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ener Opernball 2020,
Balleröffnung(무도회공개)
오스트리아, 대표 문화상품
'오펀발(Opernball, 오페라무도회 )'
1956년 이래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문화 행사
역사와 문화의 효율적 접목 및 마케팅으로,
성공한 문화상품의 벤치마킹 사례
오펀발(Opernball) 행사 개요
매년 여름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Salzburger Festspiele)과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꼽히는
오펀발(Opernball) 행사가
지난 2월 23일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개최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 행사는 다수의 유명 인사를 포함해
매년 5000명이 넘게 참석하고 있으며,
언론의 관심 등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넘어 유럽을 대표하는
고급 무도회로 그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왈츠를 추며 등장하는 144쌍의 남녀들
'비엔나 오펀발(Wiener Opernball)'이라는
이름의 행사는 1935년 1월 처음으로 개최됐다.
그러나, 이 후 제2차 세계대전 등의 이유로
행사가 중단됐다가,
1956년 2월 9일
유럽 3대 오페라 극장 중의 하나인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실질적' 1회 행사가 개최된 이래
현재까지 매년 같은 장소에서 개최되며
세계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오펀발 행사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음악
왈츠에 맞춰
사교계에 데뷔하는 고위층 자제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행사는 숱한 여성 편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카사노바'로 유명한
건설 재벌 루그너(Richard Lugner)가
1992년부터
매년 1명씩 VIP 형식으로
유명 여배우들
(패리스 힐튼, 파멜라 엔더슨 등이 초대됐고,
2017년에는 골디 혼이 초대됐음)을
초대하는 등
행사 시작 전부터
오스트리아 주요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오펀발 행사는
이러한 '홍보적' 측면 이외에도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성공한 문화상품'으로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펀발(Openball)의 경제적 효과
행사 주최측인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 담당자에 따르면,
주최측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수입 지출은
총 수입 460만 유로,
총 지출 350만 유로로
2017년 행사의 경우
110만 유로의 순이익을 달성한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저녁 8시 40분에 시작해서
통상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총 8시간 정도 진행되는 행사에서
파생되는 직접적 수익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적은 금액이라 할 수 없는 규모이며,
이 행사의 참석을 위해
비엔나를 찾는 손님들과
관련된 여행 상품, 호텔, 식당 등의
간접 효과까지를 감안하면
오펀발 행사의 경제적 효과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017년 행사 기준으로
행사장 설치에 30시간,
행사 후 정리 및 원상 복구에
21시간이 소요됐다.
케이터링 인력 350명,
자원봉사자 150명 등을 포함해
총 2000명이 넘는 인력이
행사장 준비 및 진행에 투입됐다.
또한, 이 작업을 위해
약 50개 업체에
총 140만 유로가
외부 용역으로 발주돼 지출됐다.
사실 오펀발 행사는
일반 대중들 입장에서는
매우 '사치스럽고 비싼‘ 행사이다.
입장권 가격
(입석으로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서있어야 함)이
최소 290유로(36만 원)이며,
좌석에 해당하는 발코니칸의 경우
위치에 따라 최소 1만 유로(1250만 원)부터
최대 2만500유로(2520만 원)에 이를 정도로
고가(高價)이다.
또한, 포도주 한 잔에 15~25유로,
샴페인 한 잔에 12유로,
소시지(2개) 10.5유로 등
행사장에서 판매하는 음료
및 간식거리의 가격도
'비정상적‘으로 비싸
소위 부유층을 위한
'그들만의 행사‘라 할 수 있다.
2층 발코니칸에서 바라본 오펀발 행사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는 입장권이 조기 매진되는 등
매년 5000명 이상
(2017년의 경우 5150명)이 참가해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으며
샴페인 1300병,
포도주 900병,
소시지(2개 한 세트) 2500개,
케이크, 샌드위치 1000개,
굴라쉬{구야시, 헝가리어 : Gulyás는
쇠고기, 양파, 고추, 파프리카 등으로 만든
매운 수프로 헝가리 전통 음식의 하나이다.
