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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보이신 모범
벧전 3:18-22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벧전 3:18-22 /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분이었지만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께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려고 단 한 번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죽었지만 영은 살아 계셔서 19) 감옥에 갇혀 있는 영혼들을 찾아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20) 그 영혼들은 오랜 옛날 노아 시대에 살던 자들을 가리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순종해 오기를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하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무서운 홍수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21)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받는 침례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죽음과 멸망할 운명에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침례는 단순히 우리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에서 깨끗해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렇게 살기를 약속드리는 것입니다. 22)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셔서 모든 천사들과 하늘의 군대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난해 구들이 있는 본문 해석의 핵심은 여자의 후손으로 장차 오실 구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맥락이해와 구약 신앙인들이 믿었던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내용이해입니다.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법에 의해 십자가 형틀에 죽임을 당하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편에서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통과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사 53:7).
반면에 죄로 인해 죽게 될 인간 편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단번에 죽으신 것입니다(사 53:5-6). 이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음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19-20) 육체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은 육체적인 생명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의 영역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19절은 난해구로 한 해석을 따른다면 그리스도는 부활의 영으로 옥에 갇힌 영들에게 가셔서 그리스도 자신이 그 홍수의 집행자이며,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갇힌 영들은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자들입니다. 당시 의인이라 불리던 노아는 주님이 물로 행하실 심판을 예고하였고, 심판을 집행하셨던 주님은 장차 여자의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 외쳤을 것입니다.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21-22)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물로 심판을 받았지만 안에 있던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먼저 물속에 잠김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어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된 것을 의미합니다.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어 함께 부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참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인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적용: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말씀대로 참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세례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묵상하세요(엡 2:4-10).
"당신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미국의 한 신문에 이런 설문이 실렸다고 합니다. 이에 응답자들은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돈을 더 벌겠다는 물질적 희망에 대한 내용보다는 이러한 응답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래요." "그동안 못 해본 일들을 도전하고 싶어요." "안타까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겠어요."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께서 보이신 모습을 따라 살아가는 하루가 됩시다.
< 설 교 >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
벧전 3:18-22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고난을 잘 견디어 내도록 하기 위해 주님의 고난과 영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주님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이셨으나 인간들의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죄인같이 십자가를 지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주님을 살리시고 하늘에 오르도록 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히시고 무한한 영광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의인이 당하는 고난을 넉넉히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로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들도 이 세상이 주는 상 말고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며 죄가 없이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상을 생각하며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주님의 고난과 영광(18, 22) [2]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심(19-20) [3]순종한 자들을 세례를 통해 구원하심(21)입니다.
[1]맨 먼저 18절과 22절의 주님의 고난과 승리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8절에서는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 소개해 주고 있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한번 죽으셨고 의인으로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또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으며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죽으셨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한번 죽으셨다는 말은 히브리서 9장 26에 주님께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려 했다는 단번의 의미와 같은 뜻으로 구약시대에 매년 속죄일 마다 대 제사장에 의해 드려졌던 동물의 제사와 단 한번으로 제사를 끝내신 주님의 제사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번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죽으신 것입니다. 죄인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도 고통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자신의 죄는 전혀 없으시나 불의한 자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희생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것도 가치가 없는 불의한 자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죽으신 목적이 뚜렷합니다.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몸은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영으로는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메달아 죽게 했지만 죽게 한 것은 몸뿐이지 영은 아니었습니다. 영은 오직 하나님만이 살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2절에서는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 뒤에 누리시는 영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죽으신 주님을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살리시고 하늘에 오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하늘에 오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이란 가장 권세 있는 높은 자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께 천사들과 권세 있는 자들과 능력들이 다 순복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의 모든 영들이 다 주님께 복종하도록 큰 권세를 주셨으니 죄 없이 당하신 모든 고난을 다 참아내신 주님께 하나님께서 넉넉히 보상해주셨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모든 고난 후에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안겨 주실 것을 소망하며 고난을 잘 참아내라는 격려를 보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9절, 20절의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심 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9절은 해석이 어려운 말씀 중 하나입니다. 19절과 20절의 앞부분을 그대로 소개하자면 주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찾아가셔서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옥에 있는 영들이란 음부에 있는 영들, 즉 노아 시절 홍수의 경고를 노아로부터 듣고도 하나님의 경고를 믿지 않고 순종치 않았던 구원받지 못한 영들인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의 해석이 어렵다는 것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운명이 결정 지워지게 되므로 죽은 이후에는 구원받지 못한 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주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영들에게 찾아가셔서 선포하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타당한 해석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듣고 회개하도록 특별 기회를 다시 주기 위해 전도하셨다는 뜻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능한 해석이라면 주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실리심으로 다시 사시어 숭리하신 사실을 선포하신 것이라 풀어 봅니다. 더 이상 풀어보는 것은 오히려 원래의 뜻에서 더 멀어질 수 있을 것이므로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3]마지막으로 21절의 순종한 자들을 세례를 통해 구원하심 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 때의 홍수와 세례와 연관을 지으며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하였습니다. 세례를 구원의 표라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 10:1-2 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홍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 살아났던 사실을 세례와 연관을 지은 것을 보게 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라 한 것입니다. 