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내림 받는 김금화
김금화 만신은 마돈나, 피나 바우쉬, 글렌 굴드처럼 천재다. 굿의 천재다. 신이 내린 재주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그냥 신이 내린 사람이다. 자주 하는 대목 중 하나가 ‘배연신굿’(<만신>에서 문소리가 연기한다)인데 수백 년간 전해온 가사 내용이 김금화 만신의 삶과 꼭 같다. 배를 찾아 헤매면서 생이별한 남편을 찾는 얘긴데,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옛날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았다.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치고 헤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극빈가정 출신의 이북 여성이자, 대단히 매력적인 미인이자, 남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굿에는 절대적인 카리스마이고, 자기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의 딸이고, 타인의 감정에 관한 진정한 전문가다. 관심을 안 갖는 게 더 이상하다.
“전 세계 각지에 다른 상상, 환상의 축적이 있다. 한국의 자산, 한국만의 상상의 세계를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만신을 만든 감독에 이야기가 이 영화를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읍니다
관람객 중에는 기독교를 다니는 분들은 다투다 나가는 분이게셔지만 외국분들은 끝까지자리을 지키고 영화를 관람 했읍니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다큐멘터리와 드라마가 혼재된 장르입니다. 김금화의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영화는 그녀의 족적을 드라마로 재구성해서 보여줍니다. 여기서 가장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감독의 의도는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극적 재미’이겠지요. 누군가의 일생을 따라가는 수단이 인터뷰, 그리고 실제 현장을 담은 논픽션 영상으로만 채워진다면 러닝타임 두 시간은 몹시 길고 지루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또한 실제 촬영 자료가 없는 그녀의 유년기나 일상의 부분부분을 드라마를 통해 채워넣을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배우들이 무녀 김금화의 인생을 재현할 때, 그 인생의 굴곡은 한층 풍성하게 다가옵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감독의 기교가 나레이션과 드라마의 여백을 채워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탱화처럼 그려진 무녀 그리고 신들의 기기묘묘한 그림과 동시에 깔리는 꽹과리, 피리 등 빠른 템포를 지닌 사운드트랙은 그야말로 굿판처럼 얼을 빼놓습니다. 신내림을 처음 경험하는 김금화의 유년기부터 청년기와 중장년기를 거치는 그녀의 신비한 체험을 소개할 때마다 음산하고도 귀기어린 음악은 보는 이의 신비감과 공포를 건드립니다. 물론, 이것은 썩 유쾌한 음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기꾼 쯤으로 인식되던 무당의 진면목을 드러낸다는 부분에서 이 영화가 가진 미스테리 장르로서의 흥미는 다른 엑소시즘 영화에 결코 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마다 증언처럼 삽입되는 다큐멘터리는 어지간한 모큐멘터리보다도 설득력을 갖추고 있죠. 정작 극적으로 재현되는 장면보다 김금화 본인의 담담한 인터뷰에서 소름이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녀의 신비함을 앞세워 그녀를 대단한 사람인양 포장하지 않습니다. 무녀로서의 이질감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녀가 무녀라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애환을 보여주죠. 일단 그녀는 무녀라는 직업 때문에 겪어야 했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아픔이 있습니다.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그녀를 의지하다가도 한 편으로는 천시하고 박해합니다. 신의 힘을 빌어 병마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존재이다가도, 헛소리와 춤사위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마녀로 둔갑되곤 했으니까요. 그녀는 거의 일생을 누군가의 손가락질로부터, 위협으로부터 도망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친구들에게, 커서는 공권력과 다른 종교로부터 등 떠밀려야 했던 약자에 불과한 존재였지요. 사진 속처럼 목사와 신도들이 와서 훼방 하고 사탄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무속신앙으로 남아 지켜야 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삶은 단지 사회 속 개인의 비극으로 축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김금화는 시대의 아픔을 등에 지고 살아온 존재이기도 했어요. 일제 강점 시대, 그녀는 굶주림과 싸우고,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 억지로 시집을 가야 했으며 시어미의 모진 소리에 시달려야 했던 여자였습니다. 6.25 전쟁 통에서는 분단국가의 가운데에서 사상과 신념을 끊임없이 취조당하며 죽을 뻔한 고비도 몇 번을 넘겨야 했지요. 그녀의 인생은 시대가 남긴 상처 자욱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역사의 격류 속에서 휩쓸려다닐 뿐인 존재로 남지 않습니다. 산 자의 원망과 죽은 자의 원혼 때문에 몇 배의 지옥을 겪었음에도, 신음하는 대신 그녀는 이 모두를 품고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아픔, 집단의 아픔, 그리고 나라의 아픔 그 전체를 달래고자 제를 지내고 신을 부르며 그녀는 우짖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산 자와 죽은 자 가리지 않고 아픈 모든 이들의 어머니를 자처했지요.
