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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0,20-28
오늘은 첫 순교 사도,
성 야고보를 기립니다.
복음에서 그와 동생 요한은 어머니를 통해 ‘영광의 자리’를 청합니다.
아직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세상 권력처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오해를 부드럽게 바로잡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여기서 ‘잔’은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고난’을 뜻합니다.
그들은 그 뜻도 모른 채 “할 수 있습니다”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고보는 정말로 그 잔을 마셨습니다.
그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영광의 자리를 청했던 그가, 끝내 고난의 잔으로 주님을 증언한 것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복음에서 ‘위대함의 뒤집힘’을 봅니다.
세상은 군림하는 사람을 크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섬기는 종’을 가장 크다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친히 사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섬김은 약함이 아니라, 가장 큰 사랑의 힘입니다.
문화 주간을 마무리하며 보면 문화를 새롭게 하는 힘은 위에서 군림하는 권력이 아니라 아래에서 섬기는 사랑입니다.
야고보가 ‘영광의 자리’에서 ‘섬김의 잔’으로 돌아섰듯, 우리도 ‘무엇을 차지할까’에서 ‘무엇을 내어줄까’로 돌아설 때, 비로소 누룩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영광의 자리’를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는 물음 앞에 정직한가?
나는 군림하려는가, 섬기려는가?
나는 ‘무엇을 차지할까’보다 ‘무엇을 내어줄까’를 묻는가?
주님,
높은 자리를 구하는 마음을 섬김으로 돌이켜 주소서.
야고보처럼 당신의 잔을 마다하지 않게 하시고, 섬기러 오신 당신을 닮아
아래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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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허무의 요르단강을 먼저 건너는>
오늘 성 야고보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읽는 독서는 불굴을 드러냅니다.
그는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불굴(不屈)이란 굴복(屈服)함이 없는 거지요.
어떤 어려움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 사도가 그런 분이라는 뜻이겠지요.
사실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한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지만 야고보 사도가 지닌 것은 불굴의 의지가 아닐 것입니다.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 불굴의 힘이고, 불굴의 힘이 아니라 불굴의 은총일 것입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다른 말씀과도 맥이 통하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냐는 말씀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불굴의 의지와 힘과 사랑의 소유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그가 그런 소유자였을 수도 있지만
애초의 그는 곧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첫 번째 환난 때는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쳤던 존재입니다.
그런 그를 첫 번째 순교자가 되게 한 것이 성령이셨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사실 그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의 사람이 아니라 주님 왕국에서 주님의 오른쪽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세속적 욕망의 존재였습니다.
그랬기에 허무의 강을 먼저 건너야만 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 욕망의 존재였기에 누구보다 먼저 허무의 강을 건너야 했고 누구보다 어두운 허무의 밤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랬기에 그는 누구보다 강하고 진하게 욕망이 사랑으로 바뀌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기에 세속에서 축배를 들고자 했던 그가 주님과 똑같은 영적인 고배를 누구보다 먼저 마시게 되었고 영적인 고배를 같이 마셨기에 영적인 축배도 마침내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첫 번째 순교가 다른 사도들의 순교에 불을 질렀을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과 본보기가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아직 세속적인 축배의 욕망이 있다면 허무의 요르단강을 건너는 고배를 마셔야 함을 본보기 삼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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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주님!~~~>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두 사도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사도들의 명단에서 언제나 첫 세 사람 안에 이름이 오르며, 최초로 순교한 사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이름은 거의 언제나 그의 동생 요한과 함께 언급되며, 단독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서 그의 순교가 기록될 때뿐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갈릴래아 출신 어부였습니다. 그는 동생 요한 사도와 함께 성격이 다소 충동적이고 성급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아네르게스", 곧 "천둥의 아들들"(마르 3,17)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야심 많은 젊은이로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큰 자리를 보장받고 싶어 했습니다(마르 10,35-45). "야고보 서간"이 있는데 그 서간의 저자는 이 (대)야고보 사도가 아닌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리가 아는 야고보 사도에 대한 기록은 이 정도입니다.
하지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이베리아 반도, 즉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티아고(Santo-Iago) 길이 바로 이 대 야고보 사도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여기서 Iago는 Iacopus(야고보)의 스페인어 식 표기입니다.
