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없는 그들 무리 속에 하나는 하찮고 하찮은 생명이야.
20
아까부터 뭘 그렇게 고민하는건지. 경호는 옷매무새를 다듬는 척하며 거울 뒤편으로 슬쩍슬쩍 나연을 보았다.
나연은 일찍이 일어나 부산스럽게 경호를 깨우고 자신도 몸을 움직였다. 방도 이불을 개켜 한구석에 밀어 넣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쓸고 닦고. 남자사는곳치고 깨끗했다지만 그래도 나연의 손을 타니 그보다 더 깔끔해져
있었다. 그러더니 깨끗하게 걸레까지 빨고 옥상에 널었다. 살림 솜씨가 한 두번 해본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등
을 벽에 기대고 앉아 무릎을 감싸 앉은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길없는 멍한 눈초
리.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있더니, 경호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핸드폰 좀 써도 될까요? 이거였다. 경호는 드디어
가족에게 연락하나 싶어 선뜻 핸드폰을 내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기만 할뿐 정작 번호를
누르진 않았다. 설마 가족 전화번호를 잊은건 아닐테고. 경호는 타인의 사생활을 캐낸 가십거리 연애지를 즐기
는 여고생도 아니지만 조금은 궁금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뜬금없이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경호씨, 감옥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해요?"
경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우리」지. 시키면 시키는데로 밥주면 주는데로. 너 죄지었냐?"
감옥. 폭행, 사기, 마약, 매춘, 도박, 그리고…살인. 악을 상징하는 모든 죄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그 곳.
경호는 관심없다는듯 하품을 하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친구 중에 조폭 길로 빠져서 제 딴엔 조직에 힘
을 싣는다고 다른 조직원을 흉기로 찔러 자랑스레 감옥에 들어간 녀석이 있긴 했다. 영웅심에 우쭐거
리던 녀석은 몇 년을 썩어야 하는 곳에서 고작 한달이 지나자 지겨워 죽겠다며 하소연을 하던 때가 생
각났다.
나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웃었다고 할수 없을만큼 미미하게 생겼다가 사라지는것이 신기루같았다. 나연도
곧 그렇게 사라질것 같았다. 머리카락 한올 남기지 않으려는, 삶의 미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보이는.
꼬물꼬물 움직이는 자신의 발가락을 보았다. 꼬물꼬물, 아직까지 이렇게 어영부영 인생은 흘러가고 있었
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 바다마을로 밀려온것은 그 이유였다. 서른줄에 들어서면 시집이나 가겠거니 얼마
전까지의 사소한 일상들이 파토 난 이유였다.
전부 그 이유였다.
"엄청난 짓을 벌이긴 했죠."
"설마 너, 수배받아서 도주중인건 아니겠지?"
경호는 거울을 통해 난 턱선 부분을 유심히 보았다. 2cm가 안돼면서 연필로 그린듯 일직선상으로 그어진 상
처. 조그만 상처라도 타격은 있다. 쓰리다고 피부가 하소연을 해댄다.
"킥- 그렇게 보여요?"
"아서라. 나는 나 먹고 살길 바쁜 놈이니까 수배범까지 챙길 여력 없어. 죄 졌으면 자수해서 광명찾아."
"감옥 밥은 잘나오는지도 궁금한데, 그것도 알아요?"
"사시사철 제철 음식 나오고. 추석땐 송편, 설날엔 떡국. 뭐 못나오는건 없다고 들었다. 밥 따뜻한거 주고, 잠잘데 있고
그보다 더한 보금자리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너 포상금 걸려 있는 수배범인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어쩌실껀데요."
"당장 신고해야지. 112. 나는 돈 받아서 좋고. 너는 새 보금자리 찾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시덥잖은 농담따먹기를 해줄 정도로 경호는 한가롭진 못하다. 그래도 금방이라도
죽을상을 한 저 여자를 상대로 성을 내는것도 조금 꼴사나워 보이는것 같고. 경호는 농담이라도 대충 맞
받아쳐주자 그제서야 웃음을 짓는다. 처음보는 웃음이었다. 희미한 웃음이 아니라 최소한 진심은 느껴지
는, 살아 있는 웃음. 그랬다. 내가 웃는게 아니야라고 외치던 가요와 같이 그건 웃음이라고 하기엔 뭐랄까
생동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죽은 자의 웃음이었다. 새삼스레 저 여자는 저렇게 웃는구나-
"이제 할말 끝났으면 나 일 나간다."
