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현세자는 왜 급살 되었나
소현세자의 급작스러운 죽음
1645년(인조 23) 음력 4월 26일 인조의 장남이자 왕세자였던 소현세자가 학질로 진단받은 지 3일 만에 창경궁 환경당에서 죽었다. 소현세자의 시인 염습에 참여했던 그의 서이모의 입을 통해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이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사인은 학질이라고 할 수 없다. 실록의 언급과 같이 시신에 나타난 모습은 전형적인 독살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실록은 시신의 상태를 인조가 몰랐다고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한 나라의 왕세자가 죽었는데 시산에 나타난 사인이 은폐되었다는 투의 설명은 오히려 큰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의문의 사망 이후 소현세자의 아내가 사사 되었으며, 처가는 철저하게 몰락했고, 아들들은 어린 나이에 제주로 유배되어 그 중 둘은그곳에서 요절했다. 이러한 결과를 낳은 소현세자의 죽음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는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어야 했고, 그의 주변 인물들은 왜 핍박받아야 했을까? 소현세자가 세자로 책봉되어 죽기까지의 사건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대명의리론과 호란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정세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전란을 통해 조선과 명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압록강 북쪽의 건주위 여진 추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한 것은 동아시아 세계질서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1616) 후금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명과 충돌했고, 이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일으켜 후금의 배후를 압박할 것을 주문하였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은 임진왜란의 피해를 수습하면서 명의 은혜로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규정하였다. 사실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명의 참전 이외에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에게서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공로와 잘못을 따지게 된다면, 전란을 통해 드러난 지배층의 무능 역시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선의 지배층이 명의 은혜를 강조한 것은 의리와 명분을 강화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어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명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과 명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별도의 문제였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외교를 펼치며 임진왜란의 피해를 수습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명의 요구에 따라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원병 13,000명을 보냈지만, 이들이 만주의 심하에서 후금에 항복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강홍립의 항복이 광해군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중국 장수의 명령에 따르기보다는 패하지 않을 곳에 있으라”라는 지시를 했던 것에 비추어볼 때, 비록 출병은 했지만 후금과 대립하는 상황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명과의 의리를 주장한 다수 관료와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과 광해군의 입장을 잘 설명하는 것이 다음의 인용문이다.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자신을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이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광해군은 의리명분에 사로잡혀 현실감각을 잃어 버리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광해군의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광해군 대에는 국제 정세 이외에 국내 정치에서도 심각한 대립양상이 있었다. 광해군 스스로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형인 임해군과 선조의 적자인 영창 대군을 죽이고 선조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정국이 혼란스러웠으며, 대북계열이 정치를 주도하여 정국에서 소외된 서인과 남인의 불만이 높았다. 이에 이항복 계열의 서인들이 주도하여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옹립하는 1)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들은 어머니를 폐위하고 동생을 죽였다[廢母殺弟]는 윤리적인 이유와 함께 광해군이 오랑캐와 밀통하여 명의 은혜를 배신했다는 것을 쿠데타의 이유로 들었다. 자연히 인조 대의 대외정책은 명에 대한 사대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이에 따라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할 수밖에 없었다.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라는 걱정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조선이 후금과 일전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강경책을 펼 수도 있었지만 인조 대의 정국 주도세력은 별다른 준비가 없었다. 오히려 쿠데타 이후 조선의 국방력은 약화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반정공신 사이의 알력 때문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북방 방어의 주요 축선인 서북 지역의 군사력은 거의 와해하였다. 취약한 국방력을 보완하려는 조치는 시행되지 않았고, 광해군이 예견한 ‘큰소리’만 오가고 있었다.
이와 달리 후금에서는 조선에 유화적이었던 누루하치가 죽고 강경한 태도의 태종이 즉위하였다. 태종은 요서지역으로의 진출을 견제하던 모문룡군과 인조반정 이후 척화론이 대두하던 조선을 제압하여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1627년 정월에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였다. 후금군은 의주와 정주를 거쳐 안주를 함락하고 11일 만에 평양에 입성하였고 조선 정부는 강화 이외의 다른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후금 역시 명의 배후 공격을 우려하여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조선의 처지에서 정묘호란의 패배로 말미암은 피해와 굴욕적인 화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 결과 승명 사상과 척화론이 더욱 강화되었다. 후금 역시 전쟁 이후 기대한 경제적 이익이 실현되지 않았고, 조선과 명의 관계가 계속되는 데에 불만을 가졌다. 이러한 사정으로 정묘호란 이후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더욱 악화하였다. 후금에서는 양국 관계를 형제에서 부자관계를 바꿀 것과 세폐를 증액할 것 등 무리한 요구를 하였으며 월경이나 탈출 등의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한편, 후금은 그 와중에서도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여, 1636년 4월에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태종은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양국관계는 단절되고 병자호란(1636)이 일어났다.
