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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장옥정이라는 이름보다 희빈 장씨로 더 잘 알려진 인물. 요부의 대명사, 악녀의 표본 조선 아니, 한국사를 통틀어서 아마 가장 ‘유명한’ 여성이 아닐까 싶어요. 일단 다들 잘 알고 계시는 인물이기도 해서 따로 내용을 가져오지는 않고 제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좀 적을까 합니다.
장희빈 모르시는 분 없을 겁니다. 전 아주 어릴 때는 장희빈 이름이 희빈인 줄 알았던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야 희빈이 이름이 아니라는 걸 알았죠. 장희빈도 있고 박희빈도 있고 김희빈도 있고 빈이 되면 다 빈이라는 걸 -_- 밑에도 적혀 있긴 한데 장희빈은 빈이 되고 빈호가 '희'여서 희빈이삼. 내명부 종1품이고 왕비가 아니고서야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죠.
하여간에 장희빈은 사극으로도 굉장히 친숙할 정도의 인물입니다. 우리는 그녀를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질투에 눈이 멀어 저주하여 죽이려고까지 한 악녀. 죽어가면서까지 자기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겠다고 발악(;)하며 사라져 간 악녀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이 그럴 것입니다. 광해군과 의자왕이 폭군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장희빈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장희빈은 숙원, 소의, 희빈에 봉해졌고 왕자를 낳아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가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끝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명목으로 죽음을 맞이한 여성입니다.
장희빈을 알려면 당시 시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편 갈라서 당파 싸움하느라 정신없는 동네죠. 장희빈이 살던 숙종 조에는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했던 시대였습니다. 거기다가 사회경제적으로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면서 중인의 지위가 크게 상승한 시대죠. 허울 좋은 사대부들보다 떵떵거리면서 살았으니까요. 장희빈에 대해서 알아보려면 이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희빈을 다 아시는데 그러면 장희빈이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는 아시는 분. 손 들어 보세요. 발 드셔도 됩니다. 장희빈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는데 그래서 그녀는 당숙인 장현의 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장현은 당시 이름난 역관이었는데요. 엄청난 갑부였습니다. 장현은 효종, 현종을 거쳐 숙종 때까지 활동한 이름난 역관이었는데 당시 역관들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이용한 무역으로 그야말로 돈을 ‘긁어’ 모았다고 합니다. 여하튼 장현은 인평대군과 복창군 등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동행했는데 그래서 자연히 종실이나 남인과 친분이 두터웠죠.
우리가 장희빈이 대왕대비 장렬 왕후의 덕으로 숙종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을 겁니다. 실제로 이 대왕대비 그러니까 장렬 왕후(인조의 계비로 숙종의 증조할머니죠)는 남인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궁 안에서 장희빈을 봐주는 것은 남인과 연결된 대왕대비였고, 궁 밖에서 그녀를 후원하는 것은 바로 남인과 손잡은 장현이었습니다.
숙종 때는 환국이 많이 일어났는데요. 장희빈은 숙종 6년인 경신 환국 때 궁에서 쫓겨납니다. 승은을 입은 궁녀를 내치는 일은 흔치 않다는 거 아시죠. 승은을 입은 여인은 궁밖에 둘 수 없다고 하잖습니까. 이 경신 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습니다. 이로써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이 몰락합니다. 장현은 이 허적과 관계가 있었죠. 그리고 남인과 가까웠던 복창군 형제가 역모 혐의로 변을 당하게 되죠. 이와 연루되어 장현도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인과 연결된 장희빈이라고 무사할 수 있었겠어요. 이때다 싶었는지 대비는 장희빈을 궐 밖으로 내칩니다.
그러나 이 대비가 죽자 장희빈은 다시 궁으로 돌아옵니다. 바로 장렬 왕후가 힘써 준 덕이죠. 숙종은 인현 왕후가 있었지만 장희빈을 총애했고 서인들의 반대에도 별당을 지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숙종 얼마 후에는 종4품인 숙원으로 봉했습니다. 당시 장희빈은 왕자나 옹주를 임신한 것도 아니었는데 숙원으로 봉해졌는데, 이는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보통은 승은 상궁이 될 뿐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숙종은 이 숙원의 처소에 무려 100명의 노비를 하사했다고 합니다. 서인들은 장희빈을 내치라는 상소를 줄줄이 올렸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사사로운 애정으로 잘못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으나 이들의 속내는 과연 어땠을까요.
