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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시상영
학교에서는 가끔 단체로 영화관람을 했다. 국도극장에서 도금봉 주연의 ‘유관순’을, 국제극장에서 최은희가 주연하는 ‘검사와 여선생'을, 대한극장에서 ‘남태평양,' ‘벤허,’ ‘십계,’ 단성사에서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았다. 헐리웃의 영화들은 화려했다.
어느 봄 날 월말고사를 끝낸 날, 시험도 끝나고 반나절이나 일찍 학교가 끝나는 운 좋은 날, 우리들은 그냥 집에 돌아가기가 억울했다. 학교 건너편 가게 담벼락에 붙은 영화 선전 포스터를 보며 우리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율부리너와 지나로로 부리지다가 출연하는 영화 ‘솔로몬과 시바여왕’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 '학생입장불가'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여간 켕기는 일이 아니었다.
누구인가 우리가 무사히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정오도 안 된 시간에 보나마나 영화관이 텅텅 비어 있을텐데 단속반 선생님이 출동을 하겠느냐, 한번 가 보자’고 하여 우리는 작당을 하고 경남극장으로 갔다.
솔로몬을 유혹하던 시바 여왕, 무리들한테 돌을 맞으면서도 요염한 자세로, 그리고 여왕의 기품을 잃지 않고 외치고 있었다 "I am still the Queen of Shiba!”
여왕은 무리들이 던지는 돌을 맞고 돌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여왕의 절규가 생생한 채 영화관을 나서는 우리들을 향해 무서운 얼굴이 다가왔다. 단속반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들켜 버린 것이다.
“너희들 이리와. 너희들 어느 학교 학생들이냐? 아니, 너희들은 사대부고생들이 아니냐? 아니, 학교 수업은 어쩌고 이렇게 몰려들 왔니? “
우리는 잔뜩 겁에 질렸다. ‘몇학년 몇반 여학생 5명 1주일 정학’의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 한 과목 시험 끝나고 학교를 마쳤어요.”
한혜자가 용감하게 말했다.
“너희들 '학생입장불가' 영화를 보다 들키면 1주일 정학처분 받는 것 알지?”
드디어 B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 놈아, 울긴 왜 울어. 그런 뱃장도 없이 영화보러 왔냐? 빨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뭐하고 있어?”
단속반 선생님이 우리를 봐준 것이다. 우리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영화관을 뛰쳐나왔다.
그런데 이런 것 쯤으로 우리의 영화보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데네 같은 학생극장도 생기고, 시네마 코리아 같은 동시상영 극장도 생겼다. 이런 극장들은 우리의 단골이었다.
권순옥이네 집은 대한극장 맞은 편에 있었고 아데네 극장 바로 뒤에 있었다. 방학에는 순옥이와 함께 동시상영 극장 단골손님이 되었다.
‘사랑은 아름다워’, ‘차와 동정’, ‘OK목당의 결투’, ‘보리수’, ‘셴’, ‘우정있는 설복’, ‘킬리만자로의 눈’,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나자와 사자’,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 ‘위대한 유산’, ‘영 필라델피안’, ‘위대한 게츠비’, ‘카사불랑카’, ‘씨마론’, ‘콰이강의 다리’, ‘로마의 휴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유없는 반항’, ‘자이안트’... 끝없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어느 틈에 미국바람의 열기속에 휩싸이고 있었다.
학교 가까이 을지로 6가에있는 계림극장에서 톨스토이의 ‘부활’이 상영되고 있을 때였다. 마침 ‘부활’을 읽고 있던 때였고 카츄사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할 때였다.
이 영화도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였다. J와 나는 변장을 하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극장 앞에서 만난 J는 저의 엄마 치마 저고리를 입고 나와서 내가 몰라볼 정도였다. 나는 양키시장에서 산 까만 베레모를 쓰고 완전 숙녀처럼 차리고 갔다. 우리는 변장한 꼴이 너무 우스웠는데 웃지도 못하고 표를 사가지고 극장안으로 들어갔다.
카츄사가 시베리아 형장으로 가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토를 두른 젊은 백작이 나타났다. 자기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순백의 카츄사가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더 이상 양심을 속일 수 없고 카츄사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움직이는 기차에 뛰어 올라 함께 시베리아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극장의 불이 켜지고 우리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헤어졌다.