1636년 12월, 청은 12만 8천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다시 공격하였다. 청군은 심양을 출발한 지 10여 일 만에 한양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였지만 지방 군의 구원이 막히고, 비축된 식량마저 떨어지면서 곤란을 겪었다. 남한산성 안에서는 강화를 주장하는 주화파와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는 척화파가 서로 맞서다가,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화로 논의가 기울었다. 그 결과 조선은, 청과 군신의 의를 맺으며 명과의 관계를 끊고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는 등의 조건으로 청에 항복하였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여기에 대한 반발도 많았다. 그러나 세자는 “자신에게 동생이 둘이고 아들이 하나이니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비록 적진에서 죽은들 어떻겠는가.”라는 말로 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때 인질로 끌려간 이들은 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과 대소 관원 180여 명이었다.
소현세자의 인질 생활과 서학
소현세자는 1637년 2월 8일에 출발하여 4월 10일 심양에 도착해 심관에 거처했다. 애초 세자가 조선에서 끌려올 때 인조는 흉노에게 붙잡혀 19년간 고초를 겪으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은 한나라 소무처럼 그 역시 청에 대한 적개심을 잃지 않기를 요구하였다. 굴욕적인 패배에도 조선에서는 의리 명분론이 더욱 강해졌던 것이다. 반면 청 조정은 세자를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조선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청에서는 한편으로는 제사나 명군의항복 등의 의례에 세자를 참여시켜 자신들의 힘과 달라진 세계질서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세자는 심양에 거처면서 청과 조선 사이의 각종 사무를 처리하였다. 조선 사신의 접대나 인질의 송화, 기타 정치․?군사 등의 문제에서, 양국 간의 교역 심지어는 청 황족과 고관들의 개인적 요구에 이르기까지 세자가 처리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었다. 더구나 조선에서는 정부차원에서도 명과 교섭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반청을 위한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는 사건까지 있었다. 즉 패전에도 척화론은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청도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고척화론을 주장하는 관료들을 잡아 가두기도 했다. 한편, 청 역시 명을 공격하는 데 필요한 군사와 물자를 조선에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세자는 심양에서 이러한 양국 간의 심각한 갈등을 조정해야 했다.
조선에서는 패배에도 의리명분에 입각한 척화론이 강화되었지만, 심양에서 매일 청 조정과 상대해야 하는 세자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행동이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었던 만큼, 청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인질로서 행동에 제약이 따랐던 그는 양국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청의 황족이나 고관들과 친교를 맺어야 했으며 이에 따르는 비용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비용은 세자 스스로 마련하기도 했지만, 상당 부분은 국내에서 조달했다. 한편으로는 영리활동을 통한 세자 내외의 축재가 문제가 되었다. 가뜩이나 반청감정이 높았던 상황에서 이러한 행동은 곱게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실록에 실린 세자의 사망기사에서도 세자가 이익만을 추구하였고 모든 행동을 청나라 사람이 하자는 대로만 했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청에서 인조를 폐위하고 세자를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세자의 축재 역시 반역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실 내부에서도 세자와 소원했던 인조의 총희 소용 조씨가 세자를 모함하면서 인조의 의심은 높아갔고 자연히 부자 관계는 벌어지게 되었다.
한편, 소현세자의 인질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천주교 선교사와의 교류이다. 1644년 청이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자 소현세자도 이를 수행하여 북경에 머물렀다. 이 기간에 그는 아담 샬 등 선교사와 교류하면서 천문대를 찾았고 그들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세자가 북경을 떠나게 되자 아담 샬은 그에게 천문역학서 등의 서학서와 지구본, 천주상 등을 선물했다. 세자는 아담 샬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면서 천주상만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세자는 귀환할 때 중국인 선교사를 데려가 달라는 아담 샬의 요청을 수락하고, 이데 더하여 서양선교사를 대동하겠다는 제의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가 받은 서적을 돌아가 출판․?보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아담 샬은 서양인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아직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영세받은 중국인 환관과 궁녀 몇 명이 세자를 따르도록 하였다.
서학에 대한 세자의 입장은 당시의 통념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이었다. 세자가 보낸 편지의 원문이 서양어로 의역되는 과정에서 섞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이었고, 더구나 서양 과학은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작고한 김용덕 교수는 만약 소현세자가 즉위하였다면 자주적 근대화까지 가능했을 국사 상의 대사건이 되었으리라고 전망한 바 있다. 역사의 가정은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고, 그가 즉위했더라도 당시 조정 안팎의 척화론 앞에서 과연 서양 학문의 수용이 가능했을까는 의심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세자의 개방적인 사고와 좌절되었다는 것은 아쉬운 일임이 틀림없다. 세자가 가지고 들어온 아담 샬의 천문역법서가 김육 등의 노력으로 수용되어 시헌력을 시행하게 된 점을 생각하면 그의 즉위가 폭넓은 서학 수용 나아가 근대 과학 도입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좌절은 안타깝다.