당시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에서 쫓겨난 그녀를 돌보던 동평군(숙종의 숙부)과 조사석이 관직을 얻었습니다. 동평군은 혜민서 제조에 임명됐고 조사석은 우의정에 제수되었죠. 서인들은 이 일이 요망한 장희빈 탓이라고 비난했죠. 장희빈의 어머니가 조사석 집안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장희빈의 치마폭에서 정승 인사가 이뤄졌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죠. 그럼에도, 숙종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인이었던 김만중을 국왕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유배 보냅니다. 장희빈은 서인을 누르고 남인 세력을 넓히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죠.
그러다가 장희빈이 회임을 합니다. 서인들 똥줄이 타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왕위는 세습됩니다. 그런데 장희빈이 일단 회임을 했어요. 여기서 덜컥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세자가 된다면? 서인들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는 건 뻔한 일이었죠. 왕실과 조정을 뒤흔들고 숙원이던 장옥정은 소의(정2품)에 오르고, 후에 경종이 되는 왕자를 낳습니다. 숙종의 나이 28세에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었죠. 후사가 없어 염려했던 숙종을 왕자를 원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원자는 임금의 첫 아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장자 승계가 관례였기 때문에 원자에 책봉되는 것은 즉 차기 왕위를 보장받은 것이었죠. 하여간 태어난 지 석 달도 안 된 왕자를 원자로 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장옥정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빈에 봉해집니다.
이때 서인이었던 송시열이 상소를 올립니다. 솔직히 얼마나 애간장이 다 녹았겠어요. 자기들 운명이 휘청거리는데 말이죠. 송시열은 인현 왕후가 아직 젊으니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난리를 쳤는데 이때다 싶었던 남인들은 왕명을 거역한다며 송시열을 탄핵했고 송시열은 결국 제주도로 유배를 가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송시열은 서인의 거목이었는데 그런 그가 쓰러진 것이죠. 이어서 서인에 대한 숙청이 벌어졌습니다. 노론 소론 할 거 없이 관직을 박탈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경신 환국으로 물러났던 남인들은 이 기사 환국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당시 조정은 서인 천지였습니다. 그리고 숙종은 이즈음에 인현 왕후가 투기가 심하다고 하며 결국에는 인현 왕후를 폐위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희빈 장씨. 중궁전에 들어앉습니다. 왕비는 대대로 집안을 엄청나게 중요시했습니다. 간택은 까다롭게 행해지는데 모두 명문가의 딸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본인의 아버지는 물론 삼대의 관직명들을 다 적어야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가문을 중시했는지 보여주는데요, 그런 조선 시대에 역관 그러니까 중인 출신의 장옥정이 왕비가 된 것입니다. 중인들의 신분 상승 그러니까 새로운 계층의 성장과도 연관이 깊었겠죠. 이들은 경제적인 이익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권력과 명성까지 얻으려고 했고 중인 출신 왕비 탄생은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죠.
여기까지였으면 좋았겠는데 장다리는 한 철이라더니 무수리 최씨가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영조의 어머니입니다. 최씨는 숙원에 봉해졌고 왕자를 낳았는데 이 최씨가 바로 서인과 연결이 돼 있었습니다. 궁 밖에서는 인현왕후를 복위하겠다고 난리고 궁 안에서는 최숙원이 난리였죠. 위에 제가 적은 장다리는 한 철이라는 노래 역시 이때 퍼진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때 사씨남정기가 널리 읽혔다고 합니다.
