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인 4대 신사로는 이나리신(농경신), 하쯔만신(화살신,武神), 이세신(천조대신-국조 아마테라스 여신), 텐만신(학문의신)을 모시는 신사입니다. 이중에 하쯔만신은 백제의 침류왕을, 텐만신은 백제의 왕인박사 후손인 스노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서기 845~903)을 모시는 신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을 일본인들은 무슨 뜻인지를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단지 신들만이 아는 말일 것이라고 여기고 말아 버리지만 한국인 학자들은 무슨 뜻인지를 쉽게 알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은 바로 고대 한국어이기 때문이랍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창조신이라고 할 수 있는 1번타자인'우마시아시카비히코지노미코토(可美葦牙彦舅尊)'의 경우일본인들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답니다.
하지만 '우마=엄마', '시아시=씨앗이', '히코지=흰꽃이'란 옛날 한국어이며 '미코토'는 신에 대한 진칭어인 바결국은 '엄마 씨앗이 흰꽃이 된 신'이란 뜻이 됩니다.
또 하나 건국신화에 나오는 신인 '다카미무스히노미코토(高皇産靈尊)'의 경우'다=모든', '카미=신', '무스히=무서워'가 되니깐'모든 신이 무서버하는 신'이란 뜻이 됩니다.
결국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고대에 한국인이거나 한국인이 만든 신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한국에서 문화가 전수된 것을 일본의 신사문화가 뒷받침 해주는 재미있는 현상이라 생각됩니다.
위의 하쯔만신(八幡神)사는 특히 임나일본부설과 관련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八幡宮을 지은 전설상의 황후도 사실은 백제의 근구수왕(일본의 응신천황)의 후비라고 합니다.
임나일본부설과 대마도의 해신(八幡宮)신사
일본 대마도의 해신신사는 일본의 역사왜곡 중에서 '임나경영' 또는 '임나일본부' 라는 말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후반경 야마토 조정이 임나 지역에 거점을 두고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통치했다고 하는 일본의 왜곡된역사관을 말하는 것이다.
임나(任那)란 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학계에서 인정이 되고 있지만 임나(任那)의 지역은 대마상도(對馬上島)에 있는 소국(小國) 임나국 또는 대마도(對馬島)를 가리킨다. 문제는 이 임나국이 두었다는 일본부(日本府)의 위치다.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 남부라고 계속적인 주장을 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일본부(日本府)는 대마도에 파견된 대화왜(大和倭) 신(臣)의 주재소(관가)로 보는 시각이 주류이다. 다시말해 대마도 북쪽 끝에 임나란 나라를 세운뒤, 대마도 내에 일본부를 세워 토착민들을 지배하였다는 것이 정설인 것이다.
이 임나국인 대마도 정벌을 수행했던 사람이 신공[神功:진구우]황후라 한다.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의 전설상의 황후인 신공황후는 정복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자리에 八幡宮을 세웠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이곳 해신신사는 1870년까지 팔번궁[八幡宮:하찌만구우]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신사에는 공황후라고 추정되는 목각 인형과 신라의 금동아미타불이 신체로 모셔져 있다.
팔번궁은 八幡神을 모신 신사를 말한다.(신사에서 궁[宮]이라고 하는 단어는 아주 중요한 신사에 붙는 칭호의 일종). 일본 전역에 이 八幡宮이란 이름으로 약 3만 여 개의 신사가 있다고 한다. 그 원조이자 창시가 바로 대마도의 해신신사가 있는 키사카[木坂]]라고 한다. 해마다 음력 8월에 해신신사대제가 펼쳐지며, 이때에는 대마도 전체가 축제로 들썩이며, 신사 앞에는 난전이 서는 등 대마도의 중요 축제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출처 : 나눔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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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신천황이 된 근구수대왕의 신사와 후손들
백제 근구수대왕은 왕자 시절에, 일본에 건너가서 성무천황의 반란을 평정하고 362년에 응신천황이 되고, 성무천황의 후비인 야가하에히메, 즉 신공황후를 취하여 자신의 후비인 아이부인으로 삼는다. 신공황후가 침류대왕을 임신하니 태중에서 삼한왕, 즉 대마도왕으로 임명하고 침류왕의 나이 5세에는 칠지도를 주어서 왜왕으로 임명한다. 근구수대왕은 백제로 돌아가서 태자가 되고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평양성에 달려가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마침내 백제대왕이 되었다가 383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예전의 응신천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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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국원왕을 활로 쏘아 죽인 근구수태자 응신천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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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종열 |
제 15세 천황이 된 응신천황(應神天皇320~394)은 백제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이다. 근초고대왕이 백제 본토에서 처음 낳은 아들이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311~374)이고 두 번째 낳은 아들이 백제 근구수대왕으로서 호무다와케(品陀和氣命320~394)다.
