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복(福)은 가족 화합과 존중에서 온다.
“선근(善根)이 있는 선남자 선녀인들은 모든 상을 떠나서 본래의 얻을 바 없음을 깨달아서
항상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보살도를 행하면 바로 그곳은 부처님의 자리가 되리라.
혹시 내 마음이 바른 일을 걷고 있는 나의 동료에 대해서 의심하고 미운 생각이 난다면
이다음 생의 업장은 어떻게 할지 스스로 물어보라. 그 죄업이 수미산을 넘으리라.”
금강경의 말씀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믿음입니다.
누구든 믿고 받들면 그 공덕은 한량없이 커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의심하며, 남을 비방하면 그 과보는 더할 수 없이 무거워집니다.
일상의 나를 믿고 받들고 있습니까?
가족을 의심하고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의심하고 비방하는 생활을 살지 않으십니까?
자신을 곰곰이 살펴보십시오.
나를 믿지 않고 받들지 못하면 대우주의 복과 지혜, 덕과 영험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모든 일을 믿고 받들 때 그 공덕은 허공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클 것입니다.
대우주의 기운이 나에게 불어오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받드는 것은 대우주의 법칙입니다.
나를 믿지 않고 가족을 믿지 않을 때 과보(果報)가 내게 돌아옵니다.
요즘 수험생을 둔 가정에서는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수능시험이 백일 앞으로 다가오면 대부분 절에서 입시 기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시험을 보는 날에 기도를 끝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이 끝났다면서 기도를 끝낸 부모가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 시험이 끝났습니까?
등록금까지 내어야 끝난 것 같지 않습니까?
백일기도를 진정 제대로 치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에고 저 녀석 때문에 나까지 고생하는구나.”
이런 마음이라면 기도 해서 뭐하겠습니까?
기도 때문에- 대학에 들어간다면 수능시험 앞두고 백 일 기도한 부모와
어릴 때부터 매일 단 1분이라도 자식을 위해 기도 올린 부모와 비교하면
누구의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겠습니까?
자식을 위한 기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하십시오.
단 1시간, 단 5분이라도 좋습니다.
매일 꾸준히 자식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백일기도가 무슨 소용입니까.
수원에 사는 한 보살님의 이야기입니다.
연년생의 아들 둘이 있는 분인데 한 해, 큰아들이 대입 시험을 보게 됐습니다.
이 보살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해 철학관을 찾아갔습니다.
큰아들의 점을 쳐본 점쟁이는 운이 없으니, 재수를 시키라고 말했답니다.
그 말에 이 보살이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 길로 입시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수원 시내에서 봉녕사까지 걸어 다니며 매일 삼천 배, 정진에 들어갔습니다.
기도 시작 후 50일째 되던 날부터는 5천 배, 정진에 들어갔습니다.
그 공덕이었을까요. 아들은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이 보살의 기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곧바로 고3이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에 대한 철학관의 답변은 더 기가 막혔습니다.
삼수해야 한다나요.
이 보살은 그날로 둘째 아들을 위한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삼수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매일 5천 배-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50일째부터는 1만 배-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도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분들이 삼천 배를 하면 여러분은 삼천 1배라도 해야 합니다.
남들이 모두 죽을힘 다해 기도하는데 그보다 못하면 기도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적당히 기도하고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해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이 보살의 이야기에서 보듯 정성을 다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까.
사람다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사람다운 길인지 뒤돌아보십시오.
우리가 하는 일은 원인과 결과라는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좋은 과는 좋은 인이 만듭니다.
나쁜 과는 나쁜 인이 만듭니다.
선과선인(善果善因).
좋은 결과를 만들려면 좋은 원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곧은 저울대 속에서 굽은 것을 찾으려 합니다.
콩을 심어 놓고 수박을 걷으려 합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신라 원효 스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복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누운뱅이’로 태어난 그는 땅꾼들의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집 밖으로 걸어 나오지도 못하던 사복이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 길로 원효 스님이 머물던 선산 도리사를 찾아가 원효 스님을 불러 놓고 하는 말이
“자네하고 나하고 도리천서 경을 읽을 때 경을 실어다 주던 암소가 죽었네”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암소가 살았을 때 자네 법문을 듣고자 했으니 가자고 재촉했습니다.
누가 사복의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나 원효 스님은 그 길로 경주 사복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곤 사복의 어머니에게 이런 법문을 하셨답니다.
“태어나지 마라. 죽기 괴롭다. 나지 마라. 죽기 괴롭다.”
그리곤 상주가 관을 업고 가고 땅꾼들이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한 언덕에 이르자 사복은 관을 메고 띠 잔디 밑의 화장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따라온 사람들이 법문을 청하자, 원효 스님은 이런 법문을 하셨답니다.
“어허 두려운지고 인과응보 두려워라.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 만들고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 만든 다네.
내가 만든 원인은 내가 결과를 지어야 한다네.
복을 닦읍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이 더 무서운 것이라네.”
우리는 돌아가신 분들을 땅에 묻습니다.
화장은 잘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다는 분 중 상당수가 지관을 앞세워 묘-자리를 보러 다닙니다.
자손의 부귀영화와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명당을 찾으려 하지요.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묻히는 분이 복이 있어야만 터의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보통 땅에 묻을 때 방향과 관의 길이 등을 지정합니다.
그러나 복이 없는 분들은 아무리 좋은 땅에 제대로 묻으려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의 영향으로
시신이 움직여 결국 땅의 기운을 받지 못합니다.
제일 먼저 가족에 대한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합니다.
또한 말과 행동이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온몸으로 복을 털어 내고 삽니다.
가족이라는 부처님에게 정성을 다해 예불해야 합니다.
경전을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족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불교를 말하기 이전에 가족을 섬기십시오.
일상생활에서 복을 찾으십시오.
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은 참회란 이름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웃음꽃이 피는 곳에는 복이 오고 운도 함께 따릅니다.
우리는 절에 다니며 스님의 법문 들었다거나 경전을 읽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닙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부처를 보지 못하는 우리가 무슨 불교를 말할 수 있습니까.
한국불교의 어리석음은 부처를 부처로 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나와 함께 있는 부처에게 정성을 다하십시오.
살아있는 부처를 버리고 죽은 부처를 찾지 마십시오.
정성을 다해 좋은 원인을 만들어 나가면 좋은 결과가 여러분을 따를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 우룡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