 경허의 선풍을 전국에 펼쳐 나갔다.
만공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초청된 경허스님을 모시고 있을 당시의 일이다. 눈보라가 치던 어느날 밤 경허스님은 한 여인이 눈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실방인 해행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몇날 며칠을 방에서 나오지 않는 스승을 걱정하던 만공은 조용히 해행당으로 들어가 보고 너무나 놀랐다. 눈 코 입이 모두 썩어 문드러지고 손발이 제대로 없는 나병환자인 여인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훗날 경허스님은 심한 피부병으로 열반 때까지 고생을 했는데, 이 때의 일이 원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수덕사 주지 법장(法長)스님은 "수덕사 스님들은 평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큰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공부도 뒤로 하고 온몸을 던져 앞장서는 전통이 있다"면서 경허와 만공의 호방한 가풍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경허스님은 승려의 생활을 마감하고 중생들 틈에 섞여 사는 '화광동진'을 선택한다. 1904년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린 후 북으로 떠난 스님은 갑산에서 머리를 기르고 박난주라는 속명으로 글방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다 1912년 4월25일 열반에 든다. 경허스님의 열반은 1년후에야 만공스님이 확인한다. 시신과 함께 묻은 유품 중에 만공스님이 선물한 담뱃대와 쌈지가 있었던 것이다. 경허스님은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빛이 만상을 삼켰도다/빛은 경계를 비추지 않고/경계 또한 있지 않나니/빛과 경계 함께 없으면/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라고 열반송을 남겼다.수덕사/이무경 기자lmk@kyunghyang.com
■수덕사의 가람배치와 산내 암자들
서해로 내달리는 차령산맥의 줄기가 만들어낸 덕숭산(德崇山)은 가야산(북), 오서산(서), 용봉산(동남)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가운데 우뚝 서 있다. 덕숭산 중턱에 위치한 수덕사는 6세기 중후반 백제 위덕왕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섯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쳐 오늘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인 국보 제49호 대웅전(고려 충렬왕, 1308년 건축)은 소담한 맞배지붕(사진 위)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수덕사 본사 주변에는 비구니들의 암자인 견성암(見性庵)과 환희대(歡喜臺)가 있는데, 견성암은 최초로 문을 연 비구니 선방이며 환희대는 일엽스님이 거처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분쯤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비구 선방으로 첫손 꼽히는 정혜사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자리한다. 현재는 수도관 시설 공사 때문에 선방을 잠정폐쇄했다.
정혜사 주지 법도스님은 "현재 방장인 원담스님이 아홉살에 출가한 후 계속 등짐을 져 이곳까지쌀과 부식을 지고 날라 키가 안자랐다고 종종 말씀하셨다"고 했다. 특히 물이 모자라 이곳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은 수건을 물에 적셔 몸과 얼굴을 닦는 것으로 세안과 목욕을 대신했다. 수도관 공사를 끝내고 올 겨울 동안거 때 다시 문을 열면 이같은 불편은 해소될 것이다.
또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 정혜사 바로 밑의 금선대(金仙臺)는 한때 선방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경허스님과 수월, 혜월, 만공스님의 진영을 모신 진영각이다. 매년 음력 설에는 수덕사와 일대 암자의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모두 줄지어 올라와 다례식을 올리고 참배한다.
금선대 밑, 깎아지른 절벽 밑에는 그림같은 초가가 있는데, 만공스님이 머물렀던 '소림초당(小林草堂.사진 아래)'이다. 수덕사 교무국장 정암스님은 "만공스님이 '저 절벽 밑에 작은 초가집을 지으면 참 좋겠다'고 하자 상좌였던 벽초스님이 그 길로 연장을 들고 위험한 절벽을 타고 가 초가를 지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말했다. 소림초당 앞 계곡에는 갱진교(更進橋)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 옆 바위위에서 만공스님이 조선 말의 왕자 의친왕 이강(李堈) 공에게서 신표로 받은 거문고를 달밝은 밤에 홀로 탔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이 만들었다는 이 거문고는 조선의 왕가로 내려와 만공스님에게 전해졌고, 한동안 금선대에 보관되다가 현재는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염불이나 해주면서 겨우 사찰의 명맥만을 이어가던 조선말기. 스스로 깨우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조선 중기 이후 닫혀있던 선방 문들을 활짝 열어젖힌 경허스님은 모든 한국 선승(禪僧)들의 스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문중을 엄히 따지는 한국불교에서는 경허스님과 그 제자 만공월면(滿空은 법호, 月面은 법명, 1871∼1946) 스님을 덕숭문중의 원류로 보고 있으며, 덕숭문중은 '선의 종갓집'으로 여겨진다.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호방한 수덕사 가풍은 경허로부터 만공에 이어 현재까지도 면면히 내려온다. 그래서 처음 출가하는 행자들에게 덕숭총림 수덕사는 전국 사찰중 가장 행자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절로 손꼽힌다. 승려생활중 가장 힘든 게 행자생활이지만 수덕사에서는 '자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사찰수련회에서도 수덕사는 다른 절 수련회처럼 '묵언'(默言)이나 '차수'(叉手, 두손을 마주잡아 포개어 배에 대는 자세)를 강요하지 않는다.
