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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코 6,7-13
내 욕구에 사로잡히면 상대의 욕구가 안 보인다
제가 군대에서 읽었던 책 중에 ‘유태인의 상술’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여성의 주머니를 노려라, 현금을 가지고 있어라, 장기적인 투자가 이긴다 등의 소제목이 기억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빵을 좋아하면 빵장사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빵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것을 좋아할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사가 안 되면 ‘내가 먹으면 이렇게 맛있는데 사람들은 왜 안 사지?’ 라고 생각하며 개선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빵을 싫어하는 사람이 빵장사를 하면 빵을 싫어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파는 것을 바라보기에 이렇게 저렇게 개선하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팔아야 더욱 사려고 하는 사람의 욕구를 더 잘 알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내 욕구에 집중하면 상대의 욕구에 무관심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얻으려면 내 욕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하려면 내 욕구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신학생들에게 신자들이 가장 원하는 사제상에 대해 물었더니, “강론 잘 하는 신부”,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사제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1위가 ‘겸손한 신부’, 2위가 ‘기도하는 신부’였습니다.
신학생들조차도 자신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 잘 모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혼자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더 큰 힘이 발휘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저는 외국에 있으면서 둘이 여행 나와서 싸우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사실 마르코와 사이가 좋아지지 않아 복음을 전하다가 헤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둘이 서로 의지가 되라는 뜻도 있겠지만 관계를 잘 맺는 모범을 보여주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본당 주임신부와 보좌신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아무래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제의 강론의 힘이 떨어질 것입니다.
본당 사제와 본당 수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보기에 우선 서로 관계를 잘 맺는 사목자들이 되고 그 이후에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발도, 옷도, 전대에 돈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에 대한 욕구,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은 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욕구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 욕구가 눈을 가려 신자들의 욕구를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미래에 대한 걱정, 돈에 대한 걱정, 명예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남의 진맥을 보려면 먼저 자신의 진맥부터 가라앉혀야 합니다.
잔잔한 물이 되어야 상대의 모습이 비춰져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들에게 신자들이 보기에 세상 재물에 애착이 없는 복음전파자가 되라는 뜻 같습니다.
또한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고 받아주는 집에 계속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이 좋아서 이 사람과 친하다가 또 저 사람이 좋으니 저 사람과 친해지는 사람은 선교를 위함이 아닌 자신과 어울릴 사람을 얻기 위한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욕구도 선교를 하는데 매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의 애정이나 인정을 바라는 사람들 역시 복음을 순수하게 전해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본당의 신자들이 갈라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정에서도 자유로운 복음전파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무언가 부족하여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힌다면 이는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명목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자신 안에 복음이신 하느님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시는 사람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기름을 바르면 병이 치유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전해주는 것에서 충분한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편안해하는 아기 얼굴을 보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과 같습니다.
내 욕구에 가장 덜 집중하는 사람이 복음전파를 위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이라야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전파자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6,7-13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읍시다!
부끄럽게도 언제부턴가 소임 이동 때 짐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혈기 왕성하던 젊은 수도자 시절, 원칙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칠 때는 정말이지 이삿짐이 딸랑 가방 두개였습니다.
소임 이동하는 날, 양손에 가방 하나씩 들고, 정들었던 공동체를 뒤로하고 버스로 이동하던 시절의 그 홀가분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모아놓으면 한 짐입니다.
아무리 줄이고 줄인다 해도, 가방이 대여섯 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차량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이 살던 수도생활 초년병 시절, 행복지수가 훨씬 높았습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보니, 잡 생각하지 않고, 딴 데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만 바라봤습니다.
하느님만 생각했습니다.
가난이 가져다주는 은총인가 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마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마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금은 너무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장거리 도보 여행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길 텐데, 적어도 비상금이라든지 비상식량은 챙겨서 떠나야 되는 데, 한 마디로 ‘몸만 가라’, ‘맨땅에 헤딩’하라는 말씀입니다.
지팡이는 왜 들고 가라고 하시는가 봤더니 당시 여행객들에게 지팡이는 필수 품목이었답니다.
광야나 들길을 걷다 보면 뱀이라든지 전갈이라든지, 들짐승을 만나곤 했는데 비상시 호신용으로 다들 지팡이 하나씩을 들고 다녔답니다.
그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 당부였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더 묵상해보니 예수님 말씀이 백번 천번 지당합니다.
수도자로 살아보니 최소한의 것만으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죽었다 깨어 나도 마트나 시장 한 번 안 가고 살수도 있었습니다.
더 높은 이상향을 추구하고, 더 영적인 삶을 갈구하다 보면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초월할 힘이 본인도 모르게 생겨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 앞에서 수도자들의 증거 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돈 없이도, 최첨단 문명의 이기 없이도,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수도자들이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몸에 지닌 것이 많을수록, 통장에 잔고가 많을수록 거기에 신경 쓰이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서로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분노하고 실망하게 되고, 점점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들에 마음이 쏠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물질이, 돈이, 명예가, 건강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더군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리의 길이 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 오고 가는 끈끈한 우정이 있습니다.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우리 눈은 흐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목요일 강론>
(2024. 2. 1. 목)(마르 6,7-13)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지금 상태 그대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에(마태 8,20),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은, ‘빈손으로’ 그냥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또 ‘지금 상태 그대로’ 떠나라는 명령은 ‘미적거리지 말고 곧바로’ 떠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출발을 미루면서 시간을 끌지 말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순간 곧바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대해서, “꼭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준비를 잘해서 복음 선포를 더 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준비’ 자체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잘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준비는 ‘물적 준비’가 아니라 ‘영적 준비’이어야 합니다.
<재물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악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재물 자체에 악한 속성이, 즉 마성(魔性)이 들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하느님 섬기는 일을 막거나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모두 사탄의 작용입니다.
재물에는 하느님 섬기는 일을 방해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재물에는 마성(魔性)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재물에 관해서, 청빈과 무소유를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한 일이 아니라면, 청빈과 무소유 자체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올바르게 섬길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청빈’을 실천하라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사탄의 작용을 피하고 멀리하라는 명령입니다.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한두 가지씩 더 챙기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재물(사탄)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의 시작이 됩니다.
따라서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즉 예수님의 명령대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이 명령은 누구에게나 몹시 부담스럽고 불편한 명령인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교회 역사를 보면, 이 명령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실천했다면, 중세 때의 그 위기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항상, 외부에서 오는 박해보다도, 신앙인들과 교회가 물욕에 빠질 때 더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의 뜻은,
“어디에서나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마음 착한 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너희를 도와주시는 일이다.
그러니 그들의 도움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주는 대로 먹어라.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이집 저집으로 옮기지 마라.”입니다.
후원과 도움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은 민폐를 끼치는 일이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어느 곳이든 너희가 선포하는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자들은 심판 때에 먼지처럼 흩어져서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믿고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믿지 않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처벌을 경고하는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실행했고,
임무를 완수했다는 증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실제로 어디로 가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 배반자 유다의 경우, 아직 배반을 생각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을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