…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이들이 야고보와 요한 사도 본인들인데, 마르코 복음을 토대로 쓰인 마태오 복음은 그들 당사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가 그렇게 청하는 것으로 전합니다. 아마도 같은 사도였던 마태오는 두 사도에게 누가 될까봐 이런 청을 하는 사람을 그들의 어머니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그 청을 하는 사람들이 당사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청을 하는 이들이 누가 됐든, 그들이 그런 자리를 탐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고 또한 다른 열 제자도 그들의 이런 청원에 "불쾌해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보면 그들 역시 그런 자리를 탐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부분은 야고보 사도라기보다는 이런 그들의 세상적 야심과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마음과 가르침입니다. 아마도 야고보 사도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마음과 가르침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후에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그들을 나무라기보다는 자상하게 가르치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언급해 드렸듯이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아셨던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이런 결단을 내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의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분명히 야고보와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에게서 특별한 하느님 사랑의 힘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고요.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또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차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청까지 한 것이고요.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런 청을 하는 타이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셨는데,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이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하신 직후 이런 청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동기에는 인간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 우리가 깊이 숙고하고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인내롭고 자상하게 가르치신다는 것이고, 또 이 가르침의 모범을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직접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미사 중 감사기도 제4양식에 이어 이런 기도문이 나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현양받으실 때가 되자, 세상에서 사랑하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니…"
앞서 말씀드렸지만, 야고보와 다른 제자들은 이 사실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이후 이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을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자기들에게 나타나셔서 꾸짖으시기는 커녕 평화의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며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게끔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깊이 새기고 묵상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려고는 하지만 대개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에고의 경향을 따르기에 그 시도가 어긋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 에고의 경향을 의식하며, 여전히 우리를 인내롭고 자상하게 가르치시며 이끌어 가시는 주님 사랑의 깊은 마음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실패를 거듭할지라도 다시, 또다시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사랑의 주님께 시선을 두도록 합시다. 단죄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로 용서하시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그 주님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야고보 사도가 다른 사도들과 더부어 우리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권고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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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테아 보우먼(Thea Bowman): 흑인 가톨릭 정체성의 옹호자>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창조 질서 안에 태어난 자녀들이며, 각자는 하느님의 고유한 현현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20세기 관상 영성의 모범적 인물들
테아 보우먼(Thea Bowman): 흑인 가톨릭 정체성의 옹호자
2026년 7월 24일 금요일
출판인이자 저술가인 로버트 엘스버그(Robert Ellsberg)는 테아 보우먼 수녀(Sr. Thea Bowman:1937–1990)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테아 보우먼은 미국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보물 중 하나였습니다. 프란치스칸 수녀로서 그녀는 가톨릭 신앙의 자원을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아름답게 통합해냈습니다. 사랑의 성령에 불타고, 투쟁의 기억을 간직하며,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간 그녀는 단순한 메시지뿐 아니라 고귀한 영성으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녀를 만난 누구도 삶의 선물에 대한 그녀의 기쁨과 감사의 일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흑인 가톨릭 공동체에 큰 영감을 주며,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자긍심을 드러내도록 도왔고, 동시에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와 영성을 통해 더 넓은 교회를 풍요롭게 하도록 격려했습니다. [1]
1987년, 테아 보우먼은 미국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우주적 영성(Cosmic Spirituality)”이라는 주제로 연설했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삶의 다양성 속에서 메시지를 뿌리내리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각 문화와 전통이 지닌 고유한 빛을 존중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의 모임 주제는 "우주적 영성(Cosmic Spirituality)"…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준비시키는 대상이 바로 우주, 곧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전체와 그 안에 깃든 다양한 영성이라는 뜻입니다. 우주적 영성이란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리듬을 익히며, 주님을 찬미하는 새로운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문화와 관습, 언어를 배우고, 기도와 노래, 전례와 이야기, 나눔을 통해 우주적 영성을 익혀 갑니다. 곧 참여하고, 나누고, 주고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자녀, 곧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아 파견된 이들로서, 우주를 변화시키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우주적 영성이란 우리가 함께 모여,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와 경험, 긍정과 부정, 예술과 기술, 가르침…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품고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주적 영성은 곧 우리가 서로의 기도와 노래, 전례와 이야기, 나눔을 통해 배우고, 참여하고, 주고받음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 공동체, 내 마을, 내 세계에 들어온다고 해서, 그곳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까요? 여러분이 아름다운 하와이에서 나의 형제자매들에게 간다고 해서, 그곳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까요? 여러분이 에티오피아의 굶주림을 함께 나누고, 과테말라와 니카라과의 피 흘림을 체험한다고 해서, 그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까요?…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 안에서 성령을 나누며, 하느님의 백성 안에 깃든 은사를 불러내도록 파견되었다고 믿는다면, "아멘"이라고 응답하십시오. 여러분이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며, 술을 지나치게 마시거나 잘못된 것(대마초 같은 것)을 피우고, 걸음걸이가 바르지 않고, 말투가 바르지 않으며, 성적 성향이 여러분이 주장하는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흔히 배제해 온 형제자매들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면, "아멘"이라고 응답하십시오. 여러분이 내 현실의 물을 가장 순수한 포도주로 변화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곧 하느님께서 못하실 일이 없음을 믿는다면, "아멘"이라고 응답하십시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게 주어진 소명 가운데 하나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많은 것을 얻거나, 사람이나 상황을 바꾸어 내가 행복해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것, 매 순간에 공간과 여백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내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숨을 쉬며 깨닫습니다. 내 곁에 있는 본질적인 것은 보이지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산소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바꾸고 싶은 모든 것은 결국 내 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Cindy G.
