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1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올 한 해도 어느덧 두 달밖에 남겨 두지 않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세월이 정말 화살과 같이 빠르네요.
화살 같이 빠르게 날아가는 시간을 잘 구속할 줄 아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낚시할 때 고기를 건져 올리듯 시간 또한 건져 올리는 것이 시간을 구속하는 것이요 기회를 사는 것이오니 오늘 하루도 주님이 주신 이 시간과 기회들을 잘 구속하여 건져 올릴 수 있게 하소서.
내 안에 가득한 육신의 정욕과 옛 사람의 소욕들은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를 새 생명으로 살 수 있도록 성령으로 날 붙들어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민수가 이태리로 갔습니다.
애비로서 출국하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마음이 좀 씁쓸하지만 부모를 떠나 외국에 간 아들이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거하며 우리 주님의 뜻을 깊이 깨달아 아는 믿음이 청년으로 세워주옵소서.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로 인하여 심한 고통 가운데 있을 유가족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깊은 무덤 가운데 있는 대한민국,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무덤의 의미를 알고 주님의 뜻을 세워가는 대한민국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41:46-57
제목 : 기근을 통하여 야곱 가족으로 하여금 양식이 있는 애굽을 바라보게 하심.
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30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47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53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55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 나의 묵상
바로의 꿈을 들은 요셉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을 하였다.
해석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대책까지 가르쳐 주자 바로 왕은 요셉 네가 총리가 되어서 이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요셉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인장 반지를 끼워주고 총리로서 마땅히 행할 수 있도록 버금 수레도 하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도 애굽식 이름인 ‘사브낫바네아’라고 지어주고 애굽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을 시켜서 완전한 애굽 사람으로 만들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바로 앞에 설 때의 나이는 30세였다.
그가 애굽 왕 바로 앞을 떠나서 애굽의 온 땅을 순찰하였다.
7년 풍년에 애굽의 소출이 풍성하였다.
요셉은 풍년인 7년 동안에 생산된 모든 곡물을 거둬들여서 각 성에 저장해 두었다.
또한 각 성읍 근처에서 나는 밭의 곡식은 각각 그 성읍에 쌓아 두었다.
이 때 쌓아둔 곡식이 너무 많아서 바다의 모래 같았기 때문에 셀 수 없어서 세는 것을 그쳤다.
한편 흉년이 들기 전 풍년 기간에 요셉은 보디베라의 딸인 아스낫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내 모든 고난과 아버지 집 생각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의미로 므낫세라 지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내가 수고한 땅에서 하나님이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의 에브라임이라 지었다.
이제 애굽 땅에 7년 풍년이 지나고 7년 흉년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온 세상에 기근이 들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애굽 온 땅에는 아직 먹을 것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애굽 온 땅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바로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이에 바로는 나에게 말하지 말고 요셉에게 말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온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요셉은 모든 창고를 열러 애굽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애굽 땅 전역에 기근히 심하게 들었다.
마침내 기근이 온 세상을 덮었으므로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모여 들었다.
7년 풍년을 통해서 요셉은 애굽의 바로로 하여금 거둔 곡식들을 비축하게 하였다.
7년 풍년이 그치면 틀림없이 7년 동안 흉년이 올 것이므로 7년 풍년 때 양식을 비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7년 풍년과 7년 흉년은 애굽에 있는 바로 왕과 요셉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따라서 애굽 외에 다른 팔레스틴에 있는 나라들은 앞으로 닥칠 7년 흉년을 알지 못하기에 양식을 비축해 둘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7년 동안 풍년이 계속되는 동안 요셉은 애굽의 모든 소출을 적당량 거두어들이고 이를 흉년에 양식을 쓸 수 있도록 비축해 두었다.
마침내 7년 풍년이 끝나고 흉년이 시작되었다.
이 흉년은 애굽만 아니라 그 주변의 팔레스틴 지역이 전부 흉년을 맞았다.
이는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곱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주기로 약속하신 땅이었기에 애굽으로 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있다.
그런 그를 애굽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양식을 끊고 양식이 있는 애굽을 바라보게 하시는 방법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사람은 육신의 목숨을 위하여 양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한두 끼는 먹지 않고 굶으며 버틸 수 있지만 이틀 사흘을 넘기면서 굶을 수는 없다.
