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97
5월22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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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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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GAMHcKINgA
[예수회 도윤호 세례자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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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른 사람 인생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오늘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가장 잘 대변하는 사도가 있으니, 바로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왠지 모를 편안함과 안도감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는 수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좌충우돌,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으로부터 혹독한 질타도 많이 받았습니다.
네 복음서에는 베드로 사도와 관련된 기사가 상당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끝난 이후부터 베드로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 주지 않습니다. 나머지 행적을 밝혀 줄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기에, 전승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추정컨데 베드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코린토 등 여러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로마에서 보내셨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자행된 대박해 때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는 엉뚱하게도 사도단 안에서 언제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던 경쟁자이자 절친이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다시 말해서 요한 복음 사가의 운명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게 몹시 궁금했던가 봅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하셨던 것처럼, 요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호기심을 반기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종착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그 사람 운명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저마다 지닌 역량이 다르고, 부여받은 사명이 다릅니다. 궁극적인 도착점은 동일하지만, 목적지로 나아가는 길은 조금씩 다릅니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거나 눈치 보지 말고 당당히 우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주변 사람들 의식하느라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피곤하게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고, 다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살다 보니, 내 삶에 나도 사라지고, 주님도 사라져버린 어색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 인생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 인생도 주관하시고 안배하시니 대폭 신경을 꺼야겠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분산되는 에너지들을 대폭 줄여야겠습니다. 대신 내 삶을 좀 더 주도적으로, 좀 더 충만히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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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PZWuohTp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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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발씻김의 열매: 착한 목자의 탄생>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먹여라."(요한 21,17)
찬미 예수님! 부활 제7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가장 마지막 장, 곧 예수님과 베드로의 지독했던 사랑과 배신의 서사시가 마침내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완성되는 가슴 벅찬 에필로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허탈해하는 제자들을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숯불을 피워 빵과 물고기를 구워놓고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연거푸 물으시며 "내 양들을 먹여라"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숯불 앞의 신비를 온전히 풀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예수님의 수난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성목요일의 다락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기겁하며 거부했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3,7)
베드로가 그날 밤 깨닫지 못했던 '발 씻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너희도 서로 겸손하게 봉사해라"라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이 발 씻김은 곧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처절한 '파스카의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신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흘릴 나의 피로, 세상의 욕망과 교만에 찌든 너희의 그 얄팍한 '자아'를 완벽하게 죽이고 씻어내어, 이제부터 이 영혼의 주인이 '나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겠다"라는 위대한 소유권 이전의 예식이었습니다.
이 기막힌 신비는 구약성경 탈출기 12장의 '파스카 어린양의 피' 규정에서 이미 완벽한 설계도로 주어졌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십니다. 문설주는 집을 떠받치고 출입을 통제하는 집의 가장 아랫부분, 즉 신체로 치면 '발'에 해당합니다.
왜 굳이 피를 그곳에 발라야 했을까요? 죽음의 천사가 지나갈 때, 문설주에 발린 그 처절한 피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의 첫째 아들, 즉 이 집을 지배하던 교만한 자아(이집트의 맏아들)는 이 피와 함께 이미 죽었다! 이 집의 소유권은 이제 하느님께로 넘어갔다!"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이 건너뛰고(Passover), 참 생명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는 바로 그 파스카 어린양의 피를 제자들의 문설주(발)에 바르는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너를 지배하던 네 낡은 자아는 이제 내 피로 죽었다. 이제 네 인생의 주인은 나다." 이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날 밤, 그 씻김을 끝까지 거부하며 자신의 낡은 자아를 펄펄 살려두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며, 자기 삶의 주인이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고 뻗대며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짜 자존심은 대사제의 뜰에 피워진 '첫 번째 숯불' 앞에서 여지없이 붕괴되었습니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도망쳤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집을 지킬 능력도 없는 얼마나 쓰레기 같고 무력한 빚쟁이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그리고 그런 비겁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아 집값을 지불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목격하며, 베드로의 그 질기디질긴 이기적인 '자아'는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고 완벽하게 씻겨 나갔습니다. 이제 영혼의 방이 비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똑같은 '두 번째 숯불'을 호숫가에 피워놓으셨습니다. 과거 배신의 트라우마가 서린 그 숯불 앞에서, 이제 옛 주인이 쫓겨나고 자아가 완전히 죽어버린 베드로에게 새 주인이신 예수님은 첫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베드로가 자신의 전문 지식과 고집(자아)을 완전히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찢어질 듯이 무거운 물고기들이 올라왔습니다. 그 숫자가 무려 '153마리'였습니다. 성 예로니모를 비롯한 교부들은 이 153이라는 숫자를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온 세상 물고기의 종류, 즉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상징한다고 풀이했습니다. 즉, 자아가 죽어 하느님이 주인이 되신 베드로는 이제 하느님의 그물을 던져 '온 세상의 하느님 자녀들'을 빠짐없이 낚아 올리는 거룩한 어부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가장 소름 돋는 기막힌 반전이 시작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153마리의 물고기(하느님의 자녀들)를 끌고 예수님이 피워두신 숯불 앞의 식탁으로 모여듭니다.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 아침의 식탁이 구약성경의 어떤 장면과 완벽하게 겹쳐지는지 아십니까?