동경도(東京都) 신내천(神奈川)의 한천(寒川)에 위치한 '대신총(大神塚)'에는 응신천황의 형이라는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311~374)가 묻혀있다. 그는 311년에 태어나 64세로 374년에 죽었는데 근초고대왕의 장자다. 호무야는 호무가와(漢川)에서 유래된 말로 고려되며, 백제의 한수(漢水), 즉 평양 대동강을 의미한다.
현재 대신총이 있는 곳의 지명이 한천(寒川)이다. 한(漢)이나 한(寒)은 크다는 뜻의 우리말이고 또 같다는 뜻의 한은 대동강과 뜻이 같다. 근초고대왕이 333년 일본정벌을 마치고 백제로 돌아갈 때에, 장자인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가 도꾜(東京)의 왕이 되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본래 응신천황은 호무다천황(譽田天皇)이라고도 하는데, 호무타화기(品陀和氣命320~394)이고 백제 근구수대왕이다. 응신천황(應神天皇재위 362~367)과 호무다천황(譽田天皇재위 383~394) 두 개의 이름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가 두 번이나 천황을 지낸 것을 의미하고 응신천황으로서는 362년부터 367년이고, 예전천황으로서는 383년부터 394년까지다.
호무다(品陀)는 한전(漢田), 즉 근초고대왕 이래 백제 수도 한산(漢山)을 의미한다. 호무다천황릉에 해당하는 오사까 예전어묘산(譽田御墓山)에는 근구수대왕이 묻혀있다. 320년에 태어나 394년에 75세로 죽었다.
근구수왕자는 362년 성무천황의 반란을 물리치고 나서, 성무천황의 황비였던 신공황후(神功皇后)를 만나 백제 본토로 데려갔다. 근구수왕자는 신공황후를 후비로 삼아서 아이부인(阿爾夫人)이라 부르고 성무천황의 군대를 빼앗아 신라 정벌에 동원하였다.
근구수왕자는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침략을 막고, 371년 고구려 북쪽의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371년 백제 근초고대왕은 지금의 평양 한산성 안학궁으로 천도하였고 374년에 붕어했다. 이후 근구수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는데, 383년에는 왜국에 건너가서 응신천황이 되었고, 대신에 원자인 침류대왕을 백제로 보내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게 하였다. 응신천황 근구수대왕은 394년에 74세로 왜국에서 서거하였다.
근구수대왕을 모셨던 신사로 추정되는 구도신사(久度神社)가 남아있어서 구도신(九度神)과 팔번신(八幡神), 주길대신(住吉大神) 등을 모시는데, 팔번신은 곧 침류대왕이다. 근초고대왕을 모시는 히라노(平野神社)에서 근구수대왕은 구도신(九度神)이라 하였다.
오오사까에는 백제 근구수대왕의 후손이라는 3가의 신사가 있다. 오진(大津)신사와 가라쿠니(辛國)신사, 국분(國分)신사다. 여기서 오진(大津)신사는 오진(應神)천황과 관련되니 바로 근구수대왕이었다. 응신(應神)을 오진이라고 읽는다. 그래서 근구수대왕이 응신천황인 것을 확증할 수 있다.
오진(大津)신사의 기록; 特に百濟の貴須王の子孫と言われる葛井氏、船氏、津氏の三氏族が勢力を扶植していった。葛井氏は藤井寺市藤井寺の辛國神社、船氏は柏原市國分市場の國分神社、津氏は当社(=大津神社)とそれぞれ祖霊を祭っているようだが、明治以後であろうか素盞嗚尊や牛頭天王を祭る形になっている。
일본의 수많은 팔번신사(八幡神社)는 응신천황으로 잘못 알려진 침류대왕을 기리는 곳이다.
