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781
■ 3부 일통 천하 (104)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2장 조무령왕과 호복기사 (5)
조무령왕(趙武靈王)은 호복 차림의 기마대 창설을 공식적으로 조정 회의에 상정했다.
어느 정도 반발은 예상했었다.그런데 그 정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
<사기(史記)>는 이때의 상황을 매우 세밀히 기록하고 있다.조무령왕(趙武靈王)은 말했다.
"강력한 병력의 보호가 없으면 사직(社稷)은 망하게 마련이오. 무릇 세상에 태어나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때때로 예전의 풍속을 위배할 때도 있소.
나는 책망을 받은 한이 있더라도 모두에게 호복(胡服)을 입고자 하오."
이에 누완(樓緩)이 찬성했다."좋습니다."그러나 모든 대신들은 반대했다."불가합니다."
수십 명의 대신 중 단 한 사람만이 찬성이고 나머지 대신들은 모두 반대한 것이다.
심지어는 스승이랄 수 있는 비의(肥義)도, 숙부 및 형제들도 조무령왕의 뜻에 동조하지 않았다.
물론 반대 이유는 간단했다.- 오랑캐 풍속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때부터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조정 대신을 상대로 설득 작업에 나섰다.
일일이 대신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가장 먼저 스승인 비의(肥義)를 설득했다.
- 내가 호복(胡服)을 입히고자 하는 것은 적은 힘으로 많은 공을 세우기 위함이오.
대저 무지한 자의 즐거움은 현명한 자의 슬픔이고, 어리석은 자의 비웃음은 어진 자의 통찰이오.
- 세상 사람들이 호복(胡服)의 효능을 다 짐작할 수는 없소.
설령 모든 사람이 이 일로 나를 비웃는다 할지라도 나는 기어코 호복을 입음으로써
조(趙)나라를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고야 말겠소.
조무령왕은 온갖 수사(修辭)를 동원했다. 아니 그것은 수사가 아니라 웅변이었다.
이쯤되면 비의(肥義)도 조무령왕의 신념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듣기로, 머뭇거리는 자는 성공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자는 명예를 얻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왕 왕께서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겠다고 결심하셨으니 세간의 여론을 의식하지 마시고 부디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숙부인 공자 성(成)을 설득하기 위해 궁으로 불렀다.
그러자 공자 성은 아프다는 핑계로 조무령왕과의 만남을 피했다.
여러 차례의 부름에도 공자 성(成)이 오지 않자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친히 그의 집으로
행차하여 간곡히 말했다.- 모름지기 옷이란 몸이 편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예의란 마음이 편리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되고
일신(一身)에 도움이 된다면 몸과 예법이 꼭 동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숙부께서는 과거의 풍습을 주장하시지만 저는 미래의 풍습을 조성하려는 것입니다.
- 호복을 입음으로써 우리 조(趙)나라가 주변 나라를 통합하면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바라건대 숙부께서도 호복(胡服)을 입으십시오.
'옷이란 몸이 편리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 예의란 마음이 편리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공자 성(成) 역시 조무령왕의 의지와 신념에 감동했다.
그는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신이 어리석어 왕의 깊은 뜻을 모르고
감히 세속의 풍습만을 아뢰었습니다. 신은 왕의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마침내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모든 신료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일일이 호복을 나누어주었다.
- 이제부터 모든 신하는 호복(胡服)을 입고 조정을 출입하라.
아울러 기병(騎兵)과 사수(射手)를 모집하여 말을 달리며 활 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른바 '호복기사(胡服騎射)'다.이로써 중원 대륙에 '기마(騎馬)'가 처음 출현하였고,
이것이 점차 보편화 되어 통일 진(秦)나라 이후 주요 전투 수단은 완전히 기마에 의존하게 되었다.
병차(兵車)는 사라지고 다만 수레만이 남아 짐을 나르는 운송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의 엉뚱한 착상 하나가 중국인의 생활과 문화를 완전히 뒤바꿔놓고 만 것이다.
- 호복기사(胡服騎射).
이때부터 조무령왕의 이름은 중원 여러 나라에 화제가 되었다.화제만 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창설한 기마대(騎馬隊)는 놀라운 활약을 보여 주었다.- 중산국(中山國) 정벌.
조나라와 이웃해 있는 중산국.한때 위문후 때의 명장 악양(樂羊)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던 나라다.
그 뒤 중산환공(中山桓公)에 의해 재건되어 이 무렵해서는 제법 중원을 위협하는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그 중산국을 조무령왕이 공격하여 중산의 동성인 영수(靈壽)만을 남겨놓고
그 주변 땅을 모조리 점령해버린 것이엇다.'이제 시작일 뿐이다.'
자신감에 찬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이후 매년 주변 적족들을 공격하여 수백 리의 땅을 넓혔다.
개국 이래 조(趙)나라가 가장 전성기를 누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앞서 얘기했듯이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별난 왕이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바를 생각해 곧장 실천에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또 한 번 중원(中原)에 파문을 일으키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왕위는 왕이 죽은 후에라야만 그 후계자에게 계승되었다.
때때로 정변에 의해 망명하거나 초회왕처럼 타국에 감금되는 처지에 빠졌을 때
새 왕이 서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타의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자신이 살아 있으면서 스스로 그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파격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양위(讓位).