탈출기 24장을 보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과 파스카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려 하느님과 거룩한 계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약이 완수되자 하느님은 모세와 일흔 명의 원로들을 시나이산 꼭대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그 거룩한 산정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며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엄청난 기쁨의 식탁을 누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 나서 먹고 마셨다."(탈출 24,11)
오늘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숯불 식탁이 바로 그 새로운 시나이산의 정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자아를 죽이는 새로운 세족례(계약)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아가 씻겨진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제 단순한 어부가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우주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영적 동반자(원로)로 그 신분이 수직 상승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식탁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목숨을 다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굳이 세 번을 물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대사제의 뜰 숯불 앞에서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뼈아픈 과거를, 똑같은 숯불 앞에서 세 번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완벽하게 치유하고 상계(Offset) 처리해 주신 것입니다. 이 회복의 고백이 끝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먹여라."(요한 21,17)
이 짧은 명령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떤 역할을 이양하고 계신지 그 장엄한 무게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첫 번째와 세 번째에는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Βόσκε, 보스케)"라고 하셨고, 두 번째에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Ποίμαινε, 포이마이네)"라고 하셨습니다.
'보스케(Βόσκε)'는 단순히 육신의 밥을 준다는 뜻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영혼을 온전히 양육하라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반면 '포이마이네(Ποίμαινε)'는 목자가 되어 앞장서서 인도하고, 늑대로부터 보호하며, 목숨을 걸고 책임지는 '전인격적인 돌봄'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이제부터 이 양들은 네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철저하게 "내 양들(μου)"이라고 소유권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양들은 베드로의 소유가 아닙니다. 양들의 진짜 주인은 피를 흘려 그들을 사신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양 떼를 이끄시던 당신의 그 '착한 목자'의 역할을 이제 베드로에게 고스란히 이양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인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내 양처럼 여기며 목숨 걸고 먹이고 보호해야 할 거룩한 '청지기'로 파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자로서 양들을 이끄셨던 것처럼, 이제 네가 하느님의 양 떼를 이끌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죽고 하느님과 한 몸이 된 청지기 베드로는 양 떼에게 도대체 무엇을 먹이고 돌보아야 할까요? 푸른 풀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상 사람들에게 먹여야 할 진짜 양식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양들을 맡기시며, 그들의 입에 영원한 빵인 '성체'를 먹이라고 하십니다. 성체는 단순히 배를 불리는 위로의 떡이 아닙니다. 파스카의 피로 우리의 문설주를 발라 자아를 쫓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베드로가 양 떼에게 성체를 먹인다는 것은, 그 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에 짓밟히는 한낱 짐승 같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 거룩한 빵을 먹는 여러분은 예수님의 피로 낡은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피를 물려받아 결국 하느님과 똑같이 완전해질 수 있는 신적인 본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학의 정수인 '신화(Deification)', 즉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기적입니다. 양 떼가 늑대의 위협이나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교회를 굳건히 지켜내는 유일한 힘은, 바로 내가 하느님의 밥상에 앉아 하느님의 피를 먹는 '우주의 상속자'라는 이 엄청난 자존감에서 나옵니다.
