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0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마르코 5,21-43
쉬운 사람
10여 년 전에 저의 작은 형이 ‘투다리’라는 닭 꼬치 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일을 좀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거의 항상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장사는 매우 잘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도와주다보니 가게가 매우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쾌쾌한 냄새는 둘째 치고, 이제야 밝히는데, 주방 여기저기로 바퀴벌레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형은 그것들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서 죽였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미식거립니다.
한 번은 쥐를 잡으려고 약을 천정에 올려놓았는데 고양이만한 쥐가 그 약을 먹고 비틀거리다가
한 여자 손님이 소변을 보고 있는 앞으로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그 앞에서 손님을 쳐다보며 눈싸움을 하다가 시간이 꽤 흘러 쓰러져 죽었습니다.
손님은 나오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 그 쥐와 눈싸움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가게를 좀 더 깨끗하게 하자고 했지만 형은 너무 깨끗해지면 손님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것이 가게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손님을 포함해서 많은 손님들이 이 지저분한 가게를 계속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하나 완전한 사람이 없고 그 부족함 때문에 완전한 사람 주위에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금 부족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기가 편한 것입니다.
어차피 술을 마시고 조금은 망가지는 사람들이기에, 너무 깨끗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형은 가게도 조금은 망가진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저도 고해성사를 볼 때 매우 무서운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주일미사 빠진 것 때문에 그렇게 야단을 맞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분은 고해 중간에 십계명을 외워보라고 하고, 대죄가 어떤 것들이 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하셨습니다.
누구나 그러겠지만 저는 다시는 그 분께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 신부님들이 대부분 좀 무서운 분들 같아서 청년 때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학 가서 저의 지도 신부님을 만나고는
‘사제가 저렇게 편할 수도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너무 겸손하고 가난하시고 농담도 잘 하셔서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팬티가 보이도록 다 뜯어진 바지를 입고 오셔서 저희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옷을 입으시면서도 꼼꼼히 살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부족한 면이 저희가 편하게 그 분께 다가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성으로나 학적으로나 굉장히 뛰어나고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편하시면서도 배울 것이 많아서 그런지 저를 포함해 너무 많은 학생들이 그 분께 논문을 쓰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시나이 산에 거하시는 줄은 모두가 알았지만 그 주위의 불과 구름, 천둥과 번개 때문에 무서워
감히 범접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오로지 모세만 시나이 산에 올라가 그 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조차도 그 분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거룩하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께 어떻게 다가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분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이 피조물의 옷을 입으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너무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분께 몰려들고 또 하혈병이 걸린 여인까지 겁 없이 그 분의 옷을 만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혈병이 걸린 여자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안 되는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왜 예수님께서 이 일의 증인이 될 제자 셋만 데리고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들어가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또 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는지도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숨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밖에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예수님을 또다시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다가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까지도 같이 다니면서 그 분께 말 걸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람들이 쉽게 다가와 죄를 용서받고 병을 고치고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다가오기 쉬운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에 무리가 되는 것들은 감추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렇게 보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도 한 사제로서 가끔은 신자들이 저를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쉬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선교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다가오기 편한 사람들이 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편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30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마르코 5,21-43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 주십시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저는 요즘 보기 드믈 정도로 마음씨가 착한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착하기만 했지 모질지 못해서, 남들 시선 다 의식하고 살다보니 늘 손해 보는 삶을 살아온 특별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마음씨 착한 청년이 나름대로의 심각한 고민을 지니고 저를 찾아왔지요.
고민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얼마나 마음이 짠해왔는지 모릅니다.
그가 남 생각할 줄 아는 착한 젊은이였기에,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려는 청년이었기에 세상으로부터 받아온 스트레스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하고 소박한 젊은이, 자기 한 몸만 챙기지 않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젊은이를 오히려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 시대 왜곡된 사회 풍조나 왜곡된 교육구조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연민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이 비정한 경쟁사회의 틈바구니에 끼여 살아오느라 어깨가 축 처진 그 젊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 빨리 이 열악하고 그릇된 교육풍토가 바로잡혀지도록, 정말 이해하지 못할 학벌주의와 지역 이기주의를 포함한 그릇된 관행들이 사라지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측은지심, 연민의 마음이 유난히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두해 동안이나 하혈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는 이미 죽었던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키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고통 앞에 함께 안타까워하시고 함께 눈물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의 고통과 좌절과 방황 앞에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가련한 우리 인간들을 향하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우리의 흐느끼는 어깨 위에 놓여 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딱한 처지 앞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십니다.
결국 사도직이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섬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을 눈뜨게 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풀어주며 주님의 날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또 다시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도로 세상 앞에선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는 사람으로 서길 기원합니다.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너무 힘겨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살아볼만한 것임을 알려주는 희망의 전달자가 되길 빕니다.
희망은 힘이 셉니다.
좌절은 희망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절망도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오늘 하루이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월30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5,21-43: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고,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부인의 병을 고쳐주신다. 이 기적의 의미는 예수님은 잠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실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이다(39절).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한다. 이것은 모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회당장이 이렇게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계셨다.
많은 군중 틈에서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의사들에게 병이 낫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그의 심신은 피폐해졌고, 죽음에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생명까지도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여인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옷을 만진 것은 믿는 마음의 부르짖음이었다. 육체로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여긴 여인은 마음으로 다가가 믿음으로 하느님께 손을 댄다. 여인은 그 순간 치유되었음을 느낀다. 아드님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숨은 믿음을 보시고, 눈에 보이는 치유를 선사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건강해져라”(34절).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회당장은 믿었고, 딸은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집으로 가시어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말씀하시고 나서,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세 사도와 함께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소녀를 깨우실 수 있는 분에게는 소녀가 그저 자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41절) 뜻이다. 주님의 목소리에 소녀의 숨이 곧바로 돌아왔다. 소녀는 깨어났고 살아난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주셨다. 소녀는 되살아난 몸으로 일어났고,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었다(43절). 우리 자신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기 부당한 하혈하는 여인과도 같을 수 있으며, 잠을 자는 소녀와도 같다.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