이처럼 덕숭총림 수덕사는 경허와 만공의 숨결이 눈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곳곳에 배어 있으며 특히 1905년 이후 주로 수덕사에 주석한 만공스님의 발자취는 인근 암자들과 덕숭산 전체에 그대로 남아있다.
14세에 출가 경허와 禪 가풍 일궈 ▲만공월면 스님의 출가와 득도=13세에 어머니와 금산사에 다녀온 바우(만공스님의 속명)소년은 미륵부처가 업어주는 꿈을 꾸고 나서 식구들 몰래 출가의 꿈을 키운다. 14세에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해 진암(眞巖)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다니러 온 경허스님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경허를 따라가라는 진암스님의 말에 처음엔 "싫다"고 거부하지만, 경허의 법문을 듣고난 후 그 자리에서 마음을 바꿔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경허스님은 그의 형 태허스님과 어머니가 머물던 천장암에 바우소년을 데리고 가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준다.
바로 이때가 경허의 세 '달'이 모두 함께 천장암에 거하던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훗날 백두산에서 나그네들에게 짚신을 삼아주던 무주상보시로 유명했던 '북녘의 상현달' 수월(水月)스님은 땔나무를 해오는 소임인 부목을 맡고 있었고, 아이같은 천진불로 유명했던 남녘의 하현달 혜월(慧月)스님은 이곳에서 경허스님에게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수월은 30세, 혜월은 23세, 만공월면은 14세였다.
걸림없는 무애행으로 유명한 경허스님과 제자 만공의 일화는 많다. 어느날 무거운 시주 바랑을 짊어진 월면이 경허스님에게 "너무 무거워 쉬었다 가자"고 하자 경허스님은 "무겁지 않게 해주겠다"면서 지나가던 여인의 입을 맞춘다. 여인의 비명소리를 듣고 동네사람이 나와 두 사람을 쫓자 만공은 정신없이 산속 절까지 뛰어갔던 것이다. 경허스님은 빙긋 웃으며 "아직도 그 바랑이 무겁더냐?"고 물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대체 그 한가지 돌아가는 곳이 어디냐)를 화두로 참선에 들어간 스님은 25세에 온양 봉곡사에서 새벽종을 치며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남긴다. '빈산의 이치와 기운은 예와 지금의 밖에 있는데/흰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가/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해가 뜨네'
"큰 사자는 원래 할(喝)을 하는 법" ▲만공스님과 일화들=이후 스님은 공주 마곡사 토굴에서 수도했으나 경허스님으로부터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지 못했다"는 점검을 받고 더욱 정진한다. 경허스님을 모시고 서산 부석사와 부산 범어사 계명암에서 수도하고 해인사 조실로 초청받은 스승을 시봉한다. 1901년 경허스님과 헤어진 만공스님은 양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재차 깨달음을 얻었다. 1904년 금강산을 거쳐 삼수갑산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하러 떠나는 경허스님께 마지막으로 법인가를 받고 '만공(滿空)'이란 법호를 받는다. 이때 만공은 스승 경허의 헌 담배쌈지와 담뱃대가 맘에 걸려 새것으로 선물했는데, 경허스님은 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훗날 글방선생 '박난주'로 임종을 맞을 때 경허는 이 두가지를 꼭 무덤에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아마도 이것이 자신임을 증명할 신표가 될 것임을 내다봤기 때문일 것이다.