내가 세상의 실패자나 찌질한 죄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과 한 식탁에 마주 앉아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이 폭발적인 자존감을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세상의 파라오들 앞에서 주눅 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이름을 부여받은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 두려움에 떨며 상처받고 흩어진 이웃들에게 "당신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는 그 찬란한 이름표를 달아주며 먹이고 돌보는 참된 목자로 파견되십시오. 우리가 베드로처럼 내 자아를 죽이고 이 거룩한 식탁의 밥을 먹으며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 삶의 모든 실패와 숯불의 상처는 하느님과 영원한 계약을 맺는 시나이산의 눈부신 영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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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반려동물 사랑의 위험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양 떼를 잘 돌보라고 하십니다.
양은 인간보다 낮은 수준의 동물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양은 잡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양들을 아무렇게나 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중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우리가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을 먼저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려는 것이 옳을까요?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도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순서는 언제나 하느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하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1요한 4,21)라고도 합니다.
곧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지름길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나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사랑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이웃을 존중하지 못합니다.
리오나 헬름슬리(Leona Helmsley)는 압제적인 보스로서 악명 높은 미국 여성 사업가였습니다. 그녀는 연방 소득세 탈세 및 기타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비열한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자기 손자 둘에게는 한 푼도 유산을 주지 않았음에도 자기 반려견 트러블에게는 140억 원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녀가 말년에 외로울 때 자신을 위로해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요즘 반려견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습니다. 호텔도 반려견을 데리고 있을 수 있는 방을 따로 만들어야 장사가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위해 소비하는 돈의 액수도 엄청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 자녀에게도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고 또 여러 이유로 이득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를 낳지 않으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반려동물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리오나 헬름슬리는 세금을 내지 않아서 감옥을 들락거려야 했고 자기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혹하게 행동했습니다. 조금의 실수를 하더라도 바로 직원을 해고하였고 직장을 잃고 싶지 않다면 엎드려서 구걸하라고 시켰습니다. 작업을 끝낸 인부들에게 일을 마음에 안 들게 했다고 대금을 내지 않았고, 이 외에도 가족에게도 가혹했다고 합니다.
반려견에게는 그렇게 잘하면서 가족이나 사람들에게는 왜 그렇게 매몰찰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해야 형제들이 반려동물보다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들의 가치가 반려동물보다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리오나 헬름슬리는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바꾸었습니다. 부모에 대해 알려진 바는 얼마 없지만 부모가 준 이름을 바꾸려 한 것은 부모와 인연을 끊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형제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엔 더 심해져서 손주들보다 개가 더 사랑스럽게 된 것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로, 어떤 사람은 반려동물에게는 한 달에도 100만 원 이상을 쓰면서 형제가 홀어머니를 모시는데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한 푼도 보태주지 않습니다. 어머니보다 개가 더 소중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녀를 낳기보다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사랑하는 이들로서는 화가 날 말 같지만, 자칫 우리가 사람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동물에게 더 신경 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인간들입니다.