영화에 미친 시절이었다. 우리가 갈 곳은 영화관 밖에 없었다. 중고생들은 빵집에 가도 안되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헐리웃 영화가 한국에 들어와 판을 쳤는지도 이상하고, 그런 영화를 보면서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다는 게 돌이켜 보면 이상했다.
지금 나와 가까이 지내는 미국여성 테비는 내가 미국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고 감탄을 한다. 영화하면 배우, 감독, 연대까지 알고 있고, 미국의 역사도 미국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칭찬이냐 비웃는 것이냐. 미국 사람들보다 미국 영화를 더 많이 보고, 미국인들보다 미국의 역사 공부를 더 많이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내가 친미(親美)여서 그랬는지 반한(反韓)이어서 그랬는지 뭔가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것은 나 자신이 친미일 수도 반한일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답을 <남부군>, <하얀 전쟁>의 정지영 감독의 글에서 내가 하고싶은 말을 찾아 내었다.
“2차 대전 이후 이태리에서 빗테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 로셀리나의 <무방비도시>같은 위대한 영화들이 나왔을 때, 정작 이태리 사람들은 그 영화 보다는 리타 웨이워즈가 나오는 허리웃 영화를 좋아했다. 반대로 미국 사람들은 <자전거 도둑> 같은 영화를 좋아한 것은 그게 자신의 고통이나 위험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그 영화의 이국적 정취 때문이었다.”
이 말이 과연 미국영화 섭렵에 대한 나의 해명이 될른지 그것은 아직도 의심스럽다.
6. 회색노트
그때 그 일은 큰 사건이었다. 우리보다 한 학년 위 학생이었는데 여학생의 신분으로 남학생이 하숙하는 집에 꽃을 사가지고 찾아 간 사실이 학교를 발칵 뒤집아 놓았다. 여학생은 정학처분을 당했고 남학생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든가. 학생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빵집에 가면 안 되었고, 영화관에도 가면 안 되었고, 더구나 자장면집은 더더욱 안되었다. 그게 학교의 규칙이었다.
여학생이 남학생 하숙집에 꽃다발을 사들고 가다니... 그런데 꽃을 사들고 간 일이 그리 큰 죄가 되는 것인가. 그런 일이 어떻게 학교에 알려 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본인들이야 그런 일을 말했을리 없고, 하숙집 아줌마가 학교에 알렸나? 알고보니 여학생이 병원에 가게 되어 탄로가 났다는 것인데...
규칙은 무엇이든지 ‘안 된다’였다. 머리칼이 칼라에 닿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빵집에도 갔고 극장에도 갔고 머리는 언제나 길게 늘어뜨리고 싶어했다. 다른 일은 위반을 해도 봐주는 한도였는데 왜 꽃다발 사건은 그렇게 심각해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애사건이 산발적으로 터지고 남학생들은 절대 가서는 안 될 곳을 갔다가 잡히기도 했다는 소문이었다. 한국의 러브 스토리 고전의 주인공 춘향이는 이팔청춘 16세때 이몽룡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는데 춘향에 비하면 우리들은 더 오픈된 세상에 살고 있었고 사랑을 해도 괜찮은 나이가 되었고 그때 하는 사랑이 그 어떤 사랑보다 아름다웠을텐데... ‘안 된다’ 때문에 사랑도 제대로 못해보고 그 시절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분하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연애편지쓰기가 글쓰기의 기초가 되고 문학의 기본이 되는 것인데..
나는 불란서 소설 <회색노트>를 생각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아주 엄격한 학교에서 어떤 학생의 비밀일기장인 회색노트가 발견되었다. 학교에서는 일기장을 빼앗고 정학처분을 내리기 위해 그 어머니를 불렀다. 학장실에서 학장이 내미는 회색노트를 받으며 그 어머니는 그 노트를 열어 보지도 않은 채 가방에 넣었다.
“학교에서 무슨 권리로 아이의 일기장을 읽어봅니까? 어떻게 아이한테는 한 마디의 변명도 들어보지 않고 그런 가혹한 처벌을 내릴 수 있습니까. 이런 학교에 내 자식을 보낸 게 처음부터 잘못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학장에게 이렇게 말하고 그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떠나갔다.