갈라진 홍해 바다를 건너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는 구름 즉 물이 덮고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전히 물에 잠겨 있었던 모형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또 노아때의 홍수에서도 노아의 8식구가 탄 방주도 40주야 쏟아진 물로 위아래 옆이 다 덮인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5절을 보면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장사지내고 또 부활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 속에 온몸을 다 잠기게 하는 침수 세례를 시행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에서부터 시행해온 세례 형식이기도 하지만 침례의 의미는 세례를 통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함께 자신도 죽어 물 속에 옛 몸을 묻어버리고 물에서 올라옴으로 다시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상징인 것입니다. 세례의 모형이 온 몸이 물 속에 완전히 잠기듯 노아 식구를 태운 방주도 물로 온전히 잠겼다가 나온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 바다 속에 온전히 잠겼다가 나온 형식을 가지고 세례와 연관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물은 곧 세례요 세례는 구원의 표라고 했는데 물론 여기에서의 물이 세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믿고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구세주인 사실을 믿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막 16:16의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나 또 행전 2:38 의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물 속에 자기의 옛 몸과 옛 마음을 묻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물에서 올라오는 믿음에 따른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는 예식이 아니고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구약 율법에서는 정결 의식으로서 몸을 씻는 일이 행해졌으나 세례는 몸을 씻는 의식이 아니라 양심의 때를 벗겨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도록 하는 예식이라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죄 없으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으므로 그 구원의 길에 들어서서 어떤 고난도 굳건히 견디어 나가 최후의 예비 된 영광에 참예하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을 누릴 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을 소개해준 말씀이기도 합니다. 장차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영광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려면 오늘 본문 처음에 소개된 대로 주님께서 죄 없으신 분으로서 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대신 죽으셨으므로 옛 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길을 주님께서 준비해주시기를 에수님을 자기의 구세주로 믿는 자에게 물 속에 자신을 장사지내고 다시 태어나는 상징인 세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세례란 믿음이 없는 물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물에서 세례 받지 않은 믿음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란 믿음과 물이 합해진 것을 말합니다. 즉 믿음에 따른 행함을 물에서 행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믿기만 하고 세례를 받지 않은 것도 구원이 될 수 없으며 믿지도 않으면서 행함만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 했는데 믿고 성경에서 행하도록 한 것들을 행해야 한 것입니다. 행함이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두고 형식적인 어떤 화려한 제시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 하기를 원하는 자라 한다면 세상 누구의 의견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라 했으면 그 말씀을 믿고 세례 받아 죄 사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물 속에 장사 지내는 침례가 세례의 의미에 가장 적절한 성서적 방법이라고 믿으면 그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세례는 필요 없고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보장해줄 수 없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자는 말씀을 더 배우고 배운 말씀대로 실천해 나가야 헙니다. 또 배운 말씀대로 실천하는데 많은 고난이 있다하더라도 장차 내리실 영광을 마음에 두고 또 주님께서 당하셨던 고난을 마음에 늘 기억하며 모든 어려운 고난을 다 이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을 다 이겨내신 주님께 하나님께서 큰 영광으로 갚아주시듯 주님을 따르다가 당한 모든 고난을 끝까지 잘 참아낸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영광으로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첫째는 구원의 길에 바로 들어서고 둘째는 말씀을 열심히 배워 말씀에 따라서 살며 셋째는 말씀에 따라 사는 동안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다 잘 참아내시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영광을 다 받으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의 내용인 침례
벧전 3:18-22
기독교가 정체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원리를 무시하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만 교회에 도입하기에, 성경적이지 못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초대교회와 같이, 예배와 말씀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초대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설교와 예배로 돌아가자는 말과 같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을 2가지로 설명한다. (1) 말로 전한다. (2) 보이는 성례(침례, 성찬)를 통하여 전한다.
기독교의 거룩한 예식 성례에는, 침례와 성찬 2가지가 있다. 거룩한 예식인 성례가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례는 성경의 핵심내용,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침례는 복음 그 자체이다.
1.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죄인들을 위해서 단번에(하팍스, 아 + 파스 = 모든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한 방법) 죽으심에 있다. 특히 불의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 이유는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의 전기나 자서전을 읽어보면, 쌓은 공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접해 보면, 다른 유형의 자서전이나 전기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특색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은 죽기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죽음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은 다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의 고난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자연적인 죽음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놓았다. 그 죽음은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했다. 여기서 의인은 단수고, 불의한 자는 복수로 되어있다. 의인은 한 분, 예수님만 의인이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런데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해서 죽으셨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삼기 위해 죽으셨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은, 분명히 이런 목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 여기에서 인도(프로사고)는, 왕을 만나 뵈려고 오는 사람을, 왕 앞으로 인도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왕이 되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 육체는 (참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돌아가셨다. 잠시 기절한 것이 아니다.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케륏소).” 이 구절이 성경에서, 가장 난해 구절이라고 말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 전체적인 말씀과 조화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구절은, 연옥을 말하지 않는다. 연옥은 인도종교인 자이나교에서 들어왔다.
연옥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는 시점은, 면죄부 판매를 허용할 때였다. 그래서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공덕을 쌓는 행위로,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면서, 많은 돈을 거둬드렸다. 그렇지만 성경은 사후의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눅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성경은 사후의 세계에서 위치가 정해진 다음에는 결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음을 말한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옥에 있는 영들은, 20절에 ‘그들’이라고 잘 설명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다.
그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며,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죽었던 무리들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옥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니라, 약속대로 죽으시고 승리자가 되심을 선포하셨다.
18절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내가 불의한 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승리했다”면서, 지옥을 향해 선포하셨다는 말이다. 그때 옥에 갇힌 자들은, 땅을 치며 이를 갈며 슬픔이 넘쳐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이단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 구절을 들먹이면서 “영만 부활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는 아니고, ‘영’에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 내가 재림주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이 말은, 성령님에 의해서 살아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성령이라는 말이다.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고 부활했다.
(롬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2. 복음의 모형과 실체인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20下)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넘쳐나는 물, 넘쳐나는 홍수 속에서, 노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방주를 통해서 구원받았다. 방주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음과, 몇 가지 동질성이 있다. 방주는 예수님의 예표이고, 그림자이다. 실체는 예수님이다. (창6장)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1)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다(창6:14上).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노아가 방주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노아에게 먼저 말씀했다. 이처럼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다.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했고, 문을 닫았다. 그래서 밖에서는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방주 속은 안전했다. 홍수가 나서 아무리 범람하여도, 방주는 심판의 물 위에 떠 있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의 안전을 대변해 준다. 지옥불도 주 안에 있으면, 해칠 수 없다.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도록 하셨다(창6:14下).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였다. 고페르(집에 거한다) 나무와 역청(코페르, ר몸값, 속전)을 칠하라고 했다.