1905년 이후 주로 덕숭산 수덕사에서 주석한 만공스님은 1931년 금강산 유점산 금강선원 조실, 1933∼35년 마하연 조실, 1936년 마곡사 주지를 잠깐 맡았을 뿐이다. 만공스님이 마곡사 주지로 있었던 1937년 3월, 총독부는 전국 31본산 주지와 도지사를 모아 미나미 총독의 주재로 '불교진흥책 마련'이란 미명하에 한.일 불교 합병을 획책하는 회의를 주최했다. 이 자리에서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스님은 벌떡 일어나 "데라우치는 조선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처럼 파계하도록 했으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분연히 소리 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미나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이날 밤 만공스님의 둘도 없던 친구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찾아와 "잘했다"면서 "이왕이면 주장자로 저 쥐새끼같은 놈들을 한방씩 갈겨 주지그랬나"라고 하자, 만공스님은 "미련한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큰 사자는 원래 할(喝, 깨달음을 주기 위해 크게 소리침)을 하는 법"이라고 응수했다. 이때만큼은 한용운도 잠시 말을 잊었다.
'만해는 내 애인'…김좌진장군과 팔씨름도 ▲만공스님과 벗들, 그리고 제자들=만공스님의 시봉이었던 원담스님(덕숭총림 방장)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김좌진 장군은 자주 수덕사로 놀러 오시곤 했다"면서 "만공스님은 한용운을 가리켜 '내 애인'이라고 종종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만공스님은 거구에 육척장신으로 힘이 장사여서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이길 때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만공스님 주위에는 항상 글쓰고 그림 그리고 소리하는 예인들이 많았다. 남농 허건, 허백련 등 화가들을 비롯해 소리 잘하는 풍류객들도 종종 만공을 찾았다. 만공스님은 그럴 때면 늘 옆에 끼고 있던 '공민왕 거문고'를 타며 함께 풍류를 즐겼다. 스님의 거처였던 덕숭산 소림초당 앞의 작은 다리 갱진교(更進橋)는 달빛을 벗삼아 만공스님이 거문고를 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거문고는 의친왕 이강 공에게 신표로 받은 것으로, 공민왕이 직접 만들어 탄 이후, 대대로 조선왕조에 전해온 왕가의 가보였다. 현재는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거문고의 뒤판에는 만공스님이 지었다는 '거문고 법문'이 씌어있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체(體)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일구(一句)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현현한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돌장승 마음 가운데 겁 밖의 노래로다./아차!'
이 거문고와 함께 성보박물관에는 스님이 일본의 패망을 전해듣고 기뻐하며 무궁화 꽃봉오리를 붓삼아 썼다는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편액도 걸려있다.
만공스님은 말년에 덕숭산에 전월사를 짓고 지내다가 1946년 10월20일 나이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입적하던 봄, 스님은 시봉하던 원담스님을 불러 "더 살면 험악한 꼴을 볼 것이니 올해 시월 스무날쯤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 목욕 후 거울을 들여다 보며 "자네 나와 이별할 때가 되었네 그려" 하더니 춘성스님에게 법상을 맡긴 후 열반에 들었다.
만공스님의 제자로는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古峰) 서경(西耕) 혜암(惠庵)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스님, 비구니로는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스님을 들 수 있다.
이무경 기자lmk@kyunghyang.com
■만공스님 시봉한 원담스님 "깨달음 줄땐 무섭게 호통"
"아이구, 나 죽어. 좀 살살혀"
총림의 방장스님은 으레 근엄할 것이란 예상은 원담(圓潭.77.사진)스님 앞에서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방문객의 인사를 받기 위해 누웠다가 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원담스님은 아이처럼 천진한 모습이었다. 여든 가까운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맑은 얼굴을 한 스님은 누가 오든 전혀 거리낌 없었다. 승가에서는 이같은 '아이같은 도인'의 모습을 천진불이라 하는데, 경허스님의 제자 혜월스님도 유명한 천진불이었다.
"만공스님 이야기를 해달라구? 물어봐요"
수덕사의 비구니 암자인 견성암에 있던 이모를 따라 놀러왔다가 출가하게 된 원담스님은 진성(眞性)이란 법명을 받고 만공스님 옆에 앉아서 귀여움을 받았다. 아기스님 시절 원담은 만공스님을 찾아온 스님들과 선문답을 하는 모양을 옆에서 하도 많이 본 터라 선문답을 하기도 전에 손가락 하나를 내밀며 "이 뭣꼬?" 하고 장난스레 묻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 찾아온 스님들은 아기스님의 질문에 답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어 난처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또 원담스님이 법인가를 받으러 온 스님 앞에서 만공스님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 뭣꼬?" 하고 손가락을 내밀자 만공스님은 원담스님의 손가락을 꽉 깨물어 버렸다. 그러자 원담스님이 "아야!" 하고 소리를 치니, 만공스님은 빙긋 웃으며 "바로 그것이니라"하고 대답했다.