References
[1] Modern Spiritual Masters: Writings on Contemplation and Compassion, ed. Robert Ellsberg (Orbis Books, 2008), 131.
[2] Thea Bowman, “Cosmic Spirituality: No Neutral Ground,” in Twentieth-Century Apostles: Contemporary Spirituality in Action, ed. Phyllis Zagano (Liturgical Press, 1999), 151, 152, 155, 15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ohn Mccann, untitled (detail), 2017,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관상의 길은 위대한 모범적 인물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앞서 걸어가며, 각기 독특하면서도 서로 연결된 방식으로 관상과 활동의 수양을 살아낸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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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물을 담은 질그릇>
2코린 4,7-15; 마태 20,20-28
열두 사도 가운데 최초로 순교의 영광을 받은 성 야고보 사도의 축일 전례는 성 바오로의 말씀인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7)와 성 야고보의 삶을 아름답게 연결해 줍니다. 여기서 ‘보물’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질그릇’은 연약한 인간인 우리 자신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세상은 외적인 이미지와 능력, 성과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제자는 엄청난 힘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배웁니다(4,7). 성 야고보 사도는 완전한 사람이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변화되기를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아내는 야고보와 요한이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하고 물으십니다. ‘잔’은 특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난, 그리고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삶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팎에서 인정과 영향력, 명예를 추구하려는 유혹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의 길은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와의 일치에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성 야고보는 마침내 참된 위대함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충실하게 살아가는 데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0,26)고 말씀하십니다. 섬김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오늘의 경쟁 중심 사회와 개인주의 문화는 남보다 앞서고 인정받는 것을 성공으로 여깁니다. 가정, 직장, 본당 공동체나 디지털 공간에서도 우리는 섬기기보다 드러나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는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묻기보다 “오늘 누구를 사랑으로 섬길 것인가?”를 먼저 묻는 사람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의 삶은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몸소 증언합니다. 한때 높은 자리를 원했던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리며 순교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이루어 낸 변화였습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습니다.”(2코린 4,8)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고통이 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의 증언은 불안과 피로,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오늘의 세상에도 여전히 밝은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높은 자리를 찾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복음이라는 보물을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기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삶의 잔을 충실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존경받기보다 기꺼이 섬기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야고보 사도의 모범을 따라, 인내로 다른 이의 말을 들어 드리고, 진심으로 용서하며,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섬기고,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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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기억의 계절에서 육화와 창조의 계절로>
마음의 가장 깊고도 고요한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던 기억들은 어느 날 문득 언어의 옷을 벗고 우리의 삶 속으로 스며듭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을 되새기는 회상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존재 안에서 다시 말씀을 입으시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기억은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시간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낳으시는 육화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현존이며, 사랑이 우리 존재 안에서 다시 숨 쉬기 시작하는 은총의 계절입니다.
은은한 달빛조차 다 비추지 못하는 마음의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라도 다 표현하지 못하는 침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오래전 누군가가 건네준 따뜻한 손길이 살아 있고, 끝내 말하지 못했던 사랑이 살아 있으며, 견디어 낸 눈물이 살아 있고, 용서받았던 순간이 살아 있습니다. 그 모든 기억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어 오늘도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번 심어 놓으신 생명은 시간이 흘러도 소멸하지 않고 더 깊은 존재의 뿌리가 됩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멀리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끝없이 낳으시고, 성자는 자신을 온전히 성부께 내어드리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의 숨결로 모든 존재를 생명 안으로 이끄시는 영원한 관계의 신비로 살아 계셨습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을 소유하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를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관계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육화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구원의 계획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하느님의 영원한 존재 방식이 세상 안에서 드러난 사건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교리적 선언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기쁨을 당신의 기쁨으로 품으시고, 인간의 슬픔을 당신의 눈물로 흘리시며, 인간의 상처를 당신 몸에 새기시고, 인간의 죽음 속까지 걸어 들어오셔서 생명을 다시 일으키셨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인간을 멀리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시는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그 사랑은 베들레헴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현재형입니다.
기억이 거룩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받았던 기억은 다시 사랑할 힘이 되고, 기다려 주었던 기억은 다시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되며, 용서받았던 기억은 다시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과거의 은총은 오늘의 사랑으로 육화되고, 오늘의 사랑은 또 다른 내일의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종이에 기록된 글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랑받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의 삶 속에서 다시 몸을 입고 세상을 걸어갑니다.