이 책이 오래 기억된 것은 그 어머니의 의연한 태도 때문이었다. 아니면 우리의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부모가 저희들과 비슷한 사춘기를 보냈다는 걸 믿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 세대들이 청년기를 매우 점잖게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까. 어느 세대나 성장기에서 오는 비슷한 경험을 한다는 것을 성인되면 비로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집 큰 애가 미국에 오기 전 한양초등학교 4학년때였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녀석들이 여자의 나체사진을 돌려보는 것을 압수했다며 혹 모르니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감시를 잘 해 달라는 내용의 전화였다.
그때 나는 속으로 크게 쇼크를 받았다. 그러면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하고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날 저녁 나는 무슨 큰 비밀이나 되는 듯 남편을 아파트 어린이 공원으로 불러내었다.
“글쎄, 애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했는데 아이들이 이상한 사진을 돌려보다 들켰다지 뭐예요. 혹 우리 애도 그런 사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가방을 몰래 뒤져보고 압수해야 하지 않아요?”
남편은 겨우 그런 문제를 가지고 사람을 공원으로 불러내느냐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대수로운 문제라고? 우리는 1학년때 그런 사진 돌리기 했는데.”
“뭐라구요?”
나는 남편의 이 말에 해방이 된 느낌이었다. 만약 내가 아이의 가방을 몰래 뒤져보고 그곳에서 나체사진이 발견됐다면 어떻게 했을까. 현행범을 잡은 수사관이 되어 의기양양해 가지고 자기 자식을 무슨 파렴치범으로 내몰았을 것 아닌가. 생각만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무슨 파티가 그리 많은지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그러면 노심초사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아이들이 맥주를 마시는 모양인데... 술 먹고 운전하면 안 되는데..”
“맥주정도는 마시겠지.”
“당신도 고등학교때 술마시고 담배 피웠어?’
“고등학교가 뭐야. 중학교때 다 하는 거지.”
나는 남편에게 두손 다 들고 말았다. 그런 답변을 가진 남편이 참 용케 보였다. 아이들은 감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의 <회색노트>는 누구에게 감시받거나 발견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든지 회색노트가 있다. 회색노트 -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회색노트를 어른들은, 선생님들은 왜 이해를 하지 할까. 자신들도 회색노트를 가지고 있으면서.
7. 행진곡
아침 등교 시간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군대 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자연 발이 맞추어졌다. 남학생들은 좌로, 여학생들을 우로 발을 맞추어 교실로 들어갔다. 미국의 행진곡 작곡가 <스자> 곡이 제일 많았다. 어떤 때는 ‘양키두둘’도 흘러나왔다.
우리들은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속해 있던 선생님들의 교육방침 하에 있었다. 우리의 훌륭하신 선생님들은 어쨌든 일제치하의 교육을 받았고 그 교육에 저항하면서 그 교육이 몸에 배인 분들이었다. 아침 공부시간 30분전에는 교실에 들어와 앉아 있어야하고 조용히 자습을 하며 진지하게 하루를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은 단정하고 행동거지는 뭐든 학생다워야 했다. 남자들은 머리를 빡빡 밀다시피 깎았고 여학생들은 귀 밑 1센치 길이만 허용하였다. 상급생 규율부가 정문을 지키고 있어서 규율부 선배들한테 남학생들은 경례를 부쳤고 여행생들은 다소곳이 절을 하였다.
“너, 나 잠간 보자.’
어느 날 이수복선생님이 교문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네?”
“너 이따가 아침 조례시간 끝나고 나한테 와라.”
나는 나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왜 걸렸니? 너 카라가 너무 큰 것 아니니? 그렇지도 않은데, 머리는 오히려 짧고, 뭐지?
친구들이 걱정스러워 했다. 내가 기가 잔뜩 죽어가지고 교무실에 들어서는데 이수복선생님이 싱긋 웃으면서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너 머리 미장원에 가서 잘랐지?”
