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인가 종로나 명동이 노점상 거리가 되어버렸다. 사람마다 이런 야시장 같은 광경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할텐데.. 내 기억 속에는 외갓집 근처의 부산 광복동 야시장 풍경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 번잡함 속을 어린 내가 이웃에 살던 먼 친척 언니랑 돌아다니던 것, 그 언니는 동광동에 사시던 먼 친척 할머니의 수양딸로 홀몸이신 할머니랑 둘이 살았는데.. (우리는 다 피난민 가족이라 친척도 거의 없으니, 이런 먼 친척 한 분도 아주 가까운 사람이 된다.) 이 언니가 광복동 한 골목 주류 도매가게 집 남자랑 연애를 했던 것 같다. 나야 밤중에 나들이 갈 수 있으니 좋다고 따라나선 거지만, 언니는 혼자 나서질 못하니 내 핑게대고( 이 아멜리에 맛난 것 사준다고, 아님 뭘 사러가야할 게 있다거나? 암튼) 덕분에 이런 야시장 풍경은 어린 시절의 내 추억 속의 풍경과도 닮아서 익숙한 그리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솔직히 명동이 이런 복잡한 모습으로 바뀐 것은 싫기도 하다. 명동의 낭만과 멋스러움이 이런 뜨내기 노점상으로 뒤덮인 걸 보면 답답하다. 골목골목 노점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으니 우선 걷기도 불편하고, 거리나 가게 쇼윈도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여가도 없이 사람들에 밀려 정신없이 지나게 된다.
그리고 명동에도 어김없이 스타벅스를 시작으로 톰앤톰스,. 여러 유명 커피전문점들이 곳곳에 다 들어서버렸다. 어쩌다 한번씩 나갈 때마다 새로 생기는 건 이런 커피전문점과 화장품 가게다. 명동이 예전의 최고 멋장이들이 드나들던 그 명동이 아니라 이젠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한 것. 관광객이나 행인들의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있는 건물마다 일층에 들어선 것들은 대부분 유명 커피전문점들이고, 오래된 카페 대부분은 2층에 있다. 사보이호텔 커피숍이 아직도 남아있을까?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고 미처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모르겠다.
학창시절 내가 자주 다니던 고전음악감상실들은 다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집도 있다. 작년에 소개했던 명동막국수나 유명한 명동교자-닭칼국수집, 40년 가까이된 소고기국밥집, 할매낙지집 같이 오래된 음식점들. 중국대사관 앞길의 오래된 중국음식점들도. 그런데 이 골목 안에 있던 서호돈까스가 없어진 것이 가장 섭섭하다. 명동막국수 집 사진을 찍을 때 국수집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서호돈까스는 주인 아들이 물려받아 충무로 1가 골목안으로 자리를 옮겨 장사를 하다가 문을 닫았단다. 그래도 꿋꿋이 남아있는 <RODIN>이 내 오랜 단골 카페이다. 이 집도 80년대 중반에 문을 열었으니 25년은 된 것 같다. 처음 카페 이름은 <ROBBY>였었는데.. 어느 땐가 내부수리를 조금 하고, 이름만 살짝 바뀌고 가게는 여전하다. 처음 이 가게를 누구랑 갔었나? 기억도 가물가물 아마 연극하던 친구였던 것 같은데..
난 이 카페는 혼자서도 곧잘 간다. 이십 년을 명동 나갈 적마다 차 한 잔 마시고 다리도 쉴 겸 이 익숙한 계단을 행복한 마음으로 올라 간다. 조용히 앉아 공상을 하거나 수첩을 꺼내 생각나는대로 끄적거리기도 하고..
인테리어 바람이 불기도 전에 오픈한 이 곳 인테리어는 정말 예뻣다. 내 기억에 바닥 전체를 원목의 마루를 깐 것도 이 카페가 처음이었던 것 같고(지금은 바뀌었지만 처음엔 입구 계단도 나무였다.), 오픈된 주방 천정 가득 색색의 예쁜 수입 도자기 찻잔들이 가득 걸려 있었는데, 이 집의 특징이 바로 이 특별한 찻잔. 손님마다 똑같은 찻잔이 아니라 다 다른 하나하나가 특별했던 찻잔들은 가게 주인이 외국여행 하며 사 모아온 것들이었다. 내가 한참 탐을 냈던 푸른색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도자기 벽시계, 작지만 아주 깔끔하고 예쁜 화장실, 홀 가운데의 온갖 잡지가 가득 쌓여있던 커다랗고 둥근 테이블은 모르는 사람도 나란히 앉기도 하고, 혼자 앉아있어도 책 보며 차 마시기에 그만이었다.
음악도 클래식이나 재즈를 적당한 볼륨으로 듣기 좋을 정도로 틀어준다. 편안하고 아늑하다는 것이 바로 커피전문점과 카페의 차이 같기도 하다. 물론 서비스해주는 사람이 있단 것도 틀리고, 차 한 잔을 마셔도 깍듯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 돈 일이 천원 더 내도 그 값을 한다. 그날그날 갈아서 만드는 이 집 브랜드커피 맛도 일품이다. 그리고 마시고 싶은 만큼 리필도 잘 해준다. 눈치 보지않아도 종업원이 와서 '손님 커피 리필해 드릴까요?'하고 물어주니까, 이렇게 편안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를 두고 왜 다들 서비스라곤 없는 커피전문점에 갈까? 난 오히려 그것이 의아하다. 세대 차이일까?
가게 안은 복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여기가 내가 그렇게 탐을 냈던 도자기 벽시계가 걸려있던 자리이다. 시계는 사라지고 액자가 대신했다. 아마도 주인이 바뀐 듯?
세월 탓에 낡긴 했지만, 역시 전부 나무로 꾸며진 화장실 안에는 세면대와 비누, 타월, 로숀 등이 다 비치되어있다. 8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호텔이나 큰 레스토랑이 아니면 커피숍에 이런 화장실이 드물었는데.., 그림이 있는 도자기 세면기는 더구나! 이 앙징맞은 고양이와 쥐가 그려져 있는 세면기@!
연말이라고 이런 초를 장식으로 올려두었는데, 평소에도 늘 촛대나 꽃이 테이블 마다 올려져 있다.
난 늘 마시는 이 집 브랜드 커피 -원두 향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고, 앞의 친구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아시다시피 에스프레소 잔은 크기가 작다.
중간중간 보수- 리모델링을 했어도 세월이 드러나는 이 창틀에 내 지난 시간의 흔적도 머물러 있다.
참, 무슨 일 때문 이었던지? 너무 속이 상해 엉엉 울연서 친구를 기다리던 일도, 처음 선 보는 남자를 호텔 커피숍이 맘에 안든다고 다짜고짜 이 가게 까지 끌고 왔던 일도... 다 지난 추억이다. 시간이 흐르고.. 창 아래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 바뀌어도 변함없는 것이 오래된 가게가 주는 친밀함, 종업원들의 친절과 아늑한 공간이 주는 편안함, 무엇보다 내 기호에 맞는 맛있는 커피! 역시 난 현대적일진 몰라도 일회적인 커피전문점 보다는 오랫만에 들려도 반갑게 맞아주는 이 오래된 카페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