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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마태오 9,1-8
사람을 치유하는 이가 나쁜 사람일 수 있을까?
“내 눈을 바라봐.”라고 하며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던 허경영 씨가 지금 성추행 등의 혐의로 피소되었습니다.
허경영 씨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없다면 왜 수많은 사람이 수백억씩 바치면서 자기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했을까요?
혹시 마귀도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중풍 병자의 치유는 곧 당신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중풍 병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며 이분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신 하느님과 같으신 분임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것이 사탄의 힘으로 이루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사탄도 능력이 있을까요?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은 러시아의 신비주의자이자 자칭 성자로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차르 니콜라스 2세의 가족과 가까워져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렸던 인물입니다.
물론 그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막을 내렸습니다.
라스푸틴이 러시아 왕권과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치유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차르의 혈우병 아들인 알렉세이에 대해 치유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아들을 끔찍이 아끼던 황제와 왕비는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치유 능력에도 불구하고 라스푸틴은 부패하고 부도덕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떻게 치유의 능력이 있는데 사악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살펴보면 알렉세이는 혈우병으로부터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어느 정도 상태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다시 아파서 내쫓았던 라스푸틴을 다시 불러드려야 했습니다.
사탄은 치유의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과 능력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사탄도 능력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에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느님과 사탄은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사탄은 무능하고 하느님은 빛이시고 사탄은 어둠이고 하느님은 사랑이고 사탄은 증오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치유의 기적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그린 마일’에 보면 험상궂은 흑인 살인범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는 살인범일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친절하고 착하고 심지어 치유의 능력도 있습니다. 사형수였던 그를 지키던 간수들은 그의 면모를 보며 사형수일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수 없어 그가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는 이의 가족에게까지 치유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서지 않습니다.
사탄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화 ‘블라인드’에 보면 자신을 피하는 못생기고 나이 많은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오게 하려고
자기 눈을 찔러 눈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내 피를 흘려야 합니다.
내 피를 흘리는 이가 타인에게 악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악하다는 말은 모기란 뜻입니다.
모기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려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보여주시기 위해 치유의 기적을 택하셨다면, 치유의 기적은 당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믿기 이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서 치유의 기적이 나오는지 살펴야 합니다.
단순하게 믿어서 스트레스가 사라져 병이 낫는 정도는 안 됩니다.
루르드처럼 과학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치유의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악한 이들에게서 이런 기적은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치유의 능력은 하나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창세기 22,1-9
마태오 9,1-8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제게 있어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실려 온 중풍병자’ 스토리에 대한 묵상은 손에 잡힐 듯이 실감이 납니다.
스스로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처지를 저도 200퍼센트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저도 한동안 꼼짝 못하고 똑바로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몸에 미사도 나가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하니, 일어나긴 하는데, 조심조심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만 5분이 족히 걸렸습니다.
양말 신는데 5분, 옷 입는데 5분, 최소한으로 씻는데도 5분...평소 1분도 안 걸리는 거리가 10분 이상 걸렸습니다.
참으로 기기 막히고 비참해지더군요. 이게 과연 사는 건가?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삶의 질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닥 체험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게 되니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지체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은혜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접하게 되다보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주님 자비 아니라면 나는 정말 비참한 존재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가왔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세상 인자하신 한의원 원장님께서 “이 몸으로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어요?
마음 넓게 갖고 조금만 참으세요. 꼭 낫게 해 드릴께요!” 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동료 인간 존재 안에 굳게 현존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고통만이 전부였던 중풍병자가 은혜롭게도 치유자 예수님과 대면하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
환우를 향한 가족들의 큰 측은지심, 그리고 반드시 일어나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치유를 향한 환우의 강한 의지가 마침내 기적을 일구어낸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춥고 어두운 긴 죽음의 터널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평화로이 구원의 창가에 앉아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생명의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비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죽음 같은 오랜 병고, 그것이 한평생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끝까지 잘 견딘 결과 이제 참 하느님의 부드러운 구원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외적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 총체적 치유, 완전한 자유와 해방감, 구원을 이 지상에서부터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질병,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하느님의 개입, 그리고 마침내 은혜로운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투병생활 뿐이었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끔찍한 고통을 주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고통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 끝도 없을 것 같은 고통 같지만, 그래서 쉽게 체념하고 쉽게 포기하는 우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십니다.
하느님 편의 예고 없는 방문, 성령께서 주시는 뜻밖의 선물인 치유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마음을 활짝 열 필요가 있습니다.
내 병세가 너무 심각해서, 의사도 내놓은 사람이어서,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내게 좋은 일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십니다.
눈물을 거두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내면과 외면 모두, 육체와 영혼 모두 온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강론>
(2024. 7. 4. 목)(마태 9,1-8)
<우리는 예수님이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2-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 또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넓은 뜻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권한’입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나를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구원받는다는 것을), 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죄의 용서’는, ‘구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이고,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병자가 실제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무슨 죄 속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여기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그의 병이 죄 때문에 생겼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튼 회개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합니다.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는, “그들의 믿음과 회개를 보시고” 라는 뜻인데, ‘그들’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병자도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병자 자신의 믿음과 회개입니다.
남들이 나를 위해서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해도, 나 자신이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기도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매일미사 책에서는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는데,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으려고 애를 쓴 것은, 그곳의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의인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창세 18장).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간청을 받아들이신 것은, 혹시라도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있다면, 그 의인은 구해 주시겠다는 뜻이지, 죄인들을 그냥 용서해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매일미사 책의 설명은 예를 잘못 든 것이기도 하고, 설명 자체도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었고, 소돔과 고모라는 그냥 멸망했습니다.
죄인들 자신들이 회개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의 기도로 용서의 은총이 내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2) 율법학자들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나는 너를 구원한다.)” 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생각 자체는 옳지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하고, 또 하느님께서 메시아께 모든 권한을 주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악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마태 28,18).>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일(사람들을 구원하는 일)과 불치병을 고쳐 주는 일은 모두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시려고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그 병자의 병을 고쳐 주고, 죄를 용서해 주고, 그를 구원하는 일은, 율법학자들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었다고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좀 더 생생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설정된 배경 같은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권능을 통해서, 당신이 용서와 구원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3) 중풍병자는, 예수님께 올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왔지만, 치유의 은총을 받은 뒤에는
스스로 일어나서 혼자 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일은 ‘구원의 시작’이고, 이제 그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스스로, 능동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회개도,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기도 덕분에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무임승차’는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