하여간에 이러저러하게 서로 견제하고 염탐하고 난리를 치다가 장희재(옥정의 오빠)가 돈으로 사람을 사서 최숙원을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이 있었습니다. 숙원을 죽이고 남인이 결탁해서 반역을 꾀했다는 것이었는데 조사 결과 거짓이었고 숙종도 문제 삼지 않을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갑자기 숙종이 비망기를 내렸습니다.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럽다.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빼앗고 내쫓아라. 만암과 의금부 당상은 모두 외딴 섬에 안치하라.”
여기서 만암은 바로 남인의 중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숙종은 한꺼번에 남인을 조정에서 몰아냈습니다. 대신 또 !!!!!!!!!! 서인을 불러들였습니다. 바로 갑술 환국입니다.
사실이 환국은 왕실의 권위 회복과 왕권강화를 위한 숙종의 방식이었습니다. 기사 환국으로 남인이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와 함께 장희빈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서인인 인현왕후가 복위 됩니다.
후에 인현 왕후가 죽고 숙종은 장희빈이 이를 저주했다는 것에 크게 분노하며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좀 더 신중하게 하자며 간청했습니다. 나이가 어린 세자가 있다는 이유였는데요. 또한, 장희빈은 죄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합니다. 숙종은 저주 사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국문했는데 궁녀들은 처음에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고문이 계속되자 실토했다고 합니다.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 숙종은 희빈의 처소를 찾지 않았고 장희빈 역시 다른 후궁들이 날마다 올리는 문안 인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8년 가까이 지냈는데 갑자기 숙종은 어떻게 그녀가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인 것을 알았을까요. 궁녀들이 자백했다고 하나 그는 고문 뒤에 나온 말이고 물증 역시 후에 찾아낸 것입니다.
숙종은 신하들의 간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장희빈을 살려두면 후일 뜻을 얻어 안팎으로 자신의 당파를 심은 뒤에 국가의 근심이 될 것이니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희빈의 죽음은 숙종의 정치적인 결단에서 나온 것이었죠. 숙종이 직접 문제 삼아서 심문하고 자결을 명한 것입니다. 나아가 숙종은 이후 후궁이 다시는 왕비가 될 수 없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장희빈이 죽고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노론이 맞섰는데요.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장희빈을 너그럽게 용서하기를 바랐고 희빈이 죽었지만 세자를 보호했습니다. 노론은 장희빈을 옹호했던 소론을 조정에서 내몰고자 했고요. 숙종 말기에 이르러서는 노론의 세상이 열렸습니다.
장희빈의 삶은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 그리고 그 유명한 ‘인현왕후전’이 대표적인데요. 특히 이 ‘인현왕후전’이 바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간악하고 권모술수에 능하고 미모로 왕을 유혹하였으며, 투기 때문에 착한 인현왕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희빈의 이미지에 공헌을 했습니다. 인현왕후의 덕행을 기리고자 장희빈의 악행을 소상히 기록하고 서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노론의 시선으로만 장희빈을 본 것이죠. 이렇게 장희빈은 악녀의 대표 주자가 된 것입니다.
17세기 말. 그러니까 숙종 대에는 붕당정치와 탕평 정치기에 낀 이른바 ‘환국’ 기입니다. 환국이란 처음에는 서인과 남인, 남인이 퇴조한 다음에는 노론과 소론 등 두세 붕당이 정국 주도 건을 놓고 대립하면서 변전을 거듭하는 정치 형태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권당은 상대당에 대해 보복과 숙청을 가하는 것이죠. 장희빈의 역사적인 성격 우리가 익히 아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환국이라는 정치상황에서 기인한 것일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앞서서 장희빈은 그 시대의 정치, 사회 상황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한 것이고요. 또한, 희빈뿐 아니라 인현왕후 역시 서인과 손잡은 여성이었다는 것도 잊어선 안 되겠죠.
이때 일을 간단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숙종이 즉위하면서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을 주도
〃 숙종 12년. 궁중에 궁인 장희빈을 위한 별당을 지음.
〃 숙종 14년. 장숙원이 왕자를 낳음 - 소의로 봉함
〃 숙종 15년. 왕자 균이 원자에 책봉됨 - 소의에서 빈으로 승격. 빈호는 희.
