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지은이:톨스토이
제1부
1
아무리 많은 사람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인 지구 어느 한구석에 몰려서 일부러 기름진 땅을
못 쓰게 하려고 해도, 또 땅 위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돌을 깔아 덮어 씌운다 해도,
또한 그 돌 틈새로 비집고 싹트는 풀을 깡그리 뽑아 버린다 해도, 아니면 석탄이나 석유의
매연으로 그 땅 위의 공기를 탁하게 오염시킨다 해도, 그러고도 모자라 온갖 나무를 모조리
잘라내고 거기 깃들인 새나 짐승을 샅샅이 찾아낸다 해도-북적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역시 봄은 봄일 수밖에 없다.
싹튼 초목이 정말 송두리째 뽑혀 버리지 않는 곳이면 햇볕이
따사로이 비쳐서, 가로수 옆 잔디밭이 있는 좁은 길은 물론 보도에 깔린 포석 사이사이에
파릇파릇 싹이 돋아 마냥 푸르렀다. 자작나무와 포플러, 야생 벚나무에도 향기롭고 촉촉한
새잎이 트고, 보리수에도 이제 막 순이 튼 새잎을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까치와 참새, 비둘
기도 정녕 즐거운 듯 봄맞이 준비로 벌써부터 둥지를 틀기 시작하고, 봄볕을 받아 따스한
벽에는 파리까지 윙윙거렸다.
이처럼 산천 초목도, 새와 짐승, 곤충까지도, 그리고 천진한 아이들마저도 저마다 봄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어른들-여전히 자기 자신을, 또는 서로 남을 속이거나
괴롭히기만 했다. 사람들에게 신성하고도 중요한 것은 화사한 봄날 아침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위해 베푸신 조물주의 아름다운 은혜-평화와 친목과 사랑으로 마음을 바치는 미덕-
를 거역하는 일투성이였다. 오직 그들에게는 서로 상대를 지배하기 위해 어떤 생각을 궁리
해 내느냐 하는 것이 신성하고 중요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현청 소재지의 교도소 사무실 안에서도 신성하고 중요한 일로 치부되는 것은 모
든 생명, 동물이나 인간에게 새봄의 감동과 환희에 있는 것이 아니라, 4월 28일 오전 9시까
지 현재 예심중인 미결수 3명-2명의 여죄수와 1명의 남자 죄수를 법정에 출정시키라는 내
용의 날인된 통고서가 전날 밤에 접수됐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주범으로 몰린 여
죄수 1명은 따로 특별 호송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 명령에 따라 4월 28일 오전 8시, 악취
가 물씬 풍기는 어두컴컴한 여죄수 감방 복도로 간수장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희끗희끗
한 곱슬머리에다 수척하고 소매에 금빛몰을 두른 재킷을 입고, 가장자리에 푸른 파이핑 장
식이 달린 허리띠를 맨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여간수였다.
"마슬로바에게 용무가 있으십니까?" 복도 쪽으로 난 감방문 중의 하나로 당직 간수와 함
께 걸어가면서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간수장은 덜거덕거리면서 자물쇠를 풀고 감방문을 열었다. 복도보다 더욱 심한 악취가 풍
겨나왔다.
그는 곧바로 호명했다.
"마슬로바 출정!" 그러고는 다시 문을 닫고 그녀가 안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비록 교도소이기는 하나 바깥 뜰에는 시내로부터 바람에 실려온 상쾌하고 싱그러운 들판
의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복도에는 분뇨와 콜타르와 부패물 따위의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악취가 배어 장티푸스균이 득실거릴 것 같은 공기가 가득 차 있어서 처음 들어오는 사
람이면 누구라도 우울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평소 이런 악취에 젖어 있을 여간수조차
밖에서 들어오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복도에 들어서자 갑자기 피로가 느껴지면서 졸
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감방 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은 여죄수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였다.
"마슬로바, 빨리빨리 하란 말이야!" 간수장이 감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약 2분쯤 지났을 때, 하얀 웃옷과 스커트 위에 회색 죄수복을 입은, 그다지 키는 크지 않
으나, 가슴이 풍만한 젊은 여자가 활달한 걸음걸이로 나와서 휙하고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간수장 곁에 와 섰다. 발에는 삼베로 만든 긴 양말에다 죄수용 장화를 신었으며, 머리는 흰
수건으로 싸고 있었으나, 그 밑으로 멋을 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듯싶은 곱슬곱슬한 새까만
머리칼이 삐죽 나와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보고 지낸 사람들에게서 흔
히 볼 수 있는 움 속의 감자싹을 연상케 하는 유달리 창백한 모습이었다.
조그맣고 도톰한 손도, 죄수복의 높은 깃 사이로 드러난 희고 포동포동한 목덜미도 역시 창백한 빛이었다.
그 얼굴에서 유달리 반짝이는 새까만 두 눈동자는 비록 눈두덩이 약간 부어오른 듯했어도 유난
히 생기가 있어 보였고, 한쪽 눈이 약간 사팔뜨기였지만 윤기 없는 창백한 살결과는 두드러
지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풍만한 가슴을 앞으로 내밀다시피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복도로 나오자, 그녀는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명령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는 듯한 자세로 간수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 옆에 섰다.
간수장이 감방문을 닫으려고 할 때, 갑자기 안에서 허옇게 센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창백하고
깡마른 주름투성이인 노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나더니 마스로바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수장이 문짝으로 노파를 밀어넣는 바람에 노파의 머리는 안으로 사라졌다. 감방 안쪽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웃어 댔다. 마슬로바도 따라 우승며 감방문에 달려 있는 조그마한 쇠
창살문 쪽을 돌아보았다. 맞은편에서 있던 노파는 그 창살에 들어붙어 쉰 목소리로 그녀에
게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면 못써.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해. 그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면 된다
고."
"어떻게든지 결판이 났으면 좋겠어요.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을 테니까요." 마슬로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결판은 한쪽이지, 두 가지일 리가 있나?" 간수장은 자기의 재치있는 말을 자랑하듯 관리
답게 내뱉었다. "자 따라와, 어서!"
쇠창살문으로 내다보고 있던 노파의 눈은 사라지고, 마슬로바는 감방 복도 한가운데로 나
와 총총걸음으로 간수장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돌층계를 내려와 여자 감방보다 더욱
냄새가 고약하고 소란스런 남자 감방 옆을 지났는데, 모든 쇠창살문에서 많은 죄수들의 눈
이 두 사람을 뚫어지게 좇고 있었다. 그들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앉아 있던 서기는 담배 연
기가 밴 서류를 한 병사에게 건네주고, 여죄수를 가리키며 "데리고 가!"하고 말했다.
병사는 곰보에다 벌건 얼굴을 한 니주니노브고로드 출신의 농부였는데 그는 그 서류를 두
툼한 외투 소매에다 쑤셔넣고 여죄수를 흘끗 훔쳐보면서 광대뼈가 튀어나온 핀란드 태생의
동료에게 넌지시 눈짓을 해 보였다. 두 사람의 병사는 여죄수의 양 옆에 서서 층계를 내려
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문은 조그마한 샛문만 열려 있었다. 샛문의 문턱을 넘어서 밖으
로 나온 두 병사는 여죄수와 함께 시내의 포장된 도로 한복판을 걸어갔다.
마부, 장사치, 요리사, 노동자, 관리들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
았다. 그 중에서 고개를 흔들며, '행실이 나쁘면 저런 꼴이 된다고. 우리와는 딴판이지.'하
고 생각하는 삶도 있었다. 아이들은 여죄수를 보고 무서워했으나, 그래도 두 사람의 병사가
뒤따르고 있었으므로 나쁜 짓을 못하려니 생각하고 가까스로 마음을 놓았다. 숯을 판 뒤, 선
술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시골서 온 농부는 여죄수 곁으로 다가와 성호를 긋고는 1코페이
카짜리 동전 하나를 건네주었다.
여죄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 쪽으로 쏠리고 있음을 느끼자, 그녀는 자기가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기도 했다. 감옥 안과 비교해 볼 때 싱그런 봄날의 대기는 그녀의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지만, 오랫동안 걸어보지 않은데다가, 딱딱한 죄수화를 신고 포도 위를
걷는다는 것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등만 내려다보며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발을 옮겨놓도록 조심했다.
어느 밀가루 가게 옆을 지날 때, 아무에게도 해를 입힌 일이 없었던 비둘기 몇 마리가
그 앞에서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있었는데 얼떨결에 하마터면 그 중 한 마리를 밟을 뻔했다.
암청색 비둘기는 푸드덕 날개를 치며 그녀의 귓전을 스치고 날아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
게 빙긋이 웃었으나 곧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
여죄수 카추샤 마슬로바의 과거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예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시골에서 살고 있는 두 자매 지주의 소유인 영지에서 일하고 있는 농노의 딸이었
다. 결혼도 못한 이 여자는 남편도 없는 처지이면서도 해마다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보통
시골에서 그러하듯이 영세만은 받게 했다. 그러나 바라지도 않았는데 생긴 필요 없는 자식
이라 해서, 또 일에 방해나 되는 자식이라 해서 젖을 통 먹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내 굶어
죽곤 했다.
다섯 명의 어린애가 이렇게 해서 죽었다. 모두 영세는 받았으나 젖을 먹이지 않았기 때문
에 굶어 죽고 말았다. 그러던 중에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어떤 집시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번째 아기는 계집아이였다. 이 아이도 똑같은 운명에 빠질 뻔했으나, 때마침 지
주인 두 자매 중 한 여자가 농장에 들렀기 때문에 용케 살아났다. 우유에서 비린내가 난다
고 젖소를 돌보는 일꾼들을 야단치러 온 것이었다. 뜻밖에도 외양간에 귀엽고 튼튼해 보이
는 갓난아이를 안은 산모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여지주는 우유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과 외양간에 산모를 들여놓은 것에 대해서 한 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은 다음, 그대로 돌아가려다가 갓난아기의 얼굴이 눈에 띄자, 동정심이 우러나 자기가
그 갓난아기의 얼굴이 눈에 띄자, 동정심이 우러나 자기가 그 갓난아기의 대모가 되겠노라고 제의했다.
