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206〉
■ 집오리는 새다 (정일근, 1958~)
왜 집오리는 날지 않을까, 기러기목에 속하는
우아하고 튼튼한 날개를 접어 퇴화시키며
저 넓고 푸른 하늘의 자유를 포기한 채,
일용할 하루의 양식을 위해
도시의 더러운 시궁창에 거룩한 황금색 부리를 묻는
날지 않는 새, 집오리
시립 도서관의 먼지 쌓인 서가(書架)처럼
TV 앞에 침묵하는 우리들처럼
스포츠에 거세당한 이 시대처럼
날지 않는 집오리여, 너는 새다
길들여진 관습과 타성의 질긴 그물을 찢으며
빈 발목을 죄는 불안한 시대의 불안한 생존,
사육의 쇠사슬을 풀고, 혁명하라
날아라 집오리여, 새여
달 밝은 우리 나라의 가을밤
기역자 시옷자로 무리 지어 힘차게 날아가는
쇠기러기, 청둥오리 떼를 따라 우리 다 함께
무서운 무리의 힘으로 힘차게 날갯짓하며
산맥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유의 하늘로 푸른 하늘로.
- 1987년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창작과 비평사)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들에게 가장 친근한 날짐승을 꼽으라면 당연히, 닭과 오리일 것입니다.
그중 집오리는, 농촌에서 흔히 보였던 가금류로, 뒤뚱거리는 재밌는 걸음걸이로 부지런히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당을 휘젓거나, 낯선 사람을 겁내지 않고 다가와 종아리를 쪼아보기도 하는 등 호기심이 왕성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또한 동네 우물가 옆 지저분한 미나리꽝이나 더러운 시궁창을 부지런히 헤엄쳐 다니며 부리로 먹을 것을 탐구했던 모습이, 우리들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집오리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시골에서조차 청둥오리나 쇠기러기, 백로 같은 기러기목의 철새들만 관찰될 뿐 집오리의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집오리도 소나 닭처럼 도축을 위해 철장 안으로 갇혀진 게 이미 오래 전이니 말이죠.
이 詩는 하루의 양식에 매달리다가 점차 하늘을 날던 본성을 잃어버린 ‘집오리’의 모습을 통해, 일상적 삶의 조건에 매몰되어 참된 자아를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한 작품입니다.
시인은 집오리를 관찰하면서 우리들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날짐승이지만 날지 않고 일상의 먹이만 구하는 집오리의 행태가 바로, TV와 스포츠에 매달려 현실에 안주하여 살아가는, 본성과 자아를 잃어버린 채 개성 없는 삶을 사는 우리들 현대인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길들어진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자아를 회복하여 자유롭고 살아가라고 시인은, 우리들에게 힘차게 외치고 있군요.
물론 이 詩를 썼던 1980년 후반 대에는, 도시 변두리에서도 동네 주변을 쏘다니는 집오리들의 모습이 왕왕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만. Choi.
첫댓글 집오리여 날아오르라
날아오르기 전에 다이어트를 하라
다이어트를 하려면 먹이를 안 먹어야 하는데...
그러면 값이 떨어져 금방 눈총받을 집오리여
왜 집오리는 날지 않을까, 기러기목에 속하는
우아하고 튼튼한 날개를 접어 퇴화시키며
저 넓고 푸른 하늘의 자유를 포기한 채,
일용할 하루의 양식을 위해
도시의 더러운 시궁창에 거룩한 황금색 부리를 묻는
날지 않는 새, 집오리
시립 도서관의 먼지 쌓인 서가(書架)처럼
TV 앞에 침묵하는 우리들처럼
스포츠에 거세당한 이 시대처럼
날지 않는 집오리여, 너는 새다
길들여진 관습과 타성의 질긴 그물을 찢으며
빈 발목을 죄는 불안한 시대의 불안한 생존,
사육의 쇠사슬을 풀고, 혁명하라
날아라 집오리여, 새여
달 밝은 우리 나라의 가을밤
기역자 시옷자로 무리 지어 힘차게 날아가는
쇠기러기, 청둥오리 떼를 따라 우리 다 함께
무서운 무리의 힘으로 힘차게 날갯짓하며
산맥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유의 하늘로 푸른 하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