그래서 시보다 아름다운 것은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사랑입니다. 달빛보다 부드러운 것은 기억 속에서 익어 온 자비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따뜻한 시선, 붙잡지 않아도 오래 남는 사랑,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존재의 향기, 그것이 바로 육화된 말씀의 언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화려한 기적보다 사람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군가의 따뜻한 미소 하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 하나, 아무도 모르게 흘린 눈물 하나, 묵묵히 내어준 손길 하나가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신비를 가장 깊이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높은 하늘의 영광보다 낮은 마구간의 겸손을 더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가장 작은 아기가 되셨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선택하였습니다. 더 작은 사람이 되고, 더 가난한 사람이 되며, 더 낮은 자리에서 모든 존재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삶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육화를 바라본 사람은 더 이상 높아질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또 하나의 베들레헴이 됩니다. 마리아의 태 안에서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듯이, 오늘 우리의 마음도 말씀이 쉬어 가는 집이 됩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교리를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 생각이 되고, 내 시선이 되고, 내 손길이 되고, 내 기다림이 되고, 내 용서가 되고, 내 사랑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이 말하는 모성적 신비주의입니다. 모든 신자는 말씀을 품고 세상에 낳는 영적인 어머니가 됩니다.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고, 형제애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으며, 가난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고, 피조물을 사랑하는 눈길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습니다. 삼위일체의 끝없는 내어줌은 우리 안에서 다시 사랑으로 태어나고, 그 사랑은 또 다른 생명을 일으키며 세상을 조금씩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계절은 저마다의 빛깔을 남기며 지나갑니다. 봄은 희망을, 여름은 열정을, 가을은 성숙을, 겨울은 기다림을 우리 안에 새겨 놓습니다. 그러나 모든 계절은 결국 하나의 계절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기억의 계절’ 그리고 말씀이 다시 사람이 되시는 ‘육화의 계절’입니다.
오늘도 내 마음속에는 그 계절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습니다. 떠난 사람들의 미소와, 말없이 건네받은 사랑과, 함께 울고 웃었던 형제들의 얼굴과, 나를 끝까지 기다려 주셨던 하느님의 자비가 하나의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그 강물은 나를 과거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주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게 하며, 내 존재가 또 하나의 복음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아마도 이것이 육화의 가장 깊은 신비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새로운 베들레헴을 찾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머물 수 있는 가난한 마음 하나, 당신의 사랑이 흘러갈 수 있는 열린 관계 하나, 당신의 자비가 세상을 만질 수 있는 따뜻한 손 하나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작은 사람 안에서 오늘도 영원한 말씀이 다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살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가슴속을 거니는 ‘기억의 계절‘은 단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계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빚어 가는 ’육화의 계절’이며, 삼위일체의 사랑이 관계 안에서 끝없이 생명을 낳는 ‘창조의 계절‘입니다. 그 계절을 살아가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고, 생명이 머무는 집이 되며,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품고, 피조물의 노래를 자신의 찬미로 받아들이며, 조용히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복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그 사람을 통하여 다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사랑은 다시 삶이 되고, 삶은 다시 기도가 되며, 기도는 다시 관계가 되고, 관계는 다시 그리스도를 낳습니다. 이것이 기억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이며, 육화의 가장 찬란한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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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관련 글 들
출처 : http://www.ofmkorea.org/ofmkfb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1 ~ 9.
기도와 영적 여정 1~ 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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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영적 여정 1~ 5. 계속 (26. 07. 19 ~ 26.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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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기도와 영적 여정 5. 기도는 관계를 낳고, 관계는 그리스도를 낳는다 2026.07.23
1914 기도와 영적 여정 4. 육화, 기도의 방향을 바꾸다 2026.07.22
1913 기도와 영적 여정 3. 하느님께로 오르는 사다리와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하느님 2026.07.21
1912 기도와 영적 여정 2. 기도는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발견되는 것이다 2026.07.21
1911 기도와 영적 여정 1. 올라가는 여정이 아니라 내려오신 하느님을 발견 하는 여정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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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1 ~ 9.(2. 07. 11. ~ 26. 0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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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8. 갈망을 불꽃으로 바꾸시는 성령 2026.07.17
1908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7 회개, 갈망이 방향을 되찾는 순간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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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2.욕망과 갈망의 차이 2026.07.12
1902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1 .갈망(기도하는 영혼의 첫번째 새벽)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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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ㄴ)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자!'>
오늘 복음(마태20,20-28)은 '출세와 섬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합니다. 그 청은 이렇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ㄴ)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한 것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 저 세상 것, 곧 영원한 생명을 청한 것입니다. 그러니 합당한 청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청원이 이루어지려면 예수님께서 마실 잔을 마셔야 하는데, 그들은 그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중에서 맏이인 형 야고보를 기억하는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사제들, 수도자들,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께 마신 잔을 마시고, 열두 사도들 가운데에서 '첫 번째로 순교한 사도'입니다.