그녀는 이 갓난아기에게 영세를 받게 한 후, 대녀가 된 그 아기가 차츰 불쌍하게 여겨져
산모에게 우유를 사 주기도 하고 돈을 주기도 했으므로, 그 계집아이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지주인 두 자매는 그 계집아이를 '스빠손나야(구원받은 아기라는 뜻)'라고 불러 주었다.
이 어린아이가 세 살 때, 그 어머니는 병을 앓다 죽고 말았다. 젖소를 돌보는 이 아이의
할머니에게는 손녀딸이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두 여인이 아이를 맡아 기르게 되었다. 까
만 눈의 이 아이는 점차 성장해 감에 따라 발랄하고 귀염성 있게 자라, 그 늙은 여자 지주
들의 마음에도 큰 위안이 되었다.
두 여지주 중 소피야 이바노브나인 동생은 마음씨가 고운 여자로 대모도이 동생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마리야 이바노브나인 언니는 성격이 좀 엄격한 편이어싿. 소피야 이바노브나
는 이 귀여운 계집애에게 고운 옷을 갖춰 입히고 교육도 시켜서 나중에는 예의 바른 숙녀로
기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이 아이를 부지런하고 튼튼한 하녀
로 길러내겠다고 하여 몹시 엄하게 다루었고 기분이 나쁠 때는 곧잘 벌을 주고 매질까지 하
곤 했다. 이같이 서로 상이한 양육 방식 속에서 이 소녀는 반은 하녀로서 반은 아가씨로서
자라난 형편이었다. 그래서 이름마저도 애칭인 첸카로도, 비칭인 카치카로도 불리지 않고 그
중간인 카추샤로 불렀다. 그리하여 카추샤는 바느질이나 방 청소를 하고, 성상도 닦고, 커피
를 볶아서 가루를 만들어 끓이기도 하고, 자질구레한 빨래도 하고, 때로는 여주인과 함께 앉
아 그들에게 책을 읽어 주기도 하였다.
여러 곳에서 그녀에게 청혼이 들어왔으나 그녀는 아무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청혼을 해온 사람들 모두가 그 날 벌어 그 날 먹는 품팔이꾼들이었으므로 편안한 지주의 집
생활에 젖은 자기로서는 그들에게 시집가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생활이 그녀가 열여섯 살 되던 해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만 열여
섯 살이 되었을 때, 여주인의 조카인 대학생이며 부유한 공작이 고모네 집을 찾아왔다. 그러
나 카추샤는 그 청년에게 자기 자신이 감히 고백할 엄두도 못 내면서 점차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어느 날, 바로 그 젊은 공작이 전쟁터로 나가는 길에 고모네
집에 들러 나흘 동안 머물렀는데, 출발하기 전날 밤에 그는 기어코 카추샤를 욕보이고 말았
다. 그러고는 그 다음날 백 루블짜리 지폐를 그녀의 손에 쥐어 주고는 훌쩍 떠나 버렸다. 그
가 떠난 지 다섯 달이 지나서야 그녀는 자기가 임신한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 뒤로 그녀는 모든 일이 귀찮아졌고 짜증이 났다. 어떻게 해야 앞으로 다가올 수모를
피할 수 있을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여주인들의 시중을 들 때도 그전과 달리 짜
증을 내게 되었고, 고분고분 말도 잘 듣지 않았을뿐더러, 자기도 모르게 발끈 성을 내기도
했다. 그러고는 이내 그것을 후회했지만 또다시 여주인에게 마구 대들며 집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떼를 쓰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여주인들도 그녀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는 그녀를 내쫓아 버렸다. 그
집에서 나오자 그녀는 어느 지방 경찰서장 집으로 들어가 하녀로 일했으나 그 곳에서도 석
달밖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쉰 살이나 먹은 늙은 경찰서장이 추근거렸는데 하루는
그녀에게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화가 치민 그녀는 멍텅구리 같은 놈이라느니 늙은 색마라
느니 하고 소리치다 가슴을 그만 떼밀었는데 그냥 벌렁 나자빠지자 그녀는 주인에게 난폭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그 집에서도 내쫓기고 말았다.
그러나 해산날이 가까웠으므로 마땅한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술장사를
부업으로 하는 과부인 시골 산파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해산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산파가
그 마을의 어떤 앓는 여자를 돌보아 준 탓에 산욕열을 카추샤에게 감염시켜 갓난 사내아이를
양육원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갓난아이를 데리고 간 노파의 이야기로는
그 아기는 양육원에 도착하자마자 곧 죽어 버렸다고 했다.
카추샤가 산파집에 가서 살게 되었을 당시 그녀가 갖고 있던 돈은 전부 12루블이었는데
그건 그녀를 유혹한 공작이 그녀의 몸값으로 준 백 루블과 일을 해서 번 27루블이었다. 그
러나 그녀가 산파집에서 나왔을 때는 단돈 6루블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돈을 아낄 줄 모
르는 성격인지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돈을 물쓰듯 한 것은 물론이요, 아무나 간청하는 대로
선뜻 내주곤 했다. 산파가 두 달 동안의 하숙비로서-식비와 차값을 포함해서 -40루블을 받
아갔고 갓난아기를 양육원에 보낸다고 25루블, 또 암송아지를 산다고 해서 40루블을 꾸어
줬으며, 나머지 20루블은 옷가지와 자질구레한 주전부리 등으로 달아났다 그래서 카추샤가
회복되었을 때 그녀의 수중에는 돈이라곤 한푼도 남지 않아 곧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어느 산림 감독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산림 감독 역시 결혼한 몸
인데도 불구하고, 이전의 경찰서장처럼 들어가는 첫날부터 카추샤에게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사내가 끔찍할 정도로 징그럽고 보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카추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교활한 사내였다. 게다가 그는 주인이었으므로 아무데고 그가 원하는 곳으로 그녀를
끌어내서는 기회를 노려 끝내 욕망을 채우고야 말았다.
이를 눈치챈 산림감독의 아내는 어느 날 자기 남편과 카추샤가 단둘이 한방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카추샤에게 미친 듯 달려들어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추샤도 가만히 있지를 않아
둘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고 카추샤는 결국 월급 한푼 못 받은 채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카추샤는 시내에 사는 아주머니네 집으로 갔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제본업자로서 전에는
제법 잘 살았지만 지금은 단골 거래인들을 몽땅 잃어 뭐든지 팔아서 마셔 버리는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손수 조그마한 세탁소를 경영해서 아이들과 함께 거의 폐인이 되다시
피 한 남편을 섬기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카추샤더러 자기 집의 세탁부로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아주머니 집에서 일하고 있는 세탁부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
고서는 차마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하녀의 일자리라도 찾으려고 소개소에 가보았다.
그녀는 두 아들이 중학생인 귀부인의 집에서 하녀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들어간 지 1주일
도 안 되고 코 밑에 수염이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중학교 6학년짜리 맏아들 녀석이 공부를
아예 집어치우고 카추샤에게 미쳐서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것마저 그만두어야 했다. 그 어머
니는 모든 책임을 카추샤에게 씌우고 쫓아냈다. 좀처럼 새로운 일자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녀자리를 알선해 주는 직업 소개소에 갔다가 우연히 그 곳에서 토실토실
한 손에 보석반지와 팔찌를 요란스럽게 낀 어떤 부인을 만났다. 일자리를 찾고 있는 카추샤
의 딱한 처지를 듣고 난 그 부인은 자기의 주소를 친절히 알려 주면서 한번 자기 집으로 찾
아오라고 했다. 카추샤는 그 집으로 찾아갔다. 반갑게 맞은 그 부인은 그녀에게 고기만두며
향긋한 술을 대접한 뒤 하녀에게 쪽지를 건네 주며 어디론지 심부름을 보냈다.
그 날 저녁, 흰 머리를 길게 기르고 턱수염이 난 키가 후리후리한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 노인은 들어오자마자 카추샤 옆에 붙어 앉더니 눈을 번뜩이며 벙글벙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치근치근 농을 걸어 왔다. 잠시 후 카츄샤는 여주인이 사내를 옆 방으로 불러내어 '시골서 갓
올라온 숫처녀예요.'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카추샤를 부르더니, 그
남자는 소설가인데 부자라서 마음에 들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사준다고 일러 주었다. 그녀
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소설가는 앞으로 자주 만날 것을 약속하고 25루블을 주고 갔다.
그러나 아주머니에게 빌린 돈을 갚고 새 옷과 모자와 리본을 사니깐 25루블은 금방 없어지
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 소설가는 다시 마슬로바를 불러냈다. 그녀는 갔다 그는 또 25루블을
주면서 따로 방을 얻어 이사하라고 권했다.
마슬로바는 이 소설가가 얻어 준 셋방에서 사는 동안에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쾌활한 점원
과 서로 좋아 지내게 되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솔직히 소설가에게 고백하고, 조그마한 외딴
집으로 점원과 함께 이사했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했던 점원은 한 마디 말도 엇 그녀를
버리고 니즈니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혼자 남게 되었다. 그녀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
가기로 작정했으나 만사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열 경찰관이 황색 면허(매춘부 카
드)와 정기 검진을 받지 않고서는 그러한 생활을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다시 아주머니에게로 가야만 했다. 아주머니는 최신 유행의 의상으로
단장하고 망토를 걸치고 모자까지 쓴 그녀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존경하는 빛을 보이며 반색
을 하고 맞아들였고, 이제는 그녀가 제법 굉장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여 감히 세탁부가 되
란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카추샤도 지금은 세탁부가 되거나 안 되거나 하는 따위
의 일은 무제도 되지 않았다. 파리한 세탁부들-그중에는 이미 폐병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이 가겟방에서 대단히 힘든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들을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까
지 생겼다. 그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노상 문을 열어젖뜨리고 30도나 되는 숨막히는 비누
증기 속에서 바싹 마른 팔로 빨래와 다리미질을 하고 있었다. 자기도 하마터면 그런 지옥
같은 처지에 빠질 뻔했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말
하자면 카추샤가 한 사람의 후원자도 없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사창가에서 여자를 소개하
는 뚜쟁이를 만나게 되었다.