"자상하시면서도 깨달음에 있어서는 아주 무서운 분이지요". 원담스님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하루에 한 번씩 주장자로 머리를 내리치며 "네가 '아야!' 하는 그 놈이 무엇인지 알아내라"고 하시고는, 원담스님이 어느날 "마음인 것 같다"고 답하자 칭찬을 했다고 한다. 또한 만공스님은 겉치레에는 신경을 쓰시지 않아, 3년에 한번쯤 머리를 자르곤 했다.
"남들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한 보살님에게 원만(圓滿)이란 법명을 주시고 산내 한 암자에 머무르게 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속가 모친이셨더랬습니다"
또한 일본이 패망하기 3년전, 원담스님에게 징집영장이 떨어졌다. 그러나 만공스님은 영장을 불태워 버리고 원담스님을 서산 간월암에서 숨어 지내며 천일기도를 하게 해 목숨을 살렸다고 한다.
"이제 하도 오래 돼서 생각이 잘 안나유". 원담스님은 나중에 또 찾아뵙겠다는 말에 "맘대로 허세요" 했다. 옆의 시자스님들은 그것이 스님의 화두라고 귀띔해주었다.
해마다 설이 되면 수덕사를 위시한 인근 암자의 비구와 비구니들은 신새벽에 덕숭산을 줄지어 오른다. 금선대에 모셔져 있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 그리고 수월·혜월 스님의 진영에 참배를 하고 내려와 대웅전에서 통알의식(먼저 열반에 든 스님들을 위한 합동제사)을 올린다. 그 이후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들이 한데 어우러져 사흘간 윷놀이를 하고 노는 것이다. 어느 사찰이든 설을 떠들썩하고 흥겹게 쇠는 전통이 있으나 선(禪)의 종가인 수덕사처럼 비구스님과 비구니 스님이 함께 윷놀이를 하는 장면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가풍은 큰스님에서부터 막 출가한 행자스님들에까지 이어진다. 방장스님부터 호미를 들고 농사를 짓고, 손수 나무를 하는 전통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것이다.
웬만한 사찰의 큰스님을 친견하려면 3배를 올려야 하는 전통이 있으나 수덕사의 가풍에 3배는 없다. 자신을 낮추고 하심(下心)하는 선의 가풍상 총림의 가장 웃어른인 방장스님부터도 '1배면 족하다'고 손을 내젓는다. 성철스님을 친견하려면 3,000배를 해야 했던 범어문중 해인사 가풍과는 대조를 이룬다. 1985년 총림으로 지정된 이후 덕숭총림에는 혜암스님, 벽초스님이 방장으로 총림을 지켰고, 현재의 원담스님은 1986년부터 방장으로 주석해 왔다.
***"산도 배도 아니가고 손수건 자락뿐"
▲혜암현문(慧庵玄門)스님(1884∼1985)=황해도 백천에서 강릉최씨 집안의 독자로 태어난 스님은 11세때 부친상을 당한 후 출가하게 된다. 양주 수락산 흥국사로 출가해 16세에 사미계를, 27세에 구족계를 받은 뒤 이후 만공 혜월 용성 스님을 비롯한 전국의 이름있는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용맹정진했다. 이렇게 운수행각을 벌인 지 6년째 되던 해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나에게 묻는다면 침묵도,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여의고/한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저절로 맞추지 못하리라 하리라'
제자들의 깨달음을 인가하는 데 있어서 무척이나 엄격했던 만공스님은 1929년 전법게를 내린다. '구름과 산은 같고 다름도 없고/대가의 가풍도 또한 없어라/이와 같은 글자의 인을/혜암, 너에게 주노라'
1943년 만공스님과 혜암스님이 지금은 육지가 된 서산 간월도로 가는 배위에서 나눈 법담은 유명하다. 만공스님이 혜암스님에게 "저 산이 가는가, 이 배가 가는 것인가?" 묻자 혜암스님은 "산이 가는 것도 아니고 배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그러면 무엇이 가는가?"라고 재차 물음을 던지자 혜암스님은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자네 살림살이가 언제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라며 혜암스님의 경지를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혜암스님은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었고 30여년간 제자들을 길러냈다. 1984년 100세의 나이로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석하며 해외포교에도 힘을 쏟던 스님은 덕숭총림 초대방장으로 추대됐다. 그 몇달 후 수덕사 방장실로 사용되는 염화실에서 101세로 열반에 들었다
***평생 농사일군 30년 주지스님
▲벽초경선(碧超鏡禪)스님(1899∼1986)=경허-만공의 선풍을 계승한 스님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13세때 탁발나온 만공스님에게 감화받아 부친과 함께 수덕사로 출가했다. 만공스님의 법맥을 그대로 물려받은 벽초스님은 1940년부터 30년간 수덕사 주지를 지내면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선농일여(禪農一如)'의 가풍을 진작했다. 또한 항상 겸손한 태도로 하심하면서 3배의 절을 용납하지 않고 1배이상의 절을 사양했다.