기원 후(A.D.)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했고, 성 야고보 사도를 기리는 기념성당이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며, 그 대성당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오늘 독서(2코린4,7-15)에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의 신앙고백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짖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4,7.8-11)
마음 깊이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네 모습을 깊이 성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셨던 십자가의 잔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이제와 영원히 부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요?
내가 먼저 죽는 사람!
내가 먼저 사랑하는 사람!
내가 먼저 용서하는 사람!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며 용서를 청하는 사람!
내가 먼저 화해하는 사람!
내가 먼저 너를 섬기는 사람!
내가 먼저 낮아지는 사람!
....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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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야고보 사도의 신앙!
바닷가에 인접한 이 좋은 장소에 적어도 여름 한 철만이라도 아이들이 오도록 하자고 마음을 모은 끝에, 드디어 중고등부 여름 신앙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걱정입니다. 공동체 형제들 연세가 만만치 않은데, 그게 가능할지? 그래서 타협안을 만들었습니다. 신앙학교 운영은 본당 교리교사 선생님들이 맡고, 저희는 미사나 성사 정도 도와드리고, 식사와 제반 시설을 제공해 드리는 걸로.
아쉬움이 크지만 그래도 이 한적한 시골에 오랜만에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저절로 흐뭇합니다. 운영하느라 고생하는 선생님들 요구 사항들을 기쁘게 들어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합니다.
하루 온종일 아이들을 생각하며 예초기를 돌렸습니다. 내일은 아이들이 오후 내내 물놀이를 한데서 작년에 쓰던 구명조끼 백여 벌을 꺼내 깨끗이 씻고 말렸습니다.
아이들 도착하는 시간에 맟추어 트럭을 몰고 나가 짐을 옮겨드렸습니다. 우리 집을 찾는 가장 귀한 손님들이라 생각하며 뛰어다녔습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오늘 하루만 네번이나 샤워를 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 생각하면 오늘 우리가 흘리는 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경축합니다. 그의 신앙 여정을 묵상해보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선택받았습니다. 은혜롭게도 그는 열두 사도단 안에서도 핵심 제자단으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세 사도를 즐겨 모으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야고보는 요한의 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가까이서 예수님을 추종했던 야고보 사도였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모습을 오늘 복음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수난을 앞둔 예수님께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가 찾아와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참으로 낯뜨거운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야고보 사도였다면 당장 어머니 앞에 나서서 그랬을 것입니다. “어머니, 창피스럽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안 그래도 고민이 많으신 스승님께 인사 청탁을 하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어머니 여기서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마시고 당장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요한과 함께 어머니 편에 서서 동조하는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대뜸 이렇게 대답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야고보 사도였습니다. 아직도 세상에 있을 때 지니고 있었던 세속적 야심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건설하시려는 새로운 왕국에 대한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한때 지니고 있었던 유아기적인 신앙, 미성숙한 신앙을 그대로 안고 살자 않았습니다. 고민과 방황, 기도와 성찰을 거듭하던 그가 어느날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스승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주님 때문이라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습니다. 적대자들의 협박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격 증인으로서 용감히 살다가 영광스런 순교의 은총을 입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위대한 이유는 그의 신앙이 거듭 성장했고 일취월장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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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하는 만큼 마시기!>
하늘 나라에도 좋은 자리 나쁜 자리가 있을까요?
하늘 나라 자리는 다 좋을 것입니다. 그래도 더 좋은 자리가 있고 덜 좋은 자리는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는 주님의 계명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주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도록 가르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는 분명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가까운 자리가 있고 먼 자리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비롯된 청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들어오면 똑같이 행복할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분명 차이는 있습니다. 당신의 잔을 얼마나 마시느냐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당신이 메어주시는 멍에를 얼마나 충실히 메고 순종했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만약 다 마시지 못한 잔이 있다면 어쩌면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헤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디스커버리’(2017)는 사후세계를 다루었습니다. 한 과학자가 사후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낸 것입니다. 이 발견(디스커버리)은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수백만 명이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과학자는 연구를 계속합니다.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은 증명해 냈지만, 사후세계가 어떠한 모습인지는 증명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안실에 있는 시체를 훔쳐서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영상으로 출력하려 하였습니다.
그 시체의 머릿속에서는 차를 달려 어떤 병원에 도착한 자신의 모습이 영상으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저승 세계에서 체험하는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 사람의 인적사항을 조사해 그의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시체가 병원에서 보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시체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과 정반대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놈은 어머니가 병들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어요. 부모를 버리고 도망친 놈입니다. 만약 그 애가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시체는 사후세계에서 헛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사가 이것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자신이 죽음 직전까지 가서 자신의 뇌를 영상으로 촬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아내가 자살하던 날 자상한 남편이 되어 아내와 함께 있어 주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사후세계는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에 갇혀 그것을 되돌려 놓으려는 안타까움만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지옥이란 바로 그 후회스럽고 용서받지 못한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억을 지워주시기 위해 우리가 내미는 쓰디쓴 잔을 마시셨습니다.