카추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최근 그 점원에게 버림받은 뒤에는
차츰 술까지 입에 대는 버릇이 생겼다. 술을 마시게 된 것은 비단 술맛을 알게 되어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술이 지금까지 그녀가 겪어 온 모든 비참한 신세를 모조리 잊게 해주고
맑은 정신으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안정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녀는 언제나 풀이 죽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뚜쟁이 여자는 아주머니에게 먼저 한턱 크게 내고 카추샤에게 잔뜩 술을 마시게 하더니
화려한 도시에 있는 멋들어진 유곽에 들어가 돈을 벌면 수입도 좋고 생활도 아주 편하다며
온갖 감언 이설로 그녀를 꾀었다. 카추샤는 양자 택일을 해야 했다. 치근거리는 주인 남자의
강요에 못 이겨 남몰래 간통을 해야 하는 천한 하녀짓을 하느냐, 아니면 생활이 보장되고
법룰로 공공연하게 허락된 상황에서 돈벌이도 잘 되는 매음 생활을 닥치는 대로 하느냐의
갈림길이었다. 그녀는 후자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처
음을 배신한 사나이와 자기를 버리고 간 점원과, 그리고 그 외에 자기를 괴롭힌 모든 사람
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그녀의 마음을 충동하고 최종적인 결심을 내리게 한 하나의 원인은, 자기만 잘하면
비로드나 비단으로 만들어진, 어깨와 팔을 온통 드러내는 무도회 의상을 마음내키는 대로
맞춰 입을 수 있다는 뚜쟁이의 말이었다. 검은 비로드로 장식한 밝은 황금빛 비단옷,
등과 앞가슴을 깊게 판 깃 없는 야회복을 입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을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기의 신분증을 내주고야 말았다(자기의 몸을 내놓았다는 뜻).
그날 밤 뚜쟁이는 마차를 얻어 그녀를 마담 키타예바가 운영하는 유명한 유곽으로 데리고 갔다.
그 때부터 마슬로바는 하느님과 인간의 온갖 계율에 위배된 죄악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
다. 그 생활은 오직 대중의 행복만을 염려하는 정부 당국의 허가뿐만 아니라 비호까지 받아
가면서 영위하고 있는 수십 수백만 여자들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못된 병을 얻음으
로써 남보다 일찍 늙어버리고 끝내는 죽고 마는 그런 생활이었다.
광란의 밤이 지나면, 아침과 낮은 깊은 잠에 빠졌다가 오후 3,4시가 넘으면 그 때서야 더
러운 잠자리에서 지친 듯 몸을 끌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술 기운을 떨쳐 버리려고 소다수와
커피를 마시고 화장옷이나 잠옷, 재킷이나 가운만 걸친 채 방 안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커튼 뒤에서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든지, 쉬어 버린 목소리로 서로 말다툼을 한다든지 하며
제각기 가지각색들이었다. 그러고 난 다음 몸이나 머리를 다듬고, 광대처럼 화장도 하고, 향
수를 마구 뿌린다. 또 옷을 걸쳐 입고 본다. 이럴 때면 영락없이 포주와 옷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다. 거울에 이러저리 몸을 비춰보고는 뺨에 분을 칠하고 눈썹을 그리고, 그러고 나서
는 기름지고 당분이 많은 식사를 한다. 그 다음 몸뚱이가 다 비쳐보이는 화려한 비단옷으로
몸을 감싸고 밝고 멋지게 장식된 눈부시게 황홀한 홀로 나간다. 손님이 모여든다.
음악, 춤, 과자, 술, 담배, 그리고 음락-상대는 젋은 사람, 중년 남자, 애송이, 늙은이, 독신자,
기혼자, 장사치, 점원,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타타르인, 부자, 가난뱅이, 건강한 사람, 군인,
문관, 대학생, 중학생 등등 온갖 계급과 연령, 갖가지 성질의 남자들이 다 있다. 소리 지르고,
농담하고, 싸우고, 욕지거리하고, 음악과 담배와 술, 다시 술과 담배와, 그리고 음악이 저녁부터
밤이 샐 때까지 계속된다. 아침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해방되어 또 깊은 잠에 빠져 버린다.
이러한 나날이 1주일 동안 연속적으로 되풀이된다. 주말이 도면 이들은 그 지역 담당 경찰서
로 출두한다. 이 경찰서에서는 진료 담당 의사인 사내들이 어느 때는 몹시 거드름을 피우며
엄숙하게 어느 때는 장난삼아 쾌활한 태도로 범죄를 막기 위하여,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까
지 하늘이 부여한 수치심을 무시하면서 이 여자들을 진찰함으로써 1주일 동안 줄곧 그들이
남자와 관계한 죄악의 행위를 다시 계속해도 좋다고 새로운 허가를 내주게 된다. 이리하여
다시금 똑같은 1주일이 계속된다. 그런 식으로 이러한 생활이 여름이나 겨울이나 평일이나
공휴일이나 상관없이 되풀이되곤 한다.
이러한 생활을 카추샤는 7년이나 보냈다. 그 동안 그녀는 유곽을 두 번 옮겼고, 병원에 한
번 입원했었다. 창녀 생활로는 7년째가 되고, 처음 타락했을 때부터 친다면 8년째가 되는 26
살 때 우연히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미결 감방에 수용되어,
6개월 동안이나 살인범, 강도범 등 온갖 여죄수와 함께 갇혀 있다가 이제야 가까스로 법정
으로 끌려나온 것이다.
3
먼 길을 걸어오느라고 완전히 지쳐버린 마슬로바가 호송병들과 같이 지방 재판소 건물 가
까이 이르렀을 무렵, 때마침 그녀를 유혹하여 타락의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자 대모의 조
카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네플류도프 공작은 아직도 자기 집에서 보료가 깔린 폭신폭신하
고 두툼한 스프링이 아주 좋고 높직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앞가슴에다 주름이 잘
잡힌 깨끗한 흰 리넨 잠옷 깃을 펼친 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다. 그는 무심히 허공
을 바라보면서 오늘 해야 할 일과 전날에 있었던 일들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부호이고 사회적 명망이 높은 코르차긴 일가의 딸과 결혼하리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일과, 그 집에서 지낸 간밤의 일을 곰곰 생각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 탄 담배 꽁초를
내던졌다. 그리고는 반짝거리는 은담뱃갑 속에서 또다시 한 개비를 꺼내 몰려다가 언뜻 생
각을 돌려 미끈한 두 다리를 침대 밑으로 천천히 내려 슬리퍼를 찾아 신은 다음, 떡 벌어진
어깨에 비단 실내복을 걸치고 잰 걸음으로 성큼성큼 침실 옆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엘릭시
르 약 냄새와 오데콜롱과 머릿기름 등의 인공적인 향기가 가득 배어 있는 화장실에서 그는
특제 치분으로 군데군데 금으로 때운 이빨을 깨끗이 닦고, 향로를 탄 물로 양치질을 하고는
몸을 구석구석 말끔히 씻은 다음, 몇 가지 다른 타월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향기 좋은 비누로 손을 씻고, 길게 기른 손톱을 여러 가지 브러시로 정성스럽게 닦고
커다란 대리석 세면대에서 얼굴과 굵은 목덜미를 씻고 나서, 이번에는 샤워기가 마련되어 있는
침실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기름지고 건장한 흰 몸뚱이를 찬물로 씻고, 커다란
목욕 타월로 몸의 물기를 없애고, 곱게 다리미질한 속옷을 입고 거울처럼 반짝반짝 광을 낸
구두를 신은 다음, 화장대에 앉아 두 개의 브러시를 양손에 나누어 쥐고 짧고 곱슬곱슬한
검은 턱수염과 관자놀이에서 좀 성겨지기 시작한 곱슬머리를 빗어 올렸다.
그가 평상시에 사용하고 있는 장신구는 셔츠, 양복, 신발, 넥타이핀, 커프스 단추
할 것 없이 모두가 최고급품으로써 점잖고 수수하고 견실한 값진 물건들뿐이었다.
한 다스나 되는 훌륭한 넥타이와 핀 가운데서 손에 잡히는 대로 골라 맸다.
하나같이 지금은 대수롭지 않으나, 전에는 새롭고 진귀해서 마음에 들었던 것들이었다.
네플류도프는 미리 깨끗이 손질하여 의자 위에 걸쳐 둔 옷을 입고 산뜻하게 차린 다음,
어제 세 하인들이 나무쪽으로 모자이크한 마루를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은 길쭉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는 커다란 참나무 찬장과 역시 같은 커다란 식탁이 있고, 흡사 사자의 발처럼 조각된,
널찍이 벌려진 식탁 다리들이 육중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모노그램(이름의
머리글자를 합해서 만든 글자)이 유난히 크게 새겨져 있고 빳빳이 풀을 먹인 식탁보가 깔려
있는 식탁 위에는 향긋한 커피가 들어 있는 은제 커피 잔과, 역시 은으로 만든 설탕 그릇,
끓인 크림이 든 주전자와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롤빵과, 살짝 구운 빵과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 빵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릇들 옆에는 갓 배달된 편지와 조간 신문과 <
르뷔 데 되 몽드(두 세계 평론)>지의 최근호가 놓여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편지를 집으려고 했을 때, 식당에서 복도로 통하는 문으로부터 레이스가 달린 모자가
앞가르마를 감추다시피 눌러 쓴, 상복 차림을 한 몸집이 뚱뚱한 중년 부인이 미끄러지듯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이 집에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네플류도프의 어머니의 하녀였던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라는 여자였는데, 지금도 가정부로서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네플류도프의 어머니를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외국에서 10년간
이나 지냈기 때문에, 그 모습이나 태도에 귀부인 같은 데가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네플류도프와 함께 살았고, 그가 소년이었을 때 미첸카(드미트리의 애칭)라고 불리던 무렵
부터 알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잘 잤소,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뭐 새로운 뉴스라도 있소?" 네플류도프는 농담조로 물
었다.