수덕사 포교국장 정암스님은 "벽초스님은 또한 어찌나 만공스님을 철저하게 섬겼던지, 만공스님이 덕숭산에 올라 절벽을 가리키며 '저기 조그만 초가를 지으면 참 좋겠다'고 하자 그길로 연장을 들고 절벽을 다듬어 나가 그림같은 초가를 지어 올렸다"고 말했다. 그 초가가 바로 수덕사에서 10분쯤 올라가면 나타나는 소담한 '소림초당'이다.
또한 수덕사에서 덕숭산 정상 가까이 있는 정혜사까지 1,080개의 돌계단을 손수 쌓았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한 스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공부"라며 말보다는 항상 실천이 앞서는 모습을 보였다. 벽초스님은 사찰의 일뿐 아니라 사하촌의 일에도 항상 앞장서 신자들의 든든한 힘이 되었는데, 동네의 큰 잔치가 있을 때는 그 모든 일을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또한 언제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면서 평생 법상(法床)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았다. 스님은 방장에 취임한 이듬해인 1986년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는 당부를 하고 수덕사에서 입적했다.
***군사정권 장군에 일갈한 '천진불'
▲원담진성(圓潭眞性)스님(1926∼)=현재의 방장인 '천진불' 원담스님은 수덕사 옆 견성암 비구니였던 이모를 따라 아홉살에 출가했다. 어려서부터 만공스님 옆에서 시봉을 하며 행자로 지내던 원담스님은 16세에 벽초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출가한 원담스님을 특히 귀여워했던 만공스님이 어린 원담스님의 머리를 주장자로 때리며 깨달음을 주고자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원담스님은 "'만공스님은 내가 맞을 때마다 '아야!' 하고 소리치면 '그 아야 하는 놈을 찾으라'고 하시고는 내가 한참을 그렇게 맞은 후 '그놈이 바로 마음인 것 같다'고 하자 크게 칭찬하며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인삼밭에서 농사를 지은 스님은 "신도의 시주에 의지하는 것은 무위도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직접 농사짓는 것을 솔선수범했다. 어려서부터 덕숭산 꼭대기의 전월사로 쌀과 물을 지어 나르던 스님은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다녀서 그런지 키가 크지 않았다"고 종종 농담처럼 말한다.
원담스님은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선지종가(禪之宗家)인 수덕사의 방장답게 누구 앞에서나 거리낌없이 천진한 도인의 모습을 보인다. 60년대 서슬 퍼렇던 계엄시절, 송요찬 장군이 수덕사를 방문했을 때 원담스님은 수덕사의 총무일을 보고 있었다. 그때 송장군의 수행원들이 앞마당에서 "송장군이 오셨는데 내다보는 중도 없느냐?"고 소리치자 원담스님은 "너네 장군이지 우리 장군이냐? 절에 왔으면 부처님께 먼저 인사를 해야지"하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송장군은 슬며시 돌아갔다가 한달 뒤 다시 찾아왔고 그 후로 수덕사의 신도가 되어 범종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을 보시했다.
'도필'로 소문난 원담스님의 글씨는 특히 유명하다. 1986년 일본의 산케이 신문 주최 국제 서예전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는 원담스님의 글씨를 받아가려고 멀리 전국에서 찾아올 정도였다. 수덕사 스님들은 "한때는 '인근 경찰서에서 원담스님 글씨를 얻기 위해 스님들이 운행하는 차를 국도에서 집중단속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아 글씨를 예전처럼 쓰기가 힘들다고 한다. 방장실인 염화실에는 스님이 직접 쓴 금강경 병풍이 놓여 있다.
수덕사/이무경 기자lmk@kyunghyang.com
■'불자의 모범' 덕숭문중 스님들
덕숭문중의 스님들은 끝까지 몸을 낮추며 하심(下心)하면서도 불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존경을 받는다. 남들이 선뜻 나서려 하지 않는 일에는 앞장서고 스승을 모시는 일에는 누구보다 열심이기 때문이다.
