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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폭발물 테러... 한국인 4명 사망
예멘 남동부 하드라마우트주의 고대 도시
시밤.2009년 3월 15일 오후 5시 50분쯤
(현지시간) 예멘 남동부 하드라마우트 주
(州)의 고대 도시 시밤에서 자살폭탄으로
추정되는 폭발이 발생해 예멘인 1명과
한국인 관광객 일행 18명 중 4명이 숨졌다.
한국인 사망자는 박봉간(70·서울 삼성동), 김인혜(여·64·서울 목동), 주용철(59·서울
암사동), 신혜윤(여·55·암사동)씨 등 4명으
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 주씨와 신씨는 부부
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홍선희(여·54·서울
상도동), 박정선(40·서울 홍제동), 손종희
(암만 현지 거주) 씨 등 4명도 부상을 입고
현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중 3명
은 심각한 화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 선출
▶2003년 국방부, 軍복무기간 2개월 단축 발표
▶2000년 초대형 인터넷 연합체 ‘예카’ 출범
▶1999년 한국 최초 인증기관 한국전자인증 설립
▶1998년 전 국회부의장 고흥문씨 별세
▶1994년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 기본계획 수립
▶1990년 고르바초프, 초대 소련대통령에 취임
고르바초프.
신설된 소련 대통령은 군 통수권, 대통령령의 포고권, 수상을 포함한 각료의 임명-해임권, 법안 거부권, 비상시의 특별권한을 부여받아 미국과 프랑스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고르바초프는 서방세계에서는 높은 평가와 기대를 받았지만, 소련 국내에서는 경제 부진, 민족문제 등으로 난관에 부딪쳤다.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난관에 대처하기 위한 강력한 권한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 대신에 대통령직을 신설, 취임하게 됐다.
▶1990년 국제환증서 한도액 인상(25달러→100달러)
▶1986년 싱가포르,뉴월드 호텔 붕괴
▶1983년 격번제 버스정차
▶1981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르네 클레르 사망
▶1980년 수리남 민족군사평의회, 새 수상 임명
▶1979년.중국군 베트남 철수 완료 발표
▶1979년 터키.중앙.조약기구
(CENTO)로부터 이탈 선언
▶1975년.국회 외무위 핵무기 비확조약
비준안 통과
▶1975년 선박왕 오나시스 사망
1975년 3월 15일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생을 마감했다. 자신의 외동딸과 음식물을 포함한 만물을 황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처했던 그였지만, 질병과 죽음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1960년대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선박왕
오나시스의 생전 모습.
1905년 1월 15일 가난한 나라 터키에서 태어난 그는 17세때만 해도 무일푼의 방랑소년이었다. 그러나 담배수입상으로 일하다 25세 때에 이르러 일약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가 거부로의 첫발을 디딘 것은 1930년대 세계적인 불황이 닥쳐왔을 무렵, 2척의 캐나다 화물선을 사들임으로써 시작됐다. 1930년대 중반쯤 그는 스웨덴으로부터 유조선을 주문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20년에 걸쳐 1백척에 가까운 탱커와 포경선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생전 카지노엔 발도 디디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는 투기적인 포경에 탐닉했다. 이는 곧 부의 부를 창출하며 그를 역사상 세계적인 갑부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땅딸막한 몸집에 연한 색안경을 낀 그는 여성들의 매력을 끌기에 충분했고, 1968년 故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젊은 미망인 재클린여사와 말썽많은 재혼을 하기 전까지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 칼라스 등 유명 여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오나시스의 사생활은 그 대부분이 황금의 방벽에 가려져 있었다. 예컨대 재클린과의 결혼식도 그가 소유한 그리스의 스콜비오스섬 그러했다. 세상의 호기심은 그를 향해 커져만 갔지만, 채워질 수 없었다.
그러던 1973년, 가족비행기의 충돌사고로 아들 알렉산더를 잃은 후 담낭수술을 받는 등 심신의 병을 앓던 그가 이날 기관지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기증된 유산을 제외한 그의 막대한 유산의 절반이 외동딸 크리스티나에게 상속되었지만, 그의 딸 역시 평생을 우울증과 약물 복용에 시달리다 세 살배기 딸 아티나양을 홀로 남겨두고1988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1904년 그리스 담배상의 아들로 태어난 오나시스는 일찍부터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921년 터키군이 그가 살던 서머나를 침공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전쟁으로 투옥된 아버지를 위해 전 재산을 털어 터키군에 뇌물을 주었지만, 그것이 풀려난 아버지의 분노를 사게 되자 그리스를 떠나 아르헨티나로 향한다. 전화 기사로 일하면서 박봉에 어려운 생활을 하던 그는 사업상 오가던 전화에서 얻은 정보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자신의 돈과 매력으로 부유한 여성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그는, 마침내 세계적인 선박 부호의 딸인 티나 라바노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한다. 1946년, 42세의 오나시스는 17세의 대부호의 딸과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일중독에 빠진 오나시스로 인해 그들 부부의 사이는 점점 벌어지게 되고, 48년과 50년에 아들과 딸이 각각 태어난 후에도 가정에 소홀한 오나시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수없이 많은 여성들과 애정행각을 벌였다. 1957년 당대 최고의 오페라 가수인 마리아 칼라스와 만난 오나시스는 그녀의 열정적인 매력과 명성에 이끌려 유부녀라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결국 각각 이혼하게 됐지만 오나시스는 헌신적인 사랑을 보내는 마리아 칼라스를 매정히 대한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에 대한 악평을 퍼트려 오페라 가수로서 점점 절망하게 만든다.
