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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에게 대한제국이
강제합병 당한 후, 조선은 일본 제국의 '무단 통치에' 신음하고 있었다.
교사들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했을 정도였고 일본 육군 헌병이 경찰보다 훨씬 많이 주둔하는 헌병 경찰 제도로 집회와 단체 운동을 일절 엄금했다.
1910년대 일제 치하에서도 지주와 소작농 관계는 이전에 비해서도 되려 악화되었고, 토지정리사업도 농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갔으며, 경제 사정은 나날이 악화일로로 치달아서 물가 상승률은 매년 두자릿수대를 기록했다.
여기에 1918년 일본에서 큰 흉년이 들어 쌀 소동이 터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조선에서 쌀을 더욱 공출하면서 자연히 농민들의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고, 부두를 중심으로 일하던 노동자들의 생활고는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1910년대 후반에 일본 자본들이 쌀 시장에 대대적으로 유입되면서 투기 바람이 불었는데, 그 결과 쌀값은 1917년 기준으로 10원대 중후반이었던 것이 3배 가량 폭등하여 1919년 3.1 운동을 앞두고 43원 57전까지 올라버렸다.
이러한 쌀값 폭등에 대해서 조선 총독부는 대책을 제대로 내놓지 않은 채 무능함만 드러냈으며,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소작농들은 쌀값이 폭등한다 한들 제대로 이득을 본 것도 아닌지라 민생고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또한 189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이 꾸준히 있어왔지만, 결국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전부 좌절되면서 희망을 잃은 조선인들이 늘어났는데, 이 때문에 매 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조선을 떠나고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해 나갔다.
또한 1918년 말에 들이닥친 스페인 독감에 대해서도 검역을 부실하게 하고, 마스크 착용 의무화 같은 조치를 제대로 된 내놓기보다는 독감이 퍼질 대로 퍼진 원인을 조선인들의 생활 습관만으로 돌리는 책임전가에 급급한 무능함과 뻔뻔함을 나타냈다.
비록 스페인 독감은 12월 경에 잠잠해졌지만, 그 와중에 벌어졌던 십수만 가량의 사망자가 나왔음에도 제대로 대처 못한 무능함과 그간의 폭압에 대한 분노가 조선인들 사이에서 번져나갔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 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또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레닌 역시 제국주의 반대의 일환으로 민족 자결을 주장하는 등, 세계에서 민족주의 운동에 힘을 싣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특히 당시 중국에 유학 중이던 신한 청년당 당수인 여운형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 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파리 강화 회의에 영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하고, 조선 쪽에는 일본어에 능한 장덕수를 보냈다.
이러한 소식은 조선 안팎에 있는 독립 운동가들을 상당히 고무하는 소식이었다.
이렇듯 일제의 실정이 반복되고 독립 열망이 고조되던 차에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사망했다. 당시는 아직 대한제국이 멸망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옛 군주의 상징적 무게감이 적지 않았고, 그에 따라 민심은 극도로 격앙되었다.
뭣보다 일본이 억지로 앉힌 순종과는 달리, 고종은 좋든 싫든 조선~한국인 모두가 인정한 군주였다. 이런 군주가 비명횡사했으니 반일 감정이 격앙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고종은 아들인 순종보다도 건강하여 고종의 급작스런 죽음은 전혀 뜻 밖의 일이었다. 고종의 사망 원인은 공식적으로 뇌일혈로 발표되었으나, 세간에는 이완용이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일 분위기는 더욱 고양되었다.
고종의 독살에 관해서는 현재도 학계조차 역사적 실재라는 견해와 그렇지 않다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고종 사망 당시에는 독살설이 사실상 확정 사실로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독살이 실재든 아니든 간에 고종의 사망 소식은 하루 뒤인 1월 22일날 발표되었고, 그동안 서거 사실은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민심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총독부는 뒤늦게 언론을 통해 해명 및 반박 기사를 내며 고종의 독살설을 무마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고종이 불미스러운 일로 사망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1918년에는 만주에서 대종교 인사를 중심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학생들의 주도로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 YMCA 강당에서 2.8 독립 선언이 발표되었다.
선언 직전 조선 유학생이었던 송계백은 인쇄 비용을 구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고, 모교 보성학교의 은사이자 중앙학교 교사였던 현상윤을 만났다.
송계백으로부터 거사 계획을 들은 현상윤은 보성학교 최린 교장과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이들은 천도교의 수장인 손병희를 찾아가게 되었다.
