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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팔고찰순례단 원문보기 글쓴이: 청원
구례 화엄사와 흑매 2015년 3월 30일(월)
붉은 매화이지만 선홍색의 붉은 기운이 유난히 짙어 검은 빛이 돌 정도라 해서 붙여진 이름 흑매, 매화의 암향(暗香)에 빠져 들려면 번잡한 휴일보다는 월요일이 나을듯 하여 월요일 아침 구례 화엄사로 향했습니다.
화엄사에 오면 그 숭고한 민족애에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해야 할 곳이 있기에 대문만 꽃장식을 먼저 하고........, 그리로 가기전에 한국전쟁 당시 상원사와 해인사를 기억해 봅니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난 부처님의 제자야. 중이란 원래 죽으면 화장을 하는 법. 나는 여기서 힘 안들이고 저절로 화장을 할 터이니 당신들은 명령대로 어서 불을 지르게"하며 “상원사”를 지켜낸 한암스님,
“각 기는 내 뒤를 따르되 편대장 지시 없이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사격하라.” 그날 저녁, 미 공군 고문단 한 소령이 편대장실에 나타났다. “그런데 엉뚱한 곳을 공격하더군요” “소령께서는 경찰의 요청에 따라 목표를 지정했지만 그 곳은 사찰이었습니다” “사찰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공비보다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세계적인 국보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천년고찰 “해인사”와 인류의 보편적이고 뛰어난 가치를 지닌 세계유산인 유네스코 등재 “장경판전”, 세계기록유산인 “대장경판 및 제(諸)경판” 이 우리 곁에 남아있게 한 빨간 마후라의 표상 김영환 장군.
여기 화엄사에도 스쳐 지내서는 안되는 공덕비가 있다.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을 전화(戰火)에서 지켜낸 차일혁(車一赫) 경무관. 시인(詩人) 고은(高銀)이 비문(碑文)을 지었다.
“이제 해원(解寃)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靈峰) 지리산(智異山)을 생사(生死)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피어린 원한(怨恨)을 풀어 그 본연(本然)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법륜(根本法輪) 화엄사(華嚴寺) 청정도량(淸淨道場)에 한 사람의 자취를 돌(乭)에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 ..............................중 략................................................................ 새삼 그의 유덕(遺德)을 길이 전하는 까닭을 이에 밝혀 놓으니 지나는 길손이여 한 겨를 머물러 주소서. 산(山)은 여기 있고 물은 먼 데로 흘러감이라.”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으로 전쟁에서 남다른 인간애를 실천하고 불교 문화유산을 지켜준 차일혁 경무관의 공덕비 앞에서 잠시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고 흑매를 찾고자 한다.
차일혁(車一赫1920~1958)경무관은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쳤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이 파죽지세로 남하해 오자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빨치산 ‘남부군’ 토벌시 전투 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은 빨치산의 은신처로 이용되고 있는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러나 차 총경은 이 명령을 차마 따를 수가 없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문화를 잃으면 우리 마음을 잃고 우리 마음을 잃으면 우리나라를 잃는다.” 차 총경은 1백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화엄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각황전 문짝을 모두 떼어와 대웅전 앞에 쌓아 놓게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부하들에게 쌓아 놓은 문짝에 불을 지르라며 이렇게 말했다. “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으니 이를 어길 순 없다. 그러나 문짝을 태운 것이니 명령은 이행한 것이다.” 화엄사를 지키기 위해 작전명령을 불이행했던 차일혁은 감봉처분을 받았다
