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내가 변해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영양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을 제대로 모심으로써 생기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생명의 양식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아들이고 그분의 마음을 닮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변할 수 있는 은총을 갈망합니다.
예수님께서“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유다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빵의 기적과 같은 세상적인 것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분을 보지 못하고 오직 만나만 바라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유다인들은‘빵’만 바라보고 그‘빵’을 주신 주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너를 뻔히 아는데 어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가? 아버지는 요셉, 어머니는 마리아이거늘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과 주변 사람들을 잘 안다고 생각한 선입견, 편견과 고정관념의 자기 틀에 갇혀 예수님을 판단해 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은총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섣불리 아는 게 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1,22-23).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분으로 생각하고 또 예수님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만든 예수님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내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내가 그분의 뜻을 따라야지, 그분이 나에게 맞춰주시길 바라는 것은 생떼를 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늘을 향한 열린 마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 은총을 더 충만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한‘새로 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만한 사람에게 은총을 더해 주면 그로 인해 주님이 가려지고 그의 헛바람만 커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 주장과 소신의 판단이 혹 잘못된 판단이 아닌지 살펴봐야 하고, 참으로 주님께서 나의 앞길을 인도해 주시길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끌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명의 빵’이요, ‘내가 줄 빵은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빵을 미사 안에서 영성체를 통하여 먹습니다. 영성체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나에게 주십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뜨거운 사랑으로 영성체를 원하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눈물이 나도록 감사하고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성 마리아 막달레나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까닭입니다. “접목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두 나무가 비슷할수록 접목이 더 잘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그리고 고해성사야말로 영혼과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시켜 주는 매우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로 영적인 준비를 잘하고 성체를 모시게 될 때 그만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신부님의 이미지에 관해 들었습니다. 우연히 교회 홍보물을 보게 되었는데 친구가 유명한 신부가 되어있어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 괴짜 친구가 신부가 되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별수 있겠나! 옛 행실을 보면 지금도 그가 신부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미사 봉헌하는 것을 보면 분심이 들 것 같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사람 됐다고!’ 성경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 혁명당원 시몬, 세리 마태오 그 밖의 많은 인물이 허물을 안고 살았고, 그 허물이 오히려 하느님만을 갈망하게 했고 새사람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옛날에 한 짓이 못됐고 가관이라 해도 새사람이 된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과거의 기억, 선입견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하셨고 오늘날 신부도 출신 본당으로는 발령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어 새사람이 되었다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삶이 변했다면 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면 그것은 기뻐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비젼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주관과 소신, 내 노선, 내 지식, 내 색깔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자칫 고집이 될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잣대로 나를 살피고 내 노선을 수정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 인양 머물면 주님의 넘치는 은총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변해야 합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이‘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고집이 센 민족이다.’,‘마음이 완고한 백성이다.’라는 말로 혼이 났습니다. 혹여 성당 다니는 ‘저 사람은 왜 저래!’,‘저놈은 왜 그래!’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은 그러한 내 생각을 내려놓으면 어떠실지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하신 예수님을 맑고 밝은 눈으로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색안경을 끼면 안경의 색깔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남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의 색깔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내가 지닌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을 주님의 잣대에 견주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혹시라도‘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만큼은‘내가 너 때문에 산다.’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너 때문에, 내가 산다.’ 주님, 제가 주님 덕분에 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묵상 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