60년대 오나시스의 외도 상대 중 하나였던 리 랫지윌은 당시 미 대통령 영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이러한 인맥을 이용해 재클린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지만, 마리아 칼라스는 그들의 관계가 그 이상 심각해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재클린 케네디를 돈 앞에 무너지지 않을 고결한 여성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믿음은 곧 무너지고 말았다. 남편의 뒤를 이어 시동생 로버트 케네디마저 암살되자 재클린은 자신과 아이들의 신변에 대해 극도의 불안을 느끼게 됐고, 이에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 오나시스가 결혼을 선언한 것이다. 미국 최고의 여성과 이방인의 결합에 미국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이는 오나시스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마리아 칼라스였다.
주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곧 서로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지게 됐고, 1973년 오나시스의 장남 알렉산더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숨진 후 마리아 칼라스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알게 된 재클린은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이혼 수속 중 갑자기 쓰러진 오나시스는 1975년 3월 15일,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은둔생활을 하던 마리아 칼라스도 1977년 그의 뒤를 따랐다.
오나시스 왕국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딸 크리스티나가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아버지의 쓸쓸한 말년처럼 그녀의 삶도 불행했다. 4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으면서 딸 하나를 얻은 후 88년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녀의 딸 아티나 오나시스는 15세가 되던 해에 세계 최연소 갑부가 되었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는 결국 자신이 꿈꾸던 강력한 왕조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맨손으로 130억 달러의 왕국을 일구어낸 그는 영원한 전설로 남을 것이다.
▶1974년 지젤 브라질 대통령 취임식
▶1971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설립
▶1969년 중국과 소련,
전바오 섬(珍寶島) 무력충돌 격화
▶1968년 광화문 복원 공사 기공
▶1968년 파리 금시장 온스당 44달러로
사상최고시세, 파운드는 대폭락
▶196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GATT) 한국 서명
▶1965년 쇼팽 피아노 콩쿨대회 열림
▶1964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의 결혼
▶1963년 군사정부 내각 총사퇴 결의
▶1963년 육군장교 80여명
최고회의에 앞서 군정 연장요구 데모
▶1961년 앙골라 흑인 폭동
▶1960년 3ㆍ15부정선거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일인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이 대대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정-부통령 후보에는 자유당에서 이승만과 이기붕, 민주당에서 조병옥과 장면이 출마했지만 선거를 얼마 안남긴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치료받던 중 급사했다.
1960년 3ㆍ15부정선거에 분노해
거리로 뛰쳐나왔던 4ㆍ19세대.
이제 관심사는 대통령보다는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였다. 4년 전 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된 현직 부통령 장면은 이기붕에게는 너무 강적이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85세로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부통령은 사실상 준 대통령이었다.
선거결과를 미리 분석한 이승만 정권은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계획을 세웠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여당의 야당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사건이 연일 계속됐다.
선거 1년 전에 내무장관에 임명된 최인규는 대대적인 부정선거의 지침을 각급 기관장에게 극비리에 하달했다. 최인규는 직위를 이용해 각급 기관장의 적극적인 선거개입을 강요하고 대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선거자금을 마련했다. 이러한 음모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폭로됐다.
선거 당일 새벽, 이승만 정권은 4-%나 되는 찬성표를 투표함에 미리 투입해 놓았고, 투표소 안팎으로 무장경찰과 완장부대를 배치했다. 개표 결과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각각 963만 표(89%)와 833만 표(79%)의 득표로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장면은 184만 표뿐이었다.
그러나 자유당의 이같은 선거부정은 3ㆍ15선거 당일부터 시위를 유발했다. 특히 마산은 시위가 심해 오후 6시부터 마산시청앞에서 시작한 시위가 그날 밤 11시 경에야 강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8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하다는 등 유혈사태를 빚었고, 이날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군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가 4ㆍ19혁명과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이루어냈다. 최인규 등 부정선거 원흉들은 혁명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1959년 북나이지리아,
영국연방내 독립국으로 발족
▶1951년 이란, 석유 국유화 법안 가결
모사덱의 석유국유화운동을 지지하는
이란의 석유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란의회가 이란의 석유를 독점지배하고 있는 영국자본의 앵글로·이란석유회사(AIOC)에 대한 국유화 법안을 1951년 3월 15일 가결했다.