스미요시대사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서 스미요시 대신과와 신공황후의 사통(私通)의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근구수대왕을 구수(貴須)라고 기록하였는데, 스미요시(住吉) 중의 뒷글자 길(吉) 한 글자 발음인 "기사"가 "貴地"와 같은 발음도 되거니와 吉을 "기츠"라고 읽을 수도 있다. 또 그 앞에 우리말 근(近; 큰-)을 구운(炭)의 의미로 적었다가 스미(炭)로 읽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근구수대왕을 위한 신사는 스미(炭)궁이어야 하는데, 같은 발음으로서 스미궁(隅宮)이라고 기록되었다. 응신천황, 즉 근구수대왕이 서거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오스미궁(大隅宮)은 본래 스미(炭, 隅) 요시(吉, 貴須), 즉 근구수대왕을 기린 궁이다.
백제 수도가 대동강 평양에 있던 증거 1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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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반기 백제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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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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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온조대왕이 배를 타고 만주를 떠나와 한반도로 들어와서 처음 건국한 곳은 평안남도 대동강의 서쪽가지 보통강 평성시 청룡산성이며 대산한성, 하북 위례성이라 불렀고 이후에 대동강 동쪽가지 비류강 성천군에 하남위례성을 세웠다. 동서 2성인 것이다. 대동강 하류 평양에 있던 기준의 마한을 병탄하여, 백제가 북으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태백산맥, 남쪽으로는 금강에 이르렀다.
고구려 국모였던 소서노가 비류왕자와 온조왕자를 데리고 바닷가로 와서 소금장사를 하여 마침내 어하라(於瑕羅)를 세운 곳은 고대 어니하(於泥河)가 흐르던 만주 대석교시(大石橋市) 진미산성(鎭迷山城)으로 고려된다. 진미산은 발해 진주(辰州)가 있었고 그 이름의 유래는 진한(辰韓)이다. 이를 소서노의 장자인 비류대왕이 물려받았다.
소서노의 차자인 온조왕자가 비류대왕으로부터 독립하여 배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와서 처음 상륙한 곳은 미추홀(彌鄒忽)이라 전하는데, 이는 평안남도 서해안의 영유현(永柔縣) 미두산(米豆山)이다. 미추는 용(龍)의 우리말이다. 강룡산(降龍山), 견룡지(見龍池) 등이 미추홀에 남아있다.
온조대왕이 오른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은 평안남도 평성시 자모산慈母山이다. 자모산성이 남아있다. 성둘레는 5000m이고, 위례성을 호위하는 5방성 중의 북방성이 된다. 온조봉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은좌봉(殷坐峰)이 그 서남에 있다. 평성시 동남쪽 백족산(百足山)도 온(溫=百)조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모산성 남쪽에는 청룡산성(靑龍山城)이 있는데 첫 번째 한산 수도 하북 위례성이다. 성둘레는 약 5000m다. 그곳을 상차리(上次里), 또는 오리동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위례성(慰禮城)의 지명이 아직 남은 것이다.
다음으로 온조대왕이 한수(漢水=평양 대동강 平壤 大同江)로 보호된 도읍지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을 세워 한성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홀골산성(忽骨山城)이다. 성천은 위례성천이 어원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비류강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의 소조산(小祖山)도 온조산에서 유래된 것이 된다.
백제의 초기 수도가 대동강 지역인 것은 다음의 17 개 증거가 있다.
1)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아스카(明日香) 기토라고분에서 나타난 벽화의 별자리가 평양 하늘을 관측한 것으로 증거가 된다. 백제인의 하늘은 평양 하늘이었다.
2) 신라의 수만 개에 달하는 고분과 고구려의 수만 개 고분에 견줄 수 있는 백제 고분은 서울에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에 약 80개 정도 남아 있었다고 전하지만 대부분 고구려식이다. 대신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수만 개 고분이 있는데 이 모두가 백제 귀족 고분이며 이제까지 유령국가 낙랑군의 고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3) 6세기 공주 무녕왕릉 같은 형식의 벽돌(塼室) 고분의 선구가 만주로부터 대동강에 산재해 있다. 현재 서울 한강에는 벽돌 고분이 없다. 고구려 장수대왕이 백제 개로대왕을 죽인 뒤에 백제는 공주로 천도하였고, 황해도 전실고분도 공주로 직접 이어진 것이다.
4) 일본의 벽화 고분은 백제가 전수한 것이다. 그 벽화 고분의 선구가 역시 평양 지방이다. 서울에는 벽화 고분이 하나도 없다. 벽화 고분은 만주의 요양시를 거쳐 평양시에 전해졌고, 그 뒤에 고구려 집안과 신라로 전해졌다.
5) 또한 고구려고분으로 선전된 황해도 안학3호 고분의 복식과 관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왕의 복식과 관이다. 고구려왕의 복식과 관은 색이 전혀 다르다.