〃 숙종 20년.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 가운데 주로 소론이 집권. 폐비 민씨 복위.
〃 숙종 22년. 장희빈의 부 장형의 묘에 흉악한 물건을 묻은 사건이 드러남.
보시다시피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교체됨과 동시에 남인과 서인이 그러니까 정치의 주도권도 덩달아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사 환국으로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갑술환국으로 이번에는 인현왕후가 복위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단순하게 삼각관계라고 생각했던 숙종와 인현 왕후 그리고 장희빈의 사이에는 그보다 더 큰 시대상이 연관되어 있는 거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숙종은 왜 이렇게 해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을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왕이 절대적으로 모두 자신의 뜻대로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국가는 몰라도 조선왕조에서는 그러했다고 합니다. 물론 왕은 엄청나게 큰 권한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왕도 당시 정치상황의 제약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붕당들이 대립하며 균형을 이루는 상황에서 때때로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환국의 원인, 그러니까 당대 정치집단 사이의 관계가 왕비의 교체까지도 이어졌다는 해석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숙종 이전 인조에서 현종 대의 정치는 서인과 남인 두 붕당이 공존하면서 서로 비판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균형이 숙종에 들어서면서 깨어지고 정권 독점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던 거죠. 이러한 변화는 왕을 둘러싼 종실과 외척 집단까지 관련되게 되고 왕비 교체 그러니까 인현왕후도 장희빈도 시대의 희생물이 된 것은 바로 이런 대립의 부산물이었던 거죠. 숙종 연간 내내 환국이 지속하고 후에 경종, 영조로 왕위가 이어지는 과정에 가서는 왕비가 아닌 왕위 자체가 붕당 간 정치적 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양상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인현 왕후도 장희빈도 이런 소용돌이에 휩쓸린 희생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명문가의 딸이었던 민비 그리고 중인의 딸이었던 장씨. 그리고 숙종 9년에 명성 왕후(숙종의 모)가 죽은 후 다시 장희빈이 궁으로 들어가는데요. 이것이 바로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씨남정기에서도 정실의 권유로 후처를 들이네요) 헌데 이때 민비의 나이 17세. 이 일화는 민비의 인품이 뛰어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데 이용되는데 과연, 열일곱 나이에 후궁을 다시 굳이 불러서 끌어들였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죠.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도 모자란데 말입니다. 나중에는 숙종이 그럼에도 인현 왕후는 안중에도 없고 장희빈만 바라보자 다른 후궁을 들이기도 했으나 숙종은 장희빈을 총애했다고 하죠.
참 이럴 때마다 타임머신이 하나 딱하니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가서 직접 보고 좀 알아보고 싶죠. 어쨌든 항간에는 장희빈이 죽을 때까지 발악을 하면서 세자를 죽여야 죽겠다고 난리를 쳤다고 하는데 실록에는 그런 기록은 없으며, 숙종 역시 장희빈이 죽고 난 후에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도록 했고 세자였던 경종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 글을 쓰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인현왕후가 못됐고 장희빈이 좋다 이런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장희빈이 실제로 어떤 여성이었는가 하는 것도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숙종이 나쁘다고 이야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장희빈이라는 여성이 무조건 악녀일 것이 아니라 사실 당대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뭐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뿐이라긔.
역사적인 사실은 어떤 것도 100% 객관적이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렇다고 조선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런 건 객관적이겠죠. 사건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걸 바라보는 시선은 100% 객관적일 수 없으며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들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에 대한 판단은 자신이 본 정보와 판단에 의해서 상이해집니다. 또한, 그 정보라는 것이 기존에 깔린 보편적인 인식과도 밀접하죠. 그러니까 장희빈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게다가 언론에서 깔아주는 더한 그 악녀 이미지. 요부. 이런 것들이 깔렸으므로 역사의 (비교적)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이 인식을 바로잡는 데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지금은 아직 아니 아마 앞으로도 완벽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렇기엔 남아 있는 사료는 턱없이 부족한 거 같습니다. 저도 뭐 이렇다저렇다 확 결론을 내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선도 있다는 것을 같이 보고, 이해하고 했으면 하는 맘에서 올리는 거죠 뭐. 타임머신이 실제로 생기지 않는 한 아마도 우리는 계속 이렇게 자료의 조사 그리고 연구 판단을 반복하면서 인식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기는 합니다.
