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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세운 가정
벧전 3:1-7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7 / [아내와 남편] 아내들이여,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지금은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곧이들으려 하지 않던 남편들도 2) 여러분의 늘 경건하고 순결한 행동에 감동을 받아서 장차는 주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생활이야말로 백 마디 말보다도 더 호소력이 있는 것입니다. 3) 보석이나 화려한 옷이나 머리 단장 등으로 외모를 아름답게 보이려고 열중하지 마십시오. 4) 오히려 온유하고 조용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언제까지나 퇴색하지 않는 매력으로 내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값진 것입니다. 5) 옛날에 하나님을 믿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한 거룩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고상한 아름다움을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6)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남편을 주인이라 부르고 순종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도 마치 좋은 딸들처럼 사라의 신앙을 따르고 바르게 행동하면 남편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봐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7) 남편된 사람들도 아내에게 세심하게 마음을 써야 합니다. 아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항상 보살펴주고 연약한 여자임을 인식하여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내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받는 반려자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만일 아내를 구박한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할 것입니다.
본문은 요즘 페미니즘과는 상충되는 부분이 있으며 집필 당시의 부부 윤리가 배경입니다. 또한 창조질서 속의 부부 관계가 기본이라는 맥락도 흐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1-2) 본문 배경은 소아시아 지역(1:1)의 작은 교회들 안에 있는 아내들입니다. 특히 믿지 않는 남편과 사는 여성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이 먼저 신앙을 갖는 축복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때 믿지 않는 남편과의 갈등이 생기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먼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라 당부합니다. 순종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아내의 순종을 통해 불신자인 남편이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설득하는 백 마디 말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숙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아내를 보고 감동하여 주님을 따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3-6) 믿음 안에 있는 아내들에게 겉모양만 화려하게 꾸미지 말라 합니다. 내면을 온유하고 정숙하게 가꾸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없어지지도 않으며, 하나님께서도 귀하게 보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부터 하나님에게 희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인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며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라조차도 자기 남편인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며 묵묵히 복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의 후손인 여인들은 아무리 까다롭고 불신자 남편이라도 매사에 선을 따르며 의롭게 행동하면서 어떤 일에도 염려하지 말고 믿음위에 든든히 서라고 당부합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7) 본 단락의 남편은 역시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들에게도 여전히 남성 주도 사회의 의식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듯이, 남편들도 아내들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가 자기보다 연약한 그릇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억압하거나 폭력을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알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남편으로 사는 사람의 기도가 막히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중요한 것은 가정이 거룩한 공동체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부부들이여!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고백처럼 서로에게 순결하며 하나님의 시선 앞에 당당합니까? 부부들이여! 서로 내 몸처럼 아끼고 존중하며 서로 기도가 막히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결혼식 날,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신부가 한쪽 다리를 절면서 들어왔습니다. 다른 쪽보다 짧은 다리를 이끌고 힘겹게 신랑 앞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갑자기 신부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신랑이 달려 나오더니 신부의 손을 힘차게 잡아 일으켜 팔짱을 켰습니다. 그리고 늠름하게 신부와 같이 걸어가서는 주례자 앞에 섰습니다. 주례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자 신랑은 자신의 한쪽 발을 웨딩드레스 밑으로 살며시 들이밀어 신부의 짧은 발을 자기 발등 위에 올려놓고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제가 늘 기쁨으로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내가 진실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내 한쪽 다리를 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 설 교 >
숭고하고 신령한 부부관계
벧전 3:1-7
부부관계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가 부부관계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이다. 어저께 배운 바울의 권면(엡5:22-33)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은 같다. 반면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고 몇 가지 구체적으로 권면하는 점이 다르다.(7절)
첫째 남편은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둘째 아내를 연약한 자이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라고 했고, 셋째 그래서 귀히 여기라고 했다. 그런데 표현만 다를 뿐이지 결론이 귀히 여기라고 했듯이 사실상 사랑하라는 것이다. 결국 부부관계의 요체는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점에서 두 사도가 다를 바 없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권면하는 동기와 이유다. 바울은 가정을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에 유비해서 가르쳤다. 요컨대 부부관계를 예수님이 이끌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반면에 베드로는 본문에서 어떤 점을 강조하고 있는가?
먼저 1절에서 아내가 순복하면 혹시 남편이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아내는 믿었고 남편은 불신자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 7절에선 남편이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여기라고 한다. 이번에는 아내가 불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바울은 부부 둘 다 신자라는 바탕에서 권면했다. 베드로는 둘 중 한 사람만 신자라고 전제했다. 지금도 아내들이 주로 먼저 믿듯이 이제 막 복음이 전파되던 초대교회 시절에는 더더욱 아주 많은 가정이 한 사람만 먼저 믿었다. 베드로는 그래서 부부관계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구원을 함께 받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강조한 사정이 있다. 베드로 전서는 AD 64년 로마의 네로 황제가 크리스천을 본격적으로 박해한 후에 로마에서 저작되었다. 잘 알다시피 그래서 담대한 믿음으로 인내하고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라고 위로 격려하는 서신이다. 신자가 핍박을 받는 중에 순교할 가능성마저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한 사람만 천국에 가는 불행은 어떻게 하든 막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내더러 외모를 단장하기보다 마음의 숨은 사람 즉, 내면의 영혼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을 더 중히 여기라고 했다.(3-5절) 심지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 자체가 단장이라고 선언했다. 아내가 화장을 과하게 하지 말라거나 화장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전혀 없다.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즉, 곧 천국에서 주님과 일대일로 대면할 것이므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을 가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4절)
종교적 핍박이 없는 현대에는?
마침 저희 교회에는 부부 중에 한 분만 출석하는 가정이 없다. 서로 전도할 필요가 없다. 세계 최대 기독교 국가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 된 미국에서 교회 출석한다고 순교를 당할 리도 만무하다. 본문에 대해서 실감나지 않는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권면인가? 그렇지 않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라. 바울이 에베소서를 박해 전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네로의 핍박이 절정에 이른 후에 저작했다면 틀림없이 베드로와 같은 맥락의 권면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7:26)고 했다. 임박한 환난 즉, 마지막 때의 주님 재림이 임박했으니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베드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권면을 했지 않는가?
더 중요하게는 종교적 핍박이 있든 없던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언제든 앗아갈 수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게”(히9:27) 마련이다. 이는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지어진 숙명이다. 베드로 전서는 네로의 핍박으로 인해 신자들이 급박하게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던 당시 상황에 맞추어 저작된 것이지만, 사실상 본문은 오늘날의 평화시대에도 그대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부부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가 예쁘게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고액 연봉을 받아 좋은 집에 좋은 차를 사서 안락한 삶을 꾸리는 것이 남편이 행할 책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은 아내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 함께 서지 못하면 이 땅에서 아무 문제없이 남들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사이좋게 살았어도 그만한 실패가 없다. 천국에 혼자서만 가면 시쳇말로 하자면 “영원한 돌싱”의 신분이 된다. 이 땅에서 결혼했지만 이혼하고 천국에는 혼자 온 셈이지 않는가? 천국 성도들 보기에 부끄럽고 온전한 교제를 나누기 힘들 것이다. 비록 지금 함께 교회에 출석하지만 배우자가 정말로 구원의 확신을 가졌는지, 함께 천국에 갈 자신이 있는지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다들 한 번쯤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역으로 말해 신자의 부부 관계가 주로 자녀 양육 문제로 야기되는 부부 싸움을 가능한 줄여나가는 차원으로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둘 중의 한 명이 천국으로 불러가도 두 사람 모두에게 전혀 아쉬움이 없고 후회될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한다. 가장 흔하게 하는 말로 오늘 하루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처럼 서로에게 순복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처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부부 각자가 개인적으로 또 함께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에 완전히 붙잡혀 있어야 한다. 가정과 부부 사이에 예수님만이 시작이자 끝, 알파요 오메가여야 한다. 예수가 없는 가정과 부부관계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어야 한다.
한 명이 먼저 천국에 가는 육신적 이별의 슬픔과 고통은 엄청나다. 미국 정신과 협회에서도 부부 사별(死別)의 우울증은 통상 6개월이 가도 정상적인 것으로, 통상적인 우울증은 2주 이상 지속되면 병으로 취급하나, 간주해줄 정도다. 그럼에도 신자는 배우자가 먼저 천국에 가있으므로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곧 그곳에서 다시 상봉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정확히 말해 곧 만날 것을 기대가 아니라 확신하기에 슬픔을 이겨내고 혼자 남아서도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저희 모두 아이들이 어리고 나이도 젊어 창창하다. 그렇다고 천국 죽음 등이 먼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의 일이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자문(自問)해보라. 인생에서 가장 실패하고 불쌍한 자가 누구인가? 돈이 없어서 항상 쪼들리게 사는 자인가?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 죽음만 기다리는 자인가?
