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황백이국(詠黃白二菊)
두 송이 국화
고경명(高敬命, 1533~1592)
황국만 제빛인 양 귀하다 쳐주지만
흰 국화도 타고난 자태가 아름답네
사람들은 꽃 색깔로 구별하여 보네마는
서리에도 꿋꿋한 기상은 모두 한가지네
正色黃爲貴(정색화위귀)
天姿白亦奇(천자백역기)
世人看自別(세인간자별)
均是傲霜枝(균시오상지)
국화는 노란 꽃을 더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쓴 길가의 볼
품없는 들국화도 노란 꽃, 흰 꽃이 있다. 색깔 이전에 국화는 공통점이 있다. 다
른 꽃이 다 시들고 잎마저 떨어진 추운 날, 차가운 눈과 서리 속에서 그 자태를
더욱 뽐낸다는 점이다. 인간도 그렇다. 양반만이 귀한 존재가 아니다. 천한 백성
도 모두 하늘이 점지해주신 귀한 인간이다. 신분과 계급을 나누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꽃도 서리 맞고 흐느적거리면 꽃이 아니듯 양반이
라도 절개와 기상을 버리면 참인간이 아니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데 국난의 위기를 맞아 비겁한 양반보다 나라를 지키려 목숨을 내놓은 소위 상
놈이 더 국화답다는 말을 하고 있다.
[작가소개]
고경명[ 高敬命 ]
<요약>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인·의병장. 임진왜란 때 금산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문집《제봉집》 등이 있다.
출생-사망 : 1533 ~ 1592
본관 : 장흥
자 : 이순
호 : 제봉·태헌
시호 : 충렬
국적 : 조선
활동분야 : 군사(의병)
출생지 : 전라도 광주
주요작품 : 《제봉집(霽峰集)》, 《유서석록(遊瑞石錄)》
주요업적 : 임진왜란 참전,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주에서 전사
시대 : 조선시대(선조)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高孟英)이고 조부는 형조좌랑을 역임한 고운(高雲)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 이순(而順), 호 제봉(霽峰) ·태헌(苔軒), 시호 충렬(忠烈)이다.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었으며, 1552년(명종 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공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하였고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관군 5만 명이 겨우 수천의 왜군에게 어이없게 패배하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潭陽)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고경명은 6월 1일에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하였다. 6월 13일에 전주에 도착해 큰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군을 막도록 하고, 22일에는 여산(礪山)으로 옮겼다. 27일 은진(恩津)에 도달해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점차 호남에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연산(連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금산(錦山)에 도착해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 그의 공적을 기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의 포충사(表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제봉집(霽峰集)》, 저서에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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