사실 여기 젤 올리고 싶은 건 친일파 청산 관련 글들인데 너무 광분해서 자료를 끌어 모아서 너무 많아서 정리 못 하고 있다규- 이건 뭐 볼 때마다 흥분하고 분통 터져서 자료 정리는 안 하고 혼자 흥분해서 원. 전 솔직히 말 그대로 그냥 제가 흥미가 있어서 이런 거 보는 거기는 해요. 그렇지만, 이러면서 안타까운 것도 많고 그렇더라고요.
전 다른 건 몰라도 일단 내가 여기서 태어났고 좋든 싫든 태어난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밟고 있는 땅이 뭔 지랄을 하든 간에 어찌 굴러 왔는지 좀 알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프랑스 놈들이 남의 것 가져가서 맘에 안 들지만 가장 맘에 드는 건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애들은 나치 이후 청산을 비교적 잘 해줬다는 거에요. 이 자료는 나중에 글 쓸 기회가 있다면 쓰겠는데 여하튼 우리나라 친일파 청산 얘기 나오면 다 지난 얘기 세계화 시대에 왜 꺼내느냐는 사람들 꼭 있죠.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고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느냐면서. 예전에 나치 패전 40주년을 맞이하여 독일의 대통령이었던 바이츠제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모두가 과거를 떠맡아야 한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을 감는 것과 같다.”라고요. 장희빈 글에서 갑자기 흥분하는 것 같은데 여하튼 우리 다른 건 몰라도 땅덩어리 굴러온 건 알고 살자 그거에요. 물론 저도 알려고 노력하는 거지 모든 걸 아는 것도 아니지만요. 갑자기 뭔가 급 진지해졌네요. ᄏᄏᄏ
국사와 근대사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소리 높여서 말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수학보다 영어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습니까. 아니 수학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우리는 ‘산수’를 배우는 거에 가깝잖습니까. 전 산수였는데도 버렸삼. 그렇다고 제가 산수가 싫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닙니다. 목적은 유연한 사고를 갖자였는데 갑자기 마무리는 역사 인식의 소중함 뭐 이런 걸로 맺게 됐네요.
# 혹시라도 제 기억에서 날조된 장희빈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댓글로 신고 바랍니다. 너무 적나라해 서 저의 내면에 상처가 날 것 같으시면 조심스럽게 쪽지로 주셔도 됩니다. 진심이라긔. 왜곡되거나 아니면 근거없은 캐소리라면 바로 알려주삼. 몰래 수정할게열 ㅋㅋ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다규 ㅋㅋㅋㅋ 이런 자료 쵝5 좋아요!!
정말 좋은 글이네요^^ 잘읽었어요~
근데 중간에 명성황후가 아니라 명성왕후 아닌가요? 숙종의 모후?
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그렇게 적였냐긔?
황후 맞아요~ 고종이 대한제국 세우면서 왕이 아니라 황제 칭호를 써서 황후~
보라를품은소녀님은 제가 명성왕후(그러니까 현종의부인)을 명성황후로 쳤다고 말씀하시는 거 아니냐긔 ㅋㅋ 아 근데 어딨는 거냐규 ㅋㅋ
휴 드뎌 수정. 저기서 말한 명성 왕후느 현종의 비였던 명성'왕'후에요. 나중에 우리가 더 잘 아는 명성'황'후는 아니삼 밑에 있어서 계속 다시 읽었다긔
그러고 보면 우리 고등학교때 국사선생님이 참 좋으신 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역사 뒷면의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
전 생각해 보면 딱히 -_- 그런 건 없었고 대신 어느 정도 이런 저런 얘기해준 세계사샘은 있긴 했는데 별로 영향은 없었긔 ㅋㅋㅋ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생각할거리도 많고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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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이런글 너무 좋아요 !! 정말 좋다긔...역사는 장희빈의 팜므파탈적인 이미지만 강조하긔..