아니다. 가장 안타까운 자는 그 심령에 예수님의 사랑이 심겨지지 않은 자이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는 자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불효는 부모가 예수님의 십자가 반대편에 거한 채로 돌아가시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저 같은 자다. 부끄럽게도 목사이면서 교회 개척한다고 바빠서 아버님을 그냥 그렇게 보냈다.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젊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너무나 교만했던 저에게 사업 뒷돈 대주느라 힘들게 만드는 천하의 불효를 저지른 위에 결정적인 불효를 범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하늘이 무너진다. 너무 괴로워서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남편더러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7절) 표현은 당시 여자를 재산, 가정부, 종, 성적 노리개 정도로만 인식했던 관습에 비추면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베드로 사도는 지식에 따라 동거를 하라고 먼저 선언했다. 어떤 지식을 말하는가?
우선 “이와 같이”라고 말했으니 6절에서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받는다. 아내와 함께 곧 하나님 보좌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7절 후반부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고 부연 설명했다. 아내가 그런 줄 아는 지식이다.
당시 예수를 모르는 일반 사람들의 여성관과 완전히 반대다. 또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조차 남편이 모세의 증서만 써주면 제 멋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교만과 오류에 빠져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큰 죄악인지 깨달으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땅에서 최고로 낮은 자리에 있던 아내를 하늘의 최고 높은 자리에 두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 땅에서도 그런 관점으로 동거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명이 아내 안에 있고 또 내 안에도 있고 나아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사이에 충만하게 역사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부관계에서 첫째로 중요한 사항, 아니 전부라는 것이다.
누가 기도해야 하는가?
누가 그 지식을 알고 주도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하는가? 남편이다. 나아가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기도가 막힌다고 한다. 너희라는 복수가 부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부부가 함께 하거나 아내 혼자 하는 기도가, 그것도 남을 위한 기도가, 막힌다는 뜻이 아니다.
‘남편들’이라고 7절에서 복수로 지칭했기에 ‘너희’는 그것을 다시 설명하는 대명사다. 기도를 남편들이 해야 하고 그럼 아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이미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해도 아내가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영광을 누리도록 기도해주라는 것이다. 당시에 물건 취급 받던 여자를 그만큼 귀하게 대우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내를 그렇게 귀히 여기지 않으면 곧 순교해서 자신이 죽더라도 아내의 천국 구원을 위해 기도한 내용이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 않는가?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는데 어떻게 함께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거기다 부부가 함께 주님을 믿더라도 가정의 대소사는 물론 부부 사이의 갈들을 해소하려는 기도도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상황은 어떠한가? 남자 성도들은 주일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끝이다. 주로 아내가 주중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에 참석한다. 생활환경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핍박을 받는 중이라 더 경황이 없었음에도 남편들더러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지 않는가?
남편이 돈을 잘 벌어주고 있으니 아내더러 순복은 몰라도 불평은 하지 말라 나는 내 책임을 다했다는 식의 뻔뻔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편이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맡아야 한다.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잘못을 품어주고 용서해주며 하나님에게 대신 기도하여 사죄와 긍휼을 간구해야 한다. 욥이 어떻게 했는가? 자식들이 잔치를 마치면 혹시라도 부지중에 하나님께 거역했을까 기도하며 제사지냈지 않는가?
매일이 마지막 날이 되려면?
부부 관계를 이 땅에서부터 천국처럼 유지하라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라는 의미라고 이미 말씀드렸다. 말기 암으로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게 되면 그 남은 기간 동안 무슨 일을 하리라고 계획하는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서 그 동안 해보지 못했던 일을 마지막으로 원도 한도 없이 다 해보는 것인가? 물론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해봤을 때 과연 후회와 미련이 완전히 없어지겠는가? 전도서가 결론을 어떻게 내리는가? 하나님이 없이 해 아래에서 행한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고 하지 않았는가? 버킷 리스트로 따지자면 인류 역사상 솔로몬만큼 다 성취한 자가 없는데 바로 그가 내린 결론이다.
실제로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자들 거의 모두가, 심지어 불신자라도 전혀 다른 일을 계획하여 시행한다. 평소에 자기가 잘못했거나 피해를 입혔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사이가 소원해졌거나 자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찾아간다. 서로 용서를 구하며 화해하고 잠시라도 짬을 내어 교제한다. 그리고 반드시 빠트리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말을 하거나 편지로 남긴다.
죽을 때에 모두 그 일을 후회한다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한 것. 남을 온전히 용서하지 못한 것이 된다. 예수 믿은 후에도 그러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물론 우리가 아직도 연약하고 비천하며 탐욕과 죄성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부부 사이와 가정에 주인으로 모시라고 에베소서에서 권면한 까닭이다.
매일 천국처럼 살라는 뜻은 결국 이것이다. 시한부인생 선고를 받고 행해야 하는 이 일을 안 해도 될 만큼 평소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것이다. 시한부 인생은 그나마 마지막으로 정리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도록 미리 알려주니 감사할 일이고 다행이다.
언제 부부가 서로 영원히 이별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본문의 베드로의 권면은 한마디로 천국을 먼저 가든, 뒤에 혼자 남아 있던 후회 하지 않도록 살라는 것이다. 최소한 서로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일들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럽도록 가장 성공한 부부는?
세상의 부부 중에 어떤 부부가 가장 부러운가? 저희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한 날 한 시에 함께 천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가끔 기도하고 있다. 정확히 그렇게 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우니 사실은 그렇게 소망만 하고 있다. 어쨌든 최대한 그 차이를 단축시켜 달라고는 기도한다.
집 사람이 가끔 이런 농담을 한다. 자기가 죽고 3일 후에 저보고 따라오라고 한다. 제가 먼저 죽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자기가 그 뒤처리를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막연한 소망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다.
여러분이 실감나도록 설명해보자. 가장 부러운 부부, 가장 성공한 부부로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꼬부라졌는데도 서로 손을 꼭 잡고 공원을 산책하는 부부를 아마도 다 꼽을 것이다.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 서로 나눠 먹는데 이빨이 빠져 흘리는데도 짜증 하나 내지 않고 웃으며 서로 닦아 준다. 그 얼굴에 온화한 빛이 넘치고 한눈에 봐도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여서 극진히 챙겨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마저 그런 따뜻하고 사랑스런 분위기가 번져나가는 부부다.
누구나 오래 같이 살다보면 그렇게 되리라 자신할 문제가 아니다. 백세 인생에 부부로 75년을 함께 살아야 하고, 빈 둥지 증상(empty net syndrome)을 겪은 후로는 부부 둘이서만 50년을 살아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싸움과 갈등이 줄어서 사이가 더 좋아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오늘의 본문처럼 남편이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오래 살 동안에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신뢰해야 한다고 해서 항상 좋아하고 열정이 넘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래 살수록 그만큼 갈등과 충돌은 많아지기 마련인데도 잘 해소해냈다는 뜻이다. 잘 참아주었고 잘 용서해준 것이다. 어제 저녁 집회에서 배운 대로 사랑의 본질이 참는 것이기에 그만큼 많이 사랑한 셈이다.
신앙의 문제를 너무 도덕적 계명이나 종교적 교리로 따져선 안 된다. 신앙생활이란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다. 부부란 수도 없이 다투고 자존심을 세우고 이혼 일보 직전까지 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신자부부는 자식 때문에 할 수 없이 참고 사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는 지식에 따라, 특별히 아내를 귀히 여기며 동거해야 한다.
그리고 천국에 함께 가는 일이 먼 미래가 아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내 가정과 교회를 세우도록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남편과 아내 중에 혼자 먼저 믿었다면 배우자가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믿음으로 끝까지 잘 버텨야 한다. 또 처음 믿음이 연약했을 때는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저 원수 같은 남편과 아내를 고쳐달라고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를 자꾸 하다 보면 그런 기도는 그만 두게 되고 내용도 바뀌게 된다.