석유 국유화는 모사덱을 지도자로 하는 국민전선이 주도했다. 모사덱은 70세를 넘은 노인이었지만, 장관과 법관 등을 역임한 실력자로 이란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의회는 모사덱을 석유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했고, AIOC의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국유화를 지지해 이날 국유화가 가결된 것이다. 게다가 8일 전인 3월 7일 ‘외국의 지원없이 석유 국유화는 불가능하다’ 고 주장해 온 알리 라즈마라 수상이 광신적인 이슬람교도에게 암살된 것도 석유 국유화를 촉진시켰다.
팔레비 이란 국왕도 국민전선의 압력으로 무사덱을 수상으로 임명하고 석유 국유화 법안에 서명했다. 모사덱이 석유 국유화에 이어 이란국영석유회사(NIOC)를 설립하자 영국은 ‘이란산 석유판매를 방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고 발표했다. 국제석유자본도 영국에 화답, 이란 석유의 취급을 거부하자, 석유수입에 크게 의존해 온 이란경제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외화가 부족해지고 수입이 감소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반(反)모사덱 목소리가 높아졌다.
▶1946년 남북이산가족 서신교환 시작
남북이산가족이 1946년 3월 15일 분단 후 처음으로 서신을 교환했다. 이날 남한에서 보낸 서신은 30만2천2백9통이었고, 북한에서 온 서신은 1만5천7백60통이었다. 남북 사이에 서신왕래가 끊긴 것은 한반도가 38선으로 분단된 지 22일만인 1945년 9월 6일이었다.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은 해주우체국에 지시, 전신과 우편물 등을 남한에 보내지 못하게 하고 남한과의 전화통화도 차단했다. 이날 남쪽에서 보낸 서신은 친인척의 안부를 묻는 사적인 내용이 대부분인데 반해 북에서 온 서신의 상당수는 남한에서의 공산혁명을 부추기는 선전물이 주종을 이뤘다. 당시 남측에서 미 군정 소속 장교 1명과 사병 2명, 우체국 직원 3명 등 모두 6명, 북측은 소련 장교 1명, 평양우체국 직원 5명 등 6명이 각각 우편물 수송을 담당했다.
이들은 기동차에 우편물을 싣고 개성역에서 만나 우편물을 교환했다. 이후 우편물 교환장소는 소련측의 요청에 따라 38도선에서 북쪽으로 1백여m 떨어진 여현역으로 바뀌었다. 북측은 6.25 이틀전에 서신교환을 일방적으로 중단함으로써 이산가족들은 2001년 3월15일 이산가족 서신교환이 이뤄질 때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생사를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
▶1946년 러치 미군정장관 귀속농지분할매각 발표
▶1945년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자살
▶1941년 총독부, 학도정신대 조직
▶1939년 독일군,
보헤미아-모라비아 점령해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1937년 미국 시카고의 쿡 카운티 병원,
세계최초 혈액은행 설치
▶1932년 아폴로 12호 우주비행에 참여한 미국의 우주비행사 빈 출생
▶1928년 일본, 공산당원 1천여명검거
▶1923년 미국 WEAF국, 최초로 음악 광고방송 실시
▶1920년 시인 초정 김상옥 출생
▶1919년 일제, 호세-가옥세 부과 개시
▶1919년 수필가 전숙희 출생
▶1910년 독립운동가 오광심(김학규의 부인) 출생
▶1894년 아프리카에 관한 독일-프랑스 협정 성립
▶ 1887년 경과정시 실시
▶ 1874년 제2차 사이공조약 체결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됨
▶ 1869년 폴란드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 뵈치에호프스키 출생
1854년 독일 세균학자 에림 폰 베링 출생
▶ 1830년 독일 작가 하이제 출생
▶ 1820년 메인주, 미연방 23번째 주로 편입
▶ 1815년 나폴레옹 다시 황제에 즉위
▶ 1767년 미국의 제7대 대통령(1829-37 재임) 잭슨 출생
▶ 1521년 스페인 탐험가 마젤란, 필리핀 발견
포르투갈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1년 3월 15일 필리핀을 발견했다. 1519년 8월 10일 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를 위해 스페인의 세빌랴를 출항한지 1년 6개월 만이었다. 앤티워프 출신 상인의 경제적 지원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허락을 받고 시작한 탐험에는 다섯척의 선박과 270명의 승무원이 동원됐다.
세계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자 페르디난드 마젤란
1520년 11월 28일 남미 남단과 푸에고 제도 사이를 통과해 태평양에 이른 마젤란은 수개월동안 서진(西進)을 계속해 1521년 3월 초에 괌섬을 발견했고 이날 필리핀을 발견했다. 필리핀 레이테만의 즈르안섬에 도착한 마젤란은 세빌랴에서 데리고 온 수마트라 출신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세부에서는 군주와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4월 27일 섣불리 막탄섬을 공격하다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했다. 나머지 선원들이 세빌랴에 도착한 것은 1522년 9월 8일이었고 생존자는 18명이었다. 비록 마젤란 자신은 세계일주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의 지휘자였다.
▶ 1493년 콜럼버스 제1차 탐험 마치고 귀항
▶ 1437년 조선, 월식 발생
▶ 493년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 출신의 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 피살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