단돈 몇 푼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면서도 반려동물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면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인간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또 가장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쩌면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 양 떼를 잘 돌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상관없이 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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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 이야기를 두 번 하셨습니다. 하나는 루가복음 5장,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예수님이 티베리오 바다에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신 장면입니다. 먼저 루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와 동료들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물은 이미 씻고 있었고, 마음은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사실 이 말씀은 어부의 상식과는 맞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해봤고, 자기 전문 분야인데, 지금은 낮이고, 상황도 안 맞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나는 이미 다 해봤다. 더 이상 할 게 없다. 소용없다.” 기도도, 섬김도, 관계 회복도, 이미 노력해 봤지만, 안 된다고 느끼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깊이’보다 ‘의지’입니다. 깊은 데로 가는 것은 방향의 변화이고, 말씀에 의지하는 것은 중심의 변화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얕은 곳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네 믿음의 깊은 데로 나아가라. 상식과 경험만 의지하지 말고, 내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려 보라.” 우리가 두려워해서 가지 않던 ‘깊은 곳’은 어쩌면 정직하게 회개하는 자리일 수 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자리일 수 있고, 말씀 앞에 내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주님이 준비하신 풍성한 ‘어획’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옛 일상, 옛 직업인 고기잡이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황은 예전과 똑같습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자리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오른편’은 단순히 방향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를 상징합니다. 같은 바다, 같은 배, 같은 그물, 같은 밤이었지만, 말씀 한마디에 순종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우리도 종종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들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직장, 가정, 교회 상황이 좋아져야 뭔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말하는 ‘오른편’으로 그물을 옮겨 보지 않겠니?” ‘오른편’으로 옮긴다는 것은 조금 더 편한 쪽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선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고집을 고집하는 쪽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같은 가정, 같은 직장, 같은 교회, 같은 일상이지만, 조금만 방향을 돌려 “오른편에” 그물을 던질 때, 그때부터 우리는 “내가 아는 바다, 내가 아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마련하신 은총의 자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예,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3번 하십니다. 베드로는 3번 대답하면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충분히 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3번 질문하신 이유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3번 모른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반을 충분히 용서하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주님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너의 상식과 경험을 넘어, 내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해 보아라.”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머뭇거리던 깊은 데로 나아가게 하시고, 제 중심의 방향을 ‘오른편’, 곧 주님의 뜻 쪽으로 돌리게 하소서. 같은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리게 하시고, 그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열매와 기쁨을 보게 하소서. 저의 삶 전체가 주님의 말씀에 걸린 그물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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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당신을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경상도 남편을 둔 아내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아내가 평소에 사랑 표현에 인색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옛적에 ‘사랑해’와 ‘안 사랑해’가 살았대. 그런데 ‘안 사랑해’가 죽고 말았대. 그럼 누가 남았게?” 아내는 “사랑해.”라는 말을 기대하였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니 뭐 잘못 무긋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사랑의 말은 상처를 낫게 하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시며 베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덮어 주시며 사랑의 실패를 치유하시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확장시키는 데로 나아가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뒤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이 따라옵니다(21,16-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베드로 사이의 사랑이 그 안에만 갇히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를 넘고, 나의 공동체를 넘어서 심지어 나의 원수에게도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양들임을 발견하고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5)라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데만 머물지 말고, 주님께서 저마다에게 주신 사명을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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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5-19: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와 나누신 대화로, 교회 사목의 본질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의미를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하게 하신다. 이는 과거의 약함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회복의 순간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 번의 부인은 세 번의 사랑의 고백으로 씻겨졌다. 입은 죄를 지었지만, 같은 입이 다시 구원을 고백하였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23, 요한 21,15-17 의역) 우리의 상처와 죄도 주님 앞에서 사랑의 고백으로 회복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15.17절) 이는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목자의 사명을 위임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그분은 그에게 단순히 사랑을 고백하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로 양들을 맡기셨다. 사랑한다면, 사랑의 증거로 양 떼를 돌보아야 한다.”(Homiliae in Ioannem 88, 요한 21,15-17 의역)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고백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교회를 돌보는 봉사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리라.”(18절)라고 하시며 그의 죽음을 예고하신다. 이는 십자가의 길이다. 성 예로니모는 이를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는 자신을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릴 자격이 없다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기를 원했다. 그는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냈다.”(Commentarius in Matthaeum 초기 베드로 순교에 대한 전승 의역) 순교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주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만을 특별히 임명하시어, 가시적이고 항구적이며 눈에 보이는 일치의 원리와 기초로 삼으셨다.”(18항 요약) 또한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의 목자로서의 임무를 주셨다. 이 임무는 교회의 일치와 선익을 위한 봉사이다.”(881항 의역) 교회의 목자직은 권위가 아니라, 봉사와 사랑에 뿌리내린 사명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만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구체적인 봉사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양들”, 곧 가정과 공동체,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을 돌보는 삶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이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말로만 그칠 수 없다. 그것은 봉사로, 희생으로, 때로는 고난과 순교로까지 이어진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 것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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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또한 당신처럼>
요한 21,15-19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나 또한 당신처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저를
믿으시기에
당신의 믿음을
저의 믿음에
건네시니
당신을
믿기에
저의 믿음으로
당신의 믿음을
품습니다
저를
희망하시기에
당신의 희망을
저의 희망에
건네시니
당신을
희망하기에
저의 희망으로
당신의 희망을
품습니다
저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사랑을
저의 사랑에
건네시니
당신을
사랑하기에
저의 사랑으로
당신의 사랑을
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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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그렇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다. 선을 알면서도 오히려 악을 행하기도 한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한다.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고 좌절하게 된다.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린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하고 세 번이나 물으셨다. 베드로도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하고 세 번 반복해서 대답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상처 입고 좌절한 마음이 회복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 관계의 회복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용서를 알고 믿었기에 배반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었다. 자비를 입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활동하게 된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하고 대답하였는데 이는 ‘제가 당신께 잘못 하였지만, 그럼에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서할 수 있게 한다.