굴라시(Goulash)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육개장과 유사하다.}
스프 1300개 등
행사 당일 현장에서 판매되는
식음료 매출도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사점
1969년부터
국영 방송 ORF를 통해
TV로 생중계됨으로써
전 세계 146만 명이 시청하고 있는
오펀발 행사는
오스트리아의 왈츠,
오페라 극장 등을
전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이 같은 '무형‘의 효과와 더불어
이 행사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서,
그 성공사례는
비즈니스적으로도 좋은
벤치마킹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오펀발은 상업적 시각에서 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행사이다.
오프닝과 함께 왈츠에 맞춰
144쌍의 고위급 또는 유명인사 자제들이
등장한 이후
단체로 왈츠를 추는 것을 제외하면,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프로그램이 없다.
그 이후 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약 7시간 동안 대형 홀로 나와
왈츠를 추다 쉬었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현대의 상업적 시각에서 보면
너무 단조로울 수 있는 이러한 행사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높은 인기를 누리면서 지속되는 데에는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에 대한 향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음악인 왈츠 등
오스트리아가 지닌
역사적 문화적 유산들을 잘 조합하고 포장해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탄생시킨
오스트리아 정부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오펀발 행사는
이제 오스트리아를 넘어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뉴욕에서
처음으로 해외 공연이 기획 성사된 이래
2005년에는 두바이와 자그레브에서,
2007년에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오펀발 행사가 개최됐다.
문화상품 수출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물론 오펀발 행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비판 여론이
'너무 가진 자들만의 행사‘로,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68년 이후
매년 오펀발 행사가 개최될 때면
행사가 열리는 오페라 극장 앞에서
이 행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집회가
연례행사처럼 열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비엔나 오펀발 행사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성공한 문화상품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창조 경제와 관련해
문화상품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클래식의 본고장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문화상품인
오펀발 행사에
한국의 관련 정부 부처
또는 업체의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페라무도회(Opernball)
2012년 슈타츠오퍼에서의
오페른발에는
우리나라의 한유정 양 등이
데뷔땅뜨(debutante,
상류 사교계 아가씨)로 참석하였다.
2012년은
한국-오스트리아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했다.
(가운데가 한유정 양.
한유정 양은 국제원자력기구
한필수 국장의 영애이다.)
비엔나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는
지나간 수십년 동안
세계적인 비엔나 오페라무도회
(Wiener Opernball)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오페라무도회는
매년 사육제(사순절 : 3월 또는 4월)의
마지막 목요일 밤에 개최된다.
이날을 봐이버파스트나하트
(Weiberfastnacht)라고도 부른다.
아마 부인네들이
오랫만에 춤추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밥을 먹는 것도 잊기 때문인듯 싶다.
슈타츠오퍼는
오페라무도회를 위해서
객석의 의자들을 들어내고
무대와 같은 높이의
마루를 깔아 놓는다.
오페라 무도회에는
세계적인 저명인사들도
상당수가 참석하여
뉴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스페인 국왕 내외가 참석했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부군인
필립 공이 참석했었다.
1968년부터
거의 해마다 오페라 무도회 때에는
슈타츠오퍼 앞으로부터
링슈트라쎄에 걸쳐
대규모 반대 데모가 있어서 혼잡했다.
반대주의자들은 오페라 무도회가
엘리트를 위한 것이며
(입장료가 턱없이 비싸며
의상 등을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돈일 들어가므로),
자만심만 높여주는 것이고
(돈 많은 부자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며
또한 뉴스 카메라만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보수적이라고
(구시대의 관습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으므로)
주장했다.
시위자들은 경찰과 충돌하여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슈타츠오퍼에서의 오페라 무도회 시작 전의 사교
오페른발의 오프닝 댄스에 참석하기 위해
매년 1천명 정도의 남녀가
데뷔땅뜨로 신청하지만
그중에서 80명만이 선정되어
화려한 입장과 함께
오프닝 댄스의 영광을 차지한다.
