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양목의 미덕
회양목. 석회암지대가 발달된 북한 강원도 회양(淮陽)이라는 곳에서 많이 자랐기 때문에 회양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장속도가 엄청 느린 나무. 10년을 자라도 손가락 굵기 밖에 자라지 않으며, 300년을 자란 영릉(寧陵)의 회양목도 겨우 4m 넘는 정도라고 한다. 자라는 속도가 늦은 만큼 목질이 단단하여 도장을 새기는 도장나무로도 불린다고 한다.
자연상태에서는 등산길에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흔치 않은 나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웬만한 정원에서는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키가 많이 자라지 않는 습성으로 화단의 울타리를 장식하거나, 조경석(造景石) 사이에 많이 심는다. 조경용 회양목은 흔히 상자처럼 각(角)지게 전지(剪枝)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서만 그렇게 관리했을까? 영문 표기명이 'korean box tree'라고 하니 재미있다.
나는 해마다 2월이면 회양목에 가장 먼저 눈길을 준다. 겨울이 끝나가는 2월이면 벌써 가지 끝에 꽃망울을 맺기 시작해서 3월이면 꽃을 피운다. 매화나 산수유보다 한 발 앞서 꽃을 피우니 나의 봄은 회양목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꽃이 작고 나뭇잎 색깔이 비슷하여 회양목 꽃이 있는지 잘 모르고 지나친다. 산수유 꽃을 축소한 듯 연두색 같기도 하고 노란색 같기도 한 작은 꽃을 자세히 보여주면 비로소 사람들이 놀란다.
겨우내 굶주렸던 벌들에게도 회양목 꽃은 반가운 소식이다. 벌 마다 다리에 꽃가루를 한 다발씩 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비록 보잘 것 없는 꽃이지만 벌에게는 생명과 다름없는 존재다.
옛날에 수컷 부엉이 두 마리가 암컷 부엉이를 차지하겠다고 밤이 새도록 싸웠단다. 그러다 날이 환하게 밝아오자 깜짝 놀란 부엉이들은 사냥꾼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얼른 회양목 열매로 변신했다고 한다. 그 후로 부엉이 세 마리는 회양목 씨앗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7월 경이면 갈색으로 익은 열매가 세 쪽으로 갈라지는데, 쪽마다 부엉이를 꼭 닮은 단면이 나타나 동화 속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진다.
회양목은 나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운 생각이 드는 나무이다. 나의 직장생활 중 세 번째 근무지가 제천이었는데, 청사 바로 앞마당에도 어김없이 회양목이 식재되어 있었다. 3년여 근무를 마치고 5월에 새로운 근무지로 다시 전근 갈 무렵이었다. 화단 앞의 회양목에 이름 모를 애벌래가 집단으로 달라붙어 나뭇잎을 갉아 먹고 앙상한 가지만 남겨 놓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행의 주인공은 명나방 애벌레라고 했는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불청객이라고 했다.
전근 가기 전날 회양목을 살리겠다며 창고에서 살충제를 준비해 골고루 뿌려주고 새로운 근무지로 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쪽 직원에 회양목에 무슨 약을 뿌렸냐는 항의 전화였다. 내가 전출 간 다음 회양목 나뭇잎만 누렇게 말라 죽으며 고사 직전이라는 사연이었다.
짐작하기에 살충제를 확인하지 않고 대신 제초제를 뿌리고 왔던 모양이었다. 제천을 떠나면서 좋은 일하고 왔다는 자부심이었는데, 벌레가 아니라 나무를 잡았던 것이었다. 남은 직원들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사과를 하였지만, 회양목의 안위도 많이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전화로 나무의 안부를 물어보니 다행히 고사(枯死) 직전에 다시 소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그곳을 떠나 온지 벌써 20여년이 지났지만 제천을 생각하면 회양목에 대한 생각이 가장 먼저 난다. 지금도 가끔 출장 가면 회양목부터 살피게 된다. 그간의 걱정과 달리 당시보다 더 무성하게 자라지는 않지만 정원석 사이로 파랗게 자라주는 것을 보면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그 때 모두 몰살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실수로 마음의 짐이 많이 되었을지 싶다.