우리는 그때 머리를 자르려고 미장원에 가면 안되었다. 다 큰 여학생들이 남자들 머리 깎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왜 미장원에 가면 안되었는지 그 때도 지금도 이해가 안 되어 미소를 짓기도 한다.
“미장원에 가지 않았는데요?”
“그럼 머리 어디서 잘랐나?”
“어머니가 잘라 주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솜씨가 좋은 분이셨다. 음식도 잘 하시고 바느질도 잘하시고 자식들 머리는 다 손수 잘라 주셨다.
“엄마, 학교에서 머리는 귀밑 1센치 길이로 잘라야한대..”
“얘야, 네 머리는 유난히 잘 긴다. 아주 짧게 자르자.”
우리 엄마는 내 머리가 너무 잘 자란다고 자주 깎기 귀찮다고 하며 귀밑 1센치가 아니라 귀에서 1센치나 치켜 올려 깎아버렸다. 그리고는 뒷머리를 남자애들 상고머리처럼 올려 쳐서 오드리 햅번 머리가 유행하던 그때 '카트머리’가 되어버렸다. 짧게 잘려진 머리 때문에 속이 상했지만 ‘좀 있으면 금방 길어진다’는 엄마 말에 참아야했다. 우리 동네에 살던 E여고에 다니는 국민학교 동창은 머리를 땋아 늘이고 다녔다. 그때 그 애 머리를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우리 학교는 참 이상도 하지’ 그런 맘이 들었다.
“얘 머리 어때요? 요새 유행하는 커트머리인데 학생신분에 안 맞지요?”
이수복 선생님이 주위 선생님들에게 내 머리를 보라고 하셨다.
“학생 머리 참 예쁘네요. 짧으면서 멋이 있네요.”
“요새 일본 여학생들이 이렇게 머리를 깎던데, 우리 여학생들도 그렇게 했으면 더 예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씀한 선생님도 계셨다.
황석근 선생님과 몇몇 선생님들이 ‘커트머리’가 예쁘다고 내 편을 들어주셨다. 이수복 선생님 멋을 내려고 일부러 미장원에 간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잘라 주신 것이라는 말을 믿으셨는지 ‘됐다. 가 봐라’ 하셨다. 머리가 너무 짧아서 걸린 케이스였다.
이수복 선생님의 체육시간은 참으로 이상했다. 체육복은 또 어땠는지.. 지금은 스웻샤스(땀옷)가 보편화되어있지만 그때 체육복으로 스웻샤스를 입은 것은 우리 학교가 처음이 아닐까 한다. 이 옷은 메리야스여서 몸에 찰삭 달라 붙었다. 몸이 좀 큰 애들은 이 옷이 불만이었다. 가슴이 큰 애들은 양팔로 가슴을 가리고 싶어했다.
그리고 체육시간은 4줄로 대강당을 출발해서 학교 건물을 돌아 ‘그만’할 때까지 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메리야스 체육복을 입고 우리가 줄지어 학교 건물을 돌고 운동장을 돌면 남학생들이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고 웃고 떠들고 소리지르고 난리였다. 실제로 그 때 내가 남학생반에 들어가 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러지 않았나 싶었다.
“걔들은 공부는 안하고 왜 여학생들 뛰는 것만 보고있는 거야?” 이런 말을 하는 여학생들은 없었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안보는 척 하면서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나는 ‘남녀공학’에 내가 다니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채리기시작했다.
우리의 교복은 가관이었다. 동복은 더불 단추 자켓에 바지는 몸뻬바지 스타일이었다. 우리 삼촌은 늘 내 교복 입은 모습을 보고 놀려댔다. “절구통’ 같다느니 ‘여자육군사관생’ 같다느니 하면서. 그러면 약이 올라 ‘우리 교복이 왜 어때서’하고 싸웠다.
우리는 그런 교복을 입고 6년을 지냈다. 여름에는 감색 스커트에 흰 짧은 옷을 입었고 감색 양말에 검은 운동화를 신었다. 교복은 옷걱정 안해서 좋고, 잘사는 집 아이와 못사는 집 아이 차이가 안 나서 좋고, 부모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이 없어서 좋고, 학생 신분이 어디서든지 들어나 통제하기에 좋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아름다웠을 시기에 겨우 교복에 묻혀 있었다는 때 늦은 성토를 하기도 했다. 졸업 후 교복을 벗고 개성껏 멋을 내고 만났을 때 우리들은 서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어마, 이제보니 얘, 뚱보가 아니었구나’
‘다리가 아주 예쁘구나’
‘긴 머리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구나’하며.