특별히 부부끼리 자기들 문제는 물론 자녀들의 문제를 함께 항상 기도하면 그렇다. 인생의 동일한 고난, 부부 두 사람이 힘을 합해 맞서야 할 시련 연단 슬픔 상처를 함께 기도하며 이겨낸 체험이 쌓이고 쌓여야 한다. 두 사람이 함께 믿음으로 이겨낸 두 사람만의 비밀이 늘어나게 된다. 다른 이와는 공유할 수 없고, 오직 주님과만 나눌 수 있는 그럼 은혜의 체험들이 생긴다. 그래서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손잡고 산책하는 것을 연습하라.
매일을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로 살려면 바로 오늘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비록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바로 오늘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셨다는 감사가 매일 있어야 한다. 또 그래서 내일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백세 시대에 다가올 50년을 버티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갖고 있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를 부부가 함께 소유해야 한다. 노년의 부부가 사이좋은 것만큼 인생은 물론 신앙에서 가장 큰 승리는 없다. 그런 부부에겐 거룩한 아우라가 비춰 나와 사람들의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세상의 엄마는 물론 세상의 아빠 모두가 위대하다. 신자로서 정말 신자다운 남편과 신자다운 아내도 둘 다 위대하다. 생명의 은혜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라서 더더욱 그렇다. 그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못 이룰 것 하나 없지 않겠는가?
신자 부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원대하다. 그분의 엄청난 큰일을 성취할 수 있다. 부부가 함께 눈물의 제단을 함께 통과하면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 그 모든 시련을 함께 기도하며 통과했고 마지막까지 사이좋은 신자 노부부는 숭고하고 신령하기까지 하다.
첫 집회에서 인간 세상을 향한 사탄의 목표는 사랑을 실종시켜서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사탄에겐 에덴동산 때부터 세상 끝 날까지 오직 이 한 가지 목표뿐이다. 신자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한다면 사탄의 그 음모는 철저히 파괴되고 이 땅에서의 신자로서의 소명을 완수하는 셈이다.
이 시대의 인류의 소망이 이것이다.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도 이 믿음 외에 따로 없다. 부부가 손잡고 산책하고 있는가? 손잡는 것이 혹시라도 어색한가? 지금부터라도 연습해야 한다. 상대가 먼저 손을 잡자고 하면 이미 성공한 부부다. 그 손의 따뜻한 기운이 평강을 주는가? 그 따뜻함이 없으면 너무 허전해 못 살 것 같은가? 그만큼 성공한 부부는 없다.
남편과 아내의 의무 (벧전 3:1~7)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큰 환난과 시험이 그칠 때가 없는 험악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랑하는 백성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천국을 맛보면서 살 수 있도록 교회와 가정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천국과 같은 가정, 천국과 같은 교회를 이루어서 날마다 천국을 맛보면서 살다가, 천국에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과 같은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모여야만 천국과 같은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천국과 같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천국과 같은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3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 서로가 이 의무를 다할 때, 천국과 같은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벧전 3:1)』고 사도 베드로는 예수 믿는 아내들을 향하! 여 그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25절을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사도 바울은 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부부는 한 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게 하시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에서 하나님이 왜 남편을 아내의 머리가 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 종하라고 말씀하시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후에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보다 먼저 지으셨기에 아내의 머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뱀에게 꼬여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인류가 다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남편을 머리로 알고,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남편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곤란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 남편과 아내의 의견이 다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 범죄 하는 일이 아니라면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머리가 둘이 되면, 그 가정은 항상 시끄럽습니다. 아이들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의 머리가 되려고 하지 않고, 남편의 목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의 머리는 목이 조절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아내는 자기 남편을 주님 모시듯이 하면서도 남편으로 하 여금 자기의 말과 뜻에 따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남편은 아내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실수와 실패를 하지 않으려면, 아내와 의논을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내의 조언을 들으면서 잘못된 부분을 깨닫게 됩니다. 아내의 도움을 받을 때, 더 온전해지고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편이 아내의 도움이 꼭 필요하기에 돕는 배필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18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아내 없이 혼자 살면 행복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남편들은 좋은 아내를 맞이 하면 이 땅에 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7절을 보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고 말합니다. 잠언 19장 14절을 보면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집과 재물을 얻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슬기로운 아내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입니다. 좋은 부모를 만난 축복보다 슬기로운 아내를 만나는 것이 더 큰 축복인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아내는 남편에게 큰 축복이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믿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본문 3장 1절)』
여기서 말하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불신 남편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믿음이 없으며, 거듭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사랑한다면 아내들은 남편의 건강을 생각할 것입니다. 남편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멀리 하며, 오직 사랑만을 베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이 아직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남편이 구원받기 위해 어떤 희생과 봉사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남편들이 아내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운데서도 아내 때문에 예수를 믿은 사람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아내들의 공로가 큽니다. 아내들 덕분에 남편이 예수를 받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남편의 신앙이 성숙한 것도 역시 아내의 덕분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들의 믿음과 기도와 헌신으로 말미암아 남편들이 은혜 받고, 성숙해져서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 중간부분을 보면,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보다 중요한 것은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내가 가져야 할 행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
벧전 3:1-7 / 정필도 목사
1.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본문 2절)』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워하며’는 남편을 무서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존경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주님을 존경하고, 주님을 존중하듯이 남편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정결한 행실’이란 깨끗하고 산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의 이런 모습을 볼 때, 자연히 감동을 받고 ‘내 아내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어야 되겠다’는 생각할 것입니다.
2.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본문 3~4절)』고 말했습니다.
외모를 꾸미기 위해 사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모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너무 외모에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모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단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속사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4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부드럽고 차분한 성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부드러운 아내를 좋아합니다. 남편의 태도나 요구사항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아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힘이 세고 목소리가 큰 여자보다 말과 행실이 부드러운 여자를 남자들은 좋아합니다.
어느 날 한 가정에서 아내의 신앙문제로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참다못해 아내에게 “당신 물건, 모두 가지고 나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때 예수 믿는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일 큰 가방을 열어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다 필요 없어요. 이 가방 하나만 가지고 갈래요. 전 당신만 있으면 되니, 어서 이 가방 속으로 들어가세요.” 남편은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책임감도 느꼈습니다. 자기만 의지하고 사는 아내에게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곧 사과를 하고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아내입니까! 여러분, 지혜로운 아내는 큰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행동으로 보여 줍니다. 지혜롭지 못한 아내들이 집안에서 남편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24절을 보면,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말과 행실이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차분하고 침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안정감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항상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이 충만한 여인들입니다. 환난과 풍파가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로 안정감을 가지고 가정을 지키며 남편을 돕는 것입니다. 이런 성품은 하! 나님 앞에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
3.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본문 5절)』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예로 들어 말합니다.
1)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했습니다.
사라는 남편 대하기를 하나님께 대하듯 했다고 합니다. 사라는 지혜로운 아내였기에 하나님께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자기 남편 대하기를 왕에게 하듯이 합니다. 이런 여인이야말로 지혜로운 아내인 것입니다. 왕의 아내가 되었으니, 왕후의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아내는 자기 남편을 머슴같이 부리려고 합니다. 그런 아내는 머슴의 아내가 될 뿐입니다. 사라는 남편을 부를 때에도 하나님을 부르는 것처럼 ‘주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라와 같은 지혜로운 여인이 되길 바랍니다.
2) 선을 행하고 아무리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 음이 있었기에 어떠한 일이 생겨도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편을 믿어주는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하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어도 남편을 끝까지 믿는 아내는 참으로 귀한 아내입니다.
창세기 12장 2~3절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고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 하셨습니다. 사라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라는 하나님을 믿고 남편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인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해서 두 번씩이나 남에게 뺏기는 일이 있었고, 또한 백 세에 낳은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다고 했을 때에도 사라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만일 사라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감당할 수 ! 있었을까요? 그러나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언제나 안정된 마음을 가지고 남편이 하는 일에 순종만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사라는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거룩한 부녀였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본문 7절)』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에 대해서 말한 후에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1)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했습니다.
‘지식을 따라’ 이 말은 아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30세에 결혼을 했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니 결혼생활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내와 40년을 살고 나니, 이제 여자에 대해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좋은 남편이 되려고 하면 아내에 대해서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를 똑바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아내의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어떤 일에 약해지고 낙심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힘들어하는지, 자신의 아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좋아하는지 알아서,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 한 이유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약하다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으로 약하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비교할 때, 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약합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힘이 센 남자가 전장에 나가서 싸웁니다. 여자는 깨어지기 쉬운 그릇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를? 깨어지기 쉬운 그릇을 다루듯이 귀히 여기고 잘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이유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함께 누릴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만 잠시 살다가 끝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내를 귀히 여겨야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통로가 막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고 멸시하고 천대하여, 가정에 슬픔이 가득하다면 은혜의 통로가 막힙니다. 기도가 막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8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지혜로운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에게 복이 됩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십시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은혜가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천국과 같은 가정이 되길 축원합니다.