"잠깐만요."
"또 뭐."
"돈 좀 빌려주세요."
"갚을 능력은 있고?"
그 말에 나연은 할말이 없어졌지만 경호는 그러면서도 몇만원을 꺼내 쥐어주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나연
은 그게 고마웠다. 경호는 분명 그녀가 이제 돌아갈것이라 생각해서 기름값이라도 하라고 준것이지만 안타깝
게도 나연은 돌아갈곳이 없었다. 그래도 확실히 기름을 채우긴 했다. 고급 외제차를 이곳에 방치했다간 언제
발각날지 모르니까 차를 외딴곳으로 버리기 위해서. 그런데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
이럴 리가 없었다. 분명히, 분명히 이럴 리가 없다!
나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핸들을 꼭 잡고 있었는지 땀으로 젖은 손이 기분 나쁠만도 한
데 그것도 잊을만큼 나연은 자신의 눈을 믿을수 없었다. 제 눈이 보고 있는것이 사실인지 환상인지 모호한 경계속에서
나연은 다시 한번 눈을 부릅 떠 봤다.
다시 한번 봄으로써, 더 확실해 진건.
아버지.
한번만, 그들을 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으로 멀리서 지켜만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태어나고 자란 동네 골목길 어귀에
차를 주차시켜놓고 내리지 않으며 대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수척해진 어머니가 노루한 옷차림으로 대문을 삐걱 열
며 나타났을때는 반갑고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하고 클랙션을 누르고 싶은 자신의 손을 간신히 억제했다. 뒤이
어 나연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왔다.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흙으로 돌아갔다던 아버지가 멀쩡히
있었다. 두 분다 수척해지고 여읜 모습으로 아버지는 갈대처럼 휘청이는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걸었다. 나연은 아직 상
황파악을 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버지?… 아버지는…아버지는…또렷히 들리는 말소리들.
'누나 아버지 교통사고로 뇌진탕을 일으키셔서 돌아가셨어. 한달도 더 된 얘기야.'
'누난 실종신고되어 있는 상태야. 실종된 사람이 변고없이 멀쩡하다면 용의자로 지목되는건 당연하잖아. 어디 한군데
안심할수 없다고. 거기라고 예왼줄 알아? 이럴줄 알고 비밀로 한건데…'
'사실이야.'
내가 누나에게 거짓말따위 할 이유가 없잖아? 그런 눈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뭐가 어떻게 된거야. 도무지 모르겠어.
두통. 시끄럽게 리플레이 됐다. 다시 재생하고, 흐름이 끊기다가 되감기되서 다시 재생했다. 도대체 왜! 왜 이런 끔
찍한 거짓말을 한거야? 농담이라고 하기엔 너무 심하잖아?
승민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통화로 잠깐이나마 들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겹쳐 졌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내일 49재 탈상 날이잖니…. 참석할꺼지?]
그렇다면, 누가 죽은거야? 조각이 짜깁기로 맞춰진다.
영국행을 서둘렀던 승민은 그녀가 언젠가는 어딘가로 떠날것이라 강박관념처럼 늘 두려워했다. 부친의 사망소식과
함께 허망함과 허탈감에 힘들었었다. 발의 통증에도 물론 이유가 있지만 삶의 의욕을 잃고서 그렇게 좋아하던 정원
일도 모두 승민에게 떠맡기고 낙담했다. 유일한 외출인 산책도 되도록 자제하면서 침대구석에 쳐박혀 승민이 하자
는데로 하던 그때, 유달리… 이상하게… 기뻐하던 승민.
설마…
"나였어?"
나연은 핸들에 고개를 파묻었다.
"엄마가 말했던게… 나인거야?"
당연히 상대가 없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위와 권력과 돈을 이용해서 살아있는 자를 지우는 이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서 감추면서 오직 그만을 집중하도록
만드는 의도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곁에 두려는 승민을 이해할래야 할수 없었다. 나연은 승민이 무서워졌다.