일반 대학교 다닐 때 술을 마시지 않는 자매에게 건배를 권하며 “사랑하는 만큼 마시기!”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다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 마셨다는 뜻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 술잔을 뒤집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서 아직 마시지 못하고 있는 저의 술잔을 응시하였습니다.
저도 기쁜 마음에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머리에 부었습니다.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잔에 조금이라도 술이 남으면 그만큼 관계가 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것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상대가 따라준 쓰디쓴 술잔을 쥐고 있습니다. 그 잔은 처음엔 쓰지만, 끝은 달콤합니다. 마시기 싫어도 상대가 주는 잔을 마실 수 있다면 관계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우리를 절대 죄책감의 굴레에 빠져있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 각자에게 잔을 내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만큼 마시면 됩니다. 마시고 남은 양만큼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미는 잔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잔은 평생 그 잔을 마시는 것에만 집중해도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후회스럽지 않게 죽음을 맞으려면, 하나도 남기지 않을 마음으로 최대한 많이 마시고 그분 앞에서 머리에 술잔을 부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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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지나치면 왜곡된 집착으로 변질되고는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비록 사랑 때문일지라도 부모가 지나치게 자식 문제에 개입하면 주변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뒤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분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며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앞세워 자신의 야심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아들들이 열두 제자 안에서 차지할 서열뿐 아니라 어머니로서 자신의 ‘우위’도 함께 드높이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인을 나무라시지도, 그렇다고 그 청을 섣불리 받아들이시지도 않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뒷날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르면,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이 ‘극성’은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키는 여인의 ‘열성’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눈길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향합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을 뿐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곳은 자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내주는 ‘죽음’의 자리이자 모든 이를 받드는 “섬김”(20,28)의 자리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이 역설적인 신비를 알지 못하였기에 헛된 영광만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바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을 증언하는 참된 사도로 거듭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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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20-28: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 사도를 기념하고 있다. 복음에서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은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22절). 예수님은 이미 자신 앞에 놓인 십자가를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결국 그 잔을 마셨다. 그는 헤로데에게 목이 베이는 순교를 당했으며(사도 12,2), 요한은 파트모스로 귀양을 갔다.
1. 복음 해설과 교부 가르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8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겸손과 섬김 속에서 나타난다. 참된 제자는 남을 섬기며 자신의 뜻을 낮추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Serm. 138,2 의역) 예수님의 섬김과 낮아지심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적인 사랑이다.
교회는 이 복음을 통해 제자들이 세속적 야망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섬김과 순교를 통해 참된 영광을 얻는 길을 보여 준다. 교리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셨으며,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521항 의역) 또한,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자리가 주는 이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은총에 합당한 이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치신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3절)
2. 야고보 사도의 모범
야고보 사도는 처음에는 수난과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는 주님의 뜻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그의 삶은 순교적 제자직의 완성을 보여 주며, 우리가 신앙 속에서 견디어야 할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제자는 스승을 본받아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광이 드러난다.”(Homilia in Matthaeum, 88 의역)
3.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도 수난과 섬김의 신앙으로 세속적 욕심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참된 제자의 길임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십자가를 통한 성장을 노력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섬김으로써, 영적 성장과 하늘 나라의 참된 영광을 체험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견디는 믿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야고보 사도처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과 순종으로 끝까지 따라가는 삶이 중요하다.