나그네의 부부관계
베드로전서 3:1-7 / 정도열 목사
초기 기독교가 전파될 때에 기독교는 하류 계층의 사람들에게 먼저 전파되었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복음이 쉽게 전파되었다. 평민들에게 노예들에게, 또 여자들에게 복음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이로 인해서 가정과 사회에서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믿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었다. 요즘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 동등한 인권과 역할이 있다. 그러나 고대 헬라사회에서 여성의 의무란 “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었다. 되도록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질문하는 것이 여성의 미덕이었다. 남편은 아내의 결혼 지참금만 돌려주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었다. 로마의 법률 하에 여성은 아무 권리가 없었다. 여성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생사여탈권이 있었고, 결혼을 하면 남편에게로 옮겨갔다. ‘만일 아내가 부정한 행위를 하다가 체포되면 재판 없이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그나티우스라는 사람은 아내가 술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때려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경우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일어났겠는가?
베드로 사도는 2장에서 사환들에게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하라고 권면했다. 이제 예수 믿는 성도들의 가정생활에 관해 말한다. 오늘 말씀은 특히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가는 나그네로서 부부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권면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외모보다는 마음을 다듬어야 하고, 남편은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소중하게 여길 것을 권면한다. 부부 관계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믿지 않는 불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원리를 배울 수 있다.
I. 아내 된 자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1-5)
사도 베드로의 주된 관점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의 삶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첫째, 행실을 통하여 남편을 구원하라(1,2)
1,2절을 보라.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아내 된 자들에게 먼저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이 무엇과 같이 되라는 말인가? 앞장에서 베드로는 사환들은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복종하라고 했다. 그 모델로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복했는가를 예로 들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하심이니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남을 얻었나니”(2:24) 베드로는 주님을 믿는 여인들이 예수님처럼 되도록 권면한다. 그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는 비굴하거다 줏대 없는 복종이 아니다. 자발적인 자기희생이다. 또 남편을 섬김으로 그들의 아름다운 행위로 말미암아 남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믿지 않는 남편은 그 아내의 경건한 삶과 순결한 삶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도를 받아들이게 된다. 구원을 얻게 된다.
예수 믿는 아내들은 믿지 않는 남편에게 설교하기 쉽다. 논쟁을 하여 남편을 설득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잔소리가 되고 만다. 베드로는 교회에서 들은 남녀 평등사상이나 주장하고, 남편이 자기를 소유물처럼 여기는 것을 대항하여 싸우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여성해방운동가처럼 행동하기를 원치 않았다. 남편의 약점을 헐뜯고, 바른 진리를 가르치라고 하지 않았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남편에게 선량한 아내가 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의 아름다운 행실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정을 풀게 하라는 것이다. 남편의 마음을 녹여서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도록 섬기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남편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에서 나오는 순종이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비굴한 순종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의 순종이다. 아내의 순종과 아름다운 행실은 남편에게 하는 침묵의 설교이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지 않는다. 아내의 경건과 정결한 삶을 보고 도를 순종하게 된다. 예수 믿는 것 빼놓고는 내 아내는 최고라는 칭찬을 들어야 한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남편 싫어하는 일을 골라서 하고, 남편을 무시하고, 대항하여 싸운다면 어느 남편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래서 베드로는 남편에 대한 목자의 심정으로 그리스도께 받으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사랑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잠언 기자는 말한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잠 12:4)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고통을 주면서 예수를 믿는다면 이는 남편의 구원을 가로막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바울도 말한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4)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 7:16).
이러한 원리는 믿지 않는 남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친척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좋은 가족이 되고, 그들에게 좋은 형제가 되고, 친척이 되어야 한다. 착한 행실로 그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크리스천으로 있는 가족이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면 누가 예수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착한 행실로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동네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청소를 비롯해서 많은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캠퍼스에 있는 대학생들에게도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불신자들은 믿는 자의 말에 절대로 감동받지 않는다. 행실을 통해서 감동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말없이 고난을 짊어지고, 꾸준하게 선을 행해야 한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날이 온다.
둘째,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3-4)
3,4절을 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여자들은 몸단장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단장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머리를 단장하고, 장신구를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때 이미 머리를 곱슬곱슬하게도 했으며, 검은 색으로 염색하기도 하고, 자색으로 염색하기도 했다. 머리를 꾸미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사회적인 계급과 신분에 따라서 머리 모양을 단장하는 법이 달랐다. 또 몸에 온갖 보석들을 달았다. 이사야서에 보면 장신구들이 너무나 다양했다. 가발을 썼다.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살던 카타콤에서도 가발이 발견되었다. 가발을 만드는 머리카락은 독일 지방이나 인도와 같은 먼 지방에서 수입되었다. 해어밴드나 머리핀 머리빗은 상아나 회양목재나 거불이 등뼈로 만들었다. 때로는 보석을 박은 금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옷 색깔을 자줏빛이었다. 두로 지방에서 생산되는 두 번 염색한 최고급 자색 양모 한 파운드 값이 2000데나리온도 넘었다. 두로 지방에서 나는 최고급 자색 외투 값은 일만 데나리온이나 했다. 온갖 보석들로 장식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외모를 단장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숨은 속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 오직 겉으로 드러난 외모와 겉 장식에만 관심이 많다. 요즘은 겉 장식뿐만 아니라 몸 자체를 뜯어고치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있다. 21세기는 신체의 시대하고 한다. body가 중요하다. 몸짱, 얼짱, 생얼짱 등 유행어들이 이 시대를 말해 준다. 이런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행에 따라가기 쉽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장식하라고 한다. 속사람을 무엇으로 장식하라고 했나?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장식하라고 했다.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사람을 단장하라고 한다. 온유란 야생마가 길들여진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야생마는 힘이 세고, 에너지가 넘친다. 그렇지마는 길들여지면 주인에게 아주 온순하다. 주인에게 절대 순복한다. 온유란 힘이 넘치면서도 아주 부드러운 성품을 말한다.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은 시끄럽게 하지 않고 조욯한, 고요한 마음이다. 온유한 마음이나 안정된 마음은 우리 주님께서 예수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품이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속사람을 온유함과 정숙함으로 장식할 수 있나? 우리가 몸을 단장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있어야 몸을 단장할 수 있나? 거울이다. 거울이 있어야 한다. 거울을 보고 머리도 빗고, 장식품도 달고, 옷을 입고 몸에 맞는지 분별할 수 있다. 거울을 보고 자기 몸을 아름답게 단장한다. 이처럼 우리의 속사람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필요하다. 이 거울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현재 속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말씀의 거울이 없이는 우리 속사람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속사람을 단장해야 한다. 우리는 불신 세상에서 살면서 속사람이 더러워진다. 오염된다. 혈기를 부리게 되고, 사나와진다. 마음에 평강을 잃어버리고 조급해진다. 그러므로 온유한 마음과 안정된 마음으로 속사람을 단장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양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속사람을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묵상을 통해서 우리 속사람을 주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베드로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무엇이라고 했나? 베드로는 여인의 아름다움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온유하고 인정한 심령은 여인의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발하는 시들지 않는 여인들다움이다.