용서는 배신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된다. 혹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길 희망한다.
“주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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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맞벌이가 증가하고, 사교육이 활발해지면서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오래간만에 함께하는 식탁에서도 대화보다 스마트폰, OTT 영상을 각자 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밥은 더 이상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2023년 캐나다 공중보건학자 카렌 라르손 연구진은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빈도가 높으면 아동, 청소년의 식사 질이 올라가고, 우울이나 불안 등의 정신 문제도 25% 감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음주나 흡연과 같은 행동이 감소하는 등 함께 식사하는 것이 건강지표와 큰 연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스트레스 회복력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편안한 ‘혼자’를 선호하면서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듣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즉, 사랑을 통해서만 함께할 수 있고, 사랑을 통해서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을 꾸짖거나 해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내면에 남아 있는 깊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씻어주시고, 그가 사도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주셨던 반석이라는 ‘베드로’가 아닌, 그의 옛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교회의 수장이라는 직분이나 화려한 겉모습을 다 내려놓고, 가장 연약하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시몬’으로서 하느님 앞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에서 사랑의 마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진실한 사랑 고백 위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본질은 의무감이나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대화의 마지막은 “나를 따라라.”(요한 21,19)입니다. 이는 베드로를 처음 부르셨을 때의 말씀과 같습니다. 아마 처음의 베드로는 자기 열정만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뼈아픈 실패를 겪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경험하고,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 후 진정한 따름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따름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주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습니다. 또 실패하고 배신했다고 해서 당신의 부르심을 철회하시지도 않습니다. 철저히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계속해서 질문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얻게 됩니다.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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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15-19)
1)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일은, 사실은 예수님 쪽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세 번이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신 일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언제나 항상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1요한 4,10)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 때문입니다.
그 일에 초점을 맞추면,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너는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래도 너에 대한 내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입니다. ‘회개’는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직후에 곧바로 회개했습니다.(루카 22,62)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은, 그의 회개를 인정하셨고 받아주셨으며, 그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사랑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하고 실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은, 사도로서 당연히 수행해야 할 직무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직무 수행을 잘할 수 있지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직무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1코린 13,1-3)>
3)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말씀은, 당신이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하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은(마태 16,18-19), 변함없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일부 종파에서 베드로 사도의 잘못을 비난하고, 그가 사도의 자격을 잃었다고 주장하면서 교황 제도를 부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넘어진다는 것도 알고 계셨고, 다시 일어선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그를 예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떻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과 보호’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32)
이 말씀은,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받지만,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잘못과 배반자 유다의 죄는 거의 비슷한 죄이고, 둘 다 큰 죄인데, 베드로 사도는 회개했고, 배반자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5) 유다도 자기 죄를 뉘우치긴 했지만(마태 27,3), 그냥 자살했기 때문에 그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었던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도 그 전에 용서하셨을 텐데, 유다 자신이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주님의 ‘용서’도 ‘사랑’처럼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회개는 그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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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진동길 마리오 신부님]
<눈높이 사랑>
“나를 사랑합니까?” “당신을 사랑합니다.” 같은 사랑을 말을 하고 있지만, 주님의 사랑과 베드로의 사랑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베드로가 응답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주님은 ‘아가페ἀγάπη’ 사랑을 원했지만, 제자는 ‘필로스φίλος’ 사랑을 말합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요?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아가페 사랑을 물어보십니다.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시고 가르치신 사랑을 베드로에게 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필로스φίλος’ 사랑을 고집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결국 예수님은 “나를 사랑합니까(φιλεῖς με)?”라고 물으시며 ‘필로스’라는 말을 선택하십니다.