자유복을 만끽하면서 그러나 교복 입었던 그 시기가 우리의 황금시기였다는 감회는 버릴 수가 없었다.
8. 천하부고
선생님들은 공부시간에 들어와 선배들 이야기를 종종 했다.
“여러분의 선배들은 얼마나 대단했는 줄 아나? 정말 수재들이었지. 어떤 학생은 노트도 없이 강의 내용을 손바닥에 메모를 하고는 수업 시간이 끝나면 수도가에 가서 손을 쓱 씻는 게 다 였다. 그 학생은 공부시간에 그날 배운 것을 다 머릿속에 넣는 대단한 집중력을 과시한 것이다.”
“여러분의 선배들 중에는 고2때 서울공대 화공학과에 입학을 하였다.”
“천하부고가 천하부고이려면 이정도는 돼야지.”
“공부는 머리도 좋아야 하지만 노력이다”
“천재는 1퍼센트의 천재성과 99퍼센트의 노력이 만드는 것이다.”
“점점 학생들 질이 저하된단 말야.”
선생님들의 이런 말씀을 참 많이도 들었다. 부고 선배님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부모가 되어 제일 자랑스러울 때는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의 칭찬을 들을 때라고 한다. 선생님들이 가장 자랑스러울 때는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일류 대학에 척척 합격을 하여 학교 이름을 빛내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우 자랑스런 느낌과 함께 한편 우리가 마치 ‘천하부고의 미운오리xx’에 지나지 않을까 하고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공부 잘 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날 배운 것을 다 외우고 예습 복습 하면 성적은 오르는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는 학생들은 거의 없을 정도인데...
그렇다면 외우고 암기하고 그래서 시험 잘 보면 공부 잘하는 것인가. 이런 걸 '주입식 교육'이라고 하는 것인가.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대개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던데... 어쨌든 우리는 주입식 교육이 빛을 받는 그런 시기에 살았다.
나는 특별활동 시간으로 처음에는 음악반에 들어갔다. 최동희 선생님이 이태리 가곡 ‘라르고’를 가르쳐주시는데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어찌된 음악반인지 피아노 한 대가 있을 뿐 그 흔한 유성기(?) 하나가 없었다.
그때 우리들은 ‘스테파노’에 미쳐 있을 때였다. 신설동에 사는 장정자는 아주 좋은 뮤직 플래이어를 갖고 있었다. 장정자 큰 오빠는 당시 충남비료 여자배구 코치였다. 동남아로 배구경기를 다니면서 특히 일본에 다녀오면서 최신 음악 레코드 판을 선물로 정자에게 사다 주었다.
“큰 오빠가 아주 좋은 레코드 판을 선물했는데 들으러 올래?”
장정자는 키가 큰 편이어서 교실에서 뒷 편에 앉았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앞으로 자리를 옮겨주시고 나와 짝이 되었다.
“웬 일이냐?”
“응, 내 눈이 나빠져서 뒤에서는 글씨가 잘 안 보이거든. 이대로 계속 있으면 사시가 될 거래. 그래서 선생님께 말씀 드렸어.”
그러고 보니 정자가 멀리 볼 때는 지금도 약간 사시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나는 이 애의 이런 눈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정자의 골방에서 스테파노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하루 종일 들었던 적도 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짓기도 하고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라라의 테마’를 들으며 라라의 운명에 대해 그들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가 끊임 없었다.
“너희들 공부를 하는 거냐, 뭐하는 거냐” 정자 어머니가 간식을 내어주시며 감시를 하셨다.
어느 해 여름방학에는 “날이 저물었는데 집에 안 가냐?” 하실 때까지 음악을 들었다.