역청은 피와 같은 모습인데, 카파르(용서하다, 속죄하다)는 말에서 왔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한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게 만든다. 그래서 신자들을 미혹한다. 이단이 왜 위험한가? 사신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단은 교주를 신격화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이, 각 시대마다 구원자가 다르다는 말이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구원자를 세웠다는 말이다. 노아시대에는 노아, 모세시대에는 모세, 예수님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듯이, 말세에는 그 시대의 목자, 구원자, 중심인물이 따로 존재한다는 교리는 이단사상이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구원자를 찾고, 만나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3) 말씀을 믿고, 방주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방주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얼굴이 예뻐야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믿고 들어가면 된다. 어떤 씨를 받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은혜로 들어간다. 구원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방주를 준비하시고, 이 방주를 통해서 구원해 주심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방주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 들어가야 한다. 자기 발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구원의 영광스러운 사역 앞에, 스스로 응답하길 요구하신다. 홍수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받은 이 사건은, 오늘 우리가 구원받는 사실에 관한 아름다운 예표다. 노아시대에 물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다. 그런데 방주 속에 있던 노아와, 그 가족은 모두 살았다.
그는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모두 물 속에 들어갔지만, 방주 안에 있던 자들은 살았다. 똑똑하고, 착하고, 예쁘기에 구원받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믿고, 방주 속으로 들어갔기에 구원받았다.
3. 침례의 의미(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를 통해, 신령한 구원의 표인, 침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는 침례의 모형이라고 한다. 침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에 대한, 외부적인 증거요, 확인이다. 이제는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다.
그러면 여기서, 세례와 침례를 무엇이 맞는지, 살펴보자. 세례(ㅎ란티스모스, ‘ραντισμός)는 머리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며, 죄를 씻는다는 의미다. 죄를 씻는 개념은, 이란 종교 ‘미트라’교에서 왔다. 또 조로아스터교로 흘러가고, 인도로 들어가서, 나중에 천주교회의 세례가 된다.
그러나 침례(밮티스마, βάπτισμα)는 물속에, 몸이 완전히 잠긴다. 뜻은 ‘염색한다, 연합’이란 뜻이다. 침례와 세례가 똑같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뜻이 너무나도 다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도 죄가 있단 말이 된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고 하면, 그는 이단이다.
예수님께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그 이튿날 오시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선포하였다. ‘어린양’은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제물이다. 죄인들의 죄를 양에게 짊어지게 하여, 그 양을 죽였다. 요한은 예수님이 그 제물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렇게 제물이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공식적인 제물로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사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우리가 죄용서 받음은, 그냥 용서받음이 아니라, 속죄양 되신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해결되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주님과 연합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었다.
침례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물속에 들어가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언한다. 물속에서 다시 올라올 때,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었기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니 침례가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 복음을 확실히 몸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롬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침례의식은,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이며 부활의식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침례가 얼마나 복음을 잘 표현하는 예식인가? 성경은 침례를 가르치고,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셨다. 초대교회도 침례만을 베풀었다.
그런데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진리가 흐려지기 시작하여, 침례를 세례로 바꾸고,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들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사제의 권위 앞에 절대 복종하도록, 막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그래서 세례(영세)가 원죄를 없앤다고 가르친다.
(요3: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을 세례로 바꾼 후에, 유아 세례를 받음으로, 원죄가 제거되고, 성화 되는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한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유아 세례를 만들었다.
이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세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자,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1311년 라벤나 회의에 모인 로마교회 대표들은 세례만을 실시하고, 침례를 실시하면 사형하기로 결의하여, 많은 성도들을 핍박했다. 그 후부터는 세례만 실시되었다.
16C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이유로 세례를 고집했다. 그들을 도와주는 영주들이 세례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도 성경에는 침례로 되어있다고 하면서, 현실적인 이유로 세례를 계속했다. 아직도 세례를 실시하는 교회들이 많다.
믿고 침례를 받으면 구원받는 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였다면, 신앙을 침례로 표현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침례를 받았다(막1:4-5). 따라서 침례는 전에는 내가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만인에게 공포하는 선언이다.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구원자로 여겼으니, 잠시 십자가에서 내려가, 침례를 받고 올라오자고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없다.
침례식은 쉽게 말하면, 결혼식과 같다. 오늘날에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 있다. 결혼식을 꼭 해야만 부부는 아니다. 초라하게 해도 결혼식을 치렀어도, 호적에 올라가면 결혼이 성립된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분명히 회개하는 신앙고백이 없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 따라서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아세례를 인정한다는 말은,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침례가 구원과 연결된다면, 더욱 침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와 침례는 의미가 다르고, 성경이 침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셨을 때, 구속을 위한 길이 열렸기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간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구원받았음을 침례로, 신앙고백을 하고 선포할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음성이 있다.
(벧전3: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니라” 침례를 받으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주님께 복종한다. 얼마나 영광스런 모습인가? 영광의 주님이, 함께 함을 믿고, 고난을 이기자.
이처럼 구원받은 우리는 영생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며 행복하게 살게 됨을 상징한다. 침례는 신비롭다. 죽고 사는 경험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침례를 통해, 병든 자들이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침례식을 행해도, 감기도 들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불꽃이라는 책을 읽어 보라. 많은 사람이 침례를 통해, 변화되었다. 침례가 중요하기에 초대교회는 생명을 걸었을까? 그냥 믿기만 하면 되지,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침례를 받았는가? 베드로전서는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하는 책이다. 침례를 통해 주님과 연합함을 느껴보자!