당연 서인들 입장에서 쓰여졌으니깐 그렇죠..ㅋㅋㅎ 장희빈은 반대파인 남인이었다규.. 결국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그때부터 쭉 서인판..ㅠㅠ 우리역사상으로 보면 개혁적인 북인이 계속 정권을 잡았어야 했는데..인조반정으로 북인 몰락하고 그때부터 완전 보수적인 성리학판이 되어버렸다규..그때부터 여자지위도 한없이 추락한거구..보학예학 이딴게 다 모냐고!! 급분노
삭제된 댓글 입니다.
국사하고는 상관없는 전통이에요 으흐흐흐 관심은 있으나 전공으로 파고 공부한 게 아니라 모르는 것도 많고 잘못 알고 있는 것고 있고 그렇죠 ㅋㅋ
재밌게 잘 읽었어요..국사를 다시 공부하고픈 마음이 드네요..
숙종은 티비에서 나온 연약한 이미지가 아닌 자기부인을 이용하는 무서운왕이었네요.
숙종이 제일 나쁜놈이긔 숙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그랬다고 변명을하지만 실제로 숙종은 귀가 얇고 변덕이 죽을 끓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인현왕후 장희빈 둘다 숙종의 변덕에 휘둘린 불쌍한 사람들이죠 인현왕후도 폐비되서 6년간 정말 캐고생했고...인현왕후도 어찌보면 피해자라긔 내가 볼땐 숙종이 볏신이라긔
22222222222 이게 다 숙때문이다...............................
드라마 볼떄도 젤 짜증났던건 숙종의 우유부단한 태도.... -_-;;; 이러자그럼 이러고 저러자그럼 저러고.... 이건뭐.... -_-
원래 정치는 그런거죠....가장 오해받는 인물은 장희빈이 아니라 숙종인지도 모르겠네요..우유부단하고 변덕스런 왕으로 그려지지만. 기실은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정치가가 아니었을지.
아니라규..숙종이 변덕이 죽 끓듯 해서 이랬다 저랬다 한게 아니라 그당시 상황으로선 그럴수밖에 없었다규..당시 남인 서인 팽팽하게 대립해있던 상황에서 숙종이 일부러 둘중 어느한쪽 편 번갈아 들어주면서 세력견제하고 결국엔 자기입지 확실히 굳힌거라규.. 물론 당파싸움이 숙종때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일당전제화 이런거 없었는데.. 반대파라고 무조건 배척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숙종때부터 세차례 환국 거듭되면서 나 말고는 다 나쁜놈 이런 분위기 되서 .. 문제였지.
당파싸움 <- 일제시대때 일본이 만들어낸 말이래요. 당끼리 떼지어 싸움만해서 일본이 도와줄 수 밖에 없었다라는 합리화를 위해서~ 우리는 붕당이라고 해야함.ㅎ 그리고 나중에 붕당정치가 변질되었다~ 라고 표현해야되요.
재미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글은 너무 당파적 싸움에만 치중한글인거 같아요 물론 당파 싸움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군요...
인현왕후와 숙종 그리고 희빈 장씨만의 사적인 관계나 사건보다 일단 시대상에 초점이 맞춰진 거니까요.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 있었던 일은 상대적으로 언급이 안됐네요. 님이 한 번 써주시라규.
나 이런 자료 너무 좋아~~ 캬캬캬
역사는 알면 알수록 새롭고 꼭 알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잘읽었습니다^^
님 좋은글 잘봤다긔! 님 느므 멋지다긔 ㅠㅠ
님자료 항상 잘보고있어요~ 저기 레나님 다음편은 세종대왕에대해 다뤄주시면 안돼~나요? ( 사실 세종대왕 역사책으로 읽으면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왕처럼 표현하는데 안그런면도 많고 ㅋㅋㅋ 해서....... 그렇다고 세종대왕 욕하는거아녜요!)
우와..잘읽었습니다. 담에도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