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새소식
2013.12.1.
(사설)
마릴린 먼로와 온세(ONCE)
미국의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1926~1962)는 1954년 프로야구선수 출신의 조 디마지오와 일본으로 허니문을 떠난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측이 초청도 했고 신혼여행을 겸해서다. 그러나 도중에 마릴린 먼로는 혼자 한국에 와 주한미군 위문공연을 벌인다. 심심해 못 견디던 먼로는 위문공연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 남편과 싸우면서까지 주한미군 위문공연을 관철시킨다. 마릴린 먼로는 무대에서 그리고 전차 위에서 전쟁 치르느라 피로하며 거칠어진 병사들을 앞에 두고 정열적으로 노래 불렀다.
먼로가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 뒤 감기에 걸리고 위경련을 일으키자, 치료를 위해 급히 호텔 방으로 불려간 사람이 있었다. 바로 지압 창시자 나미코시(1905∼2000)였다. 나미코시는 요시다를 비롯한 전·현직 총리, 케난 전범재판소 수사검사장, 무하마드 알리 등 유명인을 많이 치료했으나 치료 시에는 최소한 가운을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먼로는 당시 가운 한 장 걸치지 않고 전라의 모습으로 누워 있어 눈이 멀 정도였다.
나미코시는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귀중한 찬스를 놓치지 않고, 맨손으로 보통 때보다 3배 이상의 시간을 공들여가며 시술했다. 5분 만에 먼로는 통증이 흩어져 사라지고 긴장이 풀려 잠들었다. 먼로는 만성 자궁내막염으로 평생 고통을 겪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이 역시 안마 지압으로 치료받는다. 일주일 동안 먼로를 매일 시술했다고 한다. 그는 일왕의 전담 지압치료사이기도 했다. 그는 훗날 TV ‘채널파이브’에 출연하여 이 같은 사실을 털어놓은 바 있다.
서양의 뷰티와 마사지 업소들은 지금도 1954년 나미코시의 마릴린 먼로 치료를 홍보물에 집어넣어 고객유치 경쟁을 벌인다.
이처럼 마릴린 먼로는 헬렌 켈러와 더불어 맥아더 미군정 당국이 금지한 일본 안마와 지압을 다시 합법화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나미코시는 정안인이었다.
두 미국여성의 덕을 본 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2011년 우리나라 마사지업계는 종사자수 1만 5,667명, 사업체수 6,797개소로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매출규모는 5,000억 원에 달한다(통계청과 기획재정부 2012년 서비스업무 통계조사). 국내 최대 프랜차이즈 마사지숍인 ‘더풋샵’은 가맹점이 2008년 21개에서 금년 3월 119개까지 증가했다. 모두 정안인이다. 반면, 현재 시각장애인 안마사는 전체 6천여 명 중 2천여 명만이 안마업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다. 일자리를 잃은 안마사들은 저임금의 경로당 안마를 전전하거나, 생계유지 때문에 안마시술소에 명의를 빌려줘 범죄에 휘말리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그럼 시각장애인도 살고 정안인도 사는 상생 대안은 과연 없는 걸까? 시각장애인 고용률을 거의 100% 보장하고 있는 스페인의 시각장애인 복권판매 독점제도가 시사점을 줄 수 있지는 않을까? 스페인시각장애인연합회(ONCE) 즉 ‘온세’는 단순한 시각장애 재활교육을 넘어서서 노동시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적극 돕는다. 이렇게 고등교육을 받은 시각장애인들은 변호사?경제전문가?심리학자?IT전문가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시각장애 특성을 살려 텔레마케팅 같은 업무에 종사한다. 이런 시각장애인이 1천여 명에 달한다니 그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대신 절대다수인 1만 5천여 명의 스페인 시각장애인들은 ‘길거리 복권판매업’에 종사한다.
우리는 ‘온세’가 스페인 국민들의 삶과 밀접한 복권판매를 담당하며, 시각장애인권을 뛰어넘어 국가경제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복권판매를 직접 수행하면 사회적 통합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역사가 80년 가까운 ‘온세’는 시각장애가 아닌 다른 모든 장애인에게까지 협동하며 사회적 책임을 진다. 즉 1980년대부터는 시각장애 아닌 다른 장애인도 복권판매를 허락한 바 있다. 그리고 복권판매 수익금의 3%만 ‘온세’ 유지비로 쓰고 나머지는 모든 장애인을 위해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온세’재단을 설립하여 라틴아메리카 19개국 시각장애인도 돕고 있다.