결론이다. 요즘 옛날에 결혼식을 잘 못해서, 결혼도 앙코르 결혼식을 행하는 분이 얼마나 많은가!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세례를 행했거나, 침례를 받았다면, 다시 행해 보라.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주님과 함께 연합되었다는 감격을 느끼는, 귀한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승리
베드로전서 3:18-20 / 조정의 목사
가장 어려운 구절
마틴루터는 이 본문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상한 구절이며 신약성경의 그 어떤 구절보다 더 모호한 구절이다 나는 사도 베드로가 쓴 이 구절의 의미를 아직도 정확히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정말 신약 성경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구절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 이 본문이 어려운지 한 번 우리가 읽은 본문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18절은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19절을 보십시오. “그가(그리스도)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옥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 옥에 갇힌 영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무엇을 선포하셨을까요? 20절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들(옥에 갇힌 영들을 가리킵니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죽으시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신 후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는데 그들이 수천년전 노아의 때 불순종 했던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고하는 주석마다 수많은 견해와 해석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고심 끝에 내린 결론 또한 다양합니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도 이 본문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해결 방법
이렇게 어려운 구절을 만났을 때 우리는 몇가지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 구절을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본문을 읽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며 같은 본문으로 설교하는 분의 설교를 찾아 듣게 되었는데 그분은 “물에서 사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이 본문을 다루었고 핵심내용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간단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18절만 이야기하고 19-20절은 대충 얼버무리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억지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제가 들었던 설교 중 또다른 설교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육체는 무덤에, 영은 하나님 곁으로 가셨고 혼이 옥으로 내려 갔다고 말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선택한 이 방법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건너 뛰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해석하지도 않으며 얼버무리거나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 가장 적합한 해석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 전하는 것입니다.
문 맥
올바른 해석을 위해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문맥입니다. 이 어려운 난제를 풀어가기 쉽게 도와주는 것은 문맥입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이야기 해오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고난과 핍박, 비방을 당할지라도 선을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은 그 가운데 선을 행함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몇명은 하나님께 돌아올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결국 그들의 비방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이전 16-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8-20절 역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도의 본이 되셨는지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앞에서 했던 가르침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보여주시는지 비교해가면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해나가는 것이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하였고 본문을통하여그리스도께서고난가운데선을행하심으로어떤승리를얻으셨는지,그를핍박하고비방했던무리들에게어떤부끄러움을가져다주셨는지살펴보기를원합니다.그렇게함으로써세상의핍박과비방속에살아가는우리가계속해서인내하며선을행할수있게하는힘,그리스도께서먼저보여주신것처럼우리에게보장된승리가있다는사실을일깨워주기를원합니다.
선을 행하심
베드로는 계속해서 선을 행하라고 권면하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2장 20절부터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선을 행하는 것에서 본을 보이셨는지 보십시오. 18절입니다. 그분은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죽으사” 대신 “고난을 받으사”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받으셨습니다. 가장 초라하고 수치스러우며 고통스러운 사형틀인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갖은 핍박과 모욕과 비방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선을 행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죄가 있어서 당한 고난이 아니라 죄인이 받을 고난을 대신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 7-8).
베드로는 또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의 죽음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축복이며 최고의 선행입니다. 어떤 돈으로도 이 죄사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위치에 올라도 안 됩니다. 아무리 많은 권력을 가졌어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행을 해도 안 됩니다. 선행을 한다고 해도 안 됩니다.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의 빚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죽어서 망하는 “사망”만이 죄가 요구하는 값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값을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단번에 갚아주셨습니다.
히브리서는 더 이상의 재물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다”(히 9:28)고 말합니다. “사망”으로만 해결되는 죄의 문제를 대신 죽으심으로 단번에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일이 바로 그분이 보여주신 최고의 선행입니다.
선행의 목적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계속해서 선을 행하라고 하면서 그 목적에 대해 반복해서 말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선행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가 베푸신 최고의 선행의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는(목적)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값을 해결해주고 나서 이제 알아서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용서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신 이유, 선행을 베푸신 이유는 바로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앞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고 죽으심으로 길을 잃은 양과 같던 자들이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말하였습니다(벧전 2:25).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선행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 시키신 것입니다. 죄인으로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없었던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선을 열심히 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유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선행의 결과: 선을 행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
베드로는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칭찬받을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습니다(2:19). 또한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며(2:21)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 말하였습니다(1:7). 여기 우리의 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보상을 얻으셨는지 보십시오. 어떤 승리를 얻으셨는지 보십시오. 18절 마지막에 예수님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한 영의 죽음도 맛보셨습니다. 영의 죽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분리를 말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말합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리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죄인의 상태에 대해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라고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엡 2:1). 그들은 육신이 살아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즉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죽으셨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까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그리스도의 고백이 기억나십니까? 이것은 단지 왜 나를 고통 중에 돕지 않으시냐고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견디다 못해 이 일을 왜 허락 하셨냐고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어느 시점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영적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마지막에 다시 예수님은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몸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의 영은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를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의 영혼을 죽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를 위해 의인으로서 육체의 죽음과 영적 죽음을 맛보셨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승리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죄를 이기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도 이기셨습니다. 죽음이 그분을 묶어둘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영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을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그분의 본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일한 승리가 보장되어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에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5-58)
선행의 결과: 비방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베드로는 선을 행해도 고난을 받을 수 있음을 여러 번 이야기 하였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며 나에게 승리가 보장되어있고, 또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이 비방하는 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역사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이 끝까지 선을 거절한 자들, 비방하는 자들에게 부끄러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보십시오. 그분은 죄와 사망을 이기셨을뿐만 아니라 비방하는 원수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19절에 나오는 옥에 갇힌 영들에게 말입니다. 20절에 보면 그들은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며 잘 들어보십시오.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합당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몸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을 때 그리스도는 성경 다른 곳에서 “무저갱” 혹은 “지옥” 이라고 불리는 곳에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범죄한 천사들이 갇혀있었는데 베드로후서 2장 4절을 보면 이 장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누가복음 8장 31절에 “군대”라 불리는 귀신들이 간구했던 것도 바로 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서 1장 6절에서도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못”이라 불리는 영원한 형벌이 주어지기 전 임시적으로 범죄한 천사들이 갇혀 있는 장소가 바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옥”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들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놓인 귀신들이 있습니다(눅 8장), 또 다른 귀신은 바로 갇힌 귀신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여기 “옥”이라는 곳에 갇혔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귀신들을 이렇게 가두셨습니다. 물론 모든 귀신들이 불순종하고 있고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넘어서는 악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을 하십니다. 20절에 바로 그러한 경우가 등장합니다. 노아의 때 범죄한 천사들입니다.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었으나 범죄하여 사람의 딸들을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아내로 삼았고 온땅을 하나님 앞에 부패하고 포악하게 만들었습니다(창 6:11). 8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물로 쓸어버려야 할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후회하실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항하는 범죄한 천사들에게 있어서 노아의 때는 승리의 때였을 것입니다. 8명을 제외한 모두를 죽여야 할 정도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단한 타격을 입힌 것입니다. 귀신들은 인류를 장악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항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것처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그 무리들은 “불순종의 자식들”을 통해 세상풍조를 만들어내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욕심과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게 만듭니다(엡 2:2-3).