"공작 마님한테서 아가씨한테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하녀가 가
지고 왔는데 아까부터 제 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편지를 내
주면서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았어. 곧 읽어 보지."
편지를 받아 쥐며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의 미소의 뜻을 알아
채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미소는 이 편지가 지금 네플류도프와 혼사 말이 있는 공작 영양 코프차기나로부터
온 게 틀림없다는 눈치였다. 미소로 나타난 그녀의 상상이 네플류도프의 기분을 자못 불쾌
하게 만들었다.
"그럼 좀 기다리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리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식탁 위에 잘못 놓
여져 있는 빵가루 터는 솔(식탁용)을 제자리에 옮겨 놓고는 살며시 식당에서 빠져나갔다.
네플류도프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가 갖다 준 향수 냄새가 풍기는 봉함 편지를 뜯어 읽
기 시작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저의 책임을 다하려고 말씀드립니다.
가장 자리가 고르지 않은 두꺼운 회색 편지지에 또렷하고 여유 있는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늘 4월28일, 당신은 배심원으로 재판소에 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제 당신이 여느
때처럼 경솔하게 약속하신, 저희들이나 콜로소프 일가와의 미술 전람회 구경은 못 가시게
되었습니다. 만일 제시간에 출정하지 않으시면 말을 사는 데도 아까워하시는 300루블이란
돈을 벌금으로 지방 재판소에 바치셔야 한다면서요. 저는 어젯밤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이
일을 생각해 냈어요. 그럼 아무쪼록 잊지 마시기를.
M.코르차기나
편지 뒷면에는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은 추신이 있었다.
오늘 만찬회에서 밤늦게까지라도 당신의 자리는 따로 잡아 두시겠다고 하신 어머니 말씀
을 전해 드립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꼭 와 주세요.
네플류도프는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편지는 벌써 두 달에 걸쳐서 공작 양양
코르차기나가 그에게 씌우고 있는 교묘한 올가미 수법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그
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점점 더 강하게 자기에게 옭아매려 하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그리 젊지 않은 사람들이나 서로 열렬히 사랑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결혼에 대해서
망설이는 법이지만, 네플류도프에게는 그러한 이유 외에도 설사 결혼할 결심을 했다손 치더
라도 당장에 구혼을 할 수 없었던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10년 전에 순진한 카추샤를 유혹하고는 내버린 데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자기의 결혼에 방해가 되리라고는
꾸메도 생각지 않았다. 바로 그 이유라는 것은 그 무렵 그가 어느 유부녀를 우연히 알게 되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자기는 이미 그 부인과의 관계가 끝난 줄로 알고 있었으나
그 부인은 아직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네플류도프는 여자에 대해서 몹시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이런 성격이 그
유부녀로 하여금 그를 정복하려는 욕망이 생기게 하였다. 그 부인은 네플류도프가 선거 때
마다 찾아가는 그 군의 귀족 회장의 부인이었다. 이 부인이 그를 유혹해서 관계를 맺게 되
었는데 그녀 쪽에서 나날이 깊은 욕정으로 네플류도프를 빠져들게 했으나 이쪽에서는 점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처음에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없어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는 부인에게 죄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 부인의 승낙 없이는 도저히 관계를 끊을 수가 없
었다. 바로 이것이 네플류도프가 공작 양양 코르차기나에게 구혼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구혼할 주게가 못 된다고 생각하게 된 원인이었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식탁 위에는 그 부인의 남편한테서 온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 필적과
소인을 보자 네플류도프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느끼곤 하던 힘
의 솟구침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흥분은 공연한 것임을 알았다. 왜냐하면 네플류도프의 중
요한 영지가 있는 그 군의 귀족 회장인 그 부인의 남편이 5월 말경에 열릴 임시 지방회의에
꼭 출석하여 이 회의에서 학교와 철도 지선 부설 문제에 대하여 반대파의 맹렬한 저항이 있
을 것이 확실하므로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는 것이 서신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귀족 회장은 도량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약간의 동지를 규합하여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와 함께 대두한 반동 세력과의 투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가정 생활의 불행에 관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언젠가는 치러야 할 모든 괴로운 순간들을 상기했다.
언젠가 남편이 눈치채게 되었을 때의 결투를 각오하고, 그럴 때 자기는 허공에다 대고 총을
발사하겠다고 생각한 일과, 부인이 절망한 나머지 정원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지려고 뛰쳐
나간 것을 자기가 뒤쫓아가서 말리는 무서운 장면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은 갈 수가 없다, 그녀로부터 회답을 받기 전까지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네플류도프는 번민했다. 그는 1주일 전에 그녀에게 자기 죄에 대한 대가로서 무엇이든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부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영원히
끊어 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정적인 편지를 써서 보냈었다. 그러고는 그 회답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으나 여지껏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회답이 오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좋은 징조이기도 했다. 만일 그 부인이 결별할 생각이 없다면 벌써 회답을 보냈거나
전처럼 몸소 달려왔거나 했을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요즘 그 지방의 어느 장교가 열심히 그 부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런 소문은 질투심을 일으켜 그를 가슴 아프게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를 억누르고 있던 책략으로부터 가까스로 해방된다는 희망 때문에 기쁘기도 했다.
또 한 장의 편지는 영지 관리인한테서 온 것이었다. 토지 상속권을 확정하기 위해서 네플
류도프가 직접 영지의 마을로 와주어야 하겠다는 것과, 그 밖에 토지는 공작 부인의 생존시
와 같이 관리할 것인지, 또는 돌아가신 공작 부인에게 관리인이 이미 권했고 또 현재 젊은
공작께도 권하고 있는 방법, 즉 농기구를 확장해서 여태까지 농민에게 빌려 주었던 모든 토
지를 이쪽에서 직접 경작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관리인의 편지에 의하면 이런 경영 방법이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초하룻날에
보내야 할 3천 루블의 송금이 약간 지체될 것에 대하여 사과했고, 돈은 다음 번에 틀림없이
보내 드릴 예정이며,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농민들이 점점 약아져서 당국의 힘을 빌려
강제 수금이라도 하지 않는 한 돈을 거두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이 편지는 네플류도프를 한편으로는 줄겁게도 했고 또 한편 불쾌하게도 했다. 막대한 재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젊었을 때 스펜서의 열렬한 숭배자였고,
특히 자기 자신이 대지주였기 때문에, 정의는 개인의 토지 사유를 허용치 않는다는
스펜서의 이론<사회정학>에 감동된 그로서는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년 시절의 솔직성과 결단성 때문에 그는 그 때 토지가 사유 재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논문에서도 이에 관해 논술했고, 실제로 그 당시 자기의
이런 신념에 배반하면서까지 토지를 소유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토지의 일부분
(그 토지는 어머니의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것으로 그 자신에 소속되는 토지였다)을
농민들에게 나우어 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속받은 유산으로 대지주가 된 지금 일찍이 10년 전에 아버지의 유산 2백 정보에 대해서
단행한 것처럼 자기의 사유 재산을 포기해 버리든가, 아니면 과거의 자기 사상이 모두 그릇된
것이라고 인정하고 침묵을 지키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토지 이외에 그에겐 아무런 생활 수단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를 택할 순
없었다. 관청에 들어가기는 싫었고, 더군다나 사치스런 생활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서 그
것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젊었을 때 갖고 있던 굳은 신념도, 고단성
있는 결단력도, 세인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야심도 희망도 이제는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
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를 태갛여 그 닷 스펜서의 <사회정학>에 대하여 감며을 받았고,
훨씬 뒤의 일이긴 하지만 헨리 조지의 저서중에서도 그 확실한 논거를 발견한 그로서는
토지 사유의 부조리에 관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관리인의 편지는 그에게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4
커피를 다 마시자, 테플류도프는 언제까지 출정해야 하는가를 통지서에서 확인할 겸 공작
영양의 서신에 답장을 쓰려고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로 가자면 아틀리에를 지나가야만 했다.
아틀리에엔 그리다 만 그림을 뒤집어 놓은 화가가 세워져 있었으며, 여러 가지 데생도 걸려
있었다. 그가 2년 동안이나 고심하며 그린 유화와, 여러 가지 데생과, 아틀리에 전체의 조망
은 그림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무력감을 환기시켜 주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더욱 강하
게 그런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감정을 너무나 섬세한 자기의 감수성 탓이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어쨌든 그 의식은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7년 전에 그는 자기가 그림에 대해 천부적 소질이 있다고 믿고 군복무를 내동댕이쳐 버렸
으며, 예술가적 높은 견지에서 얼마간 경멸의 눈으로 다른 모든 인간 활동을 보아 왔던 것
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는 자기에게 그런 자격조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일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모든 일이 그에게는 불쾌했다.
그는 침울한 마음으로 아틀리에 안의 모든 사치스런 시설을 둘러보고는 언짢은 기분이 되어
이내 서재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의 서재는 아주 뛰어난 장식과 안락과 편의를 두루 갖춘 넓은 방이었다.
통지서는 '지급'이라고 써 붙인 큰 테이블 서랍 속에서 곧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재판소에
2시까지 출두하라고 적혀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테이블에 앉아 공작 영양에게, 초대해 주셔
서 감사하게 생각하며 식사 전까지는 될 수 있는 대로 가겠다는 답장을 썼다가 곧 그것을
찢어 버렸다. 너무 다정한 것 같았기때문이었다. 다시 한 장 썼으나 이번에는지나치게 냉정
하여 거의 모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는 또다시 찢어 버리고 벽에 붙은 벨을 눌렀다.
그러자 회색 앞치마를 걸친 시무룩한 표정의 나이 든 하인이 나타났다. 그는 구레나룻만 남기
고 깨끗하게 면도질을 하고 있었다.