이미 천도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국민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도교는 처음에는 구 대한제국의 정치인들과의 연대를 모색했으나 이들이 소극적이자 개신교, 불교와의 연대로 방향을 전환했다. 개신교에서는 평안도 지방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제에 의해 일제 검거된 소위 105인 사건 등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고조된 가운데, 관서 지방의 대표적 기독교 지도자였던 이승훈이 천도교 측과 접촉하여 운동에 참여하기로 한 가운데 개신교 학교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불교 또한 한용운을 중심으로 반일의 분위기가 있었고, 최린이 한용운과 접촉하여 불교와의 연대도 성사되었다. 그러나 한용운이 추진한 유림과의 연대는 무산되었다.
원래 유림 세력도 3.1 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했으나, 사정이 생겨서 유림 대표 김창숙, 김정호는 모친의 와병으로 늦게 도착하여 서명할 기회를 놓쳤다. 독립 선언서에 유림 대표들의 이름이 없는 것을 안 유림 대표들은 막대한 죄를 지었다며 바닥에서 뒹굴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이놈아, 통곡은 왜 하느냐. 나라를 망칠 때는 너희 놈들이 온갖 죄악은 다 지어놓고 오늘날 민족적 독립 운동에는 한 놈도 끼지 아니하였으니. 이놈아, 이러고도 다시 유림이라 오만하게 자부하려느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멸시했다.
이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김창숙 등은 파리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 이 수치를 씻자고 제의하기에 이른다. 3.1 운동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가진 유림 세력의 최후의 몸부림이 면우 곽종석을 중심으로 시작된 1919년의 파리 장서 사건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국내 유림의 편지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간재 전우를 비롯해서 외적을 데려와 외적을 물리치는 일이나, 머리 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이나 유림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고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참여한 유림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곽종석 등 여러 유림들이 투옥되었다가 순국했다.
이와는 별개로 운동 직전에 일본 측에게 들통날 뻔한 위기가 한 차례 있었다.
천도교 측에서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이 이를 발견한 것. 그러자 민족 대표 중 하나였던 최린이 신철을 만나서 돈을 주며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고 묻고는 "제발 며칠간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한다. 돈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나 신철이 이를 묵인한 것은 사실이며, 이후 신철은 체포령이 떨어지자 유치장에서 숨겨뒀던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신철에게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고 묻던 그 최린은 훗날 변절하여 내선일체의 선봉장으로서 한인 청년들에게 "너희들은 일본 사람"이라고 윽박지르는 뒤통수를 치게 된다.
천도교에서는 당초 일본 정부에 조선 독립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생각했지만, 최린의 강력한 주장으로 독립 선언서를 만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최남선이 초안을 잡게 되고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게 되었다.
2월 11일에 기초가 완성된 독립 선언서는 2월 20일부터 천도교측 인사인 이종일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를 시작하여 2월 27일까지 3만 5천여 부를 인쇄했다.
다른 한편으로 만세 시위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잡히게 되어 3월 1일 2시에 탑골공원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 33인 중 23명이 모여 회합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할 경우 자칫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여 민족 대표들은 기생요릿집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 중 29명이 오후 2시 기생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 대표들이 모여 독립 선언식을 열고 있다고 연락하게 했고, 전화를 받고 일본제국 경찰 80명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쳤다.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삼창 후에 이들은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것은 기존에 알려진 내용이고, 또 다시 자료를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먼저 2시쯤 태화관에 모이고, 강기덕 등 학생들이 찾아와 항의를 한다.
학생들이 간뒤 선언문을 배포, 낭독은 생략하고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다.
그리고 태화관에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누군가(최린일 가능성이 높다)가 종로경찰서에 선언문을 보낸다. 종로경찰서에서 먼저 태화관에 거기에 민족 대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고, 이에 태화관에서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지 민족 대표에게 물었고, 민족 대표들은 여기에 있다고 답하라고 한 것. 그리고 태화관에서 다시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한 것이라고 한다.
즉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 비교를 하면 '낭독을 생략'했다는 것과 '종로경찰서 측에서 먼저 확인을 위한 전화를 했다'는 부분이 빠진 것이 차이점이다.
손병희가 이완용(...)을 직접 만나 민족 대표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매국노를 독립 거사에 참가시킬 수 없다는 측근이 반발에도 불구하고 손병희가 이완용을 직접 접촉하여 설득하려고 했다는데, 이때 이완용이 거절하면서 "내가 2,000만 동포에게 매국적이라는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이오. 이제 새삼스러이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는 없소. 이번 운동이 성공해 독립이 되면, 먼 다른 동리 사람들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 동네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외다.