4. 삶의 적용
일상에서 겸손과 섬김을 실천하며, 세속적 욕심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며, 어려움과 시련 앞에서도 신앙을 견디며, 십자가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야고보 사도의 순교적 모범을 본받아, 믿음과 충실함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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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섬깁니다>
마태오 20,20-28 (출세와 섬김)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당신을 섬깁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ㄴ-27)
당신이
있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당신이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살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믿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바라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사랑하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참되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착하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아름답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부드럽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이루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섬기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살리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당신이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있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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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년에 두 번 성당 옥상에 올라갑니다. 에어컨 필터를 교체하기 위해서입니다. 옥상에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타야 합니다. 80여 개의 필터를 교체하고 내려옵니다. 올라갈 때도, 내려올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올라갈 때는 난간을 건널 때 조심해야 하고, 내려갈 때는 잘 보이지 않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아야 합니다. 그래도 에어컨 필터를 교체하고 나면 마음이 뿌듯합니다. 교우들이 조금 더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다리를 오르고 내리면서 우리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상향 이동’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오르는 계단은 업적, 능력, 실적, 성공, 명예, 재물입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해서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합니다. 자본주의라는 바벨탑은 이런 상향 이동을 통해서 발전하였고, 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상향 이동을 꿈꾸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는 주님의 오른쪽에, 동생 요한은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다른 열 제자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런 상향 이동을 꿈꾸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향 이동’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내려가는 계단은 청빈, 정결, 순종,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하는 결단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비우고 독신의 삶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기꺼이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불교에서 ‘보살’은 바로 이런 하향 이동을 선택한 분들입니다. 세상의 중생이 모두 깨달음의 길을 갈 때까지 세상에 남아서 수행하는 분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깨달아서 극락왕생할 수 있음에도 그것을 뒤로 미루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머무는 분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인도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던 마더 테레사 수녀님도 하향 이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던 이태석 요한 신부님도 하향 이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상향 이동의 삶이 만족과 성취감을 준다면, 하향 이동의 삶은 평화와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하향 이동의 삶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하늘의 영광에 머물지 않으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왕궁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권력자들의 식탁이 아니라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병든 이를 찾아가셨고, 죄인에게 손을 내미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라는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낮아지는 길이었습니다. 차지하는 길이 아니라 내어주는 길이었습니다. 섬김을 받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으뜸이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향 이동은 실패가 아니라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야고보 사도도 처음부터 이 길을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에게 자리가 아니라 잔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야고보는 처음에는 그 말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성령을 받은 뒤, 야고보는 그 잔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명예의 잔이 아니라 십자가의 잔이었습니다. 성공의 잔이 아니라 순교의 잔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결국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높은 자리를 청했던 야고보가 마침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이것이 은총의 변화입니다.
야고보 서간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아무리 신앙을 고백하고, 아무리 하느님을 안다고 말해도 그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참된 믿음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은 입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손과 발로 내려와야 합니다. 믿음은 기도가 되어야 하고, 나눔이 되어야 하고, 용서가 되어야 하고, 희생이 되어야 합니다. 성당 옥상에 올라가 에어컨 필터를 교체하는 일도 작은 봉사입니다. 누군가는 보지 못하고, 누군가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보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땀 흘리는 일, 누군가를 위해 내려가는 일, 누군가를 위해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신앙인은 상향 이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책임도 맡아야 하고, 공동체 안에서 능력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상향 이동만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더 낮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더 많이 나누어야 합니다. 더 큰 책임을 맡을수록 더 깊이 섬겨야 합니다. 세상은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성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오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를 위해 기꺼이 내려가고 있는가?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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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치맛바람은 어디나 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지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이 권위에서 오기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한다.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 권력은 10년을 못 간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나? 성철스님이나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하고 말하였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 보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 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에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제자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를 한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길 바란다.
“주님,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않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도록 은총으로 보호하고 지켜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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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아버지에게 걱정이 생겼습니다. 다름 아닌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입니다. 아들이 유튜버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조금 하다가 그만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이제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열정을 드러내면서 점점 구독자가 늘어났고 유튜브 채널의 인기는 계속 올라가는 것입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인터넷 안에서는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나쁜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특히 근거 없이 자기 할 말만 쏟아내는 악플러 때문에 착하고 유약한 아들이 상처받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걱정에 아들 유튜브 채널에 매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댓글에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죽어버려.’
자기도 이 악플에 가슴이 떨리고 힘든데, 아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조심히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괜찮았으면 좋겠어.”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사실 아픈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똑같이 대하게 되면 악이 계속해서 재생산될 뿐입니다. 어쩌면 똑같이 대해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논리는 전혀 다릅니다. 그 누군가는 끊어야 하고, 그 주인공이 바로 우리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위에서 아래로 군림하고 세도를 누리는 것, 가장 높은 자리나 첫째가 되는 것들을 피하라고 하십니다. 대신 아래에서 위로 섬기는 사람, 스스로 종이 되어 내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 축일인 오늘의 복음에 등장하는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도 인간적인 야심과 나약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꾸짖으시며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먼저 겪어야 함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고보 사도는 열두 사도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의 피를 흘립니다. 세속적인 높은 자리를 탐했던 야고보는 가장 먼저 스승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주님의 논리를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서의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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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출세와 섬김>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0-28)
1)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1) “나는 평생 남을 섬기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섬김을 받고 싶다. 그게 잘못된 생각인가?” <“나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부자로 살고 싶다. 그게 잘못된 희망인가?”>
(2) “교회는 과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낮춤’과 ‘섬김’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더 이상 낮출 것도 없는 사람들만 ‘낮춤’을 실천하고, ‘섬김’을 받을 일 없는 사람들만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혹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 나라는 남들을 섬기기만 하면서 서러운 일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없는 나라입니다.(묵시 21,4) 동시에 그 나라는 ‘섬김’을 받기만 하면서 남을 서럽게 만들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 나라입니다. 어떻든 평생 남을 섬기면서 살았던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섬김을 받는’ 인생을 살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도 ‘혼자서’가 아니라 ‘다 함께’이고, 또 그 섬김은 남들 위에서 군림하고 남들에게 세도를 부리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앙갚음을 하는 나라도 아니고, ‘한풀이’를 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혹시라도, ‘나 혼자서만’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남들은 나보다 아래쪽 자리에 앉고, ‘나만’ 섬김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희망입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부자로 살게 되는데, ‘혼자서’가 아니라 ‘다 함께’입니다. 남들은 다 가난하게 살고 나만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기 혼자서만 부자 되기를 희망하거나, ‘남들보다 더’ 부유하기를 희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희망입니다.>
2) 우리 교회 역사에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낮춤’과 ‘섬김’을 온전히 실천한 분들이, 즉 거룩한 성인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쪽의 모습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낮춤’과 ‘섬김’을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잘하면서도 실제 삶으로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위선자들도 있고,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남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회개의 기본 원칙입니다.