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심판을 유보하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방뿐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란과 불순종 그리고 비방은 그 오래 참고 기다렸던 기간 동안 계속해서 지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옥에 가두셨고 범죄한 인간들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시고 그 옥에 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에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노아 때까지 그리고 예수님 때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항했던 그들의 모든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갈 것을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사망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의 세력을 이기셨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비방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 비방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과 비방에 대해 두려워함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을 때 그의 대적들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선포하신 것처럼, 우리를 비방했던 자들에게 하나님이 동일하게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방에 대한 대가인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결론: 나그네와 행인된 자들이여 힘을 내라!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말합니다. 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편지 처음부터 소아시아 성도들을 행인과 나그네라고 불렀습니다. 수가 적은 무리들입니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의 수가 많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많을 수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 선을 행하는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이 세상에서 선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노아의 때 오직 8명만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32절에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두려워 마십시오. 삶에서 당하는 고난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십시오. 그분의 승리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어떻게 선을 베푸셨는지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어떤 복을 누리게 되었는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어떻게 선포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계속해서 이 승리의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고난 속에서 어떻게 일합니까?
벧전 3:18-22 / 박조준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고난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일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해석하던 어떤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사도 베드로가 자기의 글이 이렇게 많은 신학자들과 주석자들에게 번민을 야기시킬 줄로 생각했다면 이 글을 아예 쓰지 않았을 텐데.” 그만큼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에는 아주 해석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할 일을 말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미 본 대로 고난의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맞이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모본이 되셨을 뿐 아니라 고난 속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도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오늘 18-19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들의 활동과 그들이 쌓은 공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접해 보면 다른 사람들의 자서전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한 가지 특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많은 부분이 주님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한 주간의 사역을 초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주님이 그의 생애 속에서 하신 일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모든 행적이 십자가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사역의 초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음을 떠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주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애의 초점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많은 부분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기사에 할애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든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들을 중요한 사건으로 부각시킬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시키는 구속의 사건을 완성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세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분명히 목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자연사도, 사고사도 아닙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분명한 목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 놓으신 것은 대속의 제물로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말은 단수로 되어 있고 ‘불의한 자’라는 말은 복수로, 그러니까 ‘불의한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은 단 한 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로지 의인이십니다. 그리고 그밖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 23)라고 말했습니다. 의인은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
사도행전의 기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둘러싸고 그리스도를 변호하면서 외치는 음성을 들어보세요. 사도행전 3장 14-15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고 의로운 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이렇게 말하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거룩하고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많은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불의한 자들을 그 불의로부터 해방하셔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은 이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사도 베드로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인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본래 헬라 시대의 왕의 비서의 역할을 강조하던 단어입니다. 옛날 헬라 시대의 왕들은 비서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 비서 가운데도 수석 비서가 왕을 알현하러 오는 사람들을 왕 앞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왕을 만나 뵙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비서가 했습니다. 그 비서의 역할이 바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만왕의 왕이신 그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 앞으로 전혀 인도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망의 어둠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음부에서의 하신 일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세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말씀은 성경의 난해 구절에 속합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이 죽은 후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죽은 후에 사람들이 다시 복음 전파를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어떤 한 구절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성경 전체의 계시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죽음 다음에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제 2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다른 명백한 구절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도 전혀 명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리한 상상을 버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26절 말씀을 보세요.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속에 있었고 부자는 뜨거운 불 속에서 괴로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위치가 정해진 다음에는 절대로 그 위치가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 제 2의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이 말씀이 분명하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주신 말씀에서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무리한 해석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주신 말씀 20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말하고 있지만 19절에서의 “영들”이란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다시 말하면 “그들”은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그리고 노아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에 이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죽었던 사람들, 그들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말하면 성령을 통하여 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불순종하고 죽은 그들에게 전파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파”라고 하는 말이 문제입니다. 이 “전파”를 우리는 흔히 생각하는 ‘복음 전파’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복음 전파’를 의미하는 단어 ‘유앙겔리조’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전파’라는 말은 ‘선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전파는 전도를 해서 그들이 다시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을 지닌 단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선포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끈질지게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면서 노아를 통해 120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죽었던 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약속대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을 따라 죽으셨고 이제 승리자가 되셨음을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선포인 것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시사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19절 말씀은 단순히 주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지옥을 향해서 선포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다가 음부의 영혼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영으로는”이라는 말이 이견이 많은 단어중 하나입니다. 많은 경건한 학자들은 이 구절을 그대로 ‘성령에 의해서’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서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하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해석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도 맞는 것입니다. 가령 로마서 8장 11절을 보세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셔서 승리를 선포하시고 그 승리를 입증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이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산 소망이 되었다는 이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1장 3절에서 이미 생각했습니다만,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났으며 산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가 보여주는 이 중대한 주제인 ‘고난 속에서의 소망’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소망과 내세를 향한 놀라운 소망을 우리에게 안겨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승리를 선포하셨고 그 승리를 입증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통해 하신 일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이 승리를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말씀을 보세요.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를 향해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천사들과 권세자들과 능력들, 모든 영들의 경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또 영혼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대적하던 모든 무리들, 악한 영들까지도 그리스도 앞에 순복할 수밖에 없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자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셔서 영화롭게 다시 높임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위치에 서게 되신 것은 고난을 받아들이시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함께 소개되고 있는 것이 노아의 사역입니다. 왜 갑자기 여기 노아가 등장할까요? 그 당시 노아는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 이전의 족장들 중에 가장 존경스러운 족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던 고난이 마치 노아 시대의 고난과 비슷하게 인식이 되어서였습니다.
