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야인시대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이정재(야인시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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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한국의 경찰 출신 조직폭력배로, 이승만 정부 시기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렸다. 단성사 저격 사건 및 야당 정치인들을 향한 정치테러 등을 지시한 실질적인 배후이며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웬만한 조직폭력배, 정치깡패와는 차원이 다른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17년 1월 6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의 부농가에서 아버지 이용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호법면 유산리에서만 13대에 걸쳐 살아왔다고 한다. 그는 힘이 굉장히 셌다고 하는데, 고향 이천군에서 씨름대회가 개최되기만 하면 그 날 상품으로 걸린 황소는 전부 다 이정재의 몫이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참고로, 황소는 지금으로 비교하면 자동차 1대 값 정도로 크게 가치가 있던 상품이었다.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9]로 전학해 졸업했다고 전해질만큼 당시의 교육 수준으로 보면 엄청난 고학력자[10]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귀향해 농업에 종사하다가, 25세 되던 해 결혼했다. 얼마 뒤 아버지와 형이 별세하자, 고향의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상경했다. 처음에는 처가살이를 하며 동대문시장에 점포 자리를 하나 얻어 '삼양상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광목 장사를 했는데, 얼마 후 한 깡패와 시비가 붙자 그 깡패를 씨름 기술로 들어 메친걸 계기로 김두한의 부하로 주먹 세계에 입문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김두한이 속해있던 반도의용정신대에서 서기 업무를 봤었다고 한다.
당시에 보기 힘든 고등보통학교까지 간 엘리트로 김두한의 추천을 받아 특채로 경찰이 되었으며, 이후 대한청년단 종로구 동부 단장직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동대문 시장의 이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반민특위 문서에는 특별조사위원회 명단에 이정재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자세한 건 김두한/생애를 참고.
칠형제파 결성 당시 이정재(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후 시장 점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열승과 차석환을 포섭해 '칠형제파'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6.25 전쟁 이후 '동대문시장 상인조합'을 조직한 후 파괴된 시장의 중심지 일대 3,000평을 광장주식회사로부터 매입하여 점포를 짓고 상인들을 입주시키는 한편으로 상인들을 모두 조합원으로 가입시켰다. 이처럼 점차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킨 이정재는 상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과거 건달들이 폭력 행위, 협박, 공갈로 상인들에게 금품을 뜯는 폐단을 없애고 상인들의 애로사항이 있으면 해결해주면서 한 번도 상인들의 원망을 산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상인들의 원망을 사지 않는 한편으로 실은 절대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었는데 광장주식회사로부터 헐값에 거둬들인 땅을 상인들에게는 고가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한 것을 비롯하여 시장의 전기·전화 관리세에 자가 발전을 구실삼아 당시 가구당 300환[ㅁ]에 불과하던 관영 요금을 2,000환~2,500환[ㅁ]까지 거출하고 전화기 교환을 핑계로 7,000환[ㅁ]을 부과하는 등의 수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상인들에게서 이정재의 평판은 좋을 수밖에 없었는데 학력이 전무한 일반 조직폭력배들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삥을 뜯었다면 이정재는 학식이 있는 인물답게 돌아서 삥을 뜯어온 것이다.
이정재의 세력은 날로 거대해지면서 경마장에까지 미쳤는데 그가 체포되기 직전 시장의 규모는 종로 4가에서 종로 6가까지 이르는 70,000평 규모에 2,900여 점포를 아우르며 이정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인의 수는 12,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 뿐만 아니라 당시 혼란한 시대상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총기 또한 보유하고 있었으며 거대한 이권을 쥐게 된 이정재는 동대문 광장 입구에 1억환[ㅁ]에 달하는 3층 건물을 짓고 옥상에 도장을 설치하여 부하들을 육성했다. 아래는 체포 당시 알려진 화랑동지회의 조직도다.