인조와의 갈등과 급살의 이유
1644년 청이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명은 실질적으로 멸망하였다. 이제 청은 세자를 볼모로 잡아둘 필요가 없어졌고 이에따라 세자는 다음 해 1월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세자의 귀환을 반기지 않았고 귀국한 세자에게 대신들이 진하하는 것도 막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박대당하던 세자는 귀국 후 두 달이 조금 지나 급사하였다.
소현세자의 시신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지만 인조는 사인을 확인하기는커녕 그를 서둘러 입관시키는 데 급급했다. 그리고 왕세자의 상에서 입어야 하는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고집하여 관철했으며 소현세자를 대신한 왕세손을 정하자는 논의도 차갑게 거부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상식인 종법을 무시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의 주변 인물들은 처참하게 몰락했다. 인조에 대한 저주 혐의로, 소현세자의 처 강씨가 사사 되었고, 이외 함께 강빈의 친정 혈족들도 죽임을 당했다. 세 아들은 12세, 8세, 4세의 어린 나이도 모두 제주도에 유배되어 둘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막내만 살아남았다. 장남이 요절했다면 며느리와 손자들을 가엾게 여겨 돌보는 것이 상정일 텐데, 그렇게 참혹하게 대한 것은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으리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며 그러므로 독살 여부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주변 정황으로 판단할 때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소현세자가 조선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조는 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의구심이 들고 있었다. 여기에 소용 조씨나 김자점 등의 충동으로 세자를 더욱 적대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세자의 생각이 조야의 일반적 감정과는 달랐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세자는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청이 중국을 석권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만큼 현실적인 인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조야를 막론하고 반청의식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구분은 있을지언정 청에 대한 적대감과 명에 대한 의리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통적이었다. 즉 세자가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즉위해서 반청의식으로 무장한 신하들과 함께 국사를 논하기는 어려웠다고 보아야 한다. 승명반청은 한편으로 인조반정 이래의 명분이었으며 호란에서 처참하게 패한이후에도 조선의 지배층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이유였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가 비록 왕세자라 할지라도 제거될 수밖에 없었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결국, 소현세자의 죽음은 직접적으로는 인조의 왕위 찬탈에 의한 의심과 증오에서 비롯되었으며, 넓게 보자면 당시 지배층을 지탱하던 의리명분에서 벗어난 데 대한 응징이었다. 그가 죽은 뒤 북벌론으로 유명한 봉림대군이 인조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소중화론이 확산하였고 명분론적 사고가 강화되면서 조선후기 정치사상계는 경직되었다. 그 결과 주체적인 대외교섭이나 국외 문물도입을 시도하지 못하고 타율적인 개항을 맞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_신항수
소현세자라고 하면 선뜻 ‘누구’라고 떠올리지 분들이 많으실 거로 생각해요. 사도세자는 알아도 소현세자는 그처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듯합니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던 소현세자에 대한 글을 올리는데 제가 쓰면 정리가 안 되어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신항수씨가 쓴 글을 가져 왔습니다.
새까맣게 변한 시신과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모두 피가 흘러나왔다는 기록을 보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저번에 한 번 올린 글에 보시면 무원록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거기에도 시신을 보고 사망 원인을 구분하는 부분이 있을 정도거든요. 무지해서가 아니라 저런 시신의 상태를 봤을 때 분명히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그 당시에 제대로 된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너무 안타까워요. 왕 다음으로 서열이라고 굳이 표현하자면 2위인왕세자가 그런 형태로 죽었는데 말이죠.
사람이 죽었을 때 검게 변하는 경우에는 급사했으면 나타납니다. 보통 심한 구타로 말미암은 사망이나 약물에 의한 사망에 많이 나타나고 급성질환 탓인 사망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실 왕세자가 심한 구타 때문에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요. 실록에 기록된 세자의 사망원인은 학질이라고 해요. 학질은 말라리안데요. 제가 예전에 모기의 생태-_-에 관해서 조사를 한 적이 있어서 아는데 우리나라 말라리아는 온대성 말라리라 여에서 특별히 치명적이지않고 원래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여하튼 어지간해서 사망에 이르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단기간에 사망할 이유도 없거든요.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3일 만에 (기록상) 학질로 말미암은 사망의 가능성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거든요. 그러면 남는 가능성은 아 그리고 시체가 심하게 부패했을 때도 시신의 색이 검어질 수 있으나 이 경우의 가능성은 제할 수 있는 이유가 그 당시 세자가 죽은 전후로 전국에 서리가 내렸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고 합니다. 이상저온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세자가 죽은 지 바로 다음날 검게 부패했을 일은 없겠죠. (실록에 사관이 기록한 것은 염을 본 사람의 증언을 보고 기록한 것인데요, 염은 세자가 죽은 바로 다음 날 이뤄졌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사실 이 일은 어떻게 확인할 수 없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렇다는 의견을 주입하자는 건 아니고요. 예를 들어서 악녀의 대표로 이야기되는 장희빈만 해도 좀 시선을 달리해서 보면 정치에 희생당한 여자일 수도 있는 것처럼요. 소현세자도 어쩌면 뛰어난 외교능력을 갖춘 왕이 될 수도 있었죠.