"마차를 부르게."
"네."
"그리고 저쪽에 코르차긴 댁에서 온 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오
늘 밤 되도록 참석하겠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예의에는 어긋나지만 도무지 써지지 않으니 별수 없지. 그러나 어차피 오늘 밤에 만나
게될 테니까.'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하면서 외투를 입으러 갔다.
옷을 갈아입고 현관에 나갔을 때에는 벌써 눈에 익은 고무바퀴가 달린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제 나리께서 코르차긴 공작 댁에서 막 떠나신 후에 제가 마중을 나갔습죠." 마부는 루
바시카의 흰 깃 속에서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목덜미를 반쯤 돌리며 말했다. "그랬더니 문
지기가 방금 돌아가셨다고 일러 주더군요." '마부까지 나와 코르차긴 일가와의 관계를 알
고 있구나.'하고 네플류도프는생각했다.
그러나 코르차긴 공작 영양과 결혼할 것인가 안 할것인가 하는, 최근의 그의 마음을 휘잡고
있던 미결된 문제가 다시금 그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른 여러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 역시 아무런 해결도 지을 수 없는것이었다.
대체로 결혼을 해서 이롭다고 생각되는 점은, 첫째로 결혼은 가정의 단란 이외에도 성생
활의 불규칙성을 없애고 도덕적인 생활을 선도하는 가능성을 준다는 데 있다. 둘째로는 이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네플류도프는 가정, 즉 이들이 현재의 그의 무의미한
생활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있었다.
이것이 대체로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다.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유는 첫째로
이미 젊은 시절을 넘긴 독신자들에겐 공통적인 현상인 자유를 박탈당하리라는 공포심과, 둘
째로는 여자의 신비로운 본질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였다.
특히 미시(코르차긴 공작 영양 이름은 마리야였으나, 특정한 계층의 다른 모든 가정에서
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이러한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와의 결혼이 이롭답고 생각되는 이유
는, 첫째로 그녀는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옷 매무새로부터 말솜씨라든가 걷는 모습,
웃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보통 처녀들보다 뛰어난 데가 있었다. 그렇다고 어딘가 특출난 데
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품위가 있다'는 것이었다-그는 이런 특질을 표현할 만한 다른 말
을 못 찾았으나 아무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둘째로는 그녀가 누구보다도 자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 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그
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뛰어난 장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
은 네플류도프로서는 그녀의 지성과 판단력의 정확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편 미시와의 결혼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첫째로 미시보다 훨씬 많은 장
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녀보다도 더 적합한 처녀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로 그녀는 벌써 27세니까, 과거에 여러 번 연애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
이런 생각을 하면 네플류도프는 괴로웠다. 비록 과거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녀가 자기 이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장래에 자기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측하지는 못했는지 모르지만 전에 다른 남자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그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긍정과 부정의 엇갈린 생각이 서로 비등했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는 스스로 비
웃으면서 자기 자신을 '부리단의 노새'('재갈 물린 노새', 즉 결단성 없는 사람을 비유한
우화)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리단의 노새'를 면하지 못하고 두 더미 건
초 중에서 어느 것부터 먹어야 좋을지를 몰랐다.
"어쨌든 마리야 바실리예브나(귀족 회장의 부인)로부터 회답을 받아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단 말이야."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렇듯 부득이 결심을 늦추어야 했고, 또 늦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자, 그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어쨌든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의 마차가 소리도 없이 아스팔트로
포장된 재판소 앞 주차장에 닿았을 때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제 나는 내가 평소에 하던
대로, 그리고 의당 해야 한다고 여겼던 대로 성심 성의껏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이런 의무는 재미있을 때가 흔히 있단 말이야."하고 그는 자기 자신을 타이
르면서 수위 옆을 지나 재판소의 입구로 들어갔다.
5
네플류도프가 재판소에 출정했을 때 재판소 복도는 벌써부터 슬렁거리고 있었다. 위임장
과 서류를 든 수위들이 이리저리 바삐 오가고 있었다.그 중에는 마룻바닥에 발을 질질 끌면
서 종종걸음으로 숨을 헐떡이며 서성대는 사람도 있었다. 정리와 변호사와 판사들이 이리저
리 왔다갔다했으며, 청원인과 감시자가 따르지 않은 피고들은 순서를 기다리면서 기운 빠진
태도로 담장 근처를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그 근처에 앉아 있기도 하였다.
"지방 재판소 법정은 어딥니까?" 네플류도프가 한 간수에게 물었다.
"무슨 법정 말입니까? 민사 법정과 형사 법정이 있습니다만."
"나는 배심원이오."
"그럼 형사 법정입니다. 진작 그렇게 말씀하셔야죠.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셔서 왼쪽으로
돌아가시면 두 번째 문입니다."
네플류도프는 그가 가르쳐 준 대로 따라갔다. 그 문 앞에는 두 사나이가 개정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한 사람은 키가 큰 뚱뚱한 상인으로서 보기에도 호인답게 생겼고, 벌써 한잔 들
이키고 왔는지 무척 혈색이 좋아 보였다. 또 한 사람은 유대인 계통의 점원이었다. 두 사람
은 양털의 시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네플류도프는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여기가
배심원실이냐고 물었다.
"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댁도 배심원인가요?" 상인은 유쾌한 듯 눈을 껌벅이며 호
인다운 태도로 물었다. "그럼, 우린 함께 수고하게 되었군요." 네플류도프가 그렇다고 고개
를 끄덕이자, 상인은 말을 계속했다. "나는 제2급 상인(혁명 전 세금의 납입 액수에 따라 상
인을 두 계급으로 나눔) 바클라쇼프입니다."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넓적하고 유연한 손을 내
밀며 말했다. "수고가 많겠습니다. 실례지만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네플류도프는 자기 이름을 밝히고 배심원실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배심원실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10여 명쯤 모여 있었다. 의자에 앉은 사람
도 있고 서로 힐끗힐끗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 방금 도착한 듯했다. 군복을 입은 퇴역
장교가 한 사람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모두 프록 코트나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단 한 사
람만 소매 없는 농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할 일을 두고 와서 곤란하다고 푸념을 하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
는 중요한 사회적인 어떤 의무를 수행한다는 기대감으로 일종의 자부심을 풍기고 있었다.
배심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사람도 있었으나, 그 중에는 그저 짐작으로 상대방의 신분
을 추측하면서 날씨가 어떻다느니 이른 봄이 어떻다느니 하다가 눈앞에 다가온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네플류도프와 아직 인사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 다퉈가며 자기 소개를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영광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플류도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동석할 경우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런 일을 매
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누가 그에게 어째서 자기 자신을 뭇 사람들보다 우월하
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아마 그 자신도 대답할 수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이때껏 그의 생
활에서 이렇다 할 만한 특성을 하나도 보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한다든가, 또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셔츠나
옷이나 넥타이나 커프스 단추 따위가 모두 일류 상점에서 산 물건이라는 것들이 결코 우월성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우월성을
확고하게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고, 그렇지 않
을 때는 모욕감을 느끼곤 하였다. 그런데 배심원실에서 공교롭게도 불손한 대우를 받음으로
써 불쾌감을 맛보게 되었다.
배심원들 중에서 마침 네플류도프가 아는 사람이 하나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라는 사람으로(네플류도프는 이제까지 한번도 그의 성을 알려고
한 적이 없으며,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전에 그의 누님네 아이들의 가정 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이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는 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어느 중학교 교사로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의 추근거리는 태도라든가, 자기 자신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너털웃음이
라든가, 네플류도프의 누이가 으레 말했던 것처럼 '서민인척하는' 언어나 동작이 몹시 못마
땅했다.
"저런, 당신도 끌려나오셨군요."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는 너털웃음을 치며 네플류도프를 맞
았다. "피할 수 없었던가 보죠?"
"피하다뇨. 그런 건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소." 네플류도프는 냉엄하고 못마땅한 어조로
대꾸해싿.
"그것 참, 시민다운 미덕이시군요! 그렇지만 좀 더 두고 보십시오. 배는고파 오고, 졸려도
자지 못하게 하면 당신도 아마 그런 태연한 소릴 못하게 될 겁니다." 표트르 게라시모비치
는 더욱 큰 소리로 웃어 대며 말했다.
'이러다간 저 머저리 같은 놈에게 자네라는 말까지 듣게 되겠는걸.' 네플류도프는 생각했
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는 육친이 모두 사망했다는 부고를 방금 받았을 때가 아니면 지을 수
없을 그런 침통한 빛을 얼굴에 띠고 그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는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하
며 수염을 말쑥하게 깎은, 뭔가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는 신사를 에워싼 사람들 쪽으로 가까
이 갔다. 이야기하면서 재판관과 유명한 변호사들을 성을 빼고 이름과 부칭으로만 부르고
있었다.
유명한 어떤 변호사가 놀라운 재간으로 사건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상대편의 노부인은
막대한 금액을 억울하게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경위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재적인 변호사야!"하고 그는 말을 맺었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자기의 의견을 말하려는 사람도 있
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자기 혼자만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듯이 다른 사
람의 말을 가로막아 버리고 혼자서만 떠들어댔다.
네플류도프는 늦게 온 편이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재판관 한 사람이 아
직껏 출정하지 않아 개정이 지연되었다.
6
재판장은 일찍부터 재판소에 나와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뚱뚱한 사나이로,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있었으나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방탕한 생활을 즐
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간섭하지 않는 주의였다. 오늘 아침에도 그는 스위스 태생인
여자 가정 교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 가정 교사는 지난 여름 동안 그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남러시아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여행하는 도중이라서 3시에서 6시 사이에 시내의 '이탈리아' 호텔에서 기다리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그는 작년 여름 별장에서 로맨스를 맺었던 이 빨간 머리의 클라라 바실리예브나를
6시 전에 찾아가려면 오늘의 재판을 될 수 있는 대로 일찌감치 시작해서 얼른 끝내고 싶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문을 잠그고 서류장 밑의 서랍에서 아령을 두 개 꺼내어 위
로, 앞으로, 옆으로, 밑으로 20번씩 운동한 다음, 아령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무릎을 세 번
가볍게 굽혔다.