셋째,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5,6)
베드로는 이제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통해서 남편에게 복종한 대표적인 아내의 모습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서 찾는다. 5,6절을 보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구약에 나타난 부녀들을 예로 들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거룩한 삶을 산 것같이 그들의 남편에게 순복하였다고 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경우를 설명했다. 사라는 모든 신실한 자들의 어머니이다. 사라는 자기 남편인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복종하였다. 성경은 사라가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고 소개한다. 이는 그의 외모보다 속사람이 온유와 안정한 마음으로 단장하였기 때문이다. 사라는 어떻게 자신을 단장했나? 첫째, 사라는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을 다 떠나왔다. 둘째, 사라는 남편을 좇아 낯선 땅으로 갔다. 셋째, 사라는 광야에서 장막 속에서 살았다. 넷째, 사라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이는 왕궁에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며 사는 왕비의 삶이 아니었다. 이것은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하는 믿음의 삶이었다. 어느 한곳에 잠시 정착했는가 하면 다시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그녀는 늘 하나님의 언약이 이뤄지기를 기도했고, 남편의 기도를 신뢰했다. 사라는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에게 순종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순종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도 사라는 순종했다. 어떤 분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에게 말하지 않고 번제로 바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바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의 동의하에 번제로 드렸다고 할 수 있다.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나 사라는 남편에게 순복했다. 사라는 남편의 귀를 기울이고 따르기만 하였다. 사라가 이렇게 남편에게 순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라가 남편에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자식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다면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겠는가? 사라는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다. 그래서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종하며 모든 믿음의 딸들의 본이 되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 어떤 신문기자가 그의 부인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인,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그 원리를 알겠습니까?” 부인의 대답에 기자는 “그러면 아인슈타인에 대해 무엇을 아십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가 내 남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가 열심히 연구했다는 것과 그의 진실한 인품을 압니다. 그런 까닭에 상대성원리는 모르지만 남편 아인슈타인 을 사랑합니다.” 아인슈타인 뒤에는 남편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II. 남편들아, 아내를 귀히 여기라(7)
7절을 보라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의 진리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결혼의 진리가 무엇인가? 첫째는 창조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창 2:24). 남자가 가장으로서 책임을 지고, 아내와 사랑으로 연합하여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는 재창조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한다. 이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남편을 공경하고 복종하라고 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2-25) 부부 사이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고, 아내는 남편의 몸이다. 그 사이를 그리스도께서 이어주고 계신다. 머리는 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고, 몸은 머리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순종한다. 이런 관계가 성경이 말하는 부부관계의 기본 지식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부관계의 근본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남편의 사랑과 아내의 순종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최고의 법으로 알고 실행토록 힘써야 합니다.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는 말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골 3:19). 아내와 불필요한 별거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아내를 사랑하며 함께 살라는 것이다. 남편들은 아내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한다.
첫째는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연약한 그릇이라는 말은 깨어지기 잘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아내가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할 이유는 그녀가 본성적으로나 신체 구조면으로 볼 때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편도 연약한 그릇이다. 우리 인간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잘 깨어진다. 그러나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보호를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런데 남편이 자기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아내는 큰 상처를 받는다. 따라서 남편은 적극적으로 아내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가정은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이혼 위기에까지 갔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근본원인이 남편이 자기가 임신했을 때 먹고 싶은 것도 안 사 주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care해 주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남편을 무시하게 되었고, 점차 골이 깊어지게 되었다. 특히 여성은 임신을 했을 때 가장 남편의 보호받고 싶어 합니다. 자녀를 낳았을 때 본능적으로 아주 예민한 시기입니다. 그때 남편들은 적극적으로 아내들을 care 해 주어야 한다. 그릇은 한번 깨어지면 다시 붙일 수가 없다. 요즘은 강력잡착제가 나와서 붙일 수 있지만 그래도 상처가 남는다. 완전히 아물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이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적극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둘째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로 알고 귀히 여겨야 한다.
신체 구조적으로나 본성적으로 아내들은 남편보다 더 연약하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아내는 그의 남편과 동등한 존재이다. 아내는 현세와 내세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과 동등한 영적 신분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성도 생명의 은혜를 공동으로 상속받을 자이다. 그러므로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한다. 아담은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사랑을 고백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그만큼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아내에게 합당한 존경을 베풀어야 한다.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의 안전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아내의 행실을 기뻐하며 신뢰하고 넓은 가슴으로 품어주어야 한다.
당시 헬라나 로마에서 여성은 귀히 여김을 받지 못했다. 여자들은 예배에 함께 참석할 수 없었다. 유대인은 회당 예배드릴 때 여성을 참석시키지 않았다. 지금도 정통파 유대교 회당에서는 여성의 예배 참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성이 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해도, 남성들로부터 분리되어 앉아 있어야 한다. 유대교 예배에는 여성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라고 선언한 것은 당시의 사회 배경 속에서는 혁명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여성도 평등한 영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남녀평등 사상이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남존여비 사상이 수천 년을 지배해 왔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것이다. 남자는 무거운 짐을 실은 나귀를 타고 가고, 여자는 그 곁을 걸어갔다. 남자가 한 발자욱 앞서가면 아내는 한 발자국 뒤에 따라와야 했다. 이런 사상의 결과로 남아선호 사상이 자리잡게 되었다. 남아선호사상이 가장 심각한 곳이 대구이다. 한때는 여자 100명당 남자가 125명까지 올라갔다. 요즘은 총각들이 결혼을 하지 못해서 베트남이나 중국 필리핀에서 여자들을 수입해서 결혼을 한다. 7쌍이 결혼하면 1쌍이 국제결혼을 한다. 유대 랍비들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과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다고 한다. 불신자들은 아내를 소유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 믿는 남편들은 자기 아내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가장 합당한 동역자(suitable helper)이기 때문에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아내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 결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남편은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내는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다. 낙이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가정은 삭막해지고, 자녀들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랄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너희 기도가 막힌다고 했다. 기도가 막힌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이다. 왜 아내를 소중히 여겨야 기도가 막히지 않을까요? 연약한 아내를 보호해주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아내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아내의 탄식소리가 남편의 기도를 가로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한다. 우리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보면 대부분 여자들이다. 보호받아야 할 때 보호받지 못하고 깊은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가 평생을 간다. 그러므로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고 귀히 여겨야 한다.
조용기 목사님이 일본에 가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한 목사님이 상담을 해 왔다. 자기는 아내 때문에 더 이상 목회를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연을 들어보니 아내가 사사건건 자기를 괴롭히고 비판하여서 도저히 더 이상 목회를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원수가 집안에 있다고 했는데 자기 아내가 원수라는 것이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면 아내는 내 설교를 비판하고, 공격한다. 아내 눈에는 못난 것밖에 안 보인다. 지옥이 없다면 아내 앞에서 당장 죽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의 좋은 점을 찾아보라고 하니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목회를 그만두어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조목사님이 다짐을 받고 먼저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라고 했다. “하나님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협조하지 않고 사랑 해 주지 않는 아내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나니까 마음에 평강이 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고, 아내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도 생겼다. 그러자 아내도 점차 변하고 일년 후에는 아주 좋은 동역자가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 이런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때 아내를 소중히 여기게 되고, 그때부터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된다. 남편의 임무는 가정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가 막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이요, 축복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세워 주셨다. 그러므로 남편의 기도가 막혀 버리면 축복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남편들은 하루 10분이라도 아내와 가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나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용사들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기도에 가정의 축복과 저주가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도가 막히기 않으려면 무엇보다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한다.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 함께 생명의 유업을 받을 자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른 관계가 유지되고 하나가 된다. 부부관계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바로미터와 같다.
우리는 거룩한 나그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거룩한 나그네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의 가정생활은 믿지 않는 자들의 가정생활과 다르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고, 속사람을 온유함과 평안함으로 단장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여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자들의 가정은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 자녀들이 사랑으로 양육되고, 부모님들의 아름다운 부부생활을 보면서 믿는 자의 가정의 행복을 알게 해야 한다.
아름다운 내면 인품
벧전 3:1-7 / 김상복 목사
오늘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제1회 국민일보 선정,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건축 대상’ 6교회를 선정했는데 그 중 첫 번째 교회로 뽑혔습니다. 국민일보 5월 13일에 8면을 발행하여 제일 먼저 전면 기사로 사진과 함께 실어주었습니다. 저희 교회만큼 좋은 환경과 여건을 갖춘 아름다운 교회는 세계 어느 곳에도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여러분과 국민일보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도 언젠가는 낡아집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의 영광으로 지은 것인데 지금 그 건물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거할 왕궁도 20년에 걸쳐 웅장하게 지었지만 그것 역시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손으로 지은 것은 제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도 점차적으로 퇴화하게 되어있어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받는 이 교회를 주신 것,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름다운 물리적 성전보다는 여기서 예배드리는 여러분의 아름다움이 몇 배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양 그것을 대단히 중요히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목회 중이이던 40대 초반 시절에 75세 가량의 한 어르신을 심방한 적이 있었지요. 머리숱은 거의 없고 주름도 많아 외모는 볼품이 없었고 걸음걸이도 불안한데다 이도 다 빠져 말이 새어나와 발음이 부정확하고 어눌했어요. 당시 겨우 40대 초반이었던 저로서는 그 분의 그 이전모습을 알리 없었지요. 그러다 그 집에 가서 경대에 세워놓은 사진에 너무도 당당하고 잘생긴 젊은이가 있어 무심코 몇째 아들이냐고 여쭈었는데 뜻밖에도 젊었을 때의 당신 자신이라고 하셔서 너무 놀랐습니다. 지금 눈앞의 어깨가 구부정한 노인이 바로 사진 속에 있는 당당한 젊은이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거지요.