노아 시대에 도덕적인 부패가 만연했던 것처럼 1세기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는 그때도 그랬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숱한 고난을 받았는데 그 고난이 노아 시대의 고난을 연상시켜 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록하다가 노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종말론적 부패와 배도 현상을 말할 때는 언제나 노아 시대를 떠올릴 정도로 노아는 어려운 시대에 살았습니다. 노아야말로 그 시대의 마지막에 살고 있었습니다. 노아는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의 인물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노아는 주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고난 속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이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노아처럼 주님의 의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복음을 전파해서 겨우 여덟 명을 구원시켰습니다. 이것은 노아의 전도가 형편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강퍅했으면 이렇게 복음 앞에 응답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한문자는 상형문자 아닙니까? 배선(船)자를 보세요. 배 ‘주(舟)’와 여덟 ‘팔(八)’ 그리고 입 ‘구(口)’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글자를 만들 때 중동 지방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방주를 만들어 여덟 명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노아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그가 어려운 때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여 여덟 명의 영혼을 구원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고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사역은 장차 성취된 구원 사역의 예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1절을 보세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홍수 속에서 구원을 받은 사실에 관한 영광스러운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에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했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내야 했습니까? 착한 일을 해야 했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방주를 준비하시고 이 방주를 통해서 구원을 허락해 주시는 것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방주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나 스스로 방주에 들어가야 합니다. 자기 발로 들어가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이 놀라운 구원 사건에 대한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표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의 정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연합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사실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절 이하를 보세요. 여기에서 세례의 의의를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노아 시대에 물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방주 속에 있던 노아와 그 가족은 살았습니다. 그는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했습니다.
이 말은 의식(儀式) 자체가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는 성례전은 우리 안에 이루어진 영광스러운 사실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의 선한 양심을 하나님 앞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에 살았던 노아. 그는 이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들을 구원했습니다. 그의 구원은 우리의 위대한 구원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고난에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대선배 노아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에 대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러므로 우리도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 고난에서 결코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노아는 자기까지 포함해서 겨우 여덟 명을 구원했지만 그의 사역이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노아는 하나나님께서 그에게 부탁하신 사역 앞에 성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셔서 장사지낸 바 되셨을 때 제자들은 주님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습니다.
셋째로, 세상에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노아는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의인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아와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는 거룩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 가득 찬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의인들만이 이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어 이 시대를 향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넷째로, 최후의 승리를 믿어야 합니다.
노아는 승리자입니다. 노아는 불순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지만 마침내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영혼들이, 그리고 모든 권세들이 다 주님 앞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삶의 고난에 찬 상황과 역사가 아무리 깊고 어두움을 던진다고 할지라도 고난을 대비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삼아 무장해야 합니다. 각자가 당하는 고난의 색깔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거나 너무 의식하지 말고 대비해야 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이 복음을 붙들고 이 악한 세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거룩한 특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이 세상을 행해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영광
벧전 3:18-22 / 한마음교회
우리는 고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성경은 말세가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기가 매우 고통스러운 때가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딤후 3:1-5).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참으로 고통이 많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는 좌절하는 ‘좌절형’입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역경을 만나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소극적이고 비생산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의 인생관은 비관적이고 염세적입니다.
둘째는 역경을 피해가는 ‘도피형'입니다. 일단 위기만 벗어나고 보자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냉소적이고 방관적인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합니다.
셋째는 역경에 당당히 맞서는 '도전형'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창조적이고 진취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앞에서 좌절하거나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 도전하는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역경 속에 꽃을 피우는 역사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고난의 시대에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보면 고난의 삶의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먼저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이 무엇이며, 그리스도께 받으신 영광이 어떠합니까?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과 영광이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고난의 시대에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지 삶의 지혜를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한번 죽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자연사도, 사고사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놓으신 것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물로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말은 단수로 되어 있고, ‘불의한 자’라는 말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단 한 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홀로 의인이십니다. 그리고 그밖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들입니다. 예수님 외에 모든 인간은 다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거룩하고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많은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인도한다’는 말은 ‘데리고 간다’는 뜻으로 비서실장이 왕을 알현하러 오는 사람을 왕 앞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롬 5:2; 엡 2:18, 3: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만왕의 왕이신 그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 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여기서 휘장이라는 말은 성전에 사용된 말로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을 가리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염소나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을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8)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상에 있는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죄 많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덮어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나라의 대통령을 알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현하는 일을 얼마나 어렵습니까? 옛날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는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의 예배는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시는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서 언제든지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 교회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연옥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심판 받아 죽은 영들을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후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의 부모님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결혼하던 해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에서 캠퍼스 선교 일을 감당하느라고 전도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장례를 지낼 때에 지옥으로 가실 어머니를 생각하니까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나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고난을 받고, 선행을 하는 길이 있다면, 내가 이 땅에서 어머니의 영혼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길이 있다면 무슨 일이라고 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옥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카톨릭의 교리가 좋아보였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연옥의 교리를 만들어내고,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돈을 주고 사면 연옥에 있는 가족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근거로 죽은 후에 사람들이 다시 복음 전파를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어떤 한 구절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 전체의 계시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그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구절 외에 우리가 죽은 다음에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제 2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다른 명백한 구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 주신 말씀에서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20절에서 보십시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 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그들은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그리고 노아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에 이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죽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불순종하고 죽은 그들에게 전파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전파했다’는 말에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전파했는가?’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주님에서 지옥에 가 있는 영들에게 무엇을 전파했을까요? 복음을 전파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내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모든 사단의 권세를 멸했으니 지옥에 있는 너희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선포했을까요? 둘 다 문법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성경의 원리를 볼 때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하게 전파했다는 동사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120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죽은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승리자가 되셨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선포는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의 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는 이 땅에 살아 있는 기간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영접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영원한 심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8c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하여 살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2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죽음과 멸망할 운명에서 구원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죽음에서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받았고,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의 중요한 주제입니다(벧전 1:3).