음악반이 좀 시시해 보였는지 이번에는 문예반으로 갔다. 문예반에서는 그해 <촛불낭독회>를 경기, 서울의 문예반과 함께 연다고 했다. 음악실에서 낭독회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 경기, 서울, 부고 문예반 학생들이 모였다. 경기 애들은 저희들이 ‘지상경기’라고 했고 서울은 또 뭐라고 하더라. 인사를 하면서 특기자랑을 하자고 했다.
경기 애중에 하나가 ‘별은 빛나건만’을 부른다고 했다. '토스카의 아리아'를 부르겠다니 ‘꽤다’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부르는 노래가 ‘반짝 반짝 작은별'이었다. 이 애들은 계속 장난을 치고있었다. “문교부 주제가를 부르겠습니다” 하고는 ‘학교 종이 땡땡 친다”였고 “교통부 주제가를 부르겠습니다”하고는 ‘찌르릉 찌르릉 비켜 나세요’를 불렀다. 그들의 재치가 돋보이기도 하고 실없는 애들 같이 보이기도 했다.
부고 문예반 차례가 되었다. 3학년 선배였다. 그가 ‘그라나다...’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스페니쉬로 부르는데 열창이었다. 나는 그의 노래에 빨려 들어갔다. 그때 이후 ‘그라나다’를 그처럼 잘 부르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풀라시도 도밍고가 감미롭고 포근한 목소리로 ‘그라나다’를 자주 불렀는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도밍고 이지만 오래전 부고 음악실에서 들은 선배의 노래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는 했다. 그 선배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채..
대강당에서 열린 '촛불 낭독회’는 자작시를 주로 낭독했는데 시의 내용을 알기가 어려워 ‘폼만 잡는 낭독회’처럼 보였다. 나는 세편의 시를 썼는데 너무 형편없는 취급을 당할까 보아 제출도 못하고 말았다. 그중 지금까지 생각나는 것은 문예반 반장이었던 홍사덕 선배의 해프닝이었다.
그가 무대로 나가더니 “무제”라고 말하고는 그냥 서 있었다. 1분 2분이 지나면서 강당 안 분위기가 착 갈아앉는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한 5분을 서있다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무대를 내려온 것이다. 동복(冬服) 등판에 ‘처녀구함’ 이렇게 분필로 쓰고 여학생 반을 다녀가기도 하는 파격적인 행동을 잘 했던 홍사덕 선배님은 국회의원이 되어 한국의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는데 학교 다닐 때 이미 그런 출중한 모습이 보였단 말인가.
천하부고, 지상경기, 천상천하서울(?) 세 학교 합동 문예반의 <촛불 낭독회>를 끝으로 나는 문예반을 떠났다. 글짓기는 문예반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확실히 알았다고 할까. 그 후 이 낭독회가 계속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천하부고’, ‘지상경기’, ’천상천하서울’ 이런 말들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오만과 독선에 찬 이 말들. 제 각기 제일주의인 이런 사고 방식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자긍심을 실어주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2류와 3류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발상은 민주주의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반성이 고교평준화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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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도 영화광이라 아마 영화관에서 많은시간을 보냈는데 인상에 남는건 무기여 잘있거라 (a farewell to arm), miracle, 카츄사, 여기주인공남자 독일배우 Horst Buchholz, 여기서 나이든후에 다 다시 몇번씩 보았는데도 여전히 좋드라. 참 무기여 잘있거라의 마지막 Rock Hudson 의기도하는 장면 ,부인살려달라고 너같이 자세히 관찰을 않했던모양. 나는 남학생들 못본애들이 거의다니 눈은 어듸다 두고 다녔는지몰라.너는 일기장을 쓴모양이구나 .
이 글에서는 남학생들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웬 남학생들 이야기는?
이 글은 미주부고(bugousa.org 관리자 김호중)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6회 선배)일이 있었을때 내 놓은 것입니다. 한국 방문때 한친구의 부탁이 있기도 했지만 새해 15 우리 동기님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고자 여기 올렸습니다.
경인년 새해 동기님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아니 남학생 예기가 나와서가 아니라 나는 아마 눈감고 다녔다보다지 아무것도 생각않나서.네가 그리 자세히 모든걸 보았을때말이지.