빨치산 남부군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였기에 화엄사뿐 아니라 지리산의 천은사, 쌍계사와 모악산의 금산사, 장성 백암산의 백양사, 고창의 선운사 그리고 덕유산의 크고 작은 사찰 등 산악에 자리 잡은 많은 사찰들이 토벌 작전에 방해가 되기 일쑤였지만 차일혁은 부하와 동료들을 설득해 가며 이 사찰들을 지켜냈다.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차일혁의 부대에 의해 사살되자 그의 시체를 스님들의 독경 속에 정중히 화장해 하동 송림(천연기념물 제455호)에 뿌리며 장례를 치렀다. 자신과 부하들의 목숨이 오가는 전투 속에서도 민족애와 생명의 소중함을 외면하지 않고,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전투’는 한국전쟁 후 유일하게 태극무공훈장을 3개나 받은 전투였지만, 정작 차일혁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빨치산 대장을 정중히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상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은 차일혁 총경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고, *1998년 5월 화엄사는 경내에 시인 고은이 비문을 작성하여 차일혁총경을 기리는 공적비가 건립된다. *2008년 문화재청에서는 빨치산의 근거지인 화엄사 등의 사찰을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절하여 명찰들을 보존한 공적이 있는 차일혁 경무관에게 감사장을 추서하였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10월 18일 청주 예술의전당 '2008년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보관문화훈장을 서훈하였다. *경찰청에서는 2011년 8월 차일혁 총경을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하였다. *2013년 6·25동란 당시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을 전화(戰火)에서 구한 숭고한 뜻을 기려 화엄사에 故차일혁 경무관 공덕비가 제막되었다. *색깔이 틀리면 어떤 살인도 용서가 되고 치적이 됐던 당시, 그는 적 조차 용서하는 인도주의적 관용과 박애정신을 보인 것이다. 이에 지난해 2월 미국 알링턴국립묘지 초청으로 알링턴국립묘지의 국내 전쟁 박물관에 해당하는 메모리얼홀에 차일혁 경무관의 기념패가 증정되었다. 알링턴국립묘지는 매년 세계 각국 정상들이 방문해 참배하는 장소다. 민간 차원에서 한국 출신 인물의 기념품을 메모리얼홀이 소장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미 육군3사단의 모니카 스토이(대위·퇴역군인)는 “적군을 포용한 6.25참전 영웅인 차 경무관의 정신은 이 알링턴국립묘지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각황전 주변은 매화향기로 가득합니다. 향기가 겨울 눈속에서 준비되어 와서인지 푸른듯 맑고 짙습니다.
화엄사 홍매화는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조선 숙종 때 각황전을 중건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파선사가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장육화'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아직은 동면중인줄 알았는데 매화향 따라 벌도 한마리 날아 들었습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매월당시집 권지12(梅月堂詩集卷之十二) 유금오록(遊金鰲錄)에 실려 있는 '탐매(探梅)'중 한 수 입니다.
여기서 김시습과 일본 초암차(草庵茶)에 관하여 잠깐 살펴보면, 생육신으로 일컬어지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경주 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칩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집필하였는데, 당시 인근 염포의 왜관에 머물던 일본 사신인 승려가 김시습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는 김시습의 시 두편 '여일동승준장로화(與日東僧俊長老話)'와 '도이거(島夷居)'가 위'탐매(探梅)'가 실려 있는 매월당시집권지12(梅月堂詩集卷之 十二) 유금오록(遊金鰲錄)에 실려 있는데, 이로 미루어 1930년대에 일본의 아사카와 교수가 <부산요와 대주요>라는 책속에서 ‘일본 초암차(草庵茶)의 원형은 매월당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라는 당시의 획기적인 발표가 사실로 추정된다. 1400년경 일본사회는 송나라의 차문화인 서원차(書院茶)가 무분별하게 유행하면서 사치와 낭비가 커다란 사회적 병폐로 부각될 때 김시습으로부터 배워간 초암차(草庵茶)로 서원차(書院茶)의 사치와 낭비를 치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승려는 경주 남산에서 사회적 병폐를 치유하는 지혜를 얻어 갈때, 이 나라의 일부 인사(人士)들은 후손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던 조상의 염원과 혼이 녹아 있는 남산 불상의 목을 자름으로 조상을 부정하는 패륜을 저지르고 있었으니......
흑매가지 사이로 보이는 국보12호 석등
화엄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 후, 백제법왕(599)때 3천여 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다고 하며,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우시고, 원효성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쳤고, 문무왕 17년(677)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신라말기 헌강왕(875)때 도선국사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조성과 더불어 화엄사 중흥조가 되시면서 화엄사가 대총림으로 승격되었답니다.