안 먹으면 죽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국 요셉의 아버지와 그의 모든 가족을 애굽으로 부르셔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하셨다.
결국 애굽도 기근이 심해져서 애굽 온 땅에 흉년이 들고 먹을 것이 없어졌다.
하여 애굽에 있는 백성들이 바로에게 자기들에게 양식을 주어 먹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바로는 나에게 말하지 말고 요셉에게 말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이제 애굽의 백성들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양식을 사러 온다.
이제 가나안에 있는 야곱 역시 이 소식을 듣고 양식을 사러 올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육신을 위하여 양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가족이 이 양식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눈을 들어 애굽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들은 육신의 양식을 넘어 참된 양식을 먹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 양식은 우리 주님이 주신다.
(요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썩을 양식은 육신을 위한 양식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얻어먹은 오병이어를 말한다.
그 오병이어는 아무리 배부르게 많이 먹어도 시간이 좀 지나면 뒤로 나와 없어지는 것이다.
오늘 많이 먹었다고 해서 내일까지 계속 배부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썩을 양식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서 하라고 하신다.
그 썩지 않을 영원한 양식은 인자이신 주님께서 주시마고 하셨다.
개는 개밥을 먹는다.
사람은 사람이 먹는 밥을 먹는다.
내가 무엇을 먹는가에 따라 나의 존재가 결정된다.
양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개밥을 먹으면 개가 된다.
내가 사람이 먹는 밥을 먹으면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육신을 위하여 썩을 양식을 먹으면 나는 썩어질 육신을 가진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썩을 양식을 먹는 것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구하여 먹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 주시는 영생하도록 있는 생명의 양식이다.
그 생명의 양식은 우리 주님이 주시는 참떡이다.
그 떡은 생명의 떡이며 생명의 물이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 영생을 얻게 하는 생명의 떡은 곧 우리 주님의 살이요 피이다.
(요 6:54-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자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도 내 안에 거하신다.
그렇게 연합을 이루어 함께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된다.
그것이 영생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비결이다.
(요 6: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이 생명의 양식을 알지 못하였다.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인 줄 알았던 자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
그렇게 하여 젊은 나이에 제법 성공이라는 위치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제법 성공을 하여 높은 위치에 올랐지만 여전히 목이 말랐다.
이 갈급함은 어디서도 채울 수가 없었다.
그 때 신학을 하면 될까 하여 늦깎이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
부교역자로 섬기면서 나는 정말 나의 자기주장의지를 있는 대로 발휘하여 내가 원하는 열매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열매를 거두면 거둘수록 더 목이 말랐다.
야곱의 우물을 찾아다니던 수가성 여인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복음을 알게 되었고 이 복음을 듣고 지금까지 내가 붙들고 있던 야곱의 우물에서 길어마시던 물동이를 내어 던질 수 있었다.
수가성 여인이 복음이신 주님을 만난 후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와서 보라고 외친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만난 복음이신 예수를 전하고 있다.
지금은 베트남에서 정말 작은 공동체를 이끌고 있지만 이들에게 다른 것 전하지 않고 오직 존재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과 메시야적 구속행위로써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 두 차원의 복음이 복음의 핵심요소이다.
나 역시 육신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날마다 육신의 양식을 먹지만,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더 나은 양식인 영생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양식을 날마다 얻어먹는 것이 더 중요한 나의 양식이다.
이 생명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나는 죽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에 우리 대한민국의 이태원에서 151명의 압사자가 나왔다.
너무도 비통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생때같은 어린 자녀들이 군중의 무게에 못 이겨 압사를 당한 것이다.
할로윈 축제의 호불호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이런 죽음 앞에 노출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렇기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도 생명의 양식을 먹자.
그리고 그 생명의 양식을 기꺼이 나누자.
그 양식은 오직 우리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육신의 양식을 잘 배분한 요셉이 총리로써 큰 일을 감당했듯이
우리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 생명의 양식을 알지 못하여 썩을 양식만을 구하며 살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이제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양식인 우리 주님의 말씀 곧 복음을 나누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내가 받은 복음의 말씀,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영원한 나라를 현재로 누리는 자들이 하나 둘 많아지기 원합니다.
주께서 늘 함께 하셔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연합하여 늘 함께 동거하게 하소서.
오늘도 이 생명의 양식인 복음이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도 증거되기를 원합니다.
맘몬 신을 섬기는 우리 대한민국을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