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작은교회 목회론"
작아서 당당한 교회,
작음이 은총인 교회
우뚝한 십자 탑도 없다. 그 흔한 네온 십자가도 보이지 않는다.
천장이 높아 장엄을
연출하는 그런 예배당도 아니다. 어른 키에
몇 뼘만 보태면 닿을
만큼 낮은 천장이다.
교인이야 새해 두 번째 주일 낮 예배에 마흔 정도 참석한 정도이다. 서울 신림 5동 허름한 6층 건물 40평 짜리
4층에 자리한 예본교회는 그러나, 작아서 당당한 교회이다. 작아서 은혜라 고백하는 교회이다.
예본교회는 스스로를 “작은 교회”라 말한다. 작은 교회는 이제 예본 교회의 자랑스런 수식어가 되었다. “작은 교회, 예본교회”,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드러낸다.
한국에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작은 교회들이 스스로의 작음에 대해서 그리 당당하지 못하다. 작음에 당당하고,
작음을 소망하고, 작아서 감히 은혜라고 말하는 작은 교회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이 말 또한 진실이다. ‘작은 교회는 없다.’
작은 교회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 많은 작은 교회들이 스스로 작음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대형 교회’가 정상이요 모범이요
소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본교회 안영혁 목사는 “성장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메가 트랜드를 대형 교회들이 암암리에 형성시켰다”고
꼬집는다. 그래서 대형 교회는 자만감에, 작은 교회는 열등감에 빠졌다. 작은 교회 목사들은, 안 목사의 말을 빌자면, “죄인”이며, 작은
교회의 교인들은 누가 ‘어느 교회 교인이요’ 묻기라도 하면 ‘그냥
동네 교회에 다녀요’ 라며 대충 넘어간다.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안 목사는 작은 교회는 “어떤 일에라도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부딪혀 간다”고 말한다. 무엇을 할라치면 교회 전체가 나서서 온 몸으로
부딪혀야 한다는 말이다. 한 마흔 되는 성도 가운데 누구 한 사람 아프기라도 하면 그것은 곧장 교회 전체의 아픔이 되고, 교회 전체의 기도가 된다.
예본교회 가족들의 1월 기도 제목은 A4 종이 한 쪽이면 족하다. 성도들 사이에 모르는 얼굴이 있을 리 없으니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가 간절하지 않을 리 없다. 면역 수치가
갑자기 떨어져 아픈 아기, 시헌이를 위한 기도는 엄마 아빠 되는 박은영 자매와 이우정 형제 둘 만의 기도가 아니다. 그를 위해 목사님도
전도사님도, 온 교회 가족이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부딪혀” 기도한다. 30만원 들어가는 공부방 보일러 기름 걱정도 교회가 온통 나서야 한다.
안 목사는 대형 교회들은 이런 소소한 일들에 존재로서 부딪히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형 교회는 관료적으로 관리되며 효율성을 따져야
하고 그러나 보니 유기적이기 못하고 기계적이 된다는 것이다. 사회
집단에 적용되는 ‘관료제화’는 교회에라고 예외는 아닌가 보다. 이
일은 이 위원회에, 저 일은 저 부서에…, 그렇게 큰 교회는 효율성을
따지고 부서를 따지고 위계와 절차를 따진다. 안 목사는 반문한다. “그런 대형 교회의 어느 한 부서가 전담하는 일이 작은 교회가 전체로서 달려들어 하는 것보다 산술적 결과는 더 클지 모르지만, 그 결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안 목사는 작은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무슨 큰 뜻을 세워
스스로 작고자 해서 그렇게 작은 교회가 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교회의 본질을 상실해 가는 대형 교회를 보면서, 그들이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을 지키고자 스스로 성장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작은 교회는
‘큰 사람’(어른)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성장을 스스로 포기한 양철북 소년 오스카가 아니다. 그러니 교만에 빠질 까닭도 없다.
왜 작은 교회가 되었을까? 안 목사는 “여러 복합적인 여건들”이라고 말하지만 더 자세히는 말하지 않는다. 담임 목사의 설교가 시원찮아서 일지도 모른다. 재빨리 신도시로 이사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다.