젊은이 여러분들은 아직 젊은 것을 축하합니다. 제가 예언자도 아니요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예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분과 같은 노년이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겉 사람이 변할 날이 올 것입니다. 저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난날 주름도 없고 음성도 맑고 깨끗한 소리를 힘 있게 내는 트럼펫 같았었지요. 한때는 워싱턴의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제 설교음성에 저 스스로 반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흉내조차 낼 수 없게 되었지요. 이와 같이 인간의 겉 사람은 시간과 함께 쇠퇴하게 되어 있어요. 눈으로 보는 것은 사라집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고 바울도 말했듯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여러분의 속사람, 새사람, 영적인 그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져야합니다. 속사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속에 생겨난 하나님의 성품이자 인격이고 품성이자 아름다운 영적인 자질들입니다. 아름다운 자질들은 여러분이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기 원한다면 또한 개발시키고 변화시키기 원하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그 날까지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인지는 자명해집니다. 좋은 가정을 이루려면 할 일이 있어요. 그것은 여러분의 속사람 즉, 내면의 사람을 지속적으로 가꾸는 일입니다. 내면의 사람을 가꾸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일에 에너지와 시간, 노력과 정성을 지속적으로 쏟아 넣지 않으면 물리학의 법칙에 의해 그 모든 것은 점차 소멸되고 맙니다. 발전하려면 새로운 에너지를 계속 투입해야한다는 뜻입니다. 내면의 사람이 성장하며 아름다워지는 그때, 비로소 아름다운 인품과 인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 베드로전서 3장1-3절에는 아내와 남편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대개 “아내들이여! 남편들이여!”하면 에베소서가 생각나지요. 에베소서 5장에서는 남편에 대한 권면이 주된 내용인데 비해 베드로전서 3장은 주로 아내를 향한 권면입니다. 즉 에베소서는 남자에, 베드로전서는 여자에 그 초점을 맞춤으로써, 성경의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강조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내면의 사람을 가꿔나가자는 것입니다.
본문1절을 보세요.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즉 불신자 남편이 그 아내의 순복하는 아름다운 내면의 모습 때문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순복하라”는 말이 남녀 평등시대를 사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도 성공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순종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을 잘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적 훌륭한 자질이 내면에 있어야 합니다.
첫째, 겸손이 있어야 순종합니다. 교만한 자는 절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 5:5).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꺾으시되 겸손한 자는 축복하십니다. 순종하는 자 안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겸손은 성공의 열쇠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똑똑하고 재주 많고 재치 있는 행동을 하여도 교만하면 결국은 망합니다.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이 겸손하면 그 사람은 돋보이고 하나님께서는 높이시고 또 높여주십니다. 여러분 모두는 겸손의 미덕이 있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모를 순종하고 선생님과 윗사람을 순종하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둘째, 사람을 존중해야 순종합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는 자는 결코 순종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 지시를 따르지 않는데 어떻게 공부를 잘 수 있습니까? 자식이 잘 되기만 간절히 바라는 자기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 자식이 잘 될 리 만무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잘 되는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 남편, 아내, 심지어 자식마저도 존중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자질이요 아름다운 인품입니다.
셋째, 경청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남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야 제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곧 경청의 능력입니다. 누군가 말을 하면 그 말을 잘 듣기 위해 귀를 기울임은 물론 머리와 가슴으로 들으며 심지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등, 이렇게 온몸으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잘 듣는 태도요, 훈련인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잘 듣는 사람은 상대의 말과 의도를 놓칠 리 없고 호감을 줍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되려면 남의 말을 잘 듣는 훈련을 하십시오. 종종 제게 영어를 잘 하는 비결을 묻는 분들이 있는데, 외국어를 잘하는 원리도 이와 동일합니다. 정확히 듣고 그대로 흉내를 내면 잘하게 되어 있어요.
넷째, 순종에는 이해력이 있습니다. 순종하려면 말을 잘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제대로 알아듣고 정확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나름대로 들었다고는 하지만,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상대가 전하는 의도와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결코 순종이 아니지요. 잘 듣고 정확히 이해하고 판단하여 실천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다섯째, 순종에는 공감력이 있습니다. 가슴이 통해야 해요. 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감(sympathy)이 아닌 감정이입(empathy)을 말합니다. 상대의 내면의 감정에 같이 빠져야 합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같이 좋아해 주고, 기쁠 때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하고, 아파할 때는 동일한 심경으로 그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을 공유할 수 있어야 상대가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순종할 수 있어요. 이런 내면의 자질들은 아름다운 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상대의 계획에 동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상대와 하나 되는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듣고 이해한 것으로 끝날 뿐, 상대의 원하는 바대로 행동으로 동참하지 않으면 그건 순종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비로소 순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은 이런 아름다운 내면의 자질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을 양육할 때는 반드시 순종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순종 속에 이런 내적 자질이 없으면 절대로 순종이 안 되기 때문에 순종은 좋은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른이 말씀하실 때마다 온 마음을 집중하여 겸손하게 잘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 말하려 할 때, 이같이 겸손함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상대를 향해 바짝 정신 차려 귀 기울이며 정성을 다해 듣는 태도를 익힌 사람은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지 성공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훌륭한 자질을 포함하고 있는 순종이란 단어에 거부감 갖지 마세요. 리더십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소위 성공한 자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그것은 성공한 많은 이들이 대개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인정받아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정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결국 세계를 이끌어 가는 리더가 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순종의 훈련과정을 거친 사람은 부모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직장에 서는 상사에게 순종을 잘하게 되니까 인정받게 되고, 그것이 결국 자신에게 큰 격려가 되어 자신감이 생기고 더욱 일을 잘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순종의 순기능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축복의 비결입니다. 바로 순종을 잘 안면 인생의 복이 없을 것입니다.
순종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내적 자질을 잘 길러 놓으면 여러분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축복의 근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옛 여인들의 입 다물고 3년 귀 막고 3년 못본척 3년의 고달픈 시집살이와 같이 순종이 무조건 감정을 억누르는 행위는 아닙니다. 비록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해도 좋은 말과 좋은 목소리, 좋은 태도로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사실 대개의 부부싸움은 틀린 말을 해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내의 말이 구구절절 너무 옳기 때문에 화가 나서 싸우거든요. 우리는 자신을 신랄하게 몰아부치는 배우자로부터 빠져나갈 틈이 없지요. 그러니 적반하장인줄 알지만 방어의 본능으로 화를 내게 되고 결국 싸움으로 번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좋은 태도로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질이 필요합니다. 물론 화가 날 때는 절제가 좀처럼 잘 안되지요. 그러기에 어려서부터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품성, 좋은 인격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좋은 인격적 자질은 반드시 훈련을 통해서 개발됩니다. 소원을 가지고 노력하며 속사람을 길러야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내적 사람이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정결한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순결하다는 뜻으로서 “성적인 깨끗함”(chaste conduct)을 의미합니다. 결혼한 모든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신실하여 다른 이성들에 대해 한 치의 의혹이 없도록 자신의 배우자를 안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성적 배신의 상처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아픔으로써, 그 상처의 치유는 오래 걸립니다. 내 남편은 비록 돈은 많이 없어도 이성문제에 대해서만은 틀림없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시대에 배우자에게 자신의 깨끗한 행동을 보고 감동이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반반이 여자요 남자입니다. 부부란 그 많은 사람을 다 제쳐두고 한 사람만을 선택하여 하나님과 부모님과 그 사람에게 약속한 사이입니다. 부부는 남남끼리이기 때문에 이 약속을 지키게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와 피가 섞여있기에 본능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만나 약속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서로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편과 아내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고 그 마음에 평화를 주는 것은 신실성에 대한 내적 자질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성장하기 바랍니다.
3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물론 외모도 하나님이 주셨으니 잘 가꿔야지요. 그러나 성경은 겉만 치장하고 속사람을 가꾸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 역사상 지금처럼 모든 산업이 발달했던 때는 없었습니다. 먹고 살만하게 되자 겉모습을 치장하기 위해 엄청난 관심과 정성을 쏟습니다. 그러나 겉의 아름다움은 곧 사라지고 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속사람을 아름답게 가꾸라고 하십니다.