손 선생의 이번 운동이 성공해 내가 그렇게 맞아 죽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올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 심사위원이었던 유광렬이 방정환으로부터 들었다며 증언한 것이다.
한편 탑골공원에선 민족 대표들의 갑작스런 시위 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학생 그룹에서 강기덕을 보내 찾아다니다가 그들이 태화관에 틀어박혀있는 걸 찾아내고 민족 대표들에게 항의하였으나, 최린과 손병희에게 공원에 가서 발표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 뒤에 독립선언서를 받는 경위, 태화관에서 발표가 점심 식사 전에 있었는지, 아니면 경찰이 온 뒤에 있었는지에 대해 자료마다 다르다.
학생 그룹은 그들로부터 독립선언서만 받아내고 독자적으로 움직여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만세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혹은 고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상경한 일반 민간인들이 가세하여 수십만 인파가 모여들어 시위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시위대는 한편은 보신각을 거쳐 숭례문 쪽으로 향했고, 다른 한편은 덕수궁 대한문 쪽으로 향했다.
시위대가 다시 종로로 향하자 일본 헌병과 기마부대가 시위대를 폭압적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다가 오후 6시에 자진 해산했다. 3월 2일이 되자 조선총독부는 전 병력을 동원해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한 학생들과 시위 참가자들을 마구 연행했는데, 이 날 하루에만도 무려 1만여 명이 체포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평양, 의주, 선천군, 안주, 원산, 진남포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다음날인 3월 2일에는 이북 전역으로 만세 운동이 확산되었다. 3월부터 4월 사이에 전국적으로 수천 회의 만세 시위 운동이 벌어졌고 일본은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하여 각처에서 학살 사태가 속출했다(대표적 사건이 제암리 학살사건).
만세 운동은 3월 초부터 일제의 과잉진압이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일본 헌병 등을 때리거나 경찰서 등을 파괴하는 식의 폭력 시위 양산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으며, 후기 만세 운동은 직접적인 불만이 많았던 농민과 노동자에게까지 확산되어 운동의 폭력적 양상이 더욱 심해졌다.
한편 "대한 독립 만세" 는 일종의 상징처럼 굳어진 구호지만 사실 3.1 운동 때는 "조선 독립 만세!"라는 구호가 많이 쓰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쳤다고도 하지만,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어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조선'이라는 국호가 더 친숙했다. 당시의 신문 보도나 3.1 운동 이후 전국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 전단지에는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쓰여 있는 기록을 많이 볼 수 있다. 당장 기미독립선언서에도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적혀있었다.
한편 3.1 운동 하면 떠오르는 현대의 이미지는 대체로 백의를 입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외치는 다수의 운동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실제 3.1 운동 현장의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당대의 재판 기록을 살펴보면 3월 1일 당일에 태극기가 사용됐다는 증언은 보이지 않고, 당시 서울 YMCA 회관에서 만세 운동을 관찰한 이의 일기(윤치호일 것으로 추정)에 따르면 당시 대중들은 모자와 천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적게 쓰였을 뿐이지 안 쓰인 건 아니었고,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뤄짐에 따라 서서히 태극기가 만세 항쟁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충청남도 유성군에서는 조선이 독립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마을 한복판에 태극기를 달았으며, 전라남도 연안에서는 어선들이 태극기를 단 채 조업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당대의 공판 기록이나 일기에 따르면 태극기보다는 <독립기>가 더 자주 휘날렸다. 독립기는 대체로 흰 천에 '독립 만세' 따위의 글귀를 붓으로 써 놓은 것으로, 태극기 없이 독립기만 휘날린 지역도 많았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태극기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했다.
다만 3.1 운동에 참가한 민간인들은 국제 정세에 대해 매우 어두웠다.