서른넷. 건강했던 소현세자의 죽음. 그 당시 사인을 밝히라는 상소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왕이나 왕세자가 죽었을 때 담당 어의를 추궁하는 것인데요. 허준이 이 때문에 유배를 가기도 했죠. 여하튼 그 당시에 이형익이라는 의원에게 의혹이 집중됐는데요. 위 글에서 언급됐지만, 이 남자는 소용 조씨 -세자,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함-의 천거로 뽑힌 인물입니다. 헌데 다른 관리들은 이형익의 평소 행실이 망령되고 괴이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그의 국문을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는 환경 전(세자가 머물던 곳)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는데, 이는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라도 죽일 수 있었고 또한 그가 소용 조씨의 사가에 머물던 의원이었으며, 심지어 그가 천거로 뽑힌 것은 불과 두 달 전이라고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자 죽음에 배후가 있다고 하여 그것을 파헤치자는 관리들의 주장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조는 국문을 하기는커녕, 최소한의 책임도 묻지 않고 넘어갔다고 해요. 게다가 장례를 진행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들이 계속 됐는데요, 절차가 모두 축소되어 일반 사대부와 같은 3일장이었고, 상복 역시 1을 입는 것을 3개월만 입게 했으며 자기 스스로는 7일 만에 벗어 버렸다고 하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염습 과정에도 관료들이 참여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는데 세자는 관료들이 참가하는 것을 막았고, 종친 3명 외에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염습 후에 사흘 만에 입관을 했다고 해요. 또한, 세자는 서삼릉 언덕에 묻혔는데요. 다른 왕족의 무덤과 달리 가파른 언덕에 조성되었고, 문인석과 무인석이 4개씩 세워지는데 문인석 2개만 있어요. 또한, 세자의 무덤에는 보통 -원이라는 호칭이 붙는데 이 또한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반 사대부의 묘로 격하시켜 매장한 것이죠.
또한, 세자가 사망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세자 죽음에 대한) 진상을 캐던 세자빈 강씨를 폐출하고 사사했는데 실록에서는 죄가 아직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으로 법을 집행하여 민심이 수긍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증거가 전혀 없었고, 신하들도 증거가 없으니 무혐의, 혹은 강빈을 죽이진 않아야 한다고 했으나 인조는 끝까지 우겨 강빈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끝내는 사사시켰죠.
세자의 죽음 이후에 인조가 한 행동들은 사실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봐요. 염습과정만 해도 원래는 모두 참여하는 것이 관례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막고 종친 3명 외에는 올 수 없게 했다는 것부터 그렇습니다. 인조가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면 인조는 세자가 독살당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싶더라고요. 또한, 봉림대군을 책봉한 이유도, 이해되지 않는 거죠. 소현세자의 맏아들이 있음에도 그를 유배하고 죽게 했다는 거죠. 장자 승계가 보통인데 그것을 바꾸면서까지 했다는 것은 의혹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죠. 조선시대 야사에는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벼루를 인조에게 내밀자 인조가 화를 내며 벼루를 던져 거기에 소현이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는데 물론 이것이 사실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 당시 민심에서도 세자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는 얘기겠죠. 세자빈 강씨만 해도 그 당시 나인들이 모두 곤장을 맞고 죽어 가면서도 결백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전에 그러니까 독살 혐의를 받기 전까지 강씨는 후원의 별당에 유폐되어 마음대로 출입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고 하고 세자빈이 기거하는 방에 구멍을 뚫어 음식과 물을 넣어주게 하였으며 시녀 한 명만이 시중들게 했다고 합니다. 궁중 사람들에게는 강씨와 말하는 자는 벌을 주겠다고 하기도 하여 궁과 그녀와의 왕래는 거의 끊긴 상태였다고 해요. 이런 상황에서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그녀가 과연 독을 넣을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억측과 소용 조씨의 말만 믿고 법을 집행한 것이죠. 소용 조씨는 정3품이던 소용에서 정2품인 소의가 됩니다 -_- (소용 조씨는 효명 옹주를 낳았는데 인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하죠. 