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8월4일 토. [(백)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제1독서 예레 26,11-16.24
복음 마태 14,1-12
◈ [서울]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2018년 나해 8월4일 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예비 신학생들의 성지순례에 함께 했습니다. 학생들은 신리, 솔뫼,
여사울, 한티, 해미 성지를 도보로 걸었습니다. 저는 성지순례를 왜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걸어보라고 했습니다. 의미를 알고 흘리는 땀과
의미를 모르고 흘리는 땀은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해미
성지에서는 성지를 소개하는 영상물을 보았습니다. 제게 큰 감동으로
다가온 장면이 있었습니다. 포졸들은 죽음을 앞둔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보여 줍니다. 십자가를 발로 밟으면 살려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십자가에 경배하였고, 죽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학생들에게 십자가를 밟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것이 십자가를 밟는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양심을 속이면 십자가를 밟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친구들을 도와주고, 매일 기도하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양심을 속이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밟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학생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며칠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한 형제님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건강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치료를 잘 받았고, 건강을 회복한 형제님은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고 합니다. 무심했던 가족들에게도 따듯한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30년을 함께 하는 아내를 위해서 선물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큰 고통이 있었지만, 십자가에 경배하였던 순교자들의 뒤를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형제님은 공동체와 의견 충돌이 있었고,
그만 건강이 악화하였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형제님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공동체에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원망과
분노가 있으니 건강의 회복도 늦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원망과
분노의 마음은 십자가를 밟아버린 배교자의 뒤를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십자가를 밟는 종교 배반의 길을 걷지는
않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종교 배반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밟는 것 같습니다. 체면 때문에,
욕심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우리는 양심의
십자가를 밟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십자가 경배를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픈 이웃을 위해서 장기를 기증하는 분,
아내의 생일에 작은 선물을 하는 분, 텅 빈 성당에서 조배 하는 분들은
십자가 경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아직은 세상이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였던 세례자 요한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많은 표징을 보여 주었지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억울함을 억울함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분노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하였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세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력은 지금 모두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하였고,
평화를 위해 기도했던 교회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억울하고, 속상하고,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일들을
만납니다. 그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갚으려 하면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용서와 이해, 사랑과 평화만이 나를 참된 안식으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빼앗기는 열정을 막아라
2018년 나해 8월4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빼앗기는 열정을 막아라>
복음: 마태오 14,1-12
어떤 사람은 역사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평범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지 않느니만 못하게 살다 가기도 합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분명 태어나면서 부모나 환경의 영향이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큰일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에겐 무언가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에너지의 한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에 쏟을 에너지를 다른 곳에 절대 쏟지 않습니다. 애플의 전설
스티브 잡스는 다시 일에 복귀했을 때 이전 모든 자료들은 다
폐기하고 자신의 방을 매우 단순화했습니다. 페이스 북의 저커버그는
옷 고르는데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한 가지 옷만을 입습니다.
미국 주식왕 워런 버핏은 다른 것에 정신 팔지 않기 위해 TV와 컴퓨터
등을 사무실에 두지 않고 그의 모든 시간을 신문과 책을 읽고
명상하는 데만 씁니다. 우리나라 이선희 씨도 콘서트가 있을 때는
목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의사소통할 때는 수첩에 글로 적어서 한다고
합니다. 성공한 누구든지 이 정도로 자신의 에너지 분산을 막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 시간과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 살았지만 저에게 거머리는 여전히 꿈에 나타날 정도로 끔찍한
동물입니다. 피를 빨아먹으며 살 속으로 파고 들 것 같은 느낌
때문인지 어렸을 땐 더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거머리 치료법도
있는 것을 보니 거머리가 크게 위해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거머리에게 피 조금 빼앗기는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했으면서도,
지금은 피와 같은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저기 흩뿌리며 살아온 것 같아
후회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피 빼앗기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데는 무감각했습니다.
모든 에너지는 쓰는 대로 소진됩니다. 공부하는데도 에너지가
소진되고 게임을 하는데도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게임을 하여 공부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더 생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에너지는 분명 한계
지워져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에너지를 빠져나가게 만드는, 내가
애착을 둔 모든 것들을 끊지 않으면 한 가지분야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과를 거두기란 불가능합니다.
구원만큼 우리가 에너지를 쏟아야하는 것이 있을까요? 구원은 마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들에 있는 이들은
도시로 들어가지 말고 산으로 올라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산을 오를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젖먹이 아이가 있거나 임신한 여자라면 어떻게 그 급박한
상황에서 산을 오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를 배거나
젖을 먹이는 엄마는 불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상징적인 표현인데 이 세상 것에 애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노아의
홍수 때처럼 빗물이 들이닥칠 때 노아의 방주까지 다다르지는 못할
것이란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에너지가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살모사의 새끼가 어미를 먹어치우듯 우리 에너지가
내가 집착하는 것에 의해 빼앗깁니다. 그렇게 힘이 분산되면 구원이
힘들어집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며 고통당하실
때 군중들 사이로 한 여인이 지나가는데 그 여인이 안고 있는 어린
아기가 사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그 여인은 그렇게 세상 것에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수난 당하시는 그리스도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지는 않으려 했습니다. 가끔은 그에게 찾아가 조언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것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먼저 아내에 대한 애착이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딸이 춤을 추자 헤로데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게다가 왕국과 사람들에게까지 묶여있기 때문에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요한의 목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세상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에너지는 부족하게
됩니다. 이런 애착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 에너지를
이 세상 것에 집착하며 거기에 다 써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에너지를
오로지 주님께 쏟기 위해 나의 힘과 지성과 시간을 빼앗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마지막에 끊어야 하는 것은
애정입니다. 사람과의 애정도 많은 에너지를 잃게 만듭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먼저 끊지 않으면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헤로데가 진정 자신의 가족을 사랑한 것일까요? 이용당한 것입니다.