4절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온유함은 부드러운 품성이지요. 이것들은 ‘썩지 않는 아름다움’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내들은 없어지지 않을 온유로 아름답고 안정감이 있는 여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값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여러분의 내면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것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5절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거룩한, 경건한 여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여인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모든 환경과 여건과 좋고 나쁜 모든 것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경건한 모습들이 우리에게 있길 바랍니다. 사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신뢰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6절 “너희가 선을 행하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삶의 특징이라야 합니다. 여러분 속에 늘 선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선이십니다. 그 분을 추구하십시오. 속사람이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운 속의 것들이 언행으로 드러나고 태도로 나타나고 아름다운 모습과 용모로 나타나게 되기 바랍니다.
유일한 선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꾸준히 원하고 따르면 여러분의 속사람이 선해지고 인격이 선해져서 움직일 때마다 내면의 아름다운 선이 삶 속에서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열매들을 개발함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삶 속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영적인 열매는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속에 아름답지 못한 것이 나올 때마다 바로 회개하십시오. 아름다운 인품과 품성, 그리고 자질과 인격을 꾸준히 추구함으로써 삶의 많은 성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겉 사람은 약해지더라도 속사람은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아름다운 품성을 개발하는 부부와 부모 그리고 자녀는 평생 성장해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품성은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아름다워지면 그로 인해 자신이 행복하고, 행복한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행복해지고 교회와 직장과 친구까지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 행복은 내면의 세계, 아름다운 품성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외모보다는 속사람의 성장을 추구해서 많은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
베드로 전서 三장 一-十二절 / 한경직 목사
오늘 아침은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주신 교훈을 읽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三장에서 먼저 모든 아내된 사람들에게 그 행동을 아름답게 하라고 권면 하십니다. 또 모든 남편된 사람들에게 아내는 더욱 연약한 그릇인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잘 도우라고 권면 했습니다. 또 일반 교우들에게는 피차에 불쌍히 여기며 긍휼(矜恤)이 여기고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피차에 복을 빌면서 살라고 권면 하십니다.
특별히 아내된 사람들에게 권면하신 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보면 혹 믿지 않는 남편이 있을지라도 감화를 받으리만큼 모든 행동을 조심해서 순종하는 것이나 경외하는 것이나 정결한 것에 주의를 다함으로 아름답게 하라고 권면 하셨습니다.『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특별히 여자들의 그 단장에 대해서 여기 권면 하셨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에게는 이 단장이 문제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이사야 三장 十七절 이하를 읽어보면 거기 이사야 선지자가 옛날 이사야 시대에 예루살렘에 있는 여자들이 어떻게 단장하였는지를 기록한 글귀가 있습니다.『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 합과 호신 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 포 옷과 머리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이것을 읽어보면 그 때 이사야 때에도 예루살렘에 살던 여자들이 얼마나 단장을 했는지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도 베드로의 편지가 기록된 신약시대, 헬라와 로마시대에 있어서 여자들이 어떻게 단장하였는가는 성경 외의 일반 문헌 가운데도 종종 나옵니다. 그 어떤 글에 보면 여자들이 머리 단장하는 데에도 얼마나 종류가 많은지 마치 꿀벌 통의 벌처럼 많더라고 한 기록도 있습니다. 또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한국에는 요 근래에 생긴 것 같으나, 헬라와 로마에는 그 당시에 벌써 여자들이 머리를 염색했다고 합니다.
이런 때에 베드로 사도는 모든 믿는 여자들에게 특별히 권면 하였습니다.『외모에 치우치지 말고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으로 단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불변의 단장을 하라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교훈은 먼저 여기 앉으신 우리 부인들에게 적절한 교훈인 줄 생각합니다. 특별히 한국과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부인들이 너무 외모의 단장에 치우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뉴욕이나 파리의 여자들이 한다고 그냥 그대로 받아서 하려는 생각은 하지 맙시다.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이런 것에 치우치는 것도 허영심의 발로입니다. 둘째는 열등감의 소치입니다. 어딘가 부족한 것을 보충하려는 심정의 발로입니다. 둘째는 이런 데 치우치는 사람들이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도 베드로는『거울 앞에 서서 네 옷차림과 얼굴만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숨은 사람이 어떠한가 보라』,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제가 단순히 이 외모의 단장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을 바로 단장하라고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에 숨은 사람이 각각 있습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이 어떠합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스티븐슨이라고 하는 이가 쓴 유명한 소설 가운데「지킬 박사와 하이드」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킬 박사는 유명한 과학자로서 아주 점잖은 분이올시다. 자선사업도 하는 신사올시다. 그러나 그 박사의 마음속에는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이드라고 했습니다. 하이드란 말은 영어로 숨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 하이드라는 사람이 그 사람가운데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이 박사로 나타나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이 숨은 사람은 하나인데, 겉은 이렇게 점잖은 신사요 박사인데, 그의 마음속에 숨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보통으로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속에 숨은 사람을 모릅니다.
여러분! 다윗의 생활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아이였습니다. 착실한 목동으로 자라서 훌륭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정치가로서 칭송을 받던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마음에도 음행하고, 억울하게 우리야를 죽인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윗이 젊었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그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생활을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청년 시대에 무엇을 하고 부귀를 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지혜를 많이 받아서 모든 정치와 재판을 지혜를 가지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거행하며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솔로몬인데 그 후에 보면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위해서 심지어 예루살렘에 우상 숭배하는 신당을 짓기 시작했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까지 우상을 숭배한 적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이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아마 자기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로마의 역대 황제 중에 가장 악하기로 이름난 네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학살했습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시흥(詩興)을 돋우기 위해서 심지어 로마성에 불을 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자기 아내, 어머니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이 사람의 생활의 한 페이지 가운데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맨 처음에 황제가 된 다음에 한 번은 결재 서류가 올라왔는데 어떤 사람이 사형을 보고 받아서 황제의 인준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네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내가 어떻게 이 사람을 죽이라고 싸인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글을 몰랐다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때에는 자신도 그 후에 역사상에 나타난 흉악한 사람이 있은 것은 몰랐을 것입니다.
제가 몇 주간 전에「세브란스」병원에서 종합 진단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엑스광선도 여러 번 찍고 혈액 검사도 여러 번 하고 그 밖에도 무슨 검사를 여러 번 했습니다. 물론 귀찮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지만 이런 진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몸에 어떤 때에 병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미리 진단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혹 병을 치르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숨은 사람이 어떠합니까? 숨은 사람의 건강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빛은 엑스광선보다도 더 빛납니다. 더 밝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 자신을 내어놓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로 날선 검보다도 더 예리해서 사람의 신혼골수를 쪼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一三九편을 저술한 시인은 마지막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옵소서,』
내 속의 악한 행위를 내 스스로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살펴서 이것을 알고 회개할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자문자답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거듭 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과연 내 마음속에 숨은 사람이 거듭 났습니까? 과연 내 마음속에 숨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온전히 못 박혀 죽고 새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까? 과연 내가 과거의 나를 청산하고 새로운 방향을 잡았습니까? 과연 내 속의 숨은 사람이 세상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내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까? 스스로 물어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그 눈으로 내가 나를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마음에 숨은 사람이 건강을 바로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약한 곳을 깨달아서 그 방면을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원수는 언제든지 약한 곳을 뚫고 들어옵니다.
우리 사람의 육체를 볼지라도 병은 그 사람의 약한 부분으로 침투합니다. 어떤 이는 폐(肺)가, 어떤 이는 간장이, 또 어떤 이는 위장이 약합니다. 여기서 내가 나의 약한 부분을 알아서 그 방면에 특별히 주의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숨은 사람도 사람에 따라서 약점이 있습니다. 전에 에서 같은 사람은 식욕에 특별히 약합니다. 전에 아간이나 유다 같은 사람은 특별히 물질에 약했던 것 같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은 특별히 그 정욕에 약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사람에 따라서 어떤 이는 식욕에, 어떤 이는 물질에, 명예나 권세에, 또 어떤 이는 정욕에 약합니다. 내 안에 숨은 사람의 약점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서 그 방면에 특별히 조심해서 악한 원수의 침투를 막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작은 죄라도 항상 삼가야 됩니다. 벌써 二, 三십 년 전의 경험입니다만, 옛날 제가 선천 오호동 약수터에 가서 한여름을 지낸 때가 있었는데 밤에 바람이 불고 비가 왔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보를 가느라고 나가 보니 뜰에 큰 아람 들이 나무가 넘어졌습니다. 아래 기둥도 튼튼하고 위도 튼튼한데 그 부러진 자리를 보니까 좀이 먹었어요. 작은 좀이 큰 나무를 넘어뜨렸습니다.