한 예로 1919년 4월 1일 오전 10시, 황해도 해주에서 5천 장의 전단지를 뿌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5명의 여자들은 "우리가 일제히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조선은 세계 강대국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3.1 운동에 200만의 조선 민간인들이 참가하여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어도 세계 강대국들은 끝끝내 조선 독립을 외면했다.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어떤 나라가 압력을 가해 조선을 독립시키게 하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선의 독립은 일본이 2차대전의 패전국이 되는 1945년 8월 15일로 미루어지게 된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 인원은 약 200여 만 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집계는 이와는 다른데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의 야마베 겐타로와 뉴라이트의 신복룡 교수는 각각 46만 명과 50만 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3.1 운동은 최초의 시민 주도 운동으로 불릴 만한데, 이전과는 달리 어떤 특정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게 아니라, 민간과 지식인들이 스스로 일본의 식민 통치에 반감을 느끼고 가담했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운동의 시작에 한해서 비폭력 투쟁을 넘어 적극적 저항으로 나아가는 것도 민간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33인들 중에서 한용운을 비롯한 소수를 제외한 이들의 투옥 기간이 5년 미만이었던 것에 비해서, 후기 시위 주동 인물들은 10~15년이 넘는 장기형을 선고 받게 되는 것에서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었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지도부가 부재한 상황에서의 산발적 저항이라는 형태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비폭력 만세 저항 운동의 문제라는 것은 후기 농민과 학생층이 주도하는 과정에서는 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산발적으로만 이루어져서 일본제국 경찰의 해산 움직임에 각개 격파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3.1 운동이 전국에서 무려 2개월 정도에 걸쳐서 일어났다는 것 또한 일이 큰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도층이 따로따로 움직인 덕분에 3.1 운동을 전후로 국내의 저항 운동은 침체기에 빠지기 시작했고, 저항 노선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한계는 독립운동 세력의 개혁을 불러왔고, 단결을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였다. 실제로 이 시기 임시정부가 곳곳에 설립되었으나 몇 개는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었고, 3개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였다.
또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민간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게 된 것도 3.1 운동이 계기가 된다. 이전 지식인들에게 민간인은 말 그대로 교화의 대상이지 독립운동의 동반자적 위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이전 시기 영웅 혹은 초인의 출현을 기대하거나, 병합 이후에 완전히 자포자기에 빠지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3.1 운동 이후에는 그에 따른 시각이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민간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활동이 적극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이다.
당장의 결과로 보자면 3.1 운동은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미독립선언서를 비롯하여 당시 지도부의 인식은 3.1 운동으로 즉각 독립을 할 수 있다기보다는 3.1 운동으로 독립 정신을 일깨워 독립국 건설의 주춧돌을 놓으려는 것이 주였다. 최근 헌법학계와 사학계에서는 3.1 운동 이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근대적 국민의 탄생 등을 언급하며 3.1 운동의 의의를 새롭게 인정하는 추세이다. 경향신문 기사.
3.1 운동은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일본이 승전국이므로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 대해 반발한다는 민족의 합의가 이루어진 사건으로, 민족의 합의에 의한 정부 수립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 '3.1 운동 정신을 계승하였다'는 문구가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3.1운동의 대표적인 의의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공화주의의 보편화와 확립이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3.1 운동을 주도한 손병희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민간인들조차 "독립 후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이냐"는 질문에 공화국이라는 답을 한 사실이 드러난다. 3대 만세 운동 거사지로 불리는 황해도 수안군의 주민들은 3월 3일 만세 시위에서 "공화정치는 세계의 대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 앞에서 행진을 벌였으며, 평안북도 선천군 일대에서는 "우리 조선 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신국가를 건설하려고 한다"는 구절이 담긴 선언서가 낭독되기도 했다. 3월 5일 서울에서의 만세 운동에 참여한 정신여학교 학생 이애주는 '독립'이란 "조선에 황제 또는 대통령이 나와 조선을 통치한다는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는 공화주의 개념이 3.1 운동을 계기로 일반 민간인들에게 널리 퍼지기 시작했음을 뒷받침한다.
