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가 있었던 8월 29일
어떤 분들은 아직도 '한일합방'이라는 말을 쓰시는데요.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지 '합방'한 것이 아닙니다. '합방'은 두 나라가 비교적 대등하게 합쳐서 어느 정도 정치 참여의 권리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처럼), '병합'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일방적으로 '병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은 병합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지, 일본과 대등한 나라로 합쳐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한국인은 형식적으로는 일본국민이 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치 참여는커녕 국적법도 적용되지 않는 '식민지민'이 되었지요.
1909년 일진회에서는 '한일합방'을 일본 정부에 청원했지만, 일본 정부는 콧방귀를 뀌면서 '합방'이 아닌 '병합'을 해버린 것입니다. '병합'은 요즘 말로는 '병탄합병', 즉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럼 한국은 어떻게 일본에 병합되었을까요. 또 왜 그렇게 쉽게 병합되고 말았을까요. 아래 글은 제가 2012년에 페북에 쓴 글로서 제 책 <역사의 힘>에도 실은 글인데, 보신 분들이 많지 않을 듯하여 다시 한 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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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일기를 읽고 있는데, 1910년 8월 22일, 즉 병합조약을 체결했다고 한 날의 일기를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데라우치는 1910년 7월 23일 통감으로 부임하여 8월 22일 한 달도 채 안 되어 병합을 성사시키고 이어서 초대 총독이 된 인물입니다.
“오늘(22일) 오전 10시 궁내부대신(민종석)과 시종원경(윤덕영)을 불러 협약의 부득이함과 궁중의 취급 방향에 대해 충고하였다. 양인은 이를 승낙하고 갔다. 12시, 고쿠분(國分) 참여관으로부터 궁중에서의 일이 모두 제안한대로 잘 되고 있다는 내보가 있었다. (중략) 오후 4시 한국병합 조약의 조인을 통감관저에서 마쳤다. 참석자는 이완용, 조중응, 부통감, 그리고 나였다. 또 오는 29일에 이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대의를 통지해 두었다. 합병문제는 이와 같이 용이하게 조인을 마쳤다. 하하.”
마지막 부분, 즉 ‘하하’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모멸과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7월에 데라우치가 조선에 부임해올 때, 일본 정부 내에서는 병합과 관련하여 점진론과 급진론이 있었습니다. 데라우치는 급진론의 입장에서 병합 추진을 밀어붙였고, 부임 한 달 만에 이를 해치웠으니, 그로서는 ‘하하’ 소리가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우치는 어떻게 전광석화와 같이 병합을 해치울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는 8월 18일 일본에 있던 송병준을 조선으로 불러들여 이완용 내각을 흔들었습니다. 데라우치는 7월에 부임하기 전부터 이완용 대신 송병준을 앞세워 병합을 성사시키겠다는 소문을 서울 정가에 퍼뜨려서 이완용을 초조하게 만들었는데, 송병준을 실제로 서울로 불러들여 이완용을 더 압박한 것입니다. 이완용은 자신이 총리대신의 자리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웠고, 또 ‘병합의 공’을 송병준에게 빼앗기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서둘러 병합 협상에 나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데라우치는 시종원경이자 황후의 숙부인 윤덕영의 개인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하면서 그를 매수하였습니다. 윤대원 선생의 책에 의하면, 윤덕영은 이때 순종의 옥새를 훔쳐내어 이완용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한다는 문서에 도장을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하지만 ‘병합’이 이와 같이 쉽게 끝나버린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대한제국 내에 외국과의 조약을 ‘비준’하는 의회와 같은 기구가 없었던 데 있습니다. 의회가 없었기 때문에, 몇몇 대신들만의 동의로 국권이 그냥 넘어가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고종이 1898년 독립협회가 요구했던 의회 설치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당시 독립협회는 중추원을 의회와 비슷한 기구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지만,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시킴으로써 이를 사실상 거부했습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의회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깨달은 것 같지만, 의회가 자신의 권력을 빼앗아가지나 않을까 연연하여 끝내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1898년 말 독립협회를 해산시킨 뒤 1899년 「대한제국국제」를 반포했는데, 여기서 대한제국은 전제국가라고 선포하고, 외교권, 국방권, 인사권 등 모든 권력을 자신이 독점한다고 공포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박영효는 고종의 이러한 권력 독점에 대해, 이는 조선왕조 내내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조선왕조는 국왕과 신하들이 권력을 분점하는 체제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권력을 독점한 고종은 을사늑약과 병합을 막지 못했습니다.
고종은 권력을 국민과 나눌수록 국가는 강해지고, 권력을 군주가 독점할수록 국가는 약해진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