3) “어쩌다가 교회 안에도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생겼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 사이의 서열에는 관심이 없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3ㄴ-34)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사도들이 논쟁을 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도들 사이의 서열을 정리해 주지 않으셨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때에는 꽤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은 채로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은(마태 16,18), 그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신 일이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사도들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그런 문제로 논쟁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음을 나타냅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조직과 제도가 생기고,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생긴 것은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 내부에 이단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교도권이 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높은 자리는 더 많이 ‘섬김’을 실천하는 자리다.” ‘반석’의 위치는 건물의 가장 아래쪽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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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어머니를 통하여 앞으로 올 예수님의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염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마태오 복음서 16장에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였고 그들의 바람은 메시아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너무나 세속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 잘못된 인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 “종”(마태 20,26.27)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과, 당신께서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0,28)라는 말씀으로 메시아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더욱이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 바로 다음에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수난의 뜻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모습은 나중에 실현될 무엇이 아니라,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이제 곧 그 수난이 시작될 예루살렘 입성(21,1-11 참조) 바로 앞에 있습니다. 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분 곁에서 그분을 지켜보고 느끼고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분을 모르니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호통치시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가까이”(20,25) 부르시고 부드럽게 타이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종’으로서, ‘섬기는 사람’으로서 계시기에 제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그들 수준에 맞추어 온화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신의 죽음에서 가장 잘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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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죽음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많은 경우 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구약 성경의 예언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속’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나타내려고 복음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느님 종의 노래를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의 죽음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며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길을 올곧게 걷는 이들을 말합니다. 악인들은 이런 의인들을 시기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려고 의인을 박해하고 죽입니다.
대속과 비슷한 의미의 ‘속량’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타냅니다. 속량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려고 ‘몸값’을 지불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죄에서 해방시키시려고 당신 자신을 몸값으로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하여 달라는 청은 예수님을 세상의 권력자와 같은 메시아로 이해하는 시각입니다. 같은 메시아이지만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것과 예수님의 업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아는 임금의 표상을 사용하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탄생 때부터 동방 박사의 경배를 받는 임금의 모습이시지만, 그 임금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십니다.
그러기에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것이기에 앞서 예수님 삶에 대한 요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부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그리스도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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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금 나는 누구를 닮아 있을까요?>
오늘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했습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와 아들들의 열망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곧 ‘진정 청해야 할 바’가 무엇이고, ‘진정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무엇을 먼저’ 행해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이요, ‘진정한 으뜸인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다면 내 아내를 왕비로 대하고, 내가 왕비처럼 살고 싶다면 내 남편을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여기고, 내가 예수님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예수님으로 바라볼 일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자신도 그렇게 무시당하게 되고, 남을 존중하면 그만큼 존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곧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도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을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필시 그도 나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뻔하고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살지를 못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가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김’의 본질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고, 상대에 대한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들어 올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높이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섬기면서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를 닮아 있을까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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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피워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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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26)
길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만,
사람은 사랑을 향해
성장합니다.
매일매일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이
신앙의 참된 여정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순례자들의
영적 길잡이가 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걷고,
형제들과 함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렇듯 방향과 충실함이
더 중요한 교훈임을 가르칩니다.
성 야고보 사도의
진정성의 삶은
예수님의 본질을
바라보았습니다.
삶의 이유를 예수님 안에서
찾았고, 그 이유를 끝까지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길은 발걸음으로 완성되지 않고
그 길을 걷는 이유로 완성됩니다.
영광도 고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는 은총이며
신비입니다.
배와 그물을 떠나듯
더 깊이 떠나야 했던
자기 중심적인 마음입니다.
따르는 삶의 마지막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사랑으로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길을 걷고
길을 만납니다.
어디까지 갔는가보다,
주님과 함께 걷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끝까지 걸어간 사람이
마침내 희망의 순례길이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성공의 높이가 아니라
사랑의 참된 깊이가
한 편의 복음임을
일깨워줍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걷는
순례자가 되길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