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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23일 화요일 말씀묵상 ♣
성경:사도행전3:11-16(신191P)
제목:베드로의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
11.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2)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또는 소자
14.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3)이 일에 증인이라/ 또는 그의
16.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할렐루야!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제목}***“베드로의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1.앉은뱅이 인생입니다.
2.일어나 걷는 인생입니다.
3.일으키는 인생입니다.
①.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②.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앉은뱅이 인생처럼 현실 속에서 때로는 안주하며, 때로는 체념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육신만을 위해 그냥저냥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주저앉아 있는 자리에서 당당히 일어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 사람들을 일으켜 줘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는 성도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시고, “일어나는 인생”에서 더 나아가 “일으키는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행3:11-16절)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걸인이 나은 일로 말미암아 모든 백성이 크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베드로는 여기서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실제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추상적인 진리나 유명한 사람의 체험담도 아닙니다. 시사사건 해설도 아닙니다.
설명이 아니라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 내 의지 내 지식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계시된 말씀인 것입니다.
1.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본문의 배경은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입니다.
신약시대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지었기 때문에 헤롯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헤롯 성전의 맨 바깥쪽에는 사방으로 울타리처럼 둘러 있는 행각이 있었습니다. 이 행각으로 만들어진 안쪽의 뜰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의 뜰은 문자 그대로 이방인들이 머물 수 있는 곳입니다. 이방인의 뜰 안에 다시 울타리 같은 행각으로 둘러싸인 성전 지역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 지역은 유대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담장에는 이방인이 출입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경고문이 붙여져 있었습니다.
이 성전 지역으로 들어가는 문이 바로 미문입니다. 미문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여인들이 머물 수 있는 여인의 뜰이 나옵니다.
여인의 뜰에서 다시 니가노르 문이란 문을 통과하면 남자들이 머무는 남자의 뜰, 즉 “이스라엘의 뜰”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뜰에서 성소 쪽으로 계단을 오르면 제사장의 뜰이 나옵니다.
본문에 나오는 솔로몬 행각은 헤롯 성전의 맨 바깥뜰을 둘러싼 행각 중에 동편 쪽의 행각을 말합니다. 이 행각은 162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된 세 개의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행각이란 말은 헬라어로 “stoav”(스토아)입니다. 스토아란 기둥들로 이어지고 지붕이 덮여진 복도, 주랑(柱廊;porch)입니다. 헬라 시대 스토아는 교육과 강론의 장소였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로 이 솔로몬 행각입니다. 본문에는 세 등장인물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 등장인물은 고침 받은 병자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요!.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고침 받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이때에 그는 자기를 고쳐 준 베드로와 요한에 이끌려 성전으로 기도하러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의 손을 붙잡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얼떨결에 고침을 받기는 했지만 감사의 표시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사도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손을 잡은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 뭔가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내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왜 사도들이 자기를 고쳐줬는지? 어떻게 기적이 일어났는지? 그 기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더구나 모여드는 군중들 앞에서 시원한 설명을 듣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등장인물은 모여든 무리들입니다.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기적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놀라움과 흥분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불구자가 일어나 걸었대! 그가 완전한 사람이 되었대! 성전에서 나오는 사람마다 몰려왔습니다.
고침 받은 사람이 있는 솔로몬 행각으로! 고침 받은 사람을 보려는 뜻도 있었고, 기적을 일으킨 사도들을 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기적을 일으킨 사도들에 대한 관심이 더 컸을 겁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 나타나 이런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단 말인가?
왜 기적이 나타났을까? 어떻게 기적이 일어났나? 기적의 주인공인 사도들에게 뭔가 듣고 싶었습니다.
세 번째 등장인물은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쩔 수 없이 청중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두 번째 설교입니다. 첫 번째 설교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알리는 설교였습니다.
두 번째 설교는 자신이 일으킨 기적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한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설교했을까요?
베드로의 첫 마디는 다소 엉뚱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설교자에 대한 입장 설명입니다. 우선 부탁하건대, 설교자 자신, 베드로에게 주목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졸지에 스타가 되어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우러러봅니다. 요즘 같으면 베드로란 이름은 인터넷 최고 검색어가 되고, 광고회사들이 섭외하려고 난리가 났을 겁니다.
베드로를 국회로 보냅시다! 전국구 1번으로 추대합시다! 베드로! 베드로! 이럴 때에 이전의 베드로 같았으면 한참 우쭐했을 겁니다.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역시 나야!” 그러나 지금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눈빛들이 그저 부담스럽기만 했습니다. 왜 나를 쳐다보는가? 잠시라도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도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은 신앙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위험합니다.