부미, 넌 눈을 감고 다닌게 아니라 네 눈 높이가 달랐던거야. 매우 높은 눈높이를 가지고있었지.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부고 여학생들은 정말 모범생(?)들만 있는 줄 알았었는데 지금 보니까 내가 정말 전농동 촌놈이었네요. 내 친구들은 한 명도 학교에서 단체 관람한 영화 말고는 영화를 본 게 없었는데... 얌전한(?) 순옥씨 같은 사람도 영화관을 같다????? 빵집 앞에만 가도 정학 당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친구들 모두 얌전 했습죠. 나 빼놓고.
수자씨의 행장기 첫페이지에 장식할 인물이 바로 "나"라고 자칭하는 "권순옥"여사와 엊그제 도봉산 산행을 마치고 같이 귀가길 전철에서 수자씨 글 얘기를 했더니...다 수긍을 하더라구요..
내눈에는 우리 부고의 여학생들 교복입은 모습들이 참 아름다웠는데, 특히 동복 입은 모습은 우아했고, 어느 여학교 보다도 좋았어요. 그런데 어떤 선생님들이 선배들 칭찬하신것 까지는 좋았는데, 우리를 너무 주눅들게 했던것 유감 천만이고.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시간에 연습문제라도 하나 더 학생들과 풀어 볼일이지. 그런면에서는 황적륜 영어선생님이 참 열심이었고 학생들에게도 예의 바르게 잘 존중해 주시고, 그분이 기억에 좋게 남습니다.
'내 눈에는....그 시간에 연습문제라도 하나 더 학생들과 풀어볼일이지.' 그대 생각 옳은 말씀.
황적륜 선생님이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하얀 백지다. 지금부터 그 백지위에 그림을 그려가라.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는 너희들에게 달렸다."고.
지금 쯤 우리는 어느 정도 자신의 완성도(完成圖)를 가지고 있을때.
나에게 무슨 그림을 그렸느냐 물으신다면 심히 부끄러운 미완성의 그림뿐이라고
고백 할 수 밖에 없겠군. 완성이라는것이 있는지 모르지만
완성으로 가는 중이라고 핑개라도 대야 하는가.
황선생님은 왜 이렇게 어려운 숙제를 주셨는지..
선홍군 말에 전적으로 동의. 천하부고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실감이 안 갔지요. 우리들만의 이야기였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경기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좀 달라요. 우리 동기들 대학 나와서 경기 졸업생들과 견주어 부족했었나요? 나는 부고를 나온 것이 가장 잘 한 일이라 생각하오. 우리보다 음악교육 잘 받은 학교가 있을까요? 우리보다 특별활동 잘 한 학교 있을까요? 우리 학교 영어선생님보다 좋은 발음을 가르쳐준 학교 있을까요? 전체적으로 우리 학교보다 좋은 교사진은 없었죠. 비록 노후한 시설이었지만 내 일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은 부중고 6년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죠. 좋은 친구들, 좋은 선생님들, 그립소
부고사랑! 동감. 동감. 또 눈물 날라고하네.
몰래 영화관을 드나들은건 아마도 나와 심상원(미안) 따를자 없을걸? ㅎㅎㅎ.... 우리는 한번도 들킨일 없었는데..
원래 프로들은 안들키는법이지.
왕겨 먹은 쥐는 티가 나도 쌀 먹은 쥐는 살만 포동포동 ㅎㅎㅎ
지난번 대만여행시 노천온천에서 수영복차림으로 동창들끼리 만났을 때 아쉬워하며 "한참 날씬하고 예뻤을 때는 못보여주고 60넘어 이런 몸매를 보여줘 미안하다"는 누군가의 푸념에 와!!하고 웃었지...엉엉^^;; 우리가 그 당시에 서로 내외할 수밖에 없었던 건 순전히 '이수복'선생님 탓이었다는 투정도 있었고....
제가 겪은 바로는 산업계나 학계,기술계를 망라하고 우리 동문들이 좍 깔려있는 걸 보면 "천하부고"의 명성이 헛말은 아닌 듯 합니다. 요즘은 고교 평준화 이후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아픈 기억도 추억으로 만들어주고...
낙망같음도 희망으로 바꾸어 준 그대, 임수자.
unFortune을 Fortune으로 내꺼도 바꾸어 주려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