먼저 끊지 않으면 올바른 데 써야하는 에너지도 빼앗기고 맙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성인(聖人), 때로 불꽃처럼 때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사람!
2018년 나해 8월4일 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성인(聖人), 때로 불꽃처럼 때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사람!
열정적이고 치열한 삶을 사시다가 이제는 빛나는 하늘의 별이 되신
성인(聖人)들 대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셨을까? 많이 연구도 하고
묵상도 해봤습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또 요모조모 살펴보니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성인들은 우리 보다 좀 더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좀 덜 고리타분한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삶을 좀 더 비범하게
사신 분들, 남루한 인간 조건 속에서도 품위를 지킨 사람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희와 충만의 삶을 엮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지리멸렬한 삶이 아니라 때로 불꽃처럼,
때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사람들이 바로 성인이더군요. 이것 저것
다 기웃거린 것이 아니라, 정작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오직 주님,
그분을 향한 영적 여정, 이웃을 향한 복음적이고 이타적인 삶에 깊이
헌신하고 몰입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신부님의 성화 여정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그분 성덕의 가장 두드러진 비결은 무엇일까요?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충실, 그것이 그분
성화의 비결이었습니다.
본당 사제로서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고
경건하게 봉헌하는 것, 그리고 성체성사에 앞서 꼭 필요한 또 다른
성사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을
충실히 행함으로 인해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비안네 신부님에게 성모님은 어머니요 친구요 연인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성모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성모상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품안에 작은 성모상을 모시고 다녔습니다. 임종 직전 남긴
말을 통해 성모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이 목각 성모상을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평생토록 밤낮없ㅇ 이 성모상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도 이 성모상이 옆에 없으면
편안히 잘 수가 없었습니다.” 성모님을 향한 자신의 강렬한 애정과
신심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모님은 저희 첫사랑입니다. 저는
그분을 알기도 전에 벌써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성모님을 향한 사랑은 묵주기도를 향한 그의
사랑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그는 조금이라도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즉시 묵주를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르스 본당 마당을 산책하면서
더 없이 행복한 얼굴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본당 신자들도 자연스럽게 묵주기도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낡은 수단 주머니 안에는 언제나 여러 개의 묵주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신자들이 항상 묵주를 지니고
다니기를 원했습니다. 신자들을 만나면 언제나 먼저 묵주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봤고 없다면 즉시 지니고 있던 묵주를 선물로 건네며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도록 인도했습니다.
여차하면 모금을 시작하고 건축이나 리모델링을 좋아하는 우리
사제나 수도자들이 눈여겨볼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한번은 아르스
본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불행한 소녀들을 위한 작은 기숙사 건축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저 같았으면 얼씨구나 하고 즉시
설계사를 부른다, 시공업체를 불러 공사에 착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님은 언제나 신중했습니다. 꼭 필요해 보이는 건축이라
할지라도 시작하기에 앞서 아주 신중한 식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식별작업이란 다름이 아닌 성모님과 함께 하는
9일기도였습니다. 본당 신자들과 함께 정성껏 9일기도를 바치면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성모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9일기도가 완전히 끝난 후 본당 신자들과 함께 공사를 시작할 것인가
아닌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강론은 단순하지만 성모님을 향한 그의 극진한
효심과 깊은 신심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저의 진정한 사제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주셨으나
저는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십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신뢰심을 지니고
그분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야 합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위해 다녀야 할 안전한 통로이며 지름길이시고 티 없이 깨끗하고
빠른 길이시므로, 성덕으로 빛나는 영혼들은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마태 14,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8월4일 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마태 14, 10)
헤로데의 한 순간 유희를 위해 요한 세례자가
어처구니 없는 희생을 당합니다.
꺼리낌 없는 사람의 욕망이 참으로 어이없고 무섭기만합니다.
욕망의 끝은 언제나 파멸뿐입니다.
아마 사람보다도 더 잔인한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생명과 참으로 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명으로 돌아가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영원한 삶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공장에서 마음대로
찍어내는 기성제품이 결코 아닙니다.
생명을 키우는 사람과 생명을 지키는 사람과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거나
이웃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생명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목숨을 살리는 그것이 참된 삶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메기 효과! : 오늘의 능력 말씀
오늘은 “메기 효과”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무엘상 18장 29절 말씀에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좋은 환경보다는 가혹한 환경이 문명을
낳고 인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며 이른바 ‘메기 효과’를 자주
인용했습니다.
먼 바다에서 청어를 잡아 육지까지 운반하다 보면 거의 다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조에 천적인 메기를 넣었더니 청어들이 살기 위해서
도망치다가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싱싱함을 유지했습니다.
다시 말해 메기 효과는 강한 경쟁자 덕분에 약자의 활동 수준이
높아져 전체 분위기가 활성화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을 보면 다윗이 다윗 되게 한 것은 평생에 다윗을
대적했던 메기 역할을 했던 사울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메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매사 시비를 걸고
따지고 드는 사람이 꼭 한 둘은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로
인해 인내와 눈물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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