데뷔땅뜨로 참가하려면
그 전해의 10월까지 신청해야 한다.
자격은 우선 링크스봘츠
(왼쪽으로 돌며 추는 왈츠)를
잘 추어야 하며
연령은 17세부터 24세까지이다.
그래서 후보자들은
댄스학원(탄츠슐레)에 다니면서
테크닉과 맨너를 연마한다.
남자는 검은 예복
(프록코트 : Frackzwang)에
하얀 나비 넥타이를 매야 하고
여자는 마루까지 닿는
흰색 이브닝드레스
(Abendkleid)를 입어야 한다.
2010년 오페라무도회는
2월 11일(목)에 열렸다.
일반인의 입장료는
230유로(약 37만원)이다.
회사에서 접대를 위해
칸막이 관람석을 임대하려면
1만7천유로(약 2천7백만원)을
내야한다.
슈타츠오퍼의 박스 관람석은
150개에 이른다.
1층의 구석진 곳에
4명분의 탁자를 하나 차지하려면
640유로(약 1백만원)을 내야한다.
모두 함께 콰드리유를...
즐겁고 행복한 오페라 무도회
오페라무도회(오페른발)라고 해서
오페라 공연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페라극장에서 개최되기 때문에
오페라무도회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비엔나의 오페라무도회는
언제부터 비롯한 것인가?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인
1814-15년 비엔나에서
유럽제국의 비엔나 콩그레스
(비엔나 회의)가 열렸을 때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무도회가 열렸던 것을 연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무도회는
궁전이나 귀족들의 저택에서
열리는 것이었고
오페라 극장에서의 무도회는 아니었다.
비엔나의 무도회 문화는
18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면서
꽃피어 올랐다.
마치 제국의 수도인 것을
높이 자부하는 듯한 무도회들이었다.
그러던 중 음악가들을 비롯한
비엔나의 예술가들은
어떤 지정된 장소에서
본격적인 무도회를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록 좁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련된 호프부르크의
레도우텐잘에서 무도회를 가졌다.
호프부르크 궁전의
레도우텐잘(Redoutensaal)에서
열릴 때에는
황제가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비엔나 사람들이
비엔나에서 무도회를 개최하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은 시기도 있었다.
1848년 혁명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862년에 유명한
'테아터 안 데어 빈'이
무도회를 주관하자
과거의 화려했던 무도회 문화는
부활하였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의 무도회는
명실공히 파리오페라 무도회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데뷔땅트들의 입장
1869년에
제국궁정극장은
마침내 링 슈트라쎄의
한 가운데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입주하였다.
사람들은 새로 지은 궁정극장
(현재의 슈타츠오퍼)에서
무도회를 가지면 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거절했다.
그래서 비록 무도회의 명칭은
'궁정오페라극장
(Hofoper)에서의 무도회'라고
되어 있지만
새로 문을 연 극장에서
무도회를 개최하지 못하고
비엔나 악우회의 황금홀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다가 아예 고난주간 이전의
카니발 기간과 연계하여
공식적인 멋있는 무도회를 갖자는
여론이 있었다.
더구나 선남선녀 젊은이들이
사교계에 데뷔하기 위한
기회로서 무도회가 필요했다.
그러한 젊은이들을
Jeunesse dorée 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허락을 받아
처음으로 궁정오페라무도회가
현재의 슈타츠오퍼에서 열린 것은
1877년 12월 11일의 일이었다.
당시 비엔나 무도회는
제국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대단한 이벤트였다.
1918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막을 내리고
공화국이 들어섰다.
비록 국가의 체제는
공화국이 되었다고 해도
제국시대의 오페라 무도회에 대한
향수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페라무도회에 참석한
미국의 배우인 디타 폰 티스
(Ditta Von Tees)가
샴페인을 들고 보란듯이
그윽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비엔나 무도회는
1차 대전의 와중과
그 이후의 혼란기에는
열리지 못하였다.