불교 환경운동으로 유명한 수경(水耕.53)스님은 바로 덕숭총림 수덕사의 스님이다. 30년간 선방수좌로 용맹정진하던 스님은 도반인 도법스님(실상사 주지.53)의 간곡한 설득으로 4년전 불교환경운동에 뛰어들어 북한산 관통터널 공사.지리산 댐 건설.새만금 방조제 공사 반대운동 등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탐진치(貪瞋痴.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3독을 없애고 하심하는 독특한 불교의 수행법인 '3보1배'를 환경운동에 도입해 종교와 환경운동의 접점을 제시했다.
"수덕사 스님들은 평소에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들 선방에서 조용히 수행을 하면서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편이지요. 그러나 한번 '나서야겠다'고 결심하면 그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 일을 해 나가는 편입니다". 수경스님은 벌써 국내에서만 두차례, 스페인에서 한차례의 3보1배 운동을 펼쳤고 3월말에는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새만금 살리기 3보1배'를 한달여의 기간동안 펼칠 예정이다.
또한 만공스님의 제자인 전강(田岡.1898∼1974)스님의 상좌 송담(松潭.73)스님은 이 시대의 대표적 선승이다. '북송담 남진제'(北松潭 南眞際.한강 이북에는 인천 용화사 송담, 한강 이남에는 동화사 조실 진제가 최고의 선승이라는 뜻)라는 말의 주인공인 송담스님은 수많은 불자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지만 결코 대중앞에 나서려 하지 않는다. 거듭된 인터뷰 요청도 끝까지 고사하는 스님은 스승 전강스님이 열반한 후에도 조실자리를 마다하고 법회때에도 스승의 육성법문 테이프를 먼저 듣고 법상 아래 앉아 법문을 하는 지극한 효를 지금껏 실천하고 있다.
원담방장의 상좌이자 수덕사 주지인 법장(法長.61)스님은 생명나눔실천회 이사장과 전국 본사주지연합회 회장을 지내면서 환경운동과 장기기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지난해 있었던 종정선거에서 후보로 거론되었던 숭산(崇山.76)스님은 만공스님의 제자 고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일찍이 아무도 신경쓰지 않던 해외포교에 힘을 쏟아 수많은 외국인 제자들을 길러냈다. 현재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 베트남 출신의 틱 낫한,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스님과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불린다.
5. 백양사(고불총림)
깎아지른 하얀 석벽이 안개에 싸인 백암산(白巖山)에는 고불(古佛)총림 백양사(白羊寺)가 자리잡고 있다. '하얀 양의 절'이라는 이름 때문에 하얀 석벽이 마치 양떼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백양사 주위는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비자나무 숲과 차밭이 펼쳐져 있어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품이 있다. 1996년 5대총림 중 마지막으로 '공식' 총림 지정을 받은 고불총림 백양사는 사실 가장 먼저 총림을 자체적으로 결성한 곳이다. 1947년 만암(曼庵)스님은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함양, 승풍진작 등 3대 목표 아래 호남의 20여개 사암과 포교당을 동참시켜 호남 고불총림을 결성했던 것이다.
또 백양사는 조선말에 전국 선방을 휩쓴 경허스님의 선풍 대신 자체적인 '독립 선맥'을 자랑한다. 선교(禪敎) 양종 통조인 청허 휴정선사의 5대 적손 환성지안(喚惺志安)선사의 심인을 전해 받은 이들이 대대로 백양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렸다. 특히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1563∼1649)은 조선 중.후기 선종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그의 법명을 딴 '소요파'는 조선시대 억불정책 속에서도 그 흐름을 이어왔다. 경허스님의 선풍이 전국을 뒤덮은 조선말, 유독 백양사 일대에서는 경허의 선풍 대신 학명스님과 만암스님이 선풍을 진작시켰고, 만암의 제자인 서옹스님이 현재 백양사의 방장으로 그 선맥을 받았다. 대흥사, 선운사는 백양사와 한 문중으로 한국불교의 독자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백양사의 스님들은 모두 직계스승과 관계없이 방장스님 밑으로 들어가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찰처럼 한 문중 안에서도 계보를 따지는 법이 없이 화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만암종헌(曼庵宗憲.1876∼1956)스님의 출가와 수행=만암스님은 백양사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1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스님은 백양사 취운도진(翠雲道珍)선사의 문하에서 출가한다. 환응(幻應)강백으로부터 전강을 받은 스님은 운문암과 청류암에서 경을 가르치다가 32세때인 1907년 해인사 강백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만암스님은 어수선한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승려가 결혼을 하는 상황에서도 백양사의 가풍에 따라 결혼하지 않은 비구로서 청정한 모습을 보였다. 현재 조계종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스님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속가에 자녀들을 두고 출가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백양사의 청정가풍은 미루어 짐작이 되는 것이다.
