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3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마르코 6,30-34
쉬면 도움이 되고 쉬지 못하면 짐이 된다
활기 왕성한 20대 초반 겨울에 성당 청년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을 간 적이 있습니다.
2박3일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산을 정상까지 뛰어서라도 올라갈 기세였기 때문에 남들의 짐까지 짊어지고 쌍계사에서 뱀사골까지 거뜬하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무릎 인대가 늘어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틀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남에게 내 짐까지 맡기고 끝에 쳐져 한쪽 발을 질질 끌며 쫓아가야 했습니다.
어제는 제가 기다려줘야 했던 이들이 이젠 저를 기다려줘야 했습니다.
그때 왜 산에 오르면 겸손해진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일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일주일에 하루를 쉬셨습니다.
그리고 칠 년에 일 년은 쉬도록 법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신하는 이들은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버는 것처럼 쉬는 날을 마련해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하면 오래 못 버팁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읽으며 신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사제들이 좀 더 본당을 비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고 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고 하십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피정하라’는 뜻입니다.
현재 교구사제의 연중피정은 길어야 5일입니다.
그것도 저녁에 들어와서 오전만 하고 가니 실제로는 3일 정도라 하겠습니다.
일 년에 3일 피정! 교황청에서 정한 피정기간은 일 년에 10일입니다.
그리고 피정에 들어가서도 강의를 듣고 전례를 공동으로 하는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피정은 본래 광야에서 나 혼자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광야에서 하신 일이 피정입니다.
광야에서는 미사도 성경 읽는 것도 강의 듣는 것도 없습니다.
존재 대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침묵 중에 주님과만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야합니다.
그러나 이런 피정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정기간이 짧은 데는 신자들의 영향도 매우 큽니다.
평일미사를 빠치면 개중에는 불만을 토로하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많은 신자들이 제자들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제자들의 피정을 방해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직접 그들에게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목자들이 없어 목말라 하는 수준의 신자들은 이미 주님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 오른 이들입니다.
목자들이 피정할 때면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며 스미르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카르포스 교부의 일화입니다.
자고새 한 마리와 놀고 있던 폴리카르포스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성인이라 불리시는 분이 어떻게 새와 놀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폴리카르포스는 빙그레 웃으며
“활도 쓰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놓아야지, 언제나 줄을 매어 두면 못쓰게 되고 맙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자들이 쉴 시간이 부족하면 오히려 양들에게 피해가 갑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목자들에게 쉴 시간을 충분히 할애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더 많이 쉬어 보다 생기 있는 영으로 신자들을 대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너무 바쁘게 사목하셔서 지쳐있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외국은 피정기간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이요 휴가도 일 년에 거의 1달이고 7년을 일하면 1년은 안식년을 합니다.
그러나 저희 교구 같은 경우는 평생 1번만 안식년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사제들에게 조금 더 쉬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신자들이 본당 신부님이 피곤하신 것을 보면
평일에는 우리가 공소예절이라도 하며 지낼 터이니 일주일 동안 조용하게 피정하며 쉬고 오시라고 권하는 분위기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3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 6,30-34
이 혼돈의 시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봐왔습니까?
지혜가 결핍된 지식, 겸손이 사라진 학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극단적으로 양분화되고 복잡다단한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정말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한 균형 잡힌 식별력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인들, 그중에서도 지도자들, 나이 든 사람들은 얼굴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가슴에는 지혜를 품고 살아가며, 이 무분별한 시대 균형추 역할에 충실해야 할것입니다.
이 혼돈의 시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봐왔습니까?
지혜가 결핍된 지식, 겸손이 사라진 학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나라의 이 슬픈 현실을. 좋은 머리에, 강한 학구열, 그에 못지않은 출세욕에, 줄까지 잘 서 승승장구하며, 그래서 이 나라 전체를 쥐었다 놨다 하는 집단 권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집단 지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기본적인 양심이나 상식, 예의범절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자신들의 견고한 성을 지키기 위해 파렴치한 일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마치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떼처럼 전락해버렸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선왕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는 솔로몬이 보여준 태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간 솔로몬의 꿈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실 기세입니다.
만일 제가 솔로몬이었다면,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주변 강대국들에게 당당히 맞설 강력한 군사력, 이를 바탕으로 한 천년 왕국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왕으로 살아가는 동안 백성들 모두 굶주리지 않고, 전쟁도 겪기 않고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대답을 보십시오.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의 대답이 너무나 마음에 흡족하셨던 주님께서는 더 큰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오늘 이 땅의 지도자들과 너무나 달라 슬픈 마음까지 듭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주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 깊이 깊이 성찰해볼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토요일 강론>
(2024. 2. 3. 토)(마르 6,30-34)
<피정>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일”을 우리 교회에서는 ‘피정(避靜)’이라고 부릅니다.
피정은 ‘영적으로 쉬는 일’이고, 주님 안에서 ‘새 힘’을 얻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이리 떼’ 가운데에서 ‘양들’로서 활동하느라고 무척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활동하는 동안 그들을 맞이해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사람들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만났을 텐데,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몸도 지쳐 있었겠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도들에게 ‘안식’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는 말씀의 표현만 보면, 제자들만 보내시는 것 같은 말씀인데, 예수님도 함께 가셨기 때문에, 뜻으로는 “우리 함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입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뒤에 혼자 남아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시면서, 그들보다 더 피곤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잠깐 쉴 틈도 없이 매우 바쁘게 일하시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활동을 마치고 예수님에게로 돌아온 사도들은
바로 그 상황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안식’과 재충전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음 말씀이 바로 연상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 자체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어 누리는 생활이고, 신앙생활 자체가 피정입니다.
<제대로, 또 온전히 집중할 수만 있다면, 미사와 각종 전례도, 개인적으로 바치는 기도들도, 성경 묵상이나 성체조배 등도 모두 안식을 얻어 누리는 일이고, 피정입니다.
성당은 주님 안에서 쉬는 곳, 안식을 누리는 곳입니다.
힘을 빼앗기는 곳이 아니라 새 힘을 얻는 곳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지치기만 한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마치 무슨 노동을 하듯이 하기 때문인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즉 강제노동을 하듯이 한다면, 그것은 결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외딴곳으로 가서’ 사도들과 함께 쉬려고 했던 예수님의 계획이 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과 사도들의 안식을 방해하려고 따라간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을 얻기를 원해서 따라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피정하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모두 맞아들이셨고, 또다시 쉬시지도 못하고 일을 하시게 되었는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안식을 얻으셨고, 사도들과 군중은
그 가르침을 들으면서 안식을 얻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에서, 시편 23편이 연상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사실, 목자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항상 인간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이 주님을 떠나 있었거나, 주님을 모르는 채로 살고 있었거나, 잊어버린 채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잃은 양들’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들’을 되찾으려고 오신 분이고,
당신이 바로 참된 목자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삶’에 지쳐 있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목적지가 없는 인생을 살면서 방황하고 있거나,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참된 목자이신 분이며, 참된 안식처이신 분이며,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내가 찾은 안식처에서 함께 쉬자고 세상 사람들을 초대하고, 또 내가 얻은 ‘새 힘’을 세상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 선포이고, 사랑 실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