넷째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한 걸음 더 나 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이 승리를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말씀을 보세요.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를 향해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돌 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천사들과 권세자들과 능력들, 모든 영들의 경배를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의 자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옥에 있는 영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II.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일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죽으사라는 말에 번호가 붙어 있지요? 성경 아래 보면 어떤 사본에는 “고난 받으사”라고 되어 있다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과 당시 고난 받는 성도들의 고난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고, 지옥에 가셔서 심판을 선포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지금도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고 계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값지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함께 소개되고 있는 것이 노아의 사역입니다. 왜 갑자기 여기 노아가 등장할까요?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노아는 아브라함 이전의 족장들 중에 가장 존경스러운 족장이었습니다. 노아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말세였습니다. 도덕적인 부패가 만연하여, 모든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노아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그것도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면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노아는 많은 고난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면서 노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이 당하던 시대가 노아의 시대와 비슷하게 인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힘든 시대에 노아는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고,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겨우 여덟 명만 구원 받았습니다. 이것은 노아의 전도가 형편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음을 말해 줍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강퍅했으면 120년 동안 전도했는데 8명 외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을까요? 한문에 배선(船)자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노아의 방주를 상징해주고 있습니다. 선자는 배 주(舟)와 여덟 팔(八)자에 입 구(口)자로 만들어졌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홍수심판 때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여덟 명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노아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그가 어려운 때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여 여덟 명의 영혼을 구원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사역은 장차 성취된 구원 사역의 예표가 된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에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방주이십니다. 이 방주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방주를 예비 하시고, 이 방주를 통해서 구원을 허락해 주시는 것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방주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노아의 방주는 이 놀라운 구원 사건에 대한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또 21a절을 보십시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표로 우리는 물세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세례라는 말은 물속에 잠기다는 뜻입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심판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속에 잠겨서 죽었습니다. 다만 여덟 명의 노아의 가족들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잠기는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상징합니다. 또 물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 가운데 살아난 것을 상징합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 안에서 살아남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홍수심판에서의 물은 세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물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방주는 우리의 구원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고난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대선배 노아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에 대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러므로 우리도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 고난에서 결코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지난 강의에서 배운 것처럼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4장에서 더욱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때 더 깊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둘째로,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노아는 자기까지 포함해서 겨우 여덟 명을 구원했지만 그의 사역이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전도했지만 열매를 맺은 것은 아들 세 명과 며느리 3명뿐이었습니다. 롯은 사위에게도 전도를 못했지 않습니까? 롯의 사위들은 심판이 있을 것을 전했을 때 농담으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며느리들은 순종하여 방주로 들어왔습니다. 노아의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탁하신 사역 앞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노아처럼 방주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미 구원의 방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원의 방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사람들을 초청하면 됩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이 초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이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눅 17:26,27)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내다보시고 주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 점점 더 무관심해지고 있습니다. 무관심에서 지나 이제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전도가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각 선교단체마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가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습니다. 인내함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구원의 방주 안으로 초청하고 호소해야 한다. 내년에는 전도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봄학기에는 캠퍼스 전도에 힘쓰고, 가을학기에는 지역전도에 힘쓰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선교라는 단어에 아주 익숙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이름도 선교교회입니다. 그런데 선교는 국내선교가 있고, 해외선교가 있습니다. 국내선교는 캠퍼스 선교와 지역 선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전도를 의미합니다. 해외선교는 선교사님들이 하지만 국내 선교는 우리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해외선교는 국내선교의 열매로 이루어지는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국내선교, 전도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외선교를 지원할 수 있습니까? 성도들이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생명력을 잃은 교회입니다. 전도의 사명을 잃은 교회는 맛 잃은 소금과 같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노아와 같이 전도의 결과에 매이지 않고, 힘써 복음을 전파하는 한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장막터를 넓히고, 사랑의 휘장을 넓게 펴고, 기도의 밧줄을 길게 하고, 말씀의 말뚝을 견고히 박을 때 하나님께서 수많은 영혼들을 보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셋째로, 세상에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1b 절을 보십시오.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다시 말해서 세례는 단순히 우리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에서 깨끗해지기를 간구하고, 그렇게 살기를 약속드리는 것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선한 양심의 응답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는 우리 안에 이루어진 영광스러운 사실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이 깨끗함을 받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히 9:14;10:22). 그리고 선한 양심을 따라 살며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그 시대에 노아는 선한 양심을 좇아 의롭게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신앙 양심을 가리킵니다. 노아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매달리는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는 거룩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 가득 찬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서 구별된 의인들만이 이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어 이 시대를 향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넷째로, 최후의 승리를 믿어야 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는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창 6:7). 노아가 높은 산에서 항공모함과 같이 큰 배를 만들었을 때에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하게 생각했겠습니까? 오늘날 같으면 인터넷에 대서특필되며, 정말 웃기는 할아버지로 알려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조목조목 논증하고, 조롱하고, 나중에는 무관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 만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홍수심판이 임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노아는 구원을 받고, 그를 조롱하던 세상 사람들은 홍수로 멸망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지만 마침내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영혼들이, 모든 권세들이 다 주님 앞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고난에 찬 상황이 힘들더라도 최후 승리를 믿고, 인내함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 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 죄가 사해졌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승천하심으로 만왕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방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마지막 고통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감당해야 합니다. 결과에 매지이 말고 믿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특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며 세상을 향해서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최후의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을 믿습니다.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벧전 3:18-22 / 송용조 목사
베드로전서 3:18-22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에 생각해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역을 말해 줍니다. 의(義)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7)는 말씀에 이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선한 일을 함으로 고난을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언제나 고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일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을 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격려를 받고 소망을 가지며 선한 일에 끝까지 헌신할 수 있기 위하여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고난