회양목의 가장 큰 덕목은 꽃말처럼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겠나 싶다. 여린 잎 그대로 월동 하고, 봄이 되면 꽃샘추위 속에서도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은 꽃을 가장 먼저 피워낸다. 그러면서도 가장먼저 다른 생명을 살리고 길러내는 소중한 역할을 한다.
풍족할 때의 산해진미 진수성찬보다 굶주릴 때 필요한 찬밥 한 술이 더 반갑고 가치 있지 않겠는가. 겨울을 힘겹게 넘긴 벌에게 비록 볼품없는 꽃에 불과하지만, 벌에게 꿀과 꽃가루를 주어 기운을 돋우고 생명을 살려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운이 왕성해진 벌들은 또 다른 생명을 창조해 내니 숨어서 덕을 행한다.
꽃이 지고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명나방 애벌레에게 먹이가 되어야 하는 수난도 어쩌면 또 다른 자기희생의 운명이 아닐까 싶다.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自矜者不長’ 즉 ‘자신만을 뽐내는 자는 오래 갈 수 없다’ 라고 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의 덕목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거나 뽐내지 않고, 어려움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자연스럽게 해결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뭇 사람들이 그 존재만 알고 있을 정도로 편하게 하는 지도자가 으뜸이며, 두 번째는 백성들이 가까이하고 칭찬받는 지도자, 세 번째는 공포정치를 일삼아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이며, 가장 나쁜 경우는 백성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라고 했다.
회양목 꽃의 의미를 찬찬히 살펴보면 가장 으뜸이 되는 지도자급에 꼭 맞는 꽃으로 보인다. 더불어 사람들의 정원에서 사시사철 푸른빛으로 말없는 벗이 되어 주는 것 또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또 하나의 미덕이 아니겠나 싶다
첫댓글 울릉도 산꼭대기에서도 본 회양목을 신비롭고 특이하겐 보았었는데...... 자세한 내용 잘 알게되어 감사드립니다.
'korean box tree'라고요...정말 재미있군요. 선생님?
정말 우리나라사람들만 회양목에게 전지를 하는 건 아닐까요? 어찌하여 그런 이름이...
혹 외국인들은 자연그대로 두는건지...저의 키가 작은 편이라 그런지 눈높이가 회양목이 잘 들어 온답니다.
아효...제천 청사의 나무가 살았다니 다행입니다. 나무사랑을 솔선하신 선생님 마음을 회양목에게 전해졌는가 봅니다.
제초제세례를 맞고도 살았다니요.ㅎㅎ재미있게 감상 잘했습니다.
회양목이 제초제를 흠씬 맞고도 살았다니 다행입니다.
회양목의 여러가지 미덕은 도장재료 뿐이 아니라는걸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의 덕목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거나 뽐내지 않고, 어려움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자연스럽게 해결하는 것이라 했다."화양동의 회양목이 생각납니다. 송시열 당대의 나무로 꼽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좋은 글 감상 잘 했습니다.
친구의 집에 회양목 분재가 있습니다. 저는 나무를 고생시키는 분재는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친구의 회양목 분재는 보기에 좋았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하여 회양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自矜者不長’
꽃이 지고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명나방 애벌레에게 먹이가 되어야 하는 수난도 어쩌면 또 다른 자기희생의 운명이 아닐까 싶다.
저희 마당에도 회양목이 있는데 해마다 그 벌레때문에 작년에 모두 잘라 버렸는데 제 생각이 짧았던것 갔습니다. 자기 희생을 톻하여 덕을 쌓는 거였었나 봐요.
정원 관상목으로서의 화양목은 아름답고 앙정맞은 모습에 누구나 달리본다. 나도 화양목두그루를 50여년 키워보았으며 구나무손질에 정성을 다해보았다.
이른봄 낮에 벌들의 꽃가루 보고임을 매년보았지요 이제는 추억속의 나무가 되었지만!
"풍족할 때의 산해진미 진수성찬보다 굶주릴 때 필요한 찬밥 한 술이 더 반갑고 가치 있지 않겠는가. 겨울을 힘겹게 넘긴 벌에게 비록 볼품없는 꽃에 불과하지만, 벌에게 꿀과 꽃가루를 주어 기운을 돋우고 생명을 살려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운이 왕성해진 벌들은 또 다른 생명을 창조해 내니 숨어서 덕을 행한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