스님은 항상 선과 교를 쌍전하며 수행하였다. "승려는 행(行)이 기본이 된다"면서 "자기 공부가 먼저 이루어진 뒤에야 다른 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중이 되기 전에 부처를 말하지 말라"며 머리를 깎았다고 다 승려가 아니요, 먹물 옷을 입었다고 모두 중일 수 없다는 분명한 승가상을 제시했다.
하루하루의 일과가 철저한 수행이었던 스님은 매일 새벽 3시 아침도량석과 함께 냉수욕으로 시작해 예불이 끝나면 후학들의 아침인사를 받으면서 한사람 한사람씩 공부를 지도했다. 그후 선방에 모두 들어가 입선(入禪)하고 공양도 대중과 더불어 했다. 방선(放禪)때는 수행삼아 붓글씨를 썼고 저녁예불이 끝나면 선정에 들었다가 삼경이 되면 대중들에게 저녁인사를 받으며 다시 한사람씩 지도를 했다고 한다. 특히 스님은 화두로 '이 뭣고'를 권해 후학들로부터 '이 뭣고 스님'이라고 불렸다.
만암스님의 제자인 현재의 방장 서옹(西翁.92)스님은 "스님은 매우 자상하셨지만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셨다"고 회고했다. 특히 만암스님의 사랑을 받았던 서옹스님은 "몸이 약했던 나를 위해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보약을 지어 먹이셨다"면서 자상했던 스승의 기억을 떠올렸다.
◇스님의 교육과 자립불교 정신=특히 사찰의 재정이 극도로 빈곤하던 당시에 스님은 교육과 재정자립에 힘을 쏟았던 깨인 선지식이었다. 1916년 백양사의 주지가 된 만암스님은 교육사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백양사 바로 옆의 청류암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설립했는데, 이곳에서는 전통 강원의 교육을 한 것이 아니라 교학, 선, 율과 함께 국어 국사 수리학 등 현대 학문도 가르쳤다. 또한 쌍계루 옆에 일반인을 위한 보통학교인 '심상학교'를 세워 한글과 국사, 수리와 농학을 교육했는데, 인근부락은 물론 멀리 정주 순창에서까지 이곳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이같은 교육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서울에 올라온 만암스님은 박한영(朴漢永)스님과 함께 재단법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세우고, 전국사찰로부터 출자를 받아 1928년 불교전수학교를 개교시켜 초대교자에 취임했다. 바로 이 학교가 중앙불교 전문학교를 거쳐 현재의 동국대학교이다. 또한 해방된 후 1946년에는 목포 정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재정자립을 위한 만암스님의 노력도 앞서가는 것이었다. 항상 반농반선(半農半禪)을 강조하며 사찰재정 자립을 역설한 스님은 매일 일정시간의 울력(공동노동)을 통해 수입을 모아 '선불장(選佛場)'이란 공동기금을 조성했다. 스님들은 주로 농사와 양봉, 숯 굽기, 죽세공품 만들기를 통해 선불장 기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훗날 금호고속과 전남방직의 모태가 되는 '전남 여객버스회사'와 '전남 베어링 공장'을 세웠고, 목포에는 '동광 유지회사'를 설립해 사찰재정의 독립을 꾀했다. 또 어려운 인근주민들을 돕기 위해 일부러 연못 수리, 논 자갈 치우기 등 일거리를 만들어 사하촌 사람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교단정화의 소용돌이=1910년 이회광(李晦光) 등 승려들이 일본의 조동종과 결탁해 우리 불교를 예속시키려 하자 1911년 만암스님은 박한영, 한용운 등과 함께 임제종을 세웠다. 이후 1941년 훗날 조계사로 명칭을 바꾼 태고사를 서울 한복판에 세우는 데 앞장선 스님은 1세교정으로 한암스님을 추대한다. 한암스님의 뒤를 이어 2세교정이 된 스님은 조계종으로 종명을 바꾸고 초대 종정에 취임한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는 물러가라'는 교시로 시작된 교단정화의 소용돌이가 불어닥친다. 300여명의 비구들이 7,000여명의 대처승들을 몰아내는 이 작업의 부작용과 '불교의 자비심'을 강조한 스님은 "한꺼번에 대처승을 몰아낼 것이 아니라 종단을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이원화해 중요직은 수행승이 맡되 그밖의 사찰사무나 포교 등 수행승이 하기 어려운 일은 교화승이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비구 중심의 선학원측이 '조계종의 종조를 기존의 태고보우(太古普愚)로부터 보조지눌(普照知訥)로 바꾼다'는 선언은 만암스님이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길로 백양사로 돌아간 만암스님은 "종조를 바꾸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환부역조(換父易祖,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는 일)"라며 용납하지 않았다. 