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2 사무 12,1-17; 마르 4,35-41 / 연중 제3주간 토요일; 2024.1.27.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으로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부하 장수의 아내를 범한 다윗에게 나탄 예언자를 보내어 회개시키신 이야기가 나오고, 복음에서는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다가 돌풍을 만나 배가 가라앉을 뻔했던 아찔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바람과 호수를 잠재우는 기적을 일으키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분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신 그 기적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나병이나 중풍, 열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나 소경, 귀머거리와 벙어리, 절름발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 등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 주신 치유 기적은 대표적입니다. 병든 사람들은 비단 그 질병 때문에 신체적인 고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다인들이 질병의 원인을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낙인까지 찍혀서 정신적인 고통에도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병을 고쳐 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질병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을 기대하셨고, 병이 낫게 되면 그의 믿음이 그를 낫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어 주신 구마 기적도 그 마귀가 더러운 영으로서 그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아 죽음으로 몰아넣곤 하였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 당사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또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도 일으키셨고, 당신의 가르침을 며칠째 듣던 군중이 들판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에는 단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으로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신 기적도 일으키셨는데, 이를 목격한 제자들이나 군중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타볼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시고 보여주신 거룩한 변모 사건도 특별한 기적으로 꼽을 수 있고, 호수 위에서 풍랑을 만나서 위험에 처한 제자들을 구하러 물 위를 걸으신 기적도 특기할 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기적도 이와 유사한 기적입니다. 거센 돌풍이 일어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자 제자들은 겁을 잔뜩 집어 먹었지만,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고 분부하시니 바람이 멎고 조용해진 기적입니다. 공포에 사로잡혀 쩔쩔매던 제자들에게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고 야단 치셨습니다. 이는 돌풍이 일어 배에 물이 가득 차서 가라앉을 지경이 된 위기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발휘하신 힘은 하느님께 향한 믿음임을 알 수 있고, 이 믿음의 힘은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도 발휘할 수 있다고 기대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시절에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많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무릇 기적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복음서들에 기록된 기적들 역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일으키실 수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는 이 기적 사건을 전하는 보도들을 통하여 그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굳게 가진다고 해도 우리가 스스로 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숱한 기적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힘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자유에 속한 영역이요 영혼의 일이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우리들 영혼에 일으키시는 기적입니다. 믿음이 생기면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과 연결되어서 그분의 힘을 얻습니다. 생기를 얻은 영혼이 바로 우리 구원의 상태입니다. 은총의 지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은총의 지위를 상실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다윗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부하의 아내를 취한 다윗에게 하느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보내어 부드럽게 설득하셨습니다. 암양 한 마리를 키우는 가난한 이의 그 양을 이미 양과 소를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가 빼앗았다는 비유의 말씀(2사무 12,1-4)으로 다윗의 죄를 깨우쳐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왕으로까지 칭송받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의 죄를 일깨워주시자마자 막바로 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무릎을 꿇고 참회할 줄 알았던 믿음의 인물이라는 데 있습니다. 임금이 신하인 나탄의 고언에 대해 하느님의 꾸짖음으로 알아듣고 회개한 일도 기적적인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도 하느님 나라의 역사에, 그리고 인류 구원에 필요하다면 하느님께서는 얼마든지 믿음을 일깨워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기적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이들은 죄를 멀리하고 하느님께 믿음을 지닌 이들일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기적을 알아보고 기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죄악이 거센 돌풍처럼 기승을 부리는 역사의 현실에서도 불신의 그 바람을 잠재우실 수 있는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된 이 상황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여러 비유 이야기로 가르치신 후에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거듭되는 가르침으로 피곤해지신 예수님이야 출렁이는 배 안에서도 태연하게 주무실 수 있었다고 하겠지만, 비유의 가르침을 군중의 맨 앞에서 듣고도 도무지 깨달음이 없었던 제자들로서는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하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만 하면 거센 돌풍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풍 같은 자연현상을 가라앉히시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으나 제자들의 마음 안을 들뜨게 하고 있던 극심한 불신의 바람을 가라앉히시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호수에게 명령하신 직후에 제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무릇 비유란 보이지는 않지만 현세를 움직이고 있는 신비요 진리인 하느님 나라를 보이는 사물과 사태에 빗대어 설명하는 화법입니다. 그 모든 비유에서 결론은 알아들을 귀가 필요하다는 것이요, 그 귀는 마음의 귀인 것이며, 깨달음이기도 하고 단연코 믿음입니다. 다윗에게 유혹이 찾아 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보고 계심을 깨닫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감히 그런 죄악을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며,더군다나 부하 장수 우리야를 죽여서라도 죄를 감추려는 더 큰 유혹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능력이나 기도로써는 거센 돌풍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겠지만,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달리 말하면 그분을 통하여 기도를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는 믿음을 지녀야 했습니다. 모든 기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하고 바치는 전례적 기도의 기본이 이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위기들, 우리를 가로막는 도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힘만 믿지 말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믿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귀감이 되고 있는 이들은 바로 사도들입니다. 성령을 받아 사도가 된 열두 제자들도 여러 기적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신자들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켜서 나눔과 섬김의 공동생활로 놀라운 복음화 기적을 일으켰으며, 끝내 로마의 박해를 종식시켰습니다. 특히 사도 바오로는 기성 사도들이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주로 복음을 전한 것과 달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더한 환난과 고생을 감수하며 드넓은 로마제국 강역 안에 두루 복음을 전하였으며, 마침내 수도 로마에 가서 치명함으로써 결국 로마 복음화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바로, 돌풍을 잠재우는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께서 바오로를 비롯한 당신 제자들을 사도로 변화시키는 믿음의 기적도 일으키신 것이라 할 것입니다.
덧붙여, 사도 바오로가 써 보낸 여러 통의 편지들 중에서 자신의 선교 활동의 고충을 토로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대목을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이 편지는 박해와 우상숭배라는 광풍의 한복판에서 에페소의 차가운 돌감옥에 갇힌 채 선교 여정에서 가장 고생스럽게 복음을 전했던 코린토의 공동체 교우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겪은 환난을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 힘겹게 짓눌린 나머지 살아날 가망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1, 8-9).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4,8-9).
“(기성 사도들보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11,23-28).
교우 여러분!
자신의 속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바오로가 모처럼 자신의 적나라한 믿음을 토로한 이러한 고백의 글을 읽노라면, 마치 돌풍으로 인해 가라앉을 뻔한 위기의 뱃속에서 바람과 호수를 향해서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고 꾸짖으시고, 제자들을 향해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야단치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겹쳐지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