실제로 김자점의 아들과 혼인을 하여서 두 사람이 결탁하게 되고 실제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뭐 떠도는 이야기죠;) 실록에서는 소용 조씨를 “성품이 엉큼하고 교사스러워서 뜻에 거슬리는 자를 모함하기가 일쑤이므로 궁중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소현세자빈 강씨가 가장 미움을 받아 참소와 이간질이 날이 갈수록 심하였는데, 강문성이 귀양가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강씨에게 화가 미칠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죠. 결국, 강빈은 죽게 되었고 당시 대사헌 홍무적은 강빈을 죽일 수 없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사직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세자는 처음에는 심양관에서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했고 조선의 사신들과도 만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온갖 협박에도 삼전도의 치욕을 기억하며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고 인질 생활 3년이 지날 때까지도 그는 청 황제의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청의 요구를 권한 밖이라고 거절하곤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만주족은 조선인 포로를 팔아서 포상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인 포로가 약 50만 명이 끌려갔고 소환하는 몸값이 너무나 비쌌다고 해요) 세자는 이러한 생활을 보면서 인질로 지낸 지 중반이 넘어갈 즈음부터 바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우선 둔전에 농사를 지어 생활비를 조달하고 자금을 만들었는데요. 여기에는 사실 강빈의 수완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 당시 청 사람들은 농사도 잘 짓지 못했으며 전쟁 중이어서 물자가 부족했는데요. 이런 농작물을 통해 이익을 얻었고 그러면서 청 태조의 아들인 도르곤을 비롯한 청나라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도르곤과 친교를 맺은 이후에는 각종 연회에 참석하면서 현안을 논의하기도 했으며 선물을 주고받기도 해요. 사실상 그 당시 조선 상황으로 봤을 때는 그런 세자를 두고 보지 못했겠죠. 삼전도의 굴욕을 준 오랑캐와 친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그런 이유로 세자는 사냥만 즐기며 학문을 전폐하고 오직 돈 버는 것에만 열중한다는 인신공격이 이어지기도 했고, 급기야 인조는 첩자를 보내서 세자를 감시하기도 했다고 해요.
인조에게 세자는 아들이기 전에 아마 정적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어요. 당시 청에서는 조선의 태도 탓에 계속 그런 식이면 왕을 바꾸겠다고 나왔는데 과거 원이 실제로 왕을 볼모로 잡혀 있던 세자로 교체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 같고요.
모든 일은 이렇게 저렇게 이런 방향으로도 보고 돌려도 보고 해야 하는 거 같습니다. 이후 정조 때 와서야 겨우 세자가 당시 들고 왔던 책들이 이용되었죠. (수원 화성을 짓는 데 이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세자가 죽은 지 수백 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또한, 숙종은 강빈과 소현세자를 측은하게 여겨 이러한 글도 지었다고 합니다.
혼령 모신 사당을 돌아보니 더욱더 처연하구나!
세월은 흘러 광음은 칠십여 년인데 궁주를 어찌하여 아울러 받들지 못하는고
세상 사람 그 누가 마음으로 항상 가련하게 여기는 줄 알리오.
숙종은 또한 세자빈 강씨의 위패와 시호를 회복시켰으며 대신들도 모두 옳다고 했다고 해요. 세자빈을 복위시킨 후에는 숙종 스스로 제문까지 지었다고 합니다. 또한, 묘도 소현세자의 묘 왼편으로 이장하여 넋을 위로했다고 해요. 비록 70년이 지난 후이기는 했지만요. 역사는 되돌릴 수는 없으므로 지금 와서 가정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소현이 그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아마 분명 상당히 다른 양상이 되었겠죠. 뭐 이거야 뭐라고 해도 마찬가지겠지만요.
첫댓글 사도세자의 고백 읽었는데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네요. 점점 역사서를 믿지 못하겠어요, 뭐가 진실인건지.
뭐가 진실이고를 떠나서 이런 측면도 있다 뭐 이런 거 아니겠어요. 보통 다들 인현왕후는 착하고 장희빈은 악하다라고 인식하게 된 것처럼요. 광해군만 해도 실질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면도 많았다고 하고, 의자왕도 삼천궁녀로 대표되면서 여색만 즐기는 왕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는 학설도 있는 것처럼요. 여러가지 다 보면서 그냥 스스로 어느 정도 의견을 갖고 있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너무 안 믿지는 마시라규 역사서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 인식의 문제도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죠 뭐 ^^;
역사가 긴 만큼 사서들도 정말 많았지만. 여러번의 전쟁도 있었고, 일제도 있었고. 거의가 소실됐죠. 5천년 역사에 단 두권의 역사서만 권위가 있다는건 정말 아이러니... 우리나라에 제대로 남아있는 사료들이 없으니까, 하나하나 찾아내면서 지금까지의 역사서들이 지금 하나씩 뒤집어지는거 뿐이지. 역사서 믿으셔도 되요. 보실때 그냥 지금의 견해라고 보심 될듯? 게다가 승자의 역사니 역사는 왜곡되는건 당연하다구. 우리도 일제치하때 얼마나 왜곡당했나요. 20만원의 서적들이 탔는데.. 외규장각도 프랑스놈들한테 개털렸구. 또 승자의 역사다 보니.. 발해의 역사가 남아있지 않은것도 다 왕건탓아니냐긔..