'냉수욕과 체조만큼 건강에 좋은 건 없지.' 그는 무명지에 금반지가 끼어 있는 왼손으로
오른팔의 튀어오른 상박근을 만져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음엔 선회 운동을 할 차례
엿으나(장시간 법정에 앉아 있을 재판 전 그는 언제나 이 두 가지 운동을 하는 습관이 있었
다), 그 때 문이 덜컹 흔들렸다. 누군가 문을 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재판장은 얼른 아령
을 제자리에 집어넣고 문을 열었다.
"아, 실례했소." 그가 말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금테 안경의 키가 작은 배심 판사였다. 그는 어깨를 쳐들고 얼
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트베이 니키티치가 또 안 나왔습니다." 판사가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아직 안 나왔소?" 재판장은 법의를 입으면서 응답했다. "그 사람 언제나 늦는단 말이야."
"정말 기가 막히는군. 염치도 없는 사람이야." 판사는 또다시 화를 내면서 의자에 앉아 담
배를 꺼냈다.
성격이 매우 꼼꼼한 이 판사는, 오늘 아침에도 아내와 한바탕 말다툼을 치르고 나왔다. 그
까닭은 한 달치 생활비를 아내가 기한도 되기 전에 몽땅 써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다
음 달치 생활비를 미리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자기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부부 싸움이 벌어졌다. 아내는 정 그렇다면 식사 준비도 할 수 없으니 집에서 식사할 생각
일랑 아예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집을 뛰쳐나와 버렸으나, 아내가 그 협박을 정말로 실
행할지도 모른다고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아내는 무슨 짓이든지 할수 있는 여자였다.
'저 사람처럼 도덕적이며 올바른 생활을 해야만 되는데.'하고 그는 건강하고 쾌화하며 선량한
재판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재판장은 두 팔꿈치를 넓게 펴고 금빛 몰로 수놓은 제복
깃 양쪽 위의 숱이 많고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을 희고 고운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저
사람은 항상 만족한 듯이 명랑해 보이는데 나는 어째서 이처럼 괴롭기만 할까?'
서기가 들어와서 무슨 사건 서류를 건네 주었다.
"수고했네."하고 나서 재판장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어떤 사건을 먼저 처리할까?"
"글쎄요. 독살 사건이 좋지 않을까요?" 서기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담담한 투로 말
했다.
"그럼 좋아, 독살 사건부터 하기로 하지."하고 재판장은 말했다. 그 사건이라면 4시까지
끝내고 퇴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마트베이 니키티치는 아직도 안 나
왔나?"
"아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브레베는?"
"나오셨습니다." 서기가 대답했다.
"그럼 그를 만나면 독살 사건부터 시작한다고 말해 주게."
브레베는 오늘 이 공판에서 논고를 하기로 되어 있는 검사보였다.
복도로 나오자 서기는 브레베를 만났다. 그는 어깨를 치켜올리고 제복 단추를 열어젖뜨린
채 겨드랑이에 서류 가방을 끼고, 구둣소리를 딱딱내가면서 팔을 크게 흔들며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미하일 페트로비치께서 준비가 다 되셨느냐고 여쭈어 보라 하셨습니다." 서기가 그에게
물었다.
"준비? 나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다네." 검사보는 말했다. "그런데 무슨 사건부터 시
작한다든가?"
"독살 사건입니다."
"좋아."하고 검사보는 말했으나 실은 조금도 좋을 리가 없었다. 어젯밤을 그는 꼬박 새웠
다. 친구의 송별회에서 잔뜩 마신 다음, 2시까지 노름을 하다가 그 후 어떤 유곽으로 스며들
었다. 그 집은 6개월 전에 마슬로바가 있던 바로 그 유곽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 독살 사건에 대한 관계 서류를 읽을 틈이 없었으며 이제부터 대강 훑어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서기는 검사보가 독살 사건에 관한 서류를 읽어 보지 못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 사건부터 시작하자고 재판장에게 권했던 것이다. 서기는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과격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브레베는 보수적인편으로 러시아에서 봉직하고 있는 대부
분의 독일인들이 그러하듯이 정교에 귀의해 있었다. 그래서 서기는 그를 몹시 싫어했을 뿐
만 아니라 그의 지위를 시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스코베츠(성의 욕망에서 악의 근원을 찾아 거세로써 인간을 구원하려는 한 종
파) 사건은 어떻게 하죠?"하고 서기가 물었다.
"그건 증인이 없으니 할 수 없다고 했잖아 법정에서도 나는 분명히 그대로 말하겠어."
"그렇더라도 어차피..."
"할 수 없다잖아!"하고 검사보는 말하고 계속 한쪽 팔을 흔들면서 자기방으로 뛰어갔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필요하지도 않은 사건을 일부러 연기하려고 하는 것은
배심원의 구성이 지식층이었으므로 공판에서 심리할 때 무죄로 끝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판장과 상의한 결과 이 사건은 군 소재의 재판소로 이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곳에는 배심원들이 주로 농민들뿐이므로 유죄로 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복도로 점점 더 혼잡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은 민사 법정 부근이었으며,
그 곳에서 남달리 소송 사건에 흥미를 갖는 그 풍채 좋은 신사가 이야기하던 바로 그 사건
이 현재 진행중에 있었다. 휴식 시간이 선언되자 그 법정으로부터 한 노부인이 나왔다. 이
노부인은 변호사의 천재적인 수완으로 인하여 자기의 재산을 아무런 권리도 없는 실업가에
게 빼앗긴 변호사는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가 너무나 교묘하게 일을 꾸며 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부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것을 실업가에게 넘겨 주어야 했다.
노부인은 화려한 옷차림을 한 뚱뚱한 여자로, 커다란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문에서 나오자,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곤 굵고 짧은 두 손을 벌리면서 자기 변호사를 향하여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런 기막힌일이 어디 있단 말예요?"하며 안타까운 듯이 같은
말만 자꾸 되풀이하고 있었다. 변호사는 노부인의 모자에 달린 꽃만 바라보면서 그 부인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노부인의 뒤를 이어, 민사 법정 문에서 앞이 많이 팬 조끼 아래 눈부시게 풀먹인 셔츠 앞
가슴을 내밀고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얼굴을 번득이면서 그 유명한 변호사가 모습을 나타냈
다. 이 사나이의 수완 때문에 모자에 꽃을 단 노부인은무일푼의 신세가 되었으며, 그에게 1
만 루블의 사례를 주기로 한 변호(소송) 의뢰인은 10만 루블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었으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쏠렸다.
변호사는 그런 눈치를 챘음인지 그 몸 전체가 '뭐 그토록 탄복하는 표정을 지을 건 없다.'는
듯한 태도로 여러 사람들 앞을 버젓이 지나갔다.
7
이윽고 마트베이 니키티치가 도착했다. 그리고 목이 길고 깡마른 정리가 배심원실로 들어
왔다. 그는 옆걸음질을 치는 습관처럼 아랫입술도 한쪽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정직하고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었으나 술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어느 직장
에서도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3달 전에 자기 처를 틈틈이 돌봐 주는 어느 백작 부인의 주
선으로 지금의 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오늘날까지 무사히 근무해 온 것을 본이도 기뻐하고
있었다.
"자 여러분, 다 모이셨습니까?" 그는 코안경을 쓰고 안경 너머로 방 안을 둘러보면서 이
렇게 말했다.
"다들 모인 것 같소." 쾌활한 성격의 상인이 대답했다.
"그럼 확인해 봅시다." 정리가 말하고 나서 호주머니에서 종잇조각을 꺼내어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할 때마다 코안경을 올려다내렸다 하면서 얼굴을 확인했다.
"5등관 N. M.니키포로프 씨!"
"네." 모든 소송 사건에 조예가 깊은 풍채 좋은 신사가 대답했다.
"퇴역 육군 대령, 이반 세묘노비치 이바노프 씨!"
"여기 있소." 군복을 입은 홀쭉한 사람이 대답했다.
"제2급 상인, 표트르 바클라쇼프 씨!"
"여기 있습니다." 선량해 보이는 상인이 입에 웃음을 담뿍 담으며 "염려마시오!" 하고 대
답했다.
"근위대 중위, 드미트리 네플류도프 공작!"
"네."하고 네플류도프는 대답했다.
정리는 코안경 너머로 특별히 공손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렇
게 함으로써 그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려는 태도를 드러내어 보였다.
"육군 대위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단첸코 씨! 상인, 그리고 예피모비치 클로쇼프 씨! 등
등..."
두 사람을 빼놓고는 전원이 출석했다.
"자 여러분, 법정으로 가십시오" 정리는 상냥한 손짓으로 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모두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서 서로 먼저 나가라고 사양하면서 복도로 나와 법정
으로 향했다.
법정은 기다랗고 큼직한 방이었다. 한쪽 끝은 3단으로 된 높은 단으로 되어 있었다. 그 높
은 단 한복판에는 검푸른 술이 달린 초록빛 상보로 덮인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뒤
에는 떡갈나무로 조각한 아주 높은 등받이의 안락의자가 세 개 나란히 있었으며, 그 뒤 벽
에는 금테를 두른 액자에 넣은 황제 폐하의 전신상이 걸려 있었다.
황제는 금빛 찬란한 훈장의 장군 복장에 현장을 어깨에 드리우고, 한쪽 발은 앞으로 내디디고,
한손을 패검 위에 얹고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는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성상을 모신 상자틀이
걸려 있었으며 선서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오른쪽에는 검사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왼편의 검사석
맞은편 깊숙한 곳에 서기의 조그만 책상이 놓여 있었다. 방청석 가까이에는 도르래식으로
된 반들반들한 떡갈나무 칸막이가 있었으며, 그 뒤쪽에는 피고들의 빈 의자가 두 줄로 놓여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변호사의 테이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떡갈나무 울타리로 칸막이를 한 법정 앞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뒤쪽으로는
방청객들을 위한 의자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것은 한 단씩 높아지면서 뒷벽에까지 꽉 차 있었다.