3.1 운동이 민간과 지식인의 사상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되었다는 사실은 1924년 3월 나경석이 <개벽> 지에 쓴 <사상의 귀추와 운동의 방향>이라는 글의 아래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의 사상계는 3·1 운동을 기회 삼아 일대 전환했다. 그 전의 조선 사상의 주조(主潮)는 정치적 자유주의, 즉 독립주의였다. 조선정치보호조약이 성립되었을 때에 우리의 선배는 은근히 월남망국사를 가리키며 폴란드 망국기를 밀담케 했고, 또 조선의 전제정치가 멸망을 가져왔다고 하여 군주입헌정체를 목표 삼은 근왕애국주의를 고조했음은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나 그 당시에는 은연히 세력 있던 정치사상이었다. 그 후 정치의 변동이 다시 일보를 나아가 일본이 조선을 병합했다고 발표하게 되매, 조선의 군주가 자연히 도태되었음으로 근왕 선동은 졸지에 퇴색되어 극소수의 전 관료와 양반, 완고한 유생을 제한 외에는 일반 청년은 민주적 애국의 색채가 농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말살되려던 조선 역사를 연구하여 민족적 자부심을 배양하려 했고, 또 근대 정치의 최고 이상이 공화대의제인 줄로 생각한 까닭에 소위 지사들이 국내외에 분주할 때에 지방 열병에 전신이 마비되면서도, 장래 조선의 정체(政體)의 이상에 관하여는 거의 이론 없이 이에 귀일했음으로 조선 당국에서는 그것이 조선에서 자연히 발견된 정견인 줄 모르고, 미국 선교사가 교회에서 학교에서 조선 학생에게 미국 정신을 양성한다 하여 걱정 끝에 일본 야소인 조합교회를 실어 오는 활극까지 있었다.]
한편 3.1 운동 발발 후 이틀 만인 3월 3일 지하신문으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에는 국민대회 개최와 함께 임시정부 및 임시대통령 선출 계획이 보도되었다. 이는 3.1운동과 동시에 민주주의제 정부 수립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동년 4월 23일 한성 정부 수립 선포식이 서울에서 거행되었을 때에도 '국민대회'와 함께 공화만세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이 곳곳에 휘날렸다.
3.1 운동으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독립 후 건설할 국가로 민주공화국을 천명하였고, 이후 임시정부에서 제정된 건국강령, 임시헌법 등은 1948년 제헌 헌법의 초안에 대거 반영됨으로써 대한민국 헌법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3.1 운동은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나라에 소식이 전해졌다. 「뉴욕 타임즈」는 3.1 운동에 대해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 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 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 고 보도했다. 한편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는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천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 고 명시되어 있다" 고 보도했다. 그 외에도 샌프란시스코의 「이그재미너」, 파리의 「앙탕트」, 런던의 「모닝 포스트」, 상해의 「민국일보」에서도 3.1 운동을 다루었다.
워싱턴 타임즈에 미국의 사업가 로버트 워드가 당시 3.1 운동 이후 일제의 학살 장면을 찍은 사진과 목격담을 제공했다.
이러한 3.1 운동은 비록 일본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막을 내렸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 한층 자만해있던 일본은 초기의 평화적 시위대에게 학살을 가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폭로되어 콧대가 꺾였다.
당시 세계적으로 과잉진압에 대해 비판 여론이 있었는데, 영국의 주한영사였던 윌리엄 M. 로이즈는 조선인들의 문화를 말살시키려 하고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직접적으로 제제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여러 정치인들은 이를 빌미로 일본이 국제 연맹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데 정작 본인들이 못 들어갔다.
일본 내부에서는 무단통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 조선 식민통치의 기조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3.1 운동이 알려지자,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다른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3.1 운동의 영향을 받은 민족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의 한국에 대한 일반 민간의 인식이 확실히 달라졌다.
운동 이전에는 조선(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무능력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냉소했으며, 합병 당시에는 대한제국 백성들은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는 인식이 많았으나, 3.1 운동 이후 정작 자신들부터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지 못함을 반성하고 항외세 및 항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고, 지식인들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한인들의 항일 정신을 매우 높이 사게 된다.
대만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되고 있다.
인도 제국의 비폭력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단,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크지 않을 뿐이지 자와할랄 네루나 마하트마 간디 같은 당시 인도 독립의 거두급이 되는 인물이나 타고르 같은 지식인들은 3.1 운동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네루가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적은 편지들을 보면 일제의 위협에도 3.1 운동에 참여한 한인들을 찬양했을 정도였다. 즉, 간접적인 영향은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남미에서도 크게 다루기도 했다.
다만 간디에게 영향력을 주었다는 근거 자체는 전무하며, 간디 또한 3.1 운동이 있기 30년 전부터 동일 성격의 민족운동을 해왔다.
3.1 운동이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한국의 특정 독립운동들이 (국제적으로 다소간 서로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인도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거대한 3.1 운동은 일본에도 대단한 충격을 주어 데라우치 마사다케 내각과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은 "조선인들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이 모양 이 꼴을 만들었냐?!"고 일본 자국민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몇몇 일본인은 3.1 운동에 감명 받아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가네코 후미코가 대표적인 예. 하세가와 총독은 와병을 핑계로 사직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게 다 군바리들이 조선을 가혹하게 통치해서 그렇다!"는 인식이 형성되어 문관총독을 임명하고 조선총독부 관제개혁이 추진되려 했으나, 조슈 번벌 등의 극렬한 반발로 타협을 본 것이 해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의 임명이었다.