ㅋㅋㅋ 급왕건탓으로 마무리하시긔. 역사서라고 해도 참 어쩔 수 없죠. 승자 혹은 어쨌든 저자의 견해가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부분이고 ~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지 않았다고 해서 견해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제가 이 글을 올린 것도 사실 저는 솔직히 인조가 죽였다- 혹은 인조가 분명히 연관이 있다 아니면 알면서도 다 묵과했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올린 거죠.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사실들이 역사속에 그냥 묻혔을 거 생각하면 장본인들이 얼마나 원통할지. 알고 싶어도 이건 뭐 의존할 역사서가 별로 없으니 ㅠ
댓글 더 길어질까봐 왕건탓으로 마무리 했다긔 ㅋㅋㅋㅋㅋㅋ 그니까요 ㅠㅠ 진짜 속상함. 사도세자의 편지 이제서야 우리나라에 돌아온거 보고 나 쓰러질뻔했다긔. 저런식으로 우리나라의 귀중한 사료들이 얼마나 외국을 떠돌고 있을지 생각하면 홧병나 죽겄다구 ㅠㅠ
전 진짜 그런 거 보면 너무 승질나서 눈물나요 진짜 ㅋㅋ 아니 내가 뭐 원대한 애국심을 품고 역사적인 사명을 갖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거 특히 우리나라 것들 남의 나라에서 떠도는 거 잘났따고 지네가 전시하고 있는 거 보면 진짜 눈이 뒤집힌다규 ㅠ 지금도 급흥분하고 있긔. 역사라는 게 달달달 외우는 게 아니라 (저도 외우는 거 년도 외우고 이런 거 못함) 적어도 관심을 갖고 알기는 해야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더 필요하다고 하는 거구 ㅠ 나 이 게시물 내가 올려놓고 떠날 수가 없는거돠
난 내가 올린것도 아닌데 떠날 수 없는거다 ㅋㅋㅋㅋ 님말 구구절절 다 옳다구!! 저도 역사학도도 아니고 내가 나라를 위해 뭘하는것도 아니지만 정말 그런것들 보면 화가 치민다구!!!!!!! 특히 프랑스!!!!!!!!!! 지네는 나치가 가져간 유물이나 보물 돌려주라고 하면서 왜 직지랑 외규장각 문서들은 먹고 입싹 씼냐긔!!!!!! 내가 구덴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 20세기의 큰사건중에 하나로 있는거보고 심장이 멎는줄알았다긔!!!! 이 도둑놈들!!!!! 솔직히 우리나라 사람들 역사에 관심너무 없다구 ㅠㅠ 일본젊은이들 욕할게 아니라 우리부터가 관심이 정말 없어요. 일제치하때의 일은 우리가 당한거고 얼마 되지 않은거라 관심많고
눈물도 흘리지만 625가 언제 일어난지 모르는 사람들 너무 많다긔 ㅠㅠㅠㅠㅠㅠㅠ 역사에 너무들 관심없으셔. 교육부터가 국사,근사가 선택이라니 이건 뭐 스스로 막장이 되겠다는거ㅏㄷ..ㅠㅠㅠㅠㅠ 휴 간만에 급흥분했다긔. 님 보고 놀래시겠다긔. ㅈㅅㅈㅅ... 암튼 글 정말 잘봤어요!!!!! 수고하셨삼 ^^
그러게요. 진짜 국사가 선택과목이라는건 말도 안돼지 않아요? 얼마전에 6 25가 몇년도인지 모르시는 분들도 의외로 많아서 깜짝 놀랬어요. 그분들을 비난하려는게 아니라 그냥 안타까워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국사에 신경을 안쓰는가 싶기도 하고...요즘 뭐 제 동생 친구들 사탐 선택하는거 보면 국사 어렵고 외울거많다고 거의 선택안하던데 꼭 하라고 말해주고싶더라니까요. 저도 뭐 많이 아는건 아니지만 어렸을때부터 관심이 있어서 약간의 지식이 있기에 망정이지...
