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음(是非吟)
시비가리기
허후(許厚, 1588~1661)
진정으로 옳은 것도 따져 틀려진다
세파 따라 시비에 얽매일 필요 없어라
차라리 시비 떠나 높은 곳에서 보면서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하리
是非眞是是還非(시비진시시환비)
不必隨波强是非(불필수파강시비)
却忘是非高着眼(각망시비고착안)
力能是是又非非(역능시시우비비)
바둑이나 장기에서 구경꾼 눈에는 잘 보이는 것도 정작 당사자들은 못 보는 경
우가 많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기심과 개인의 이익에
눈이 멀어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만 따지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
또한 너무 세세한 일에 완벽을 추구하면 정작 큰일을 놓치는 사람도 많다. 큰 뜻
을 품은 사람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법이다. 시비를 가리되 사소한 일
은 감싸 안아야 큰 인물이다 허후는 젊은 시절 너무 강직했다. 그는 지난 세월의
시비 다툼이 부질없었다고 후회하는 심정을 읊었다. 그러나 후회는 후회고 어쨌
든 옳은 건 옳고 그른 건 그르단다. 허후는 진정한 선비다.
[작가소개]
허후(許厚) 조선시대사 인물
자 :중경(重卿), 호 : 관설(觀雪), 돈계(遯溪), 일휴(逸休)
성격 : 문신
성별 : 남
출생일 : 1588년(선조 21)
사망일 : 1661년(현종 2)
본관 : 양천(陽川)
저작 : 둔계집
경력 : 공조 좌랑, 은사 현감, 선공감부정, 지평, 장령
시대 : 조선
<정의>
좌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찬성 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양천현감 허교(許喬)이다. 우의정 허목(許穆)의 사촌형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3년(인조 1)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의병장 김창일(金昌一)을 도와 공을 세웠고, 난이 끝난 뒤 제용감직장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사도시주부를 거쳐 지평현감이 되었는데, 내노(內奴)가 인폐를 끼친 바 있어 이들을 엄중히 다스려 숙폐를 일소하였다. 그러나 남살(濫殺)한 죄과로 투옥되었는데, 현민들이 호소하여 풀려나 치악산 둔계 시냇가에 소암(素庵)이라는 정자를 짓고 기거하였다. 1637년 태묘영(太廟令)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그 뒤 의성현령, 형조·공조의 좌랑, 은사현감을 역임하고 1644년 세자익위사의 좌익위가 되었다. 인조가 죽자 원주의 관설로 돌아가니 이것으로 호를 정하였다. 1654년(효종 5) 선공감부정에 이어 지평이 되고, 곧 장령에 발탁되었다. 1658년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효종의 장례를 당하여 장악원정이 되었다. 이때 자의대비(慈懿大妃)주 01)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주 02)에 반대하여 3년 상을 주장하였다. 글씨에 능하며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원주 도천서원(陶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둔계집』이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기언별집(記言別集)
둔계집(遯溪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후(許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