안마든 마사지든 지압이든 침이든 일대일 ‘터치’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온세’를 상징하는 로고의 모양은 일반 활자의 숫자 ‘11’의 형태처럼 생겼다. 우연히도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과 모양이 흡사하다. 한자로 두 사람이 서로 떠받치는 형상의 ‘사람 인’ 한자와도 흡사하다. 스페인의 시각장애인 복권판매독점제도는 물론 정안인을 포함하여 국민적 동의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스페인처럼 시각장애인 복권판매독점 시대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잘 사는’ 이 꿈을 시각장애인계와 정안인들이 함께 꾼다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 일본에서 시각장애인이 독점하던 안마 지압으로 마릴린 먼로를 치료한 나미코시도 정안인과 시각장애인 상생을 간절히 염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국의 데이비드 블렁킷을 꿈꾸는 시각장애인
지난 10월 1일, 서울맹학교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원순 시장의 축하 메시지 영상에 이어 영국의 시각장애인 하원의원 ‘데이비드 블렁킷’의 축하 메시지 영상이 상영됐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이들 중 데이비드 의원의 영상에 유독 가슴 뭉클한 감정을 드러낸 시각장애인이 있었다. 그는 56세의 나이로 서울맹학교 이료재활과에서 재활과정을 밟고 있는 늦깎이 재학생 문성호(1급) 씨다.
문성호 씨는 데이비드 의원에게 서울맹학교에 대한 소개글과 함께 2006년 안마사 독점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외국의 기사들을 첨부하면서 축하 메시지를 부탁하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데이비드 의원이 화답하여 영상을 찍어 보낸 것이다.
‘데이비드 블렁킷’ 의원은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지만 교육고용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역임했으며, 27년째 하원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때 블레어 총리의 오른팔이자 2008년에는 차기 총리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의원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 그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각장애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며 정치에 뜻을 두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는 이료대학 설립 문제나 미국의 프린팅하우스처럼 점자점역인쇄를 총괄할 수 있는 정부기관 설립 문제, 접근성 문제 등 시각장애계가 당면한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이미 정치에 발을 들인 적이 있다. 선천성 소안구증을 갖고 태어나 약시인데다가 학부시절 백내장까지 앓게 돼 학업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노력 끝에 성균관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당시 내무위원회 소속이었던 정균환 전 의원의 정책보좌관으로서 6년 동안 일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2000년에는 한국경찰연구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영국으로 건너가 포스트 닥터(박사 후 연수과정)도 수료해 경찰전문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런데 2002년에 대형 사고를 당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그 후유증으로 2년 후 망막박리가 되면서 왼쪽 눈이 실명하게 된 것이다. 오른쪽 눈의 시력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려서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막상 한쪽 눈을 실명하고 나니 활동반경이 위축돼 몇 년간 외부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바깥세상으로 발을 내딛게 된 것은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위기를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게 되면서였다.
그는 위기를 발판으로 삼아 더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다. 미미하지만 남아 있는 시력을 최대한 활용해 지금까지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쌓아온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에 집필 활동에 몰두했다. 그렇게 해서 《경찰정치학》, 《옴부즈맨과 인권》, 《미국, 아직도 노예제 국가?》 등 많은 책을 펴낼 수 있었다. 또 경찰노조추진위원회 위원장과 자치경찰연구소 소장을 맡아 운영하면서 경찰의 민주화, 더 나아가 국민 인권 보호를 위해 연구 활동과 외부 활동에 헌신했다.
그러던 중 3년 전 의사에게 “1급인데다가 진행성이고 언제 나머지 눈도 실명할지 모르니 대비할 겸 재활교육을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받았다. 그길로 그는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아가 기초재활과정을 이수했고, 현재 서울맹학교 이료재활과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서울맹학교 용산캠퍼스에서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시각장애계에도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맺어온 인적 네트워크와 쌓아온 역량들을 활용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헬렌 켈러에게는 설리반이, 강영우 박사에게 석은옥 여사가 있었던 것처럼 시각장애인의 복지향상을 위해서는 시각장애인 스스로의 노력과 투쟁뿐만 아니라 정안인들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각장애인이 겪는 어려움과 필요로 하는 도움이 무엇인지 정안인들이 알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한 첫발걸음으로써,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각 분야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낼 계획이다.
이외에도 데이비드 블렁킷 의원과 인연이 닿은 것을 계기로 내한 강연과 영국에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안마의 탁월함을 소개하는 기회를 마련해 줄 것 등을 부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문성호 씨가 시각장애계에서 자리를 잡고 ‘새내기 정치인’으로서 발돋움할 수 있을지 무척이나 기대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