저도 어릴때 책을 좋아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 쪽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고 그래서 전 너무나 자연스럽게 흥미를 갖게 된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인 거 같아요. 친일파 청산 문제를 지나간 일 왜 끄집어 내느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할 말 다 했죠. 이빨에 김 낀 님 ㅋㅋ 20만원의 서적이 불에 탄 거냐긔 건물값이 더 나오겠다규 ㅋㅋㅋㅋㅋ 아깐 왜 몰랐는지 지금 보여요 아깐 흥분해서. 그래도 전 유럽애들 나치패전 이후에 전후처리하고 청산한 건 우리에 비하면 굉장히 바람직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프랑스도 적은 수치였는데도 2백만명이 조사받고 1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체포됐다고 하잖아요. 사형만 수천;
다른 국가도 보면 덴마크나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이런 애들은 과거 청산 우리에 비하면 정말 잘 한 거 같아요. 노르웨이는 인구 십만당 600명 넘이 넘는 사람들이 처벌받은 격이라고 하더라고요. 전에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그러시던데요 우리들이 죽고 나면 다 잊히니까 그러길 일본놈들이 기다리는 거다 뭐 이런 말씀 하시더라고요. 사실 정말 그렇게 다 잊히게 되면 그 분들 얼마나 억울하시겠어요 ㅠㅠ 일본놈 쉐키들 지들 북한가서 죽었다고 난니 난리 전국이 들끓더니... 수백만 희생시켜놓고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니 기가 차죠 ㅠㅠ
예전에 소설을 읽었는데, 인조가 자신의 정치적인 거 때문에 죽였다는 가정하에 쓴 글이었는데, 꽤나 설득력이 있더군요. 물론 아닐수도 있지만...
이것도 그래요. 전 인조가 직접적으로 죽인 건 아니라고 해도 사실을 알았음에도 묵과했다고는 생각하거든요. 정황으로만 미뤄봐도 (더 이상의 파악은 현재에 사는 우리들이 할 수 없는 부분이고) 실록에서 사관이 저렇게 까지 표현했을 정도라면 시신에는 분명 뭔가 이상한 점이 많았단 건데 그걸 어떻게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는지. 염습에도 대신들도 다 참여하지 못하게 한 것도 그렇고요. 의혹이야 품으려면 많죠; 어쨌든 인조가 소현 세자를 썩 아끼거나 한 건 아닌 거 같아요 당시 조선의 사회상으로 봐서 실제로 청에 우호적이 된 세자 (그렇게 보였겠죠)를 곱게 보지도 않았을 테고요. 그건 어느 정도 이해하는 부분이에요.
인조도 사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고 그 명분때문이라도 친명인거였고 그 당시 조정에서 다 '친명'이었는데 세자가 볼모로 가더니 청에 우호적으로 돼서 청의 세력자들하고 다니고 신문물을 들여오려하고 사실 그리고 소용 조씨 모함도 한 몫했을 거 같삼. 뭐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김자점이랑 유착해서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거에 (자식 중 한 명은 영의정이랑 혼인했고 또 하나 효명 옹주는 인조의 유일한 딸이었는데 인조가 엄청 아꼈다고 해요. 효명 옹주가 김자점이랑 결혼하면서 유착하는 계기가 되는데 ㅋㅋ 맘에 안 드는 녀자다 보니 이런 것도 다 그랬을 것만 같아요ㅋㅋ)
인조
갑자기 웃음 선사하고 가시다니 ㅋㅋ 제가 무슨 퀴즈낸거냐규 ~
zzzzzzzzzzzz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도세자의 고백,조선왕독살사건 읽으면서 특히 안타까운 사람이 소현세자였죠. 작가말대로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또 달라졌을수도 있었을텐데 물론 좋은쪽으로 더 ...
그런데 뭐 사실 소현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고 해도 당시 조정 분위기상 -_- 과연 잘 진행됐을까 싶기도 하고 헌데 또 보면 강빈 역시 어느 정도 수완이 있는 인물이라는 평이 있어서 그런지 더 안타까워요 둘이 정치를 했다면 상당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겠죠. 가정하는 거니까 안타까움에서 끝나는 거지만요. 그래도 뭔가 시뮬레이션이라도 해보고 싶은 이 심정 ^^;;
인조 너 죽어너 암튼 ..조선 역사에서 고종이랑 선조랑 같이 내가 젤 싫어하는 왕~
인조가 들으면 벌떡 일어나서 오겠어요. 헌데 아무리 정적이라고 하고 그래도 참 너무한 점은 많아요. 인조가 죽였다는 증거 그리고 독살되었다는 확실한 건 아니라 해도 인조의 조치나 태도가 너무한 건 사실이죠. 상복도 일주일만에 벗어 던지고 원래는 1년 입는 것인데도 바득바득 우겨서 결국 다른 사람들도 3개월 입게 하고 자긴 일주일. 아부지가 뭐냐규 그래놓고 효명 옹주는 엄청 아꼈다고 하고 게다가 왕세자도 새로 책봉한 것도 소현 아들이 있는데도 그 아해는 죽게 하고 결국 자기 둘째 아들을 세자로 삼았죠.. 관례따위는 무시하는 거돠..