조무령왕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 또한 이채롭다.'천하 패업을 이루리라!'
그 첫 번째 일환으로 중원의 초강대국 진(秦)나라를 격파하리라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읍을 비우고 먼 길을 떠나야만 했다.오랜 세월동안 전투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 사이 나라가 빈다.'자신을 대신해서 내정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다른 나라가 쳐들어올 수도 있는데 이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단순한 섭정(攝政)이어서는 강력한 집정을 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비약하던 조무령왕의 뇌리를 스친 것이 바로 '양위(讓位)'였다.
- 나는 군사만을 맡고, 양위받은 왕은 내정을 담당한다.이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스스로의 생각에 도취되어 과감히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782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782
■ 3부 일통 천하 (105)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2장 조무령왕과 호복기사 (6)
그런데 조무령왕(趙武靈王)이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는데, 여기서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무령왕(趙武靈王)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다.그 중 유력한 공자는 셋이었다.
죽은 한씨 부인의 소생인 세자 장(章)과 후궁 소생인 공자 승(勝), 그리고 맹요의 소생인 공자 하(何)가
바로 그들이었다.원래대로라면 당연히 세자 장(章)에게 왕위를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맹요(孟姚)를 총애하면서부터 조무령왕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공자 하(何)에게로 쏠렸다.
맹요(孟姚)의 부추김도 있었을 것이다.자연히 세자 장(章)이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왕재(王才)가 아니다.'하지만 선뜻 세자를 바꾸기도 곤란했다.공자 하(何)의 나이 이제 불과
일곱 살이었기 때문이었다.반면 세자 장(章)은 20세에 이른 성인이었다.
세자를 폐할 뚜렷한 명분이 없는 것도 망설임의 한 이유였다.
그런 중에 대량 땅에 사는 이름난 인물 감별가 하나가 한단(邯郸)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잘 되었다 싶어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세자 장(章)을 보였다.
인물감별가는 세자 장의 관상을 본 후 말했다.- 단명(短命)입니다.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의 얼굴에 기쁨의 기색이 스쳐갔다.
오래 살지 못하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번에는 공자 하(何)를 나오게 했다.- 어떻소?
휘장 안에 숨어 일곱 살 난 공자 하(何)를 훔쳐본 인물 감별가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오래 사십니다.그뿐이었다.조무령왕(趙武靈王)은 어딘지 미흡해보였다.
오래 살 거라는 말을 듣기 위해 그를 초빙한 것은 아니질 않은가.- 다른 것은 없소?
- 대체로 무난하십니다. 다만.......- .................?- 올빼미상입니다.
올빼미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다.그래서 관상가들 사이에서는 '불효의 새'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인물 감별가는 조무령왕(趙武靈王)의 저의를 짐작했음인가.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지 않았다.그렇게 그는 궁을 나가버렸다.
- 올빼미상이라니? 그것이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일까?조무령왕(趙武靈王)은 궁금했다.
공자 하(何)의 후견인으로 이태(李兌)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조무령왕에게 들려주었다.
- 올빼미는 밤에도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낱낱이 보는 새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구석구석까지
살핀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명군(名君)이로군.
비로소 조무령왕의 안색은 환하게 빛났다.
그 이듬해 봄.조무령왕(趙武靈王)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바를 실행에 옮겼다.
세자 장(章)을 폐하고, 공자 하(何)를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그리고 다시 그 이듬해 여름,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또 하나의 놀라운 조치를 취했다.- 왕위를 세자 하(何)에게 물려주노라!
깜짝 놀라는 신하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조무령왕(趙武靈王)은 계속해서 말했다.
- 과인은 스스로 주보(主父)가 되어 군사의 일을 맡을 것이다.
그제야 조무령왕의 뜻을 안 신하들은 허리를 숙이며 그 뜻을 받들었다.
주보(主父).군주의 아버지라는 뜻이다.이때부터 조나라 사람들은 조무령왕을 '주보' 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말이 변해서 나중에는 '태상황(太上皇)', 혹은 '태상왕(太上王)' 이 되었다.
그러므로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태상왕이 된 셈이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세자 하(何)는 졸지에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조혜문왕(趙惠文王)이다.BC 299년(조무령왕 27년) 5월의 일이었다.
워낙 대가 센 조무령왕의 위엄에 눌린 폐세자 공자 장(章)은 별다른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무령왕에서 조혜문왕으로 이어지는 양위(讓位)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뒤이어 후속조치가 내려졌다.재상에는 원로대신이자 조무령왕의 스승이었던 비의(肥義)가 올랐다.
군대를 통솔하는 사마(司馬)에는 조무령왕의 숙부인 공자 성이 임명되었다.
폐세자 장(章)은 안양 땅을 식읍으로 받고 안양군(安陽君)에 봉해졌다.
안양군의 보좌관으로는 전불례(田不禮)가 임명되었다.
이로써 조(趙)나라는 두 왕이 통치를 하는 묘한 정치 형태를 보여주게 되었다.
앞서 얘기했던 대로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내정에 관한 일만 아들인 조혜문왕에게 넘겨주었을 뿐
군사권은 여전히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다.그 이유는 명확하다.- 영토 확장.
나아가서는 천하 패업을 이루려는 야심에서였다.
78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