작은 죄가 큰 사람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여러분! 몇 주간 전에 이태리의 큰 둑에 물이 넘어서 그 아래에 二, 三천 명이 살던 작은 도시가 七분 도안에 전멸을 당한 비참한 기사를 읽어보셨을 줄 압니다. 저는 외지에서 이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았는데 뚝 이 터진 것이 아닙니다. 그 뚝 옆에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봉우리가 갑자기 무너져 내려오며 둑에 떨어지자 물이 넘어서 불과 七분 동안에 온 동리가 전멸을 당했습니다. 산봉우리가 떨어진 것을 일순간이었지만, 그것이 떨어지기 전의 그 원인은 몇 백 년 뒤에 가서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아십니다. 아무리 튼튼한 바위라고 풍우에 깎이면서 차츰 작은 틈이 생기게 됩니다. 그 작은 틈에 물방울이 들어가고 겨울이 되면 그 물이 얼어서 틈은 차츰 벌어집니다. 아무리 튼튼한 바위라고 조금씩 금이 납니다. 이렇게 여러 백 년 지나오다가 언젠가는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작은 물방울이 큰산을 무너뜨릴 때가 있습니다. 작은 죄를 용납하지 맙시다. 작은 거짓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맙시다. 작은 물건이라고 남의 것을 훔치지 맙시다. 작은 죄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바늘 도둑이 변해서 소도둑 된다』는 말은 아주 쉬운 말이지만 깊은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작은 죄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생각과 상상의 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과 상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큰 선물 중의 하나입니다. 이 상상력을 통해서 새로운 비밀을 찾아내고 과학자는 새로운 발명을 하기도 하고 예술이라는 새로운 고안과 창작이 상상을 통해서 다 나옵니다. 창조적 상상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상력이 잘못된 것이면 파괴적 세력이 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과 상상 가운데 죄가 들어가기 시작해서 남을 미워하는 생각, 원한, 시기, 음란 등 이런 것들이 들어가서 이것이 상상의 날개를 타고 공중으로 휘돌며 계속해서 상상을 더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인격을 아주 파괴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가운데 죄를 품는 것은 죄의 알을 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알이라고 하는 것은 품으면 언제든지 까는 법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오래 생각하면 조만간 그대로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나 상상을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상상 가운데 이런 죄를 용납하지 맙시다. 특히 청년시대에 좋지 않은 상상이 많습니다. 이것은 좋은 점이지만,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시험에 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죄는 어디 있든지, 아무리 크든지 작든지 멀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를 죄로 인도하는 어떤 환경이 있다고 하면 그 환경을 멀리 합시다. 어떤 거리가 있다면 그 거리를 멀리 합시다. 어떤 책이 있다면 그 책을, 어떤 친우가 있다면 그 친우를 멀리 합시다. 어떤 음악이 있다면 그 음악을, 어떤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도 우리가 멀리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시험에「항우(項羽)」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시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항상 죄를 멀리 하고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얼굴과 옷 입은 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옷 입은 것과 얼굴을 보고서 남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숨은 사람을 보고 평가하십니다. 내 마음속에 숨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합니까?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간절히 권면 합니다.
『너희 마음에 숨은 사람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불멸의 단장을 하라.』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순결하고 자비하고 모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덕으로써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
아내와 남편에 대한 교훈
베드로전서 3:1-7 / 김효성 목사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하며 순종하며 복종해야 한다. 아내의 남편 순종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로서의 마땅한 의무이다.
여자성도들은 지나친 외적 단장, 눈에 드러나는 화장을 힘쓰지 말고, 온유하고 조용한 순종의 내면적 덕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한다.
남편들은 결혼과 부부 관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아내들과 동거하며 아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며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야 한다.
[1-2절]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道)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순복하다’는 원어(휘포탓소)는 ‘순종하다, 복종하다’는 뜻이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복종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5장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했고(엡5:22-23), 또 골로새서 3장에서도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했다(골3:18). 아내들이 자기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들의 의무이다. 거기에는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세상은 이 교훈을 거부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받아들여야 한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한 목적은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 즉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말로가 아니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말로 구원하기 힘든 남편들이 그의 행위로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말로 안 되면 행위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이웃 사람들을 말로 구원하기 어려울 때 우리의 선한 행위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게 힘써야 할 것이다.
남편을 구원시킬 아내의 행위는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말한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남편을 두려워함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자기 주인과 같이 생각하여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정결한’이라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한, 거룩한’이라는 뜻이다. 아내들은 특히 음란한 세상 속에서 단정하고 순결하며 거룩한 행실을 가져야 한다.
[3-6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 존 칼빈 주석: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 사도 베드로가 몸을 단장하는 데에 금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정죄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이 말들이 의미하는 것은 베드로가 곧이어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보아 금에 못하지 않게 값진 의복을 입는 것도 금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단순히 옷을 산뜻하고 우아하게 입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이 될 것이다. 우리는 비록 물질이 지나치게 호화스럽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만드셨고, 예술적 창조의 기술도 그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모든 종류의 몸단장을 비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헛된 죄악에 매이는 것을 헛된 죄악에 매이는 것을 책망하려는 것이다. 옷을 입는 데는 실용성과 단정함, 이 두 요소가 있어야 한다. 단정함은 절제와 겸손을 요구하고 있다. ]
여자성도들은 머리를 꾸미고 금은보석의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를 차고 값비싼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같은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 ‘머리를 꾸민다’는 원어(엠플로케스 트리콘)는 ‘땋은 머리’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머리단장이 죄악이 되므로 성도들이 머리단장을 도무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머리털은 헝클어져 있는 것보다 씻고 깨끗하고 단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 금은보석의 장신구들과 아름다운 옷들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단지, 성도들은 외적 단장에 시간과 돈을 많이 쓰며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외적 단장은 가치가 극히 작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여자성도들의 단장은 내면적이어야 한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사람의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킨다. 여성도의 내면적 인격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안정한’이라는 원어(헤쉬키오스)는 ‘조용한’이라는 뜻이다. 여자성도들은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사람의 몸은 세월이 갈수록 쇠해지지만, 이러한 고상한 인격성은 그 성질상 썩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단장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단장, 곧 고상한 인격성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인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교훈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도의 이러한 덕은 예전부터 경건한 여자성도들이 가졌던 덕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유행하는 세상 풍조에 따라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인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고 이런 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었다. 그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다. 창세기18:12에 보면, 그는 속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18:12).”라고 하였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그의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오늘날도 여자성도들은 사라처럼 선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7절]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해야 한다. 여기서 말한 지식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결혼은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과 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이다. 결혼의 목적은 첫째, 남자가 외롭지 않도록 돕는 아내가 함께 살게 하기 위함이며(창2:18), 둘째, 자녀의 출산을 위함이며(창1:27-28), 셋째, 음행 방지를 위함이다(고전7:2).
결혼에 있어서 남편의 의무는 사랑이다. 바울은 남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엡5:25). 그리스도께서 교회, 곧 택한 백성을 사랑하신 사랑은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이었다. 우리 속에는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선한 것이 없었다. 남편들은 그런 사랑으로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남편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얼굴 표정과 행위는 집안 일로 피곤한 아내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성(性)에 대한 바른 지식도 필요하다. 인간의 성은 더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이다(창2:25). 그것은 부부의 사랑을 증진시킨다. 그러나 성은 단지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관계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 음행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징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이며,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사도 베드로는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로 첫째,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며, 둘째, 그들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것을 들었다.
여성은 대체로 남성보다 몸이 연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예민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전쟁에 남자들만 아니고 여자들도 참여했을 것이다. 이런 연약한 아내들이 남편들과 자녀들을 위해 노동과 같이 힘든 집안의 일을 하며 늙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그들을 외롭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고, 귀히 여기고 보호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아내들은 생명의 은혜, 즉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이다. 아내들은 이 세상에서만 아는 관계가 아니고 천국에까지 같이 갈 반려자들인 것이다. 물론 천국에서는 부부로서의 짝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영원한 동료들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고 그들을 귀히 여길 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부부의 사이가 좋아야 기도도 잘 되지, 부부가 서로 다투고 나면 기도의 문이 막힌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의 기도의 문을 가로막는다.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의 선한 생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성도들은 가정에서부터, 결혼한 이들은 부부 사이에서부터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