3.1 운동 이후 본래 군사 통치로 가혹하게 통치하던 조선을 살짝 풀어주는, 이른바 '문화 통치'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후 일본의 정가에선 식민지 조선(한국)에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려 할 때마다 "3.1 사건을 잊었느냐?"는 소리가 나오곤 했다.
이후 3.1 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 역시 영국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편지에 3.1운동을 격찬하며 "이들을 본받기를 바란다"고 당부하며 "일본 역시 영국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국가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도 같이 실었다.
-명칭-
기미독립선언이 일어난 직후 1920년대까지는 3.1 운동, 3.1 혁명, 만세운동 등 여러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국권회복투쟁이 격렬해짐에 따라 3.1 혁명이란 표현이 점차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3.1 운동을 일제 식민지배에 대항하여 반일 자주독립을 제창한 만세 시위에만 국한하지 않고, 군주제에 반대하며 '민주공화국' 건설로의 대전환을 가져온 사실에 또한 주목하여 3.1 운동의 '혁명성'을 강조하였다.
1940년대 이후 대한민국 건국강령, 대한민국 임시헌장, 백범 김구의 석(釋) 3.1혁명정신 등 여러 문서에서 3.1 혁명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 이른바 “우리 조국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경계하여 민족자존의 정권(正權)을 영유케 하노라”하였다 ... 이는 우리 민족이 3·1헌전(憲典)을 발동한 원기이며 ...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 대한민국 건국강령 전문
[3·1 대혁명은 한국민족 부흥을 위한 재생적 혁명이다. 달리 말해 이 혁명은 단순히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이 5000년 이래로 갈고 닦아온 민족정기와 민족의식을 드높이자는 것이다 ... 3·1 대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반일독립'과 '민주자유'이다.]
— 대공보(大公報)에 실린 백범 김구의 석(釋)
3.1혁명정신 中
[우리 민족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강토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국가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문화와 진보에 위대한 공헌을 하여왔다. 우리 국가가 강도일본에게 패망된 뒤에 전 민족은 오매에도 국가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무수한 선열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부에 노력하야 삼일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순응하야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절 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아울러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 1944년 대한민국 임시헌장 전문 中
3.1 혁명, 또는 3.1 대혁명이란 명칭은 광복 이후 3.1절 기념식을 비롯한 신문 사설 등에서도 사용되었다.
5.10 총선거 이후 헌법을 제정할 때, 전문 초안에도 '3.1 혁명'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한민당의 조국현 의원이 "독립운동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3.1 혁명이란 명칭에 거부감을 나타냈고, 기존의 '혁명'이란 명칭을 사용하던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후 '기미삼일운동'이란 명칭으로 헌법 전문 수정안이 제출되었고, 사회를 맡은 이승만이 토론을 막은 채 수정안을 표결에 붙여 "재석의원 157인 중 가 91, 부 16"으로 통과됨으로써 3.1 운동이란 명칭이 사용됐다. 반일독립의 민족 운동의 시야로만 3.1 운동을 해석하게 된 것이다.
2019년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치권을 비롯한 학계에서 이 3.1 혁명이라는 용어를 부활하여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2018년 12월 14일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전체회의에서 과거 민족 진영에서 3.1 운동을 '혁명', '대혁명'으로 부른 사례와 중국 5.4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의 예시를 언급하며 3.1 혁명 용어의 부활을 정치권에서는 처음으로 언급했고, 조선일보에서는 학계의 저명한 교수진들의 인터뷰를 통해 3.1 운동을 민주혁명, 민주공화국을 이룬 시민혁명, 시대의 분기점 등으로 봐야 함을 보도했다.
이 외에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3·1 운동'이야말로 대한민국을 태동시킨 혁명) 등 여러 매스컴에서 3.1 운동의 100주년을 맞아 민주혁명의 성격을 재조명하는 기사를 내놓고 있다.
북한에서는 '3.1 인민 봉기'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3.1 사건(三・一事件), 3.1 독립운동(三・一独立運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일본 제국 시절에는 조선소요사건(朝鮮騷擾事件)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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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한독립만세~~
잊지 말아야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