고려시대는 고려 태조 26년(943)에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문종(1047~1083)때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중수, 인종(1126~1146)때 정인왕사가 중수, 명종 2년(1172)에 도선국사비 건립, 충렬왕(1236~1308)때 원소암 중건, 충숙왕(1313~1330)때 조형왕사에 의한 전면적인 보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세종 6년(142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도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에 의해 법석의 요람을 이루었고, 임진왜란(1592~1598)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에 의해 화엄사가 전소되었다고 합니다. 인조(1630~1636)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몇몇 건물을 중건하고, 숙종(1699~1703)때 계파선사와 문도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웅장한 각황전 건립과 더불어 선교 양종대가람이 되었고, 근세에 이르러 도광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주문(一柱門)의 현판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는 임진왜란 이후
대웅전(大雄殿)을 중창(重創)하고 나서 ‘대웅전(大雄殿)’ 현판(懸板)과 함께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 : 1589~1645)이 인조(仁祖) 14년(1636)에 쓴 글씨로 편액에 글쓴이의 이름이 들어간 효시이며, 부친인 선조가 즐겨쓴 한석봉체(韓石峯體)로 특히 해서 大자에 뛰어 났다고 한다. 현판 왼쪽엔 皇明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光書(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
의창군광서)라는 낙관 글씨가 있다. '명나라숭정9년병자중추로’로 조선 인조
14년(1636) 8월에 해당됩니다.
금강문(金剛門)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와 나라연금강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와 밀적금강
금강문을 지나서 왼쪽편에 천왕문 일부가 그 뒷편 오른쪽으로 멀리 운고각이 보인다.
대부분의 사찰에서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길은 일직선상에 놓여있는데 화엄사는 S라인이다. 정남향인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살짝 비껴가면 금강문, 다시 살짝 왼쪽으로 가면 천왕문, 또 살짝 오른쪽으로 운고각이 있는데, 이는 태극형상(太極形象)으로 가람이 배치된 것이라고 한다.
천왕문(天王門)은 금강문(金剛門)을 지나면 나타나는 문으로 부처와 불법(佛法), 스님, 불자(佛子)를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봉안한 건물(建物)이다.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과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
▲보제루(普濟樓 : 전남 유형문화재 제49호)
▲운고각(雲鼓閣)
신라시대 탑으로 보물 제132호와 보물 제133호로 지정된 동·서로 서 있는 5층 쌍탑과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인조(仁祖) 8년(1630)에서 14년(1636)에 걸쳐
벽암 각성(碧巖 覺性) 선사에 의해 재건됨으로써 화엄사(華嚴寺)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오래된 전각인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보물 제299호 대웅전(大雄殿) 일주문 현판과 함께 대웅전의 현판도 의창군 이광(義昌君李珖:1589~1645)의 글씨로 숭유억불 정책과 지역 탐관오리 벼슬아치들의 횡포가 극심한 시기에 아마도 그들이 화엄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벽암대사께서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에게 부탁하여 글씨를 받아 편액을 걸었으리라. 낙관은 '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光書(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의창군광서)' 로 쓰여 있다.
각황전(覺皇殿 : 국보 67호) 본래 이 자리에는 2층 4면 7칸의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입상(黃金丈六佛 立像)을 모신 장육전(丈六殿)을 의상조사께서 조성 하였으나 임진란때 소실 되었다. 계파 성능선사(桂波 性能禪師)께서 장육전 중건 불사의 대발원의 백일기도로 문수보살의 선몽으로 공양주 스님이 화주승으로 선택되고, 시주자는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로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소(沼)에 몸을 던지고 공주로 환생했는데 한쪽 손을 쥔채로 태어났으며 5년후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각황전은 숙종25년 ~ 28년(1699 ~1703)에 중건 되었으며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中層) 팔작(八作)지붕으로서 바깥에서 보기에는 중층(重層)의 건물이지만 내부는 툭 터진 통층(通層)으로 돼있어 불전(佛殿)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으로 뻗어오르는 상승감에 압도되는 기분이 드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이런 양식은 속리산 법주사(俗離山 法住寺) 대웅보전(大雄寶殿), 부여 무량사 극락전(無量寺 極樂殿), 공주 마곡사 대웅전(麻谷寺 大雄殿) 등이 있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성인중에 성인)이라는 뜻과 숙종 임금에게 불교 사상을 일깨워주었다는 뜻으로 숙종(肅宗)으로부터 '각황전(覺皇殿)'이란 이름을 하사받게 된다.