첫째로, 실족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허점이 있고 실수가 있습니다. 때때로 잘못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교회 다니다가 실족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람을 바라보다가 실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같은 목사님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과 상당히 달라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다 예수님을 닮은 줄 알았는데 별로 닮은 데가 없어요. 거짓말도 합니다.
버럭 화를 내고, 사납기도 합니다. 남에게 상처도 줍니다. 가끔 안 좋은 일로 신문에 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바라보면 다 실족합니다.
둘째로, 사람을 바라본다고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베드로 사도라고 해도 베드로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닙니다. 유명한 목사님이라고 귀신이 쫓겨 갑니까? 교회 장로님이라고 병을 고칩니까? 아닙니다. 귀신은 오직 예수님을 보고 쫓겨 갑니다. 병 고침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사람은 머리터럭 하나도 길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왜 자신을 주목하지 말라고 했는지 아셔야 됩니다.
교회 안에서 유명 인사 따라다니지 마세요. 영적으로 아무 득이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바라봐야 됩니까? 다음 절을 보세요.
2.하나님이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3절).
예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예수십니다! 40 평생을 걷지 못하다가 걷게 된 일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왜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선민의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 언약하시는 하나님,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셔서 조상들이 바라보던 메시야, 이스라엘 민족이 바라보던 메시야, 그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으로 하여금 모든 영광을 받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유대인 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오히려 살리심으로써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종”이란 말과 “영화롭게”란 말은 대조적입니다.
여기 나오는 종이란 말은 노예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 52장에 예언된 종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52:13).
여기 나오는 종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종하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얼마나 순종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죽으라 하면 죽는 종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아들을 한 없이 높이고 또 높이셨습니다.
무덤에서 하늘까지! 죽음을 이기신 예수,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 하늘에 올리우신 예수! 그보다 더 영화로운 일은 없습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13-15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낮추고 또 낮췄습니다.
본문에 “너희가”란 말이 반복됩니다. 너희가 넘겨주고, 너희가 강도를 석방하고, 너희가 주를 거부하고, 너희가 죽였도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늘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행해야 할 첫 번째 의무가 바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란 사실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본분은 주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영광스럽게, 명예롭게 해 드리는 것보다 더 큰 의무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주님을 높일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모든 신앙과 삶의 핵심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배의 목표입니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전도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봉사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교제와 양육의 목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예수님을 영화롭게 해야 될 의무가 걸려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제목이 뭡니까?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는 것! 어떻게 주님의 이름이 거룩해집니까? 거룩이란 칭호만 붙이면 거룩해지는 겁니까?
주기도문이 요구하는 것이 뭡니까? 내 삶을 통해서 주님이 명예로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너와 나의 삶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명예로워져야 합니다. 내 삶을 통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바로 살지 않으면 나를 통해서 절대로 주님이 영화롭게 되실 수 없습니다. 내가 거짓말 하는데 어떻게 주님이 영화로워집니까?
내가 음란죄를 짓는데 어떻게 주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습니까?
내가 방탕하게 사는 데 어떻게 주님이 영화롭게 되실 수 있습니까? 내 말과, 생각과, 행동에 주님의 명예가 걸려 있습니다.
내 가정생활에 주님의 명예가 걸려 있습니다. 직장 생활에, 사업상 만나는 인간관계에 주님의 명예가 걸려 있습니다.
공부를 통해서, 사업을 통해서, 정치를 통해서, 예술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 뜻대로 사세요.
그러면 주님이 나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주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3.예수 이름을 믿는 믿음이 낫게 하였느니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화로운 이름입니다.
영화롭다는 것은 수식어가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영화롭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사용할 때에 놀라운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예수님을 통해서 온 바로 그 믿음이”(현대인의성경).
베드로 사도가 결론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믿고 사용했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당신들도 예수님 이름을 믿고 사용해라!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이제는 이름을 사용할 차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가만히 있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십시오. 어떻게 사용합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명령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병자여 일어나라고 기도하세요. 주님의 이름으로 바다여 잔잔하라고 명령하세요. 주님의 이름으로 악한 생각, 악한 죄악이 물러가라고 명령하세요.
날마다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세요. 명령하세요. 귀신에게 명령하세요. 병마에게 명령하세요. 바람과 파도에게 명령하세요.
그래서 날마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죄를 이기는 승리자가 되세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제압하세요. 주님의 이름으로 연약한 환경을 이겨 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영혼을 구하세요. 가정생활을 통해서, 사회생활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사용하세요.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주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영화로우신 주님께 대안 가장 좋은 예우입니다.
***{결론}***
여러분!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의 설교 핵심이 무엇입니까?
1.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2.하나님이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예수 이름을 믿는 믿음이 낫게 하였느니라.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 자들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알지 못해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이런 오해가 주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오해에 빠지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라고 선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사도행전3:11-16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시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를 소원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