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는 혓바닥이 아닌 마음으로 하라
우리 불자들은 몸과 입과 마음의 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특히 마음 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언제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만물은 생겨나[成] 머물렀다가[住] 무너지고[壞] 사라지는[空]
성, 주, 괴, 공의 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중생의 한 생각, 한 생각 또한 생겨났다가[生] 잠시 머물고는[住] 변화하고[異] 사라지는[滅]
생, 주, 이, 멸의 단계를 순환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 생멸 속에서 편리한 대로 취하고 버리며,
이 취하고 버리고 선택하는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흔히들 ‘윤회(輪廻)’라고 하면
사람이 죽어서 개나 고양이로 다시 태어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 마음 흔들리는 것이 윤회입니다.
내가 근본 자성 자리를 망각하고 자꾸 동요하므로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며,
그래서 윤회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일 뿐,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윤회라 하는 것도 없습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면 벗어나게 됩니다.
번뇌에서도 갈등에서도 고통에서도 윤회에서도 모두 벗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은 염불하든, 화두(話頭)를 들든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흔들리지 말고,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려도 흔들리지 말고,
피부에 무엇이 닿아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으면 동요가 없습니다.
동요가 일어나지 않으면 구속받지 않고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행은 혓바닥으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안 흔들리도록 하면 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불교의 수행입니다.
실로 불교의 수행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혓바닥으로 다 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말은 쉬운데 실천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말 보다는 실천 쪽을, 지혜보다는 선정 쪽을 닦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흔들림 없는 마음의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버지들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입시생을 둔 아버지는 말합니다.
“올해 우리 아들이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구나.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서 시험 잘 쳐야지!”
이렇게 혓바닥으로는 얼마든지 응원을 해줍니다.
그러나 막상 퇴근하여 집에 들어왔을 때,
아이들은 학원에 가고 부인 또한 아이 기도를 위해 절에 가버려
빈집에 들어오는 경우 순간적으로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어,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꿈틀거리게 됩니다.
한 생각 꿈틀거림!
혓바닥으로 열 번 좋은 소리하는 것보다, 가슴 밑바닥에서 한 번 꿈틀거리는 검은 기운이
집안에 풍파를 가지고 오고 집안의 일을 망쳐버린다는 생각을 우리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꾸만 적당하게 생각하고 편리하게 생각해 버립니다.
한평생 수천수만 가지 잘못이 쌓였더라도 지옥 한 번만 갔다가 오면
해결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 열 번 잘못하면 열 번 잘못한 만큼 나쁜 세상에 열 번을 갔다 와야 합니다.
한평생 수천 가지 잘못이 쌓이면 수천 번 나쁜 세상을 갔다 와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단 한 번만 지옥에 갔다 오면 모두 해결이 되는 것으로 적당하게 생각을 해버립니다.
결코 세상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 조금 더 주의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에 끌려다니지 말고,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저쪽 세계도 늘 염두에 두면서,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윤회이기 때문에,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흔들립니까?
‘나’ 스스로 근본 자성 자리를 망각하고 자꾸 움직이려고 하니까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쪽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흔들리고 있는 내 쪽에서
아무리 말하고 생각하고 판단해도 흔들리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눈으로 맑게 고인 물을 쳐다보면 물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눈이 흔들리고 있으므로 물이 흔들리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막대기 끝에 불을 붙여 뱅뱅 돌리면 불이 하나의 원처럼 둥글게 보이는 것 또한 착각입니다.
구름이 움직이는데 가만히 있는 달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착각입니다.
이러한 착각은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 모든 착각은 내 쪽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마음, 때 묻은 마음으로 내 쪽이 흔들리고 있으므로
우리 앞에 놓여 진 게 따라 흔들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유하자면 아지랑이와 같은 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으므로 모든 게 흔들려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근본 자성 자리 세계를 아무리 이야기하고 추측해 본들
근본 자성 자리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흔들리는 쪽에 주춧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망상심(妄想心)을 가지고 부처님의 경계를 짐작하고 추측하는 것은
개똥벌레의 반딧불을 가지고 산에 불을 붙이려는 것과 같아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양을 가지고 모양을 찾아가면 전부 헛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이나 ‘나’라는 모습을 주춧돌로 삼고 있으므로,
아상(我相)이 가득한 ‘나’의 모양새를 가지고 우리가 바라는 부처님을 건너다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내 모양새를 가지고 부처님을 쳐다보는 것은
전부가 아지랑이와 같고 꿈과 같은 헛짓이 될 뿐입니다.
생, 주, 이, 멸을 순환 반복하는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 속에 있으면서 ‘나’를 주춧돌로 삼아 진리와 법과 부처님을 추측만 하고 있으니,
어떻게 윤회가 끊어진 자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내 마음자리가 안정되지 못할 뿐이고,
안정이 되지 못하니 모든 게 흔들리게 보이고 흔들리는 것처럼 착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내 마음이 쉬지 못하고 내 마음이 흔들리는 동안은 전체가 흔들립니다.
내가 흔들어서 우리 집안에 파도를 일으키고,
내가 흔들어서 우리 집안의 문제 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본래의 깨끗한 마음자리인 근본 불성(佛性)은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울에 먼지가 앉고 때가 끼어 있어도 그 먼지와 때를 닦아내면 밝은 거울이 나타납니다.
이때의 겨울은 본래 밝은 것이지, 때를 닦아냄으로써 거울에 새로운 밝음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흔들리는 내 마음을 쉴 수 있고 흔들리는 내 마음을 안정되게 하면 착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내 마음을 내가 흔들지 않는 것
이것이 불교의 수행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 우룡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