연평도 풍어굿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즐거워 모습
옛날에는 노래방도 룸살롱도 없어 그저 뱃사람들은 흥미롭게 노래 부르고 춤추던 긋판들
어떻게 미신이라고 말살 시키려고 하는지 안따가워 하는 모습은 그때 시절을 살아 보지 못한
저로서는 흥미로운 모습이었읍니다
넘새라는 이름에서 비단꽃으로 바뀌고 너무 좋았다는 김금화 무속인
그리고 그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 한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한’을 푸는 방법은 슬픔에 겨워 울고 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이 영화는 굿을 통해 보여줍니다. 무당이란, 굿이란, 울고 애원하고 음울함에 지배되는 것이 절대 아니에요. 꽹과리, 방울, 북이 함께 하는 이것은 신명나는 것입니다. 슬픔을 잊고 복을 부르기 위해서 그녀는 춤을 추고 소리를 합니다. 꼭 누군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고달픔을 잊고자 그녀는 쫓기는 와중에도 판을 벌려요. 흥에 겨워 모두가 함께 덩실덩실 웃고 떠드는 그 현장은 에너지가 넘칩니다. 굿은 곧 축제인 거지요. 노래와 춤,
사진에 담지 못한 배안에서 풍어굿 장면은 모두가 하나가 되고
사건들은 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왜 민속 신앙으로 지켜야 하는지 알게 하는 것 같아읍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김금화의 유년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녀는 방울과 칼 같은 무구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를 모으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치마폭에는 배고팠던 시절의 수저가,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던 총알이, 무녀로서의 인생 2막을 열어준 카메라가 담깁니다. 그리고 어린 금화의 치마 폭에 무언가를 넣어주는 사람들은 영화 속 배역이 아니라 그 배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류현경 본인으로, 문소리 본인으로, 그리고 김금화 본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김금화의 인생 조각 조각이 그녀의 인생을 스크린에 담고자 했던 이들의 손에 의해 어린 금화, 넘세의 치마폭에 오롯이 담깁니다.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갈무리되고, 그녀의 드라마는 이분되었던 김금화의 실제 삶과 겹쳐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카메라는 어린 금화를 뒤쫓는 카메라와 스텝들, 영화 세트까지 모두 다 노출시킵니다. 카메라 속 스토리와 이를 담는 바깥 세계, 그리고 대역과 본인,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초현실과 현실 그 모든 경계가 하나의 프레임에 담기며 영화 속 이분되어있던 세계는 하나로 화합니다. 이를 지켜보는 정체불명의 시점은 사람들 사이를 맴돌다 하늘 위로 훌쩍 올라갑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 보는 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과 늘상 곁에 있는 귀, 혹은 신이라 불리는 그 무언가가 아니었을까요.
한국에서 사라져 가는 문화중에 아쉽다고 하는 것이 무속 신앙과 공옥진선생님에 병신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500백전 부터 내려온 우리 문화
잠시 내려 놓고 관람 하면서 아 그래 옛날에는 장독대에서도 빌고 아이가 태어 나면 부정 탄다고 금줄 걸어 놓고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볼수 있는 시간인 것 같아읍니다
원주는 모르겠는데 서울에서 본 날 가족 관람객이 많아읍니다
영화에서 세월이 흘러도 무슨 날이면 택일도 하고 이사날도 본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니까
아이가 우리 그래서 이사 하는날 할머니가 그날은 안되고 이날은 된다고 했구나
연인은 가을에 결혼을 못한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 알겠다 이런 저럼 대화를 하면서 영화를 보고 특이한 저녁도 먹었읍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드세요 서울불고기 먹으면서 영화모임 회원들 생각 했지요
고기를 뭉쳐 주면 올려 놓고 먹는 불고기 맛있더군요
사장이 젊은 분이었는데 음식에 자부가 대단 했고 열정적이라 좋더군요
좋은 영화를 보여 주기위해 애쓰고 계신 보거스님에 모습 같아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저녁 시간 보내고 왔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