아니, 이미 무서웠다. 그걸 덮었다. 이제껏 인정하지 않았던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때문이다. 막말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비상식적인 행동들. 죄는 변함이 없고 어쨌든 그 죄를 위해 승민이 나연을
위해 한 일들은 상식 밖의 일이다. 그리고 승민은 그것을 적당히 이용해왔다. 나연은 알면서 모른척 외면하고 그를
따랐다.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연에게 승민은 어느때보다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
북키챤★님, 칾쏠님, 김지영님
쪽지 감사해요.
학교생활때문에 간격은 있겠지만 꾸준히 할께요.
저의 힘과 낙으로 글쓰는데 큰 보탬되는 댓글 남겨주셔요 ♡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개미지옥 20
브로콜린
추천 0
조회 2,771
08.10.04 00:18
댓글 29
다음검색
첫댓글 저 인연이에요 ㅋㅋㅋ 닉넴 바깟어요~하핫 오늘은 제발올라와잇기를 하구 들어왓는데 떡하니올라와잇네요!!!!! 아정말재밋어요..진짜 넘재밋게읽구있답니다!~
닉넴 왜 바꾸셨나요~ 이젠 맬맬님이라 불러야겠네요 히히/ 다음편 거의 완성됐으니 빠른시일내로 들고올께요/
우와 넘 오랜만인거가타요 ♥ 히히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쿨럭- 이, 일주일 넘은건 아니겠죠? ㅜ 주말에도 제가 학교에 나가야 하는 입장이라 ㅜ 다음편도 기대해주세요~
어머 소설 올라와 있네요 +_+ ㅎㅎ 항상 재밌게 읽고 있어요 저 기억 하시죠? ㅎㅎ 항상 뒤에서 응원 할게요 ^^ 홧팅
네, 저번에도 댓글 써주셨죠! 앞에서 응원해주시면 안될까요? (퍽)
꾸준히 성실연재해주세요~ 개미지옥 결말 진짜 궁금해요ㅎㅎㅎ
글쎄 어떨까요. 처음에 비축하다가 지금은 한편 분량 완성되자마자 올리기 때문에 저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ㅜ 흑흑
너무재밋어요ㅠㅠㅠ 오랜만에 보니까 새로워요 ㅎ ~
저도 왠지 새록새록 하답니다. 하지만 초심은 잡기 힘들군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ㅜ 그렇지만 화이팅!
승민이진짜무섭긴무셔워요ㅠ,ㅠ 작가님 넘글잘쓰시는거가타여!
이런 과분한 칭찬. 좋아요 좋아. 쭉 그대로 밀고 나가요~(퍽) ㅜ
무서운 승민이 ;;;;;;;
승민 등장씬이 당분간(...)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빠른 시일내에 더더욱 무서운(?) 승민이로 업그레이드 시킬꺼에요.
빠르게 2편 연속으로 읽었네요...ㅎㅎㅎ
다음편도 곧 커밍순- 히히히히
정말재밌어요 >< 완전 ! 이제 사실이 들어났네요 승민이 너무 무셔워용 ㅠㅠ
어떻게 더 못됬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요. 제가보기엔 아직 모자란것 같은...
21편이 아직안올라왓길래..아쉬운맘으루 20편 한번더 읽구가요~ 작가님 글솜씨...짱인데요?하하하하하 담편기다릴께요^^~
으앗 ㅜ 부끄럽게 ; 칭찬이 너무 적극적이셔요. 히히히 다음편은 선물이랍니다. 스크롤을 꼭 확인해주는 센스. ㅋㅋ
무섭네요 ㅠㅠㅠ
아니에요 승민이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랍니다.(주인공이라 편듬) ㅋㅋㅋㅋㅋ
오오!!!!!!!!!!!!!!!!!!!!!!!!!!!!!!!!!!!!!! 너무 재밌어요 ㅜㅜ 승민이 진짜 무섭네요..죽었다고 거짓말을 ㅜㅜ
승민이는 원래 이런아이가 아니었는데...(퍽) 열심히 다음편으로 고고 고고-!
아진짜 넘 잼땅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섭다ㅠㅠ
아~ 나연이를 말한 것이었군뇨. 근데 나연이 머리 좋은듯.
헐;;;;;;; 완전..;;;
와~ 완전 예상밖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