제국이 막을 내리고
공화국이 들어서자
무도회의 명칭도
공화국무도회로 바뀌었다.
공화국무도회가 처음 정식으로 열린 것은
1921년 1월 21일이었다.
아무리 공화국무도회라고 해도
제국시대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무도회였다.
호프부르크 궁전이 아니라
슈타츠오퍼에서 열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당시에는 오페라무도회를
오페른레도우테(Opernredoute)라고
불렀다.
레도우테는
황실에서 개최하는
공식 무도회가 아니라
작은 규모의 무도회를 말하며
특히 가벼운 가장무도회를 말한다.
오페른레도우테는
몇년 동안 계속되다가
아무래도 유럽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서 중단되었다.
그래도 전통의 무도회만은
계속 열려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1936년에 오페른발이라는 명칭으로
다시 화려한 부활을 하였다.
하지만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2차 대전의 발발 등으로
무도회는 중단될수 밖에 없었다.
2차대전은 끝났지만
오스트리아는
소련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고
비엔나는 4대 강대국이
점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변혁기에
오페라무도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슈타츠오퍼에서의 오페라무도회
오페라무도회가 정식으로 다시 시작된 것은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국으로
재출범한 이듬해인 1956년이었다.
그후 오페라무도회는
매년 빠지지 않고 열려
점차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오페라무도회는 단 한번,
1991년에 중단된 바 있다.
걸프전 때문이었다.
2005년부터는 무도회장에서의
금연이 실시되었고
2007년부터는
맹인견의 출입을 허락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2007년부터는
저명한 음악인을 초청하여
연주를 하도록 하는 이벤트가 주선되었다.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초청을 받았고
러시아 출신의 소프라노인
안나 네트레브코(Anna Netrebko)가
초청되었다.
이어 세계적인 영화배우들도 초청되었다.
소피아 로엔,
패리스 힐튼,
카르멘 엘렉트라,
파멜라 앤더슨과 같은
여배우들이 오페라무도회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오페라무도회에서 노래하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레브코. 2007년.
오페라무도회 참석자들은
저녁 8시 30분부터 입장한다.
그러나 정식으로 무도회가 시작되는 것은
밤 10시 부터이다.
그리하여 거의 밤을 새다시피하고
새벽에 끝난다.
무도회를 진행하는 사람이
큰 목소리로
'모두 함께 왈츠를!'이라고 소리치면
그제서야 오케스트라가
첫 왈츠를 연주하며
수많은 데뷔땅 들이
왼쪽으로 도는
왈츠를 추기 시작한다.
오프닝은 남녀 데뷔땅뜨 들이
화려하게 줄을 서서 입장하여
왈츠를 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근년에 들어와서는
슈타츠오퍼 발레단의 시범공연이
참가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무도회의 연주는
앙코르 곡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도나우발처)와
'라데츠키행진곡'(Radetskymarsch)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굳이 열화와 같은 앙코르가
또 나오면 유명한 극작가 겸 배우인
페르디난트 라이문트
(Ferdinand Raimund)가 작곡한
Brüderlein fein(브뤼더라인 화인)을
연주한다.
이곡은 라이문트가 쓴 드라마인
Der Bauer als Millionär
(백만장자 농부)에서 나오는 노래이다.
슈타츠오퍼 발레단의 발레공연
1995년에 작가 요셉 하슬링거
(Josef Haslinger)가
Opernball 이라는 타이틀의
소설을 발표했다.
오페라무도회가 열리는 중에
신나치주의자들이 침입하여
수천명의 사람들을 사살한다는 내용이다.
영화감독 우르스 에거(Urs Egger)는
이 소설을 기본으로 하여
1998년에 같은 제목으로
TV 영화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뉴욕에서는 매년 초봄에
두바이 오페라 무도회
(Dubai Opera Ball)라는 것이 열린다.
하지만 비엔나 오페라무도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영화 '오페른발'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