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 바뀐 한 지붕 두 가족
2024년 12월 3일 오후 11시에 전격적(電擊的)으로 단행(單行)된 비상계엄(非常戒嚴)은 그야말로 뜬금없던 충격(衝擊)이었습니다.
국회(國會)의 재빠른 대처(對處)로 6시간 만에 종료(終了)되었지만, 여파(餘波)가 워낙 커서 아직도 혼란(混亂)이 진행(進行) 중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동원(動員)된 부대(部隊)들로 말미암아 지난 1979년의 '12.12 군사반란(軍事反亂)'을 떠올린 이들이 많습니다.
2023년 개봉(開封)된 <서울의 봄>에 빗대어 이번 계엄을 '서울의 겨울'이라고 자조(自調)하는 소리까지 떠돌 정도입니다.
↑국회 본청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계엄군, 명령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부대원들이 자괴감을 느낀 비극적 장면입니다
12.12 군사반란은 한국 현대사(韓國現代史)에 엄청난 아픔을 남긴 비극적(悲劇的)인 사변(事變)이지만,
어느덧 45년 전의 과거사(過去事)여서 당시를 경험(經驗)하지 못했던 세대(世代)가 인구(人口)의 절반(折半)이나 됩니다.
그래서 영화(映畫)를 통해 당시 상황(狀況)을 알게 된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이번 사건(事件)을 그때와 오버랩(Overlap) 합니다.
<서울의 봄>은 흥행(興行)에 대성공(大成功)했을 만큼 몰입도(沒入度)가 높아 상영(上映) 중 주요 장면(主要場面)에서 관객(觀客)들이 안타까움, 탄식(歎息), 분노(憤怒)를 표출(表出)했습니다.
↑'12.12 군사반란'을 극화한 <서울의 봄> 포스터
육군본부(陸軍本部)가 반란군(叛亂軍)에게 속아 제9공수 특전여단(空輸特電旅團, 이하 9공수, 극중 8공수)을 회군(回軍)시킨 장면(場面)도 그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9공수의 회군은 대단한 전환점(轉換點)이었습니다.
9공수가 서울에 진입(進入)했다면 30경비단(警備團)에 모여있던 반란군 지휘부(指揮部)를 제압(制壓)했을 것이라는 의견(意見)이 많기 때문입니다.
9공수가 회군한 사이에 반란군 소속 1공수(극중 2공수)가 국방부(國防部)와 육군본부를 점령(占領)한 사실(事實)을 반추(反芻)하면 충분(充分)히 가능성(可能性)이 있는 주장(主張)입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묘사한 9공수의 회군 장면
반면 출동(出動)한 9공수가 1개 대대(大隊)에 불과(不過)해서 반란군 제압(叛亂軍制壓)은 불가능(不可能)했을 것이라는 반론(反論)도 있습니다.
커다란 저항(抵抗)을 받지 않았던 1공수와 달리 9공수가 반란군 지휘부를 제압하려면 우선 청와대(靑瓦臺)를 경비(警備)하는 최정예 부대(最精銳部隊)지만, 어이없게 반란군이 되어버린 30경비단, 33경비단과 싸워야 했습니다.
설령 여기서 이겨도 곧바로 진입(進入)할 반란군의 1, 3, 5공수, 9사단과의 대결(對決)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主張)도 설득력(說得力)이 있습니다.
↑중앙청을 점령한 직후의 반란군 소속 9사단 장병들
이처럼 9공수의 회군(回軍)은 두고두고 아쉬움과 논쟁(論爭)거리를 남긴 채 역사(歷史)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9공수의 출동부터 회군까지의 동선(動線)을 살펴보면 반란에 가담한 5공수(현 국제평화지원단)와 동일(同一)했다는 사실(事實)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에 두 부대의 주둔지(駐屯地)가 같은 곳이라 할만큼 가까이 붙어있었고 서울 시내(市內)로 신속(新屬)히 진입(進入)할 수 있는 길도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9공수(귀성부대)는 12.12 군사반란 당시 유일한 진압군 부대였습니다
12.12 군사반란에 등장하는 육군 특수전 사령부(陸軍特殊戰司令部, 이하 특전사) 예하 부대는 진압에 나선 9공수와 반란에 가담한 1, 3, 5공수 등 수도권(首都圈) 4개 여단(旅團)입니다.
현재는 3개 부대가 주둔지(駐屯地)를 옮겼는데,
1979년 당시에는 1, 3공수가 서울에 5, 9공수가 인천(仁川)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 3공수는 서울이라도 동서(東西)로 양극(兩極)인 외발산동과 거여동에 자리잡았던 반면 5, 9공수는 인천 부평구(당시 북구) 산곡동에 함께 주둔했었습니다.
↑현재는 국제평화지원단으로 바뀐 옛 5공수(흑룡부대) 패치
1971년 미 7사단(師團)의 철군(撤軍)으로 주한미군(駐韓美軍)의 대대적(大大的)인 감군(減軍)과 재배치(再配置)가 이루어지면서 ASCOM이라고 불린 부평(富平)의 미군 기지(美軍基址) 일부가 반환(返還)되자 많은 국군 부대(國軍部隊)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때 5공수가 산곡동(山谷洞)으로 이전(移轉)해 왔고 9공수는 1974년에 그곳에서 창설(創設)되었습니다.
대개 신편(新編) 부대는 기존(旣存) 부대로부터 분리(分離)되어 창설된다는 점을 고려(考慮)하면 정황상(政況上) 9공수는 창설 당시에 5공수로부터 많은 지원(支援)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많은 특전부대가 부평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1980년대 초에 각각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미군 시설(美軍施設)도 지난해 12월에 완전 폐쇄(完全閉鎖)되었으나 여전히 많은 부대가 산곡동(山谷洞) 일대에 주둔(駐屯)하고 있습니다.
여담(餘談)으로 부평구(富平區)는 특전부대(特戰部隊)의 요람(搖籃)과 같은 곳입니다.
일단 특전사 창설지가 부평구 구산동(九山洞)이고 항상 특전사와 함께 하는 3공수의 창설지도 구산동과 접해 있는 부개동(富開洞)입니다.
특수전 학교(特殊戰學校)는 부평구 바로 옆이라 할 수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富川市古康洞)에서 창설되었습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5공수와 9공수는 같은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산곡동에 둥지를 틀었을 당시 5, 9공수는 정문(正門) 사이는 지하철(地下鐵) 두 정거장 정도 거리였지만, 후문(後門)은 상대의 훈련(訓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 중간(中間)의 태화루(太和樓)에서 양측 장병(兩側將兵)이 섞여 식사하는 모습이 일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철조망(鐵條網)으로 부대를 나누었을 뿐이지 한 지붕 두 가족과 다름없었습니다.
부대의 성격(性格)상 수시로 협조(協助)와 교류(交流)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無妨)합니다.
12.12 군사반란(軍事反亂)은 이처럼 밀접(密接)했던 두 부대의 운명(運命)을 바꾸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