비단 소현세자를 죽인거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대한 외교정책도 맘에 안들구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점도 맘에 안들어요..딱 이것만 가지고 너죽어너암튼이라고 한거 아니라긔ㅋㅋ 암튼...소현세자 너무 안됐죠..이런 역사 자료 너무 좋아요 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인조의 경우는 솔직히 제가 인조였다고 해도 친청으로까진 못 돌아섰을 거 같아요. 한 나라의 왕이 지들이 오랑캐라고 하던 놈들한테 머리를 조아렸으니 - - 헌데 자기 아들이 거기가서 그러고 왔으니 분노하는 것도 이해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맘에 안 들긔 ㅋㅋㅋ
인조 선조 조선왕 찌질이의 쌍두마차............-_-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 저 그런 생각 엄청 많이 해요! 사실 역사라는 건 우리가 의존하는 게 기록뿐이 없잖아요. 실록이라는게 그 중에서 가장 진실성이 있고 객관적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실록도 그 시대에 쓰여진 거구 여하튼 완전 타임머신으로 몰래 가서 진짜 그 시대 상황 다 알아 오고 싶단 생각 자주 하는데 ㅋㅋ
타임머신이 생기면 문제는 우리가 조용히 보고 있지 않고 또 오지랖이 보통 넓은게 아니기 때문에 역사를 바꾼다고 설레발 치고 다닐꺼예요ㅋㅋ 사도세자 뒤주에서 몰래 꺼내주고 소현세자 피난시키고ㅋㅋㅋ
베드에서 타임머신 공구해서 훈남들 낚아올 분들 많은 거 같긔 게다가 역사서는 이미 다 개구라가 되는거긔 ㅋㅋㅋ 일제시대 가서 우리 완전 장난 아닐 거 같다규 ㅋㅋㅋ 사도세다 뒤주 ㅠ 아 근데 진짜 어린 나이에도 그 얘기 너무 안타까웠어요 ㅠㅠ
개인적으로 역사 좋아해서 이덕일씨 역사서는 물론 이것저것 다 찾아서 읽었는데, 결론은 역시 '당쟁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사실... 결국 모든 발단은 거기서 비롯되는거같더라고요
당쟁하니까 장희빈도 생각나요 장희빈도 사실은 꽤 잘 나가는 요즘으로 치면 재벌가의 여자였는데 궁으로 들어가서 결국 당쟁 싸움에 휩싸여서 악녀라고 낙인 찍인 거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실제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시해하기 위해서 저주했는지 알 수 없으나 장희빈의 행적에 정치적인 요소가 엄청 짙은 것도 사실이죠. 하여간 옛날이고 오늘이고 파 갈라서 싸우는 것들 문제있긔 나라 말아 먹는 지름길이라긔 ㅋㅋㅋㅋㅋ
맞아요. 파 갈라서 싸우는 것들이 나라 말아먹고 역사도 망쳤어!!! 요즘 사도세자의 고백을 다시 보고 있는데, 이건 뭐, 아주 사도세자는 태어날 때부터 노론과 소론 싸움에서 목숨 건지기도 힘들어보이는 거 아니었냐구... 영조부터가 노론과 사바사바해서 임인옥안에 역적으로 이름을 올렸던 전적이 있는데... 어휴 책 보다가 진짜 열통터져서 원!!!
잘 읽었어요.
좋은 자료 잘 읽었어요. 이 글 보니까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어지네요. 좋은 역사서 아시는 거 있으면 추천 부탁드려요♡
주제넘게 제가 나서자면^^;; 일단 이덕일 씨 책은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소설가들이 만드는 역사소설들을 참 싫어하는데, 이분은 역사 전공자이시면서도 너무 딱딱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너무 소설냄새 안나게 글을 잘 쓰시는거같아요. 그래서 정말 술술 읽히더라구요.
이덕일씨는 예전에 보면 역사 스폐셜 나와서도 말씀하시고 사실 역사서.라기보다 흥미 본위 책이 많은 것도 사실이에요 ㅠㅠ 그냥 딱 보시고 알아서 판단하는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가끔 보면 그야말로 소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우리 인식을 이상하게 만들기도 하죠. 저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라서 전 보통 예를 들어서 다큐멘터리라도 하나 보고 나면 뭐 예를 들어 광해군을 봤다 그러면 논문이나 학술자료 같은 거 모아놓은데 가서 검색해봐요 그러면 몇 가지가 있으면 그거 읽고 그래요. 이런 것도 괜찮은 거 같아요. 말이 논문이지 딱딱한 게 아니라 논문이라고 하긴 뭐하곤 여하튼 그런 사이트들이 있음 ㅋㅋ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
인조랑 선조 제일 븅신왕..........................ㄱ- 우열을 가릴수없다.................그래도 못난아비밑에 자식들은 참 영특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