베드로에게서 아가페 사랑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신 것이지요.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춘 사랑을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눈을 마주 봅니다. 그리고 그분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 옛날 베드로에게 물었던 것처럼, 지금 내게 다시 ‘아가페’ 사랑을 물어봅니다. 그분이 원하는 사랑은 성령에 의한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로마 5,5.8 참조)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는 사랑”(로마 8,28 참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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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참조)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그러니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16.17 참조)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사랑을 깨우쳐주소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은 늘 저를 더더 사랑하십니다.
저 역시 당신을 사랑하기에, 일을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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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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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하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고 우리 마음도 모르시기에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 사랑 고백을 듣고 싶으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자주 확인하고 싶고, 그 사랑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꼭 귀로 듣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뜻에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 능력과 한계까지 다 알고 계시기에 지금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 모든 질문은 당신을 위해서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모든 질문은 베드로를 위해서 던지시는 질문이고, 우리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우리에게 사랑 성찰을 하게 하심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나의 사랑을 성찰해야 합니다. 사랑 성찰이란 어찌 보면 사랑 점검인데 이 점검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어느새 실종되거나 방향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이 실종되고 없는 것은 아닌지. 사랑하더라도 내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진실하고 순수한지 성찰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질문은 사랑 고백 기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재(再)고백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 고백을 듣기 원하심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우리의 사랑 고백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랑을 원하지 않고 사랑 고백도 듣기 싫어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내가 사랑한다고 쫓아다니고 계속 사랑 고백을 하면 그에게 나의 사랑과 나의 사랑 고백은 스토커의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부족한 우리 사랑을, 수없이 배반한 우리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사랑하고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십니다.
셋째로 이 질문은 사랑 다지기입니다. 더 사랑해야지, 다시 사랑해야지 거듭 마음을 다지게 하는 것이고, 사랑의 의지를 갱신하고 거듭 쇄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질문을 왜 또 하시냐고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 추궁이라면 짜증 나고 짜증 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성찰, 사랑 고백, 사랑 다지기의 기회를 주심이라면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이고 그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처럼 당신 양 떼를 우리에게 맡기실 때 그 양 떼를 우리도 잘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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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나도 아가페 사랑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21,15-19)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질문하시면서, 사목직을 맡기시고, 장차 베드로에게 다가올 십자가 죽음을 언급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시면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을 예수님께서 아신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신께로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린양들을 잘 돌보라.'는 사목직을 베드로에게 맡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19ㄷ)
으뜸 사도의 길을 걸어갔던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약점이 많았던 사도입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했던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베드로의 이 아픔을 치유해 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베드로는 성령강림 이후 성령을 받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할 때까지 끝까지 예수님처럼 착한 목자가 되어 예수님의 양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 예수님의 영광과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아가페 사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향해 있어야 할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도 아가페 사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합시다!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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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베드로의 가능성과
사랑을 바라보시며
다시 양들을 맡기십니다.
양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맡겨진 생명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진정 돌보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결국 사랑 받은 사람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신비입니다.
공동체의 기초는
지배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상처를 아는 사람만이
상처 입은 이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베드로 실패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겸손함 안에서
비로소 다른 양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살아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기다려 주라는
부르심입니다.
잠시 멈추어
다른 존재의 고통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돌봄의 대상은
존귀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목자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로 섬깁니다.
누군가를 이기는 사람보다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더 깊은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돌보는 순간이
우리 또한 사랑으로
살아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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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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