***장륙불(丈六佛) : 부처님 당시 인도인(印度人)의 신장은 보통 8척이었는데, 부처님을 경모하는 마음에서 불상은 두 배인 1장(丈) 6척(尺)이 되게 조성하였다고 한다. 법당안에는 3불 4보살인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다보여래, 지적보살이 모셔져 있다.
각황전(覺皇殿) 법당내 불단 뒷편 황금색 아미타불입상(阿彌陀佛立像)이 그 옛날 여기가 장육전(丈六殿)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장엄염불(莊嚴念佛)중에 몇구절이 떠오른다. 極樂世界蓮池中 극락세계연지중 九品蓮華如車輪 구품연화여거륜 彌陀丈六金軀立 미타장륙금구립 左手當胸右手垂 좌수당흉우수수 극락세계 연못속에 수레바퀴 같은 연화대 열여섯자 금빛몸 아미타불 서 계시네. 왼손은 가슴에 오른손은 내리시고
각황전 앞 석등(覺皇殿 前 石燈 : 국보 제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꽃의 8잎은 8정도[정견(正見),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명(正命), 정업(正業), 정어(正語), 정사유(正思惟), 정정(正定)]이고, 4개의 화창(火窓)은 사성제(苦集滅道)와 부처님의 광명이며, 북의 모습은 진리의 소리이니, 즉 팔정도로 수행하여 사성제의 진리의 이치를 밝히고 광명을 놓으시며 진리의 소리를 중생들에게 들려 주시어 마음의 등불[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의 세계를 밝혀 주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석등이다.
원통전 앞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 보물 제300호)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4사자 감로탑은 신라 문무왕17년(677)에 조성한 것이며 4사자의 표정은 인간의 감정인 희노애락(기쁨,성냄,슬픔,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사람들의 수많은 번뇌를 뜻하며, 불교에서 사자(獅子)가 의미하는 바는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獅子吼) 또는 감로법(甘露法)이라 하기도 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사자(獅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석탑은 번뇌에 싸인 수많은 사람들을, 부처님의 청정한 지혜를 얻게 하여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나, 연화장세계로 이끌어 주는 감미로운 탑이라 할 수 있다.
사사자 삼층석탑(四獅子 三層石塔 : 국보 제35호)과 석등(石燈)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연기존자께서 오른 어깨에 옷을 벗어 메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붙이고 머리에 석등을 이고 왼 손에는 찻잔과 구슬(여의주:불성)을 받쳐 들고 어머니에겐 진리의 공양을 부처님에겐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은 효사상의 공양탑(供養塔)이며, 앞쪽은 12선녀(시간,공간), 희노애락(번뇌)의 표정을 한 4사자(지혜)와 어머니(비구니:수행자)는 몽오리 연꽃(불성)을 들고, 3층(3계)의 탑의 모습인 사리탑은 즉 수행자가 불성(佛性)을 밝히기 위해서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어 삼계(三界)의 대도사인 부처님 되기를 원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 사상의 사리탑(舍利塔)으로서 4사자3층사리석탑을 일명 효대(孝臺)라고도 부른다.
대웅전 옆을 끼고 작은 계단을 지나 운치있는 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고즈녘한 분위기가 감도는 암자 구층암이 나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설화가 공포 위에 조각된 천불전, 그리고 요사채도 쉽게 볼 수 있는 건축물은 아닙니다. 죽은 모과나무 고목을 기둥으로 세운지 150여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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