방청석의 앞쪽 의자에는 여공 아니면 하녀 차림을 한 여자 네 사람과, 직공 차림을 한 남자 두 사람이
앉아 있었으나 그들은 이 법정의 장엄한 장식에 분명히 위압되어 조심스럽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배심원들이 들어온 뒤 곧 정리가 옆으로 쏠리는 듯한 걸음걸이로 중앙으로 걸어나와서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위압하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개정!"
전원이 기립하자, 재판관들이 단상에 나타났다. 위풍당당한 체격에 훌륭한 구레나룻을 기
른 재판장, 그 뒤를 따라 침울한 표정을 하고 금테 안경을 쓴 배심 판사-그는 조금 전보다
더욱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개정 직전 판사보 자리에 있는 처남을 만났는
데, 아까 누이한테 들렀을 때 누이가 저녁을 준비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매부, 오늘 밤에는 천상 선술집에라도 가야겠군요."하고 처남은 웃으면서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야." 배심 판사는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맨 나중에 입장한 판사는, 매번 지각만 하는 마트베이 니키티치였다. 그는 기다란 턱수염
을 하고,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선량해 보이는 큼직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위카타르
로 고생하고 있어서 의사의 권유로 오늘 아침부터 새로운 치료법을 시작했는데, 이 새 치료
법에 시간을 빼앗겨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오랫동안 집에서 꾸물거려야만 했다.
판사석에 들어 왔을 때 그는 무엇엔가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것을 점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가 마음속으로 점치고 있는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판사실
의 방문으로부터 법정의 자기 자리까지의 걸음 수가 셋으로 나누어진다면 이 새롱누 치료법
으로 위카타르를 완치할 수 있지만 만약 나누어지지 않을 때는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
는 터였다. 걸음수는 26이 되었으나, 그는 일부러 잔걸음을 한 걸음 더 걸어서 꼭 27번째에
정확히 자기 자리에 당도하도록 했다.
깃에 금몰이 달린 법의를 입고 단상에 나타난 재판장이나 배심 판사드의 모습은 사람들을
위압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들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세 사람 다 자기네들의
위엄에 어색한 듯이 공손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면서 초록빛 책상보로 덮은 테이블 앞의 조
각된 의자에 재빨리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독수리의 문장이 들어 있는 삼각형의 서진과, 식
당에서 흔희 과자 따위를 담는 유리 접시와, 그밖에 잉크병, 펜, 백지, 새로 깎은 갖가지 길
고 짧은 연필 등이 놓여 있었다.
재판관들과 함께 검사보도 입정했다. 그는 역시 옆에 가방을 끼고 여전히 팔을 내흔들면서
창가에 있는 자기 자리로 바삐 가더니, 1분이라도 아껴 준비를 해두려는 것처럼 곧 사건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이 검사보가 법정에서 논고를 하기는 이번이 겨우 네 번째이다.
그는 매우 허영심이 강했으므로 무슨 일이 있든지 출세를 해야 한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으며,
또 자기가 관계하는 사건은 무슨일이 있든지 유죄로 판결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살 사건의 내막은 그도 대강 알고 있었으며 논고 내용도 이미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좀더 자료를 보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급히 사건 서류에서 발췌하고 있었다.
서기는 단상 반대편에 자리잡고 낭독할 필요가 있을 만한 서류를 모두 준비한 다음, 어제
입수하여 읽은 판매 금지된 논문을 다시 한 번 읽고 있었다. 그는 이 논문에 대해서 항상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긴 턱수염의 판사와 한바탕 논쟁을 벌이고 싶었기 땜누에, 그전에 우
선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두기 위해서였다.
8
재판장은 서류를 한번 쭉 훑어본 후, 정리와 서기에게 두세 가지 질문을 던져 이상이 없
음을 확인한 다음, 피고의 출정을 지시했다. 그러자 곧 가름장 난간 뒤의 문이 열리며 모자
를 쓴 두 사람의 헌병이 군도를 빼들고 들어왔다. 그 뒤로 주근깨투성이의 붉은 머리 사내
가 먼저 들어오고 잇달아 여자 둘이 들어왔다. 남자는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죄수복을 입
고 있었다. 그는 법정에 들어올 때 엄지손가락을 쑥 밀다시피 하면서 바지 옷솔기에 두손을
갖다 대어 너무 긴 소매가 늘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그는 재판관이나 방청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피고석을 응시하며 긴 의자로 다가갔다.
달느 사람이 앉을 자리를 남겨 두고 맨 끝자리에 가 앉아, 재판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뭔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듯 볼의 근육을 실룩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뒤를 이어 역시 죄수복을 걸친 중년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여자의 머리는 스카프로 동여져 있었으며
잿빛을 띤 창백한 얼굴에는 눈썹도 없독 눈만 빨갰다.
이 여자는 아주 태연해 보였다. 그녀가 자기 자리로 갈 때 죄수복이 무엇엔가 걸렸는데 서
두르는 기색 없이 유유히 그것을 벗기고, 제자리에 가 앉았다.
세 번째 피고는 마슬로바였다.
그녀가 들어오자 법정 안 모든 사내들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쏠렸다. 반짝거리는 까만 눈
에 하얀 얼굴, 죄수복 위로 불룩 도두라진 젖가슴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헌병들까지
도 그녀가 옆을 지나갈 때 그 모습에 시선을 드고, 그녀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눈을 떼지 않
았다. 이윽고 자리에 가 앉자 그들은 마치 나쁜 짓이나 하다 들킨 것처럼 한결같이 고개를
돌리고 몸을 한두 번 흔들더니 곧장 정면에 보이는 창문 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재판장은 피고들이 제각기 제자리에 앉고 마지막으로 마슬로바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자
곧 서기를 돌아보았다.
여느 때의 순서대로 공판이 시작되었다. 배심원의 점호, 결석자에 대한 심의, 그들에 대한
벌금 부과, 면제를 신청한 사람에 대한 재가, 결석자에 대한 보충 임명 등등이 진행되었다.
이어서 재판장은 조그만 표를 접어서 유리 쟁반 속에 넣고 금몰이 달린 법의 소매를 조금
걷어올려 무척 털이 많이 난 팔을 드러내면서 마치 마술사 같은 솜씨로 표를 한 장 한 장
꺼내더니 그것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걷어올린 소매를 내리고는 배심원의 선
서 순서를 사제에게 재촉했다.
부석부석 누렇게 뜬 얼굴에 갈색 법의를 입고 목에 금십자가를 걸고, 그 옆에 알 수 없는
조그만 훈장을 달고 있는 늙은 사제는 뻣뻣한 다리를 느릿느릿 법의 밑으로 옮겨 놓으면서
성상 앞에 놓여 있는 선서대로 다가갔다.
배심원들도 일어나서 한데 몰려 선서대 쪽으로 나아갔다.
"여러분, 이쪽으로!" 사제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가슴 위의 십자가를 만지면서 배심원 일동
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 사제는 이미 46년간이나 이 직책을 맡아왔는데 앞으로 3년만 더 있으면 얼마 전에 대
사원의 주교가 행한 것처럼 성직 50주년 기념 축하식을 거행할 작정으로 있었다. 그는 지방
재판소 창설 당시부터 줄곧 근무해 왔으므로 선서시킨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그렇
게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와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한결같이 봉사해 오면서, 자
신의 가족을 위하여 현재 살고 있는 집 이외에도 공채와 증권으로 3만 루블 남짓한 재산을
갖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모든 서약을 금하고 있는 성경 앞에서 사람들에게 선서를 시키는 재판소에
서의 그의 일이 옮지 않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거니와, 또 그것을 성가시게
여기지도 않았을뿐더러 익숙해진 이 일에 대하여 애착까지 느끼고 있었는데 더구나 이것은
상류 계급의 인사들과 친교할 기회도 적지 않았으므로 자기 직분을 더욱 좋아했다.
지금도 그는 유명한 변호사와 알게 되었으므로 속으로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 변호사가
모자에 큰 꽃을 단 노부인 사건 하나로 거뜬히 1만 루블이나 되는 엄청난 사례금을 받았다고
하므로 그는 그 변호사에 대하여 경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배심원 일동이 조그만 층계를 밟고 단상에 올라왔을 때, 사제는 희끗희끗한 대머리를 한
쪽으로 갸우뚱하더니 헐거운 법의 틈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어 드문드문 난 머리털을 한번
쓰다듬은 다음, 배심원들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오른손을 드십시오. 손가락을 이렇게 하고." 그는 늙은이다운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
하면서 손가락마다 옴쏙옴쏙 통통한 손을 위로 들어서 물건을 잡을 때처럼 엄지손가락과 집
게손가락을 한데 모았다. "내가 말하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하고는 선서문을 낭독하기 시
작했다. "거룩한 복음서와 생명의 근원인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맹
세하나이다. 이 법정에서 심리되는 사건..."하고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매듭을 지어가면서 말
했다. "손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계속 들고 계셔야 합니다." 그는 손을 내리려던 젊은 배심
원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 법정에서 심리되는 사건에 있어..."
구레나룻을 기른 풍채 좋은 신사와 대령과 상인 등은 사제가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합친
손을,마치 대단한 자부심이라도 맛보는 듯 높이 쳐들고 있었으나, 그 밖의 사람들은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적당히 흉내만 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화가 난 듯이 엄청나게 큰
소리로 '여하튼 할 수 있는 데까지 따라해 보겠다.'는 듯이 사제의 말을 되뇌는 사람도 있었
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저 중얼중얼할 뿐, 사제보다도 매우 뒤처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
고 놀란 듯이 따라가려고 했지만 엉뚱한 구절을 되풀이하기가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마치 무엇을 떨어뜨리지나 않으려는 것처럼 보라는 듯한 손짓으로 힘껏 손가락을
모으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손가락 끝을 벌렸다가 생각난 듯이 다시 모으곤 했다.