6) 황해도 사리원의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묘는 중국인 대방태수묘가 아니라 백제의 대방태수묘다. 471년 송나라에 개로대왕의 사자로 간 백제 대방태수의 이름도 장무(張茂)였다. 즉 장무의 부형이 장무이인 것이다.
7)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6년 백제를 정벌할 때 뺏은 첫 번째 성이 만주의 단동시(丹東市)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만주지리풍속지'에 기록되어 있다. 즉 396년 이전에 백제 땅은 만주에도 퍼져 있었다.
8) 광개토대왕에게 패퇴한 5세기, 백제가 후퇴한 수도 한성은 예성강(禮成江)에 있었다. 황해도 신계군(新溪郡) 부여면(夫餘面) 위라천(位羅川)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예성강은 본래 위례성강(慰禮城江)이었던 것이다. 그곳의 피난 수도였던 태백산성은 백제 말기 수도인 충청남도 부여의 부소산성과 똑같은 형식이다.
9) 대동강 평양에서는 506년 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연개소문의 둘째아들 천남산묘지(泉男山墓誌)에도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한 곳은 한성(漢城)으로 나와 있다. 즉 지금 평양은 본래 백제 한산성, 고구려의 한성이었다. '泉男山墓誌'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396년 백제 한산성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빼앗았다. 한편 '평양성벽각서'에서 '한성 하, 漢城 下'는 고구려 한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건설 도중에 다시 백제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506년 무녕왕 때다.
10) '삼국사기'에서 한성(평양)의 백제 개로왕을 참살한 고구려가 안장왕 대에 국경을 넘어 백제로 쳐들어와서 전투한 곳은 황해도 한복판 오곡군(五谷郡)이었다. (아래 지도 참조) 북한의 역사책은 이를 서울 한강 아래 백제군의 북침을 유인해서 섬멸했다고 해석한다.
11) '일본서기' 550년조에서 백제가 평양(平壤)을 쳐서 6군을 수복했는데, 본래 평양이 백제 고지라고 했다.
12) '삼국사기 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나제동맹군의 백제가 앞서나가서 평양성을 쳤다고 했는데 대동강 평양, 즉 하평양이다.
13) '일본서기'에서 550년 백제는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錦峴城)을 빼앗았는데 서로 싸우다가 지친 틈에 신라 진흥왕의 이사부가 습격하여 빼앗았다. '일본서기'에서는 두 성을 우두방(牛頭方)과 니미방(尼彌方)이라고 기록했는데 신라 우두방이 있던 곳은 금천군(金川郡)으로서 지금 예성강의 동편이다. 5세기 아신대왕의 위례성이 예성강 서편 평산군(平山郡) 태백산성에 있었다.
14) 번한왕 기준(箕準)이 요서에서 위만(衛滿)에게 밀려나서 피난 나온 마한이 대동강 평양이다. '마한세계(馬韓世系)'에서 기준의 9세 후예인 기정(箕貞)이 기원전 17년에 백제 온조대왕에게 망했는데, 이때 기씨마한의 세력이었던 선우(鮮于)씨는 평양 서쪽의 오석산 황룡산성(黃龍山城)의 주인이 되었고, 기(奇)씨는 경기도 행주산성의 주인이 되었고, 한(韓)씨는 충청북도 청주의 주인이 되었다. 전라도 익산 구석에서 기씨마한이 망했다는 주장은 그 후손들의 분산 배치 결과로서 말이 되지 않는다.
15) 평양의 백제대왕을 낙랑태수라고 한 것은 동진에서 보낸 근초고대왕의 책명에서 나타나고, 그후 '양나라 직공도(梁職貢圖)'에도 백제 사신을 낙랑 사신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아울러 이 백제 낙랑이 양자강 동쪽을 동진(東晋) 말부터 백년간 거느렸다.
16)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의 이름이 함흥 지명에 남아있다.
17)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도이(島夷)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백제가 발해 동북에 위치해 있었으니 백제의 만주 소유가 기록된 것이다. '正義括地志':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
이렇게 많은 대동강 백제 평양의 증거가 무시되는 현재 한국사는 결코 진실 된 역사가 아니다. 제 조상 무덤을 '호로자식'의 무덤이라 가르치면서, 스스로 근본을 부인하고 노예처럼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는 고려 말기 이후로부터 썩은 지식을 팔며 살아가는 소인배 양반 학자들의 만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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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