학인시절 직계조상인 연담(蓮潭)스님의 진영을 다른 절에서 가지고 나오기 위해 그 절의 스님과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누가 더 오래 견디는가를 겨루어 이겼던 만암스님으로서는 도저히 환부역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만암스님의 열반=만암스님은 1955년 8월 어느날 문도들을 큰 방에 불러모아 "이제 사흘 후 옷을 벗어야겠다"고 했다. 특별한 병세가 없이 정정한 만암스님이었기에 대중들은 황망하고 민망해했다. 만암은 이때 슬퍼하는 제자 석호(서옹스님의 옛 법명)에게 전법게를 내리며 후사를 부탁했다. '백암산 위 한 사나운 범이/한밤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다물어 죽인다/서늘하고 맑은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 울부짖으니/가을하늘에 밝은 달빛은 서릿발처럼 차가웁다'
"마지막 입는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과 함께 가지고 있던 모든 물품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만암스님은 사흘뒤 자는 듯 눈을 감았다.
다비식에서 영롱한 사리 8과가 나왔는데 백양사와 제주도 사라봉 보림사의 사리탑에 나뉘어 보관되었다. 특히 제주도로 가는 중에 스님의 사리에서 빛이 나고 증식을 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였고, 이 일을 계기로 사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
이무경 기자
■백양사의 창건과 역사
원래 백제 무왕 33년(632년) 신라 고승 여환(如幻)스님이 개창한 백양사는 원래 백암사(白巖寺)였으나 고려 덕종 3년(1034년) 중연조사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고쳐 정토사(淨土寺)라 부르기도 했다. 뒤로 각진국사, 환양선사, 도암선사, 환성선사가 중건했다.
선조 7년 환양(喚羊)선사가 백양사로 개칭한 내력은 이렇다. 환양선사가 암자에서 법화경을 독경하며 기도했는데, 백암산의 백학봉 밑에 사는 흰 양이 찾아와 무릎을 꿇고 스님의 독경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돌아가곤 했다. 그러기를 몇달, 어느날 그 흰 양이 꿈에 나타나 "스님의 독경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축생의 몸을 벗고 사람의 몸으로 환생합니다.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상히 여긴 환양스님은 이튿날 아침 뒷산을 산책하던 중에 흰 양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그 꿈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후로 스님의 높은 법력에 의해 축생인 양을 제도했다고 해서 절 이름을 백양사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고, 스님의 법명도 환양으로 바뀐 것이다.
백양사는 또 조계종의 절 가운데서 가장 엄격하고 전통적인 불교 재(齊)의식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관조부, 전경부, 정근부, 송주부, 범음부가 독립된 의식으로 집전되며 여기서 정근, 송주, 범음은 거의 독보적인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유일무이한 우리 전통 불교의식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에 선맥이 완전히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던 타 사찰과 달리 계속 한 문중이 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다비식은 다른 사찰에서도 배워갈 만큼 정확하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이어가고 있다.
백양사에는 호남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운문선원과 고불선원이 자리해 납자들을 불러들인다. 절에서 1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야 나타나는 운문선원 선방에는 거뭇하게 도금되지 않은 불상이 있다. 이 불상에도 이야기가 하나 전해온다. 임진왜란 직전 다각 소임(차 달이는 일)을 맡은 진묵이란 뛰어난 스님이 있었다. 원래 다각소임은 출가한 지 얼마 안된 스님들이 맡았다. 그런데 백양사의 전 대중은 어느날 '다각소임을 맡은 스님을 조사(祖師)로 앉히라'는 현몽을 받았다. 그래서 조실이 된 진묵스님은 "내가 올 때까지 운문암 불상을 도금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그 불상은 진묵스님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운문선원에는 고려 각진국사를 비롯해 조선시대 소요, 태능, 편양, 진묵, 연담 스님과 조선말기의 백파, 학명, 용성, 인곡, 석전, 고암 스님 등이 정진했던 유명한 수행 근본도량이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