누구나가 어색한 기분이었는데 늙은 사제 혼자만은 자기가 중대하고 유익한 일을 하고 있음을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선서가 끝나자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배심원장을 선출하라고 제언하였다.
배심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앞을 다투어 배심원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모두들 담배를 꺼내서 피우기 시작했다. 누군가 풍채 좋은 신사를 배심원장으로 선출하자고
제의하자, 모두들 찬성하고 피우다 만 담배를 비벼 끄고는 법정으로 되돌아왔다. 선출된 배
심원장이 자기가 선출되었음을 재판장에게 보고하고 일동은 다시 높은 등받이 의자에 2열로
줄지어 앉았다.
모든 일이 거침없이, 그리고 빠르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규칙바르고, 일관성이
있고, 엄숙한 진행은 분명히 모든 참석자들에게 어떤 민족감을 주었으며 자기들이 진지하고
중대한 사회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의식케 했다. 네플류도프도 그런 기분을 맛보았다.
배심원들이 착석하자 재판장은 그들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
켰다. 이러한 주의를 주고 있는 동안 재판장은 쉴 새 없이 자세를 바꾸었다. 왼쪽 팔꿈치를
짚는가 하면 오른쪽 팔꿈치를 문지르고, 의자 등받이나 팔걸이에 몸을 기대기도 하고, 종이
를 가지런히 챙겨 놓는가하면, 페이퍼 나이프를 만지작거리거나 연필을 만지기도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배심원의 권리란 재판장을 통하여 피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물적 증거를 체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배심원의 의무는 허위가 아닌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책임도 있어서 심리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외
부 사람과 연락을 위하거나 했을 경우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일동은 정중히 경청하고 있었다. 상인은 술냄새를 풍기다가 트림을 간신히 참으면서 한
마디 한마디 끝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9
훈시가 끝나자 재판장은 피고인석으로 얼굴을 돌렸다.
"시몬 카르틴킨, 일어서시오!"하고 말했다.
시몬은 신경질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볼의 근육이 더욱 씰룩거렸다.
"이름은?"
"시몬 페트로프 카르틴킨입니다." 미리 대답하는 연습을 해두었는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막히지 않고 술술 대답했다.
"신분은?"
"농민입니다."
"출생지의 현과 군은?"
"툴라 현, 크라피벤스키 군, 쿠판스카야 면, 보르키 마을입니다."
"나이는?"
"서른넷, 태어난 해는 18..."
"종교는?"
"러시아 정교입니다."
"결혼은?"
"아직 안 했습니다."
"직업은?"
"마브리타니야 여관의 하인입니다."
"전과가 있소?"
"전혀 없습니다. 원래 저는 지금까지 저..."
"전과가 없단 말이오?"
"네, 절대 없습니다. 한 번도 없어요."
"기소장의 사본은 받았소?"
"네, 받았습니다."
"앉아도 좋아요. 예브피미야 이바노브나 보치코바!"하고 재판장은 다음 여피고인을 호명했
다.
그러나 시몬은 여전히 서서 보치코바를 가로막고 있었다.
"카르틴킨, 앉아요!"
그러나 카르틴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카르틴킨, 앉으라니까요!"
그래도 계속 버티고 서 있자, 정리가 달려가서 목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부자연스럽게 눈
을 뜨면서 간절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자, 앉아요. 앉으라잖소!"하고 말하자, 그제서야 자
리에 앉았다.
카르틴킨은 일어설 때처럼 앉는 거솓 재빨랐다. 그리고 죄수복 앞깃을 여미고는 또다시
소리도 없이 양쪽 볼을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이름은?" 재판장은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며 상대방은 보지도 않고,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며 두 번째 피고에게 물었다. 재판장으로서는 이런 사건은 흔해빠진 것이었으므로 심
리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두가지 사건이라도 다룰 수 있을 정도였다.
보치코바는 43세, 신분은 콜모므나 시의 시민, 직업은 같은 마브리타니야 여관의 하녀였
다. 그녀도 전과가 없었으며 기소장의 사본도 역시 받았다. 보치코바는 매우 대담하게 답변
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또렷했다. "그래요. 세례명은 예브피미야고 성은 보치코바예요.
사본은 틀림없이 받았고요. 나는 조금도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나를 웃음거리로 취
급하면 가만 있지 않겠어요."하고 대답했다. 보치코바는 '앉아도 좋아요.'하고 하기도 전에
심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앉아 버렸다.
"당신 이름은?" 재판장은 특별히 친절한 말투로 세 번째 피고에게 물었다. 그는 항상 여
자를 좋아했다. 그는 마슬로바가 앉은 채로 있는 것을 보자, "일어서야지요."하고 상냥한 어
조로 덧붙였다.
마슬로바는 재빨리 일어서서 단단히 각오가 되어 있다는 표정으로 불룩한 젖가슴을 내밀
면서, 대답도 하지 않고 약간 사팔뜨기의 검은 눈으로 교태를 보이면서 재판장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은 뭐지요?"
"류보비예요."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한편 네플류도프는 코안경을 쓰고, 한 사람씩 심문을 받고 있는 피고들을 바라보고 있었
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고 세 번째 피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
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일까, 류보브라니?' 그녀의 이름을 듣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재판장은 더 심문을 계속하려 했으나 금테 안경을 쓴 배심 판사가 화가 난 듯이 무엇인가
속삭이며 가로막았다. 재판장은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여자 피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류보브라니 어떻게 된 거요?"하고 그가 말했다. "서류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는데."
피고는 잠자코 있었다.
"당신 본명이냐고 묻고 있는 거요."
"영세명이 뭐냐니까요?"하고 성미가 괄괄한 판사가 물었다.
"전에는 예카테리나라고 했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네플류도프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이 여자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로 '그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모집에서 양녀겸 하녀로 기르고 있던 그 여자 말
이다-그가 한때 욕정에 빠졌던 그 소녀, 그렇다. 미칠 듯한 열정으로 유혹했다가 그대로 내
동댕이쳐 버린 그 소녀였다. 그는 그 후로는 한번도 그 여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느데, 그
것은 너무나 괴로운 추억이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자기의 '고결함'을 스스로 자부
하고 있던 그가 이 여자에 대해서 고결은커녕 너무나도 비열한 짓을 한 비신사임을 증명케
하고 옛 상처를 들추어 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분명 그녀임에 틀림없다. 이제야 그는 한 사람의 인간을 똑바로 분간하고 그녀만
이 가진 유일하고 신비로운 특징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은 이상스럽게 희고 퉁
퉁하게 살이 쪘음에도 불구하고, 저 특징,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그 그리운 특징만은 저
얼굴에도 입술에도 약간 사팔뜨기인 저 눈에도, 더구나 저 귀염성 있는 천진한 웃음을 머금
은 눈매에도,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로 흐르고 있는 자연스러운 표정에도 나타나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 하는 거요."하고 나서 재판장은 다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저는 사생아예요."하고 마슬로바는 말했다.
"그래도 대모가 있을 거 아니오. 그 이름이 뭔가요?"
"네, 미하일로브나입니다."
'도대체 저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네플류도프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면
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성은 무엇이오?" 재판장은 심문을 계속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마슬로바라고 합니다."
"신분은?"
"평민입니다."
"종교는 정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직업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소?"
마슬로바는 잠자코 있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하고 재판장은 좀더 큰 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영업집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대답했다.
"어떤 집이지요?" 금테 안경을 쓴 판사가 위엄 있게 물었다.
"어떤 집인지 아시면서 뭘 그러세요?"하고 마슬로바는 방긋 웃엇다. 그러나 곧 주위를 둘
러보고는 다시 재판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뭔지 이상스러운 빛이 어려 있었고 금방 입밖에 낸 말에도, 그 엷은 미
소에도, 웃음을 머금고 법정 안을 힐끔 돌아본 빠른 눈길에도 무섭고도 애처로운 무엇이 서
려 있었으므로 재판장은 그만 눈을 내리깔았다. 그 순간 법정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
다. 이 정적은 어느 방청객의 웃음으로 깨어졌으나, 누군가 '쉿'하고 나무라는 소리가 들
렸다. 재판장은 머리를 들고 심문을 계속했다.
"전과가 있소?"
"없습니다." 마슬로바는 한숨 섞인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소장의 사본은 받았소?"
"네, 받았습니다."
"앉아도 좋아요."하고 재판장은 말했다.
피고는 정장한 여인네들이 흔히 치맛자락을 매만질 때와 똑같은 동작으로 스커트 뒷자락
을 살짝가 쳐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죄수복 소매 속에 자그마한 흰 두 손을 깍지낀 채
줄곧 재판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다음에 증인의 호출이 시작되었다. 계속해서 증인의 퇴정, 법원의로 결정된 의사를 소
환했다. 이윽고 서기가 일어나 기소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또렷또렷하고 큰 소리로 읽었
으나, 어찌나 빠른지 L과 R의 발음이 분명치 않을 정도였다. 재판관들은 안락 의자 팔걸이
에 기대기도 하고, 때로는 테이블이나 의자 등받이에 기대기도 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
서 서로 수군거리기도 했다. 헌병 한 사람은 하품을 몇 번이나 참고 있었다.
세 사람의 피고 중에서 카르틴킨은 쉴 새 없이 볼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보치코바는 침착
하게 똑바로 앉은 채 가끔 스카프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머리를 긁고 있었다.
마슬로바는 낭독하는 서기의 표정을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다가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며 무언가 항의하려는 듯이 얼굴을 붉히기도 햇지만 이윽고 한숨을 내쉬면서 두 손의 위
치를 바꾸며 사방을 둘러보고 나선 다시 서기쪽에 시선을 멈추었다.
네플류도프는 맨 앞 줄 끝에서 두 번째의 의자에 앉아 코안경을 벗어든 채 마슬로바를 지
켜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복잡하고 괴로운 감정이 얽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