이런 저런 성장 세미나를 부지런히 좇아 다니며 연구하지 못한 교역자의 게으름을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몇 가구 되지 않는 시골 마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근처에 대형 교회가 들어서면서 교인들이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 이런 저런 비난들에 변명도, 저항도 할 필요 없다. 작아진 까닭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어쩌다 보니 작은 교회가 되었다’는 데서 출발하자. 안 목사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작다는 현실이며, 그 작음이 고통이 되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으며, 작은 교회가 그렇게 무의미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작은 교회는 은혜이다. 고달픈 은혜, 값비싼 은혜이다. 작아서
고통스럽고 소외당하고, 그래서 교회의 본질을 고민하게 되고 또 그것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게 된 다. 은혜라고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작아서 본질을 지킬 수 있는 교회를 안 목사는 “실존적이면서도 은총을 바라는 교회”라고 말한다. 안 목사는 실존에 머물고 만 “진보
교회”와 실존 너머 은총만을 바라는 “보수 교회” 대신 “제3의 길”을 내비친다.
예본교회는 이웃 봉천 1동에서 청소년 공부방을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속한 이른바 보수 교회가 실존의 문제에 나선 아주 작은 보기일 것이다. 한때는 도시 빈민 선교하는 교회를 ‘빨갛게’ 보던 시절도 있지 않았던가.
1월 13일 새해 두 번째 주일 안 목사는 신명기 14장 22-15장 11절을
본문으로 ‘날들의 연속’이라는 설교를 했다. 신명기 14장은 십일조를 하라고 명령한다. 너무나 쉽게 은총으로 도약하고 마는 보수 교회는 아마 여기서 ‘새해부터 열심히 십일조 생활합시다’ 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많은 십일조를 할 수 있도록 10배의 은총을 기원하면서.
그러나 이날 안 목사는 이 본문으로 “기독교인이 사회에서 가질 덕성”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사회 문제를 보면서 십일조를 가지고
거기에 다가서도록 명령했습니다. 십일조를 가지고 가족이 평화 하도록 했습니다. 십일조를 가지고 이웃과 평화 하도록 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것으로 사람 사이에 가장 기본적인 덕성을 기르도록 했습니다.” 실존은 건너뛰고 값싼 은총만을 추구하는, 본질에서 빗나간 교회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겠지만 신명기의
본문은 분명 그렇게 명령하고 있다.
이날 예본교회는 신명기의 말씀을 통해서도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작은 교회가 지켜갈 수 있는 교회의 본질에 닿고 있었다.
◆‘난쟁이 교회’라는 철거딱지
안영혁 목사(사진)의 ‘작은교회 목회론’을 듣고-안 목사는 이 제목으로 지난 학기 총신신대원에서 강의를 했다-그가 섬기는 ‘작은 교회’ 예본 교회를 그 목회론에 겹쳐보기 위해 신림동 예본교회를 찾았다.
강남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신림동을 걸으면서, 예본교회가 세 들어 있는 허름한 건물에 들어서면서, 아무렇게나 걸친 안 목사의 수수한 옷차림에서, 40평을 이리저리 대충 막아 교육실과 목양실과 예배실을 나눈 교회당을 보면서, 그리고 “작은 교회 목회자는 죄인” 취급당하는 세태를 얘기하며 당당하게 작은 교회가 되고자 몸부림치는
안 목사를 바라보면서, 느닷없이 소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떠올랐다. 난쟁이 가족의 빈민가 볼품없는 작은 집이 작은 교회와 겹쳐졌다. 작음이라는 개념과 취재 과정에서 보고 듣고 받은 이런
저런 인상들이 중첩된 것이다.
그 작은 사람들의 삶과 꿈이 배어있는 그 작은 집을 세상은 ‘무허가’로 규정하여 철거했다. 그 작은 사람들의 사람된 삶과 꿈을 철거했다.
예본교회와 세상의 수많은 작은 교회들은 지금 철거반과 싸우고 있다. 거인증에 걸렸거나 ‘큰 것’ 숭배에 빠진 세상은 작은 교회들에게 성장이 멈춘 교회, 난쟁이 교회라는 철거 딱지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