- 위원회
- 3인 위원회: 이정재(두목), 조열승(부두목), 임화수(부두목)[15]
- 7인 위원회: 상기 3인 외 오영환, 고일심, 차석준, 김양수
- 참모부 - 감독반, 정치반, 사법반, 양성반, 사무반으로 구성
- 행동부 - 서울 시내 하부조직 10개 파로 구성
- 특수부대 - 이석재 외 7명
- 종로파 - 심종현 외 20명
- 소공동파 - 홍영철 외 20명
- 서대문파 - 최창수 외 30여명
- 광화문파 - 장영빈 외 50여명
- 종로4가파 - 유지광, 강승일 외 50여명
- 경마장파 - 이창수 외 50여명
- 동대문시장파 - 장세규 외 50여명
- 평화극장파 - 이천일 외 100여명
- 청년도장파 - 이창수 외 30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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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시라소니가 이정재에게 돈을 몇 차례 빌리고[16] 살 길이 막막한 전직 북파공작원 KLO 대원들에게 점포를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50만환[ㅁ]에 달하는 돈을 요구하고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도 점포를 배당해줄 것을 요구하자[18] 동대문파 간부들은 분노한다. 특히 자존심이 상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둔기와 손도끼 등의 흉기로 난자한 시라소니 린치 사건을 벌이기도 했으며[19]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이화룡의 명동파와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고향 후배인 곽영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띄어서 이승만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측근이 되자 이정재의 위세는 자유당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정계까지 월권을 행사하며 야당 인사들에 대한 집회 방해, 이기붕의 자유당 의장 취임 공작 등등 수많은 정치 테러를 벌였다. 이 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곽영주의 별명이 '곽박사', '부부통령'으로 곽영주가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경무대경찰서장이 되자 이정재를 이승만에게 알현시켰고 이정재는 이승만의 양아들이 되었다.
또한 이기붕을 대한민국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야당 인사 및 기타 조직의 방해자들로 지목된 이른바 제3세력의 동시 다발적 암살 기도를 획책하기도 하였음이 혁명재판 당시 밝혀졌는데 당시 암살 대상이 되었던 인물로는 김태선, 이순용,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김상돈, 백두진, 문봉제, 김기홍, 김두한, 조희창, 이화룡, 안두희 등 40여 명 가량이라고 한다. 이 계획은 당시 이정재의 행동대장인 김동진이 경찰에게 밀고함으로 무마되었다고 하는데 보복으로 김동진은 단성사에서 영화 '황야의 역마차'를 감상하고 나오던 도중 조직원 이석재에게 저격을 받고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이 사건이 바로 단성사 저격 사건인데 검찰의 수사 도중 자유당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서 이정재는 기소유예를 받고 풀려나게 됐다.
그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계 진출까지 꿈꾸고 있었는데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민의원 출마를 계획했다. 이정재는 오래 전부터 이천을 기반으로 정계 진출을 꿈꾸었는지 부하들에게 "길가다가 이천 사람이 곤란을 겪고 있으면 발 벗고 도와줘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당이 서울특별시 내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탓에 이기붕은 수도권이면서 만만한 지역구를 물색하던 도중 하필 이천을 선택하게 되자[20] 결국 기반은 이정재가 다 닦아놓고도 이기붕에게 공천을 빼앗기며 이천 지역구에서 출마하는데 실패한다[21]. 이 과정에서 이기붕과의 마찰을 일으킨 이정재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치솟던 이정재의 권력도 이 때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1958년 이후 직함만 1인자 자리를 유지한 채 권력을 잃은 이정재는 자택에서 칩거하게 되었고 이 틈을 타서 처세의 달인 임화수가 실질적인 화랑동지회의 1인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던 와중에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1공화국 당시 이승만 정부의 비호 아래 비리를 저지른 부정부패 사범들과 조직폭력배, 반혁명 분자 등을 척결하는 혁명재판을 단행하면서 척결대상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 4.18 고대생 습격 사건[22] 등 이정재가 관여한 수많은 범죄를 재수사해서 혁명재판에 넘겼다. 결국 1961년 5월 21일 혁명재판부에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제7조 1항 단체적 폭력 행위 외 11개 범죄 행위로 기소되어 범죄 단체 수괴로 인정되면서 사형 판결을 받는다. 판결 이후 공수특전단 대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다른 깡패들과 함께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를 쓴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시내 한복판을 행진하며 조리돌림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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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당시의 이정재의 모습들. 재판 당시 왼쪽 사진은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 이정재다. |
1961년 10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향년 44세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날 형무소장 면회라는 명목으로 감방에서 나와서 이동 중에 교도관들이 사형장으로 방향을 틀자 이정재는 처음에는 흠칫했지만 바로 체념하면서 "오늘부터는 대접이 바뀌는구만?"이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형장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사형당하기 전에 남긴 유언은 아래와 같다.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 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들이 있다.[23]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3. 기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