사도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의(義)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18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義)를 위하여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그리스도께서 의(義)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를 믿는 우리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을 각오를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3:17과 4:1 사이에 있는 18-22절 말씀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고난받을 각오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의(義)의 고난을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義)를 위하여 고난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가 받으신 고난을 생각해 보면 그 결과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8-22을 읽을 때, 이 말씀은 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도록 돕고 있다는 요지를 놓치면 안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18-22절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고자 하는 믿음으로 우리를 무장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놓치게 되면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 때문에 본문이 의도하는 유익한 교훈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을 가정과 직장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지 아니한 시기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도 지역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믿음을 지켜야 하는 곳들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70여 개 나라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곳은 드물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고난 받아야 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고난받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스티븐 닐(Stephen Neil)은 그의 「기독교 선교역사」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첫 3세기 동안 교회는 강력한 불길처럼 퍼져나갔는데, 그 무렵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조만간 자기 목숨을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 믿고 복 받으라고 전도하지만,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하는 형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재산과 직장과 가정과 목숨까지 잃어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미움 받고 박해받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고 정상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4:9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점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신랄하고 증오에 찬 경멸적 비판의 분위기가 조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베드로전서 수신자들이 살았던 당시의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상황이 바뀔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2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이 닥쳐올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4:13)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된 우리가 이 나그네 된 세상에서 사는 동안 고난받을 것을 내다보시고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사람들이랴 (마 10:25)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이유
오늘 본문(벧전 3:18-22)에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서 전체에서 베드로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 받을 마음의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 받을 때에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몇 가지를 말해줍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육체로 계실 때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는 그의 고난의 증인들입니다. 히브리서 13:12-1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그를 따르는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수(죄, 사망, 사단)를 이기시고, 우리를 안전하게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하고, 많은 것을 손해 보아야 하는데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인간에게 가장 필요할 것은 이 땅 위에서 평안하게 살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큰 필요는 죄를 용서받는 것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어 하나님 앞에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죄 문제 곧 하나님과의 분리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땅 위에 아무리 오래 살고 편하게 살아도 지옥에서 영원히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오래 사는 것과 편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생의 행복과 비교할 때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아무리 오래 살고 편히 산다할지라도 지옥 영벌에 들어간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하여 이루신 것을 베드로전서 3:18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죄와 불의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끊어놓는 가장 무서운 큰 원수입니다(사 59:2 참조). 만일 나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와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속죄와 화목을 성취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나는 내 죄 때문에 정죄와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용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죽으셔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나를 위하여 내가 받아야 할 진노와 형벌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최종적이며 충족한 것입니다. 그는 다른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단번에 그를 믿을 모든 사람의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고 하셨습니다. 나의 죄값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단번에 다 치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인인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런 비참하고 절망적인 죄인인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순교자들과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우리의 원수인 죄는 패배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전하게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화목으로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삶은 그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이 어떻게 고난 가운데서 우리를 도와줍니까? 고난 가운데서 마귀의 무서운 유혹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다 대신 받으셨고, 우리를 안전하게 하나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거나, 우리를 대적하시는 표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은 사랑의 징계이거나, 믿음의 시련이거나, 의를 위한 고난인 것입니다.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18-20). 19-20절은 신약 성경 중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해석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두 해석은 받아들여도 교리 상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노아 시대에 노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셨는데, 그 예언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 죽어 옥에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전파하신 것이 아니고, 노아의 때에 영으로 전파하셨다는 것이니 교리 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본문의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한 해석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어거스틴을 위시하여 많은 정통 학자들이 선호하는 해석이니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인성, 人性)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성령)으로는 살리심(부활)을 받으셨으니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이 땅 위에 뿐만 아니라, 하늘과, 악한 영들과 믿지 않다가 죽은 자들의 영들이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갇혀 있는 곳에까지 선포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는 난점은 왜 노아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에게만 전파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처럼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복으로 알고,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인간의 생각대로 욕심대로 살면서 노아를 조롱하고 핍박하다가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된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두 번째 해석이 무난해 보입니다.
이 본문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시기 전에 영으로 지옥에 또는 음부에 가셔서 전파하셨다든지, 생전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든지, 구약 시대 성도들을 음부에서 낙원으로 옮기기 위해 가셨다는 등등의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죽은 후에도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해석을 이 본문에서 끌어내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요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기 옥 은 노아 시대 활동했던 악한 영들이 갇혀있는 곳으로 보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들의 파멸을 알려주기 위해 가셨다는 해석도 본문과 자연스럽게 조화되지 않는 무리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노아 때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든지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자들은 소수이며, 진리를 믿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어 보입니다. 우리는 비록 소수에 속하였다 하더라도 다수의 불신자들과 믿는다는 이름만 가진 형식적인 신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노아에게 속한 자는 겨우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물로 임했을 때에 노아와 그에게 속한 자들은 구원을 얻고, 조롱하면서 잘 먹고 편히 살던 자들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으며, 의를 위한 고난에 참예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노아 시대는 방주에 들어가야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노아의 신앙과 그 고난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으로 갑옷을 삼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어떤 고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의 것이 된 나를 소유하시고 내 안에 사시며 나를 통하여 구원 사역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참예해야 그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벧전 3:22)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서도 굳게 설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굳게 서서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어떤 고난도 기꺼이 받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복된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