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8월6일 월.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
제2독서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1,16-19
복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0
◈ [서울]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2018년 나해 8월6일 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다고 합니다. 한글을
그만큼 배우기가 쉬운 문자입니다. 한글은 백성들을 사랑하는
세종대왕께서 만들었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른데 우리는
중국의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중국의 문자인 한자는 배우기가
어려웠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글을
모르기에 책을 읽을 수 없었고, 책을 모르기에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책을 모르기에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백성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헤아려서 쓰기 쉽고,
배우기 쉬운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저도 세종대왕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오늘도 한글로 묵상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새로운 문자인 한글로 어려운 유교의 경전을 책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오랜 시간 익숙하게 접했던 불교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조선의 통치 이념은
유교였지만 백성들은 1000년 동안 불교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은 모두 부처님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백성들은 책을 통해서 친숙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한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역시 백성들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97년 8월과 9월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여성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8월에는 영국의 황태자비인 다이애나가 세상을 떠났고,
9월에는 성인이 되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분은 아름다운 외모와 신데렐라와 같은 삶으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른 한 분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모습이지만 그 영혼이
아름다운 삶을 사셨습니다. 한 분은 궁전에서 살았고, 많은 풍요를
누리고, 부러움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한 분은 가난한 빈민가에서
살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 중인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인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옷과 신발, 외모를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입니다. 침을
뱉고 모욕한 사람입니다.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제자입니다.
스승님을 팔아넘긴 제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이해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독과 아픔을
예수님과 나눌 수 있습니다.
‘너는 오늘 낙원으로 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 죄가
컸어도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마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 때문에
목이 마르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목이 마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면 주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결심을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시작한 일을 다 마치지
못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존심과 교만함
때문에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이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도 포기하셨고, 재물도
포기하셨고, 세상의 명예도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하느님께 그런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모두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남의 목소리 듣는 법
2018년 나해 8월6일 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남의 목소리 듣는 법>
복음: 마르코 9,2-10
옛날 어떤 섬에 천개의 종을 가진 사찰이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
흔들리며 내는 천 개의 종소리는 듣는 이들을 황홀경에 빠뜨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그 섬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종은 물속에서도 영롱한 소리를 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려 그 섬 주위로 몰려들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 청년이 작정을 하고 매일 바닷가에 앉아서 물속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파도 부서지는
소리와 바람에 실려 오는 갈매기 울음소리뿐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실망에 실망을 거듭했지만 마을의 현자에게 찾아가서 좋은 말씀을
들으며 힘을 얻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 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소리를
들으려는 마음은 접고 마지막으로 다시 바닷가에 나가서 파도소리와
갈매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음을 놓으니 그 소리도 들을 만
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종소리, 두 개의 종소리... 천 개의 종소리가
교향악을 하는 것처럼 명확히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싶다 하면서도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는
몇 달 동안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 한 청년에게 한 시간 성체조배 해도
문제가 안 풀리면 제가 백만 원을 주겠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고민을 하고 도움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기도를 안 합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복권을 안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기도한다고 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닙니다.
성당에 앉아있더라도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주님께서
말씀하실 기회가 없습니다. 말씀하셔도 들리지 않습니다. 너무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가장 시끄럽게 만드는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생각은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끼어들 수 없으십니다.
위 예화에서 청년은 소리를 듣겠다는 자신의 뜻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자신의 뜻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그 자리에 있어도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자신이 갇혀 있는 것입니다. 소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면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감각을 깨워야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듣는 중에는 모든 생각이
사라집니다. 생각을 하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자신의
의도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머물 때 하느님은 이미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이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내가 그분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세 사도가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봅니다. 이 장소는 ‘산’입니다. 기도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산은 높이 올라갈수록 세상 것과 멀어지고 하느님과
가까워집니다.
오늘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산에 머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산에 머문다는 말은 지금 여기에 머문다는 뜻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보고도 천막을 쳐서 함께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세상 것을 떠나 그분 앞에 머물기를
배울 때 그분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증인이 됩니다.
자신에게도 변모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어떤 목수의 아들이 친구들을 데려왔습니다. 친구들은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는 모습을 재밌게 구경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들의 실수로
아버지가 풀어놓은 손목시계가 톱밥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톱밥이
워낙 많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처음엔
걱정하다가 나중엔 서로의 탓이라고 싸움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목수 아버지는 기계를 끄고 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급할수록 마음을 가라앉혀라. 일단 무릎을 꿇어보렴. 그리고 귀를
마룻바닥에 대 보아라. 무슨 소리가 들리니?”
잠시 조용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소리에 집중하였더니 시계소리가
들렸습니다.
“째깍 째깍!”
무릎을 꿇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어보십시오. 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으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을
거부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들을 준비가 안 된 것뿐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8월6일 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 마르 9,2-10: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절) 하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 시기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천상에 ‘초막’을 지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해야할 때이다. 온갖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순종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영광에 오르셨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 44.)
예수님의 변모시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부활 때 천사는 순백의 옷으로 나타난다(16,5).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독특한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예외적이고도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가운데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구약성서상의 이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즉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오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는 고백은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모가 지니는 의미는 우리의 삶이 고통을 영광의,
부활의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고, 그러한 자세로
영적으로 더욱 진보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안에서 고통을 통해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통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있던
고통이었다.
고통의 신비란,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신비라는 것이다.
고통 자체가 신비일 수는 없다. 그 고통을 통해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고통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는 같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변모축일을 지내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우리의 모습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 고통은 하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천상 체험의 감동을 마음에 품고,
이제 하산(下山)합시다!
2018년 나해 8월6일 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천상 체험의 감동을 마음에 품고, 이제 하산(下山)합시다!
타볼산 정상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베드로
사도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었던가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스승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얼굴은 광채로 빛났으며, 입고 계시던 옷도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마르코 복음 9장 3절)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말로만 듣던 이스라엘 민족의 대영도자,
엘리야와 모세가 눈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에 살고 분위기에 죽는 사람이었던 분, 급하고 충동적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갑작스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하고도
기상천외한 분위기 앞게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맨탈 붕괴, ‘맨붕’ 상태에 빠졌습니다.
잠깐 동안의 천상 체험으로 인해 무아지경에 빠진 베드로 사도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코 복음 9장 5절)
베드로 사도는 비록 잠깐이지만 맛보고, 느끼고, 만끽한 천국 체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고, 여기 지금, 타볼산 위에서, 광채로 빛나는 인물들 사이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은 동료들과 함께 초막 셋을 짓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잠깐이지만 맛본 천상 체험을 뒤로 하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잠깐 동안의 천상을 체험한 사도들이었지만, 하산(下山)해보니,
무정하게도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과 같은
피곤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고, 어제와 같은 인간 실존의 비참함은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아직 영광과 완성의 때가 도래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스승님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도래할 그 순간을 맞이하려면, 먼저 그분처럼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타볼 산에서의 변모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원과 정체를 핵심
제자들에게 뚜렷히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들이시며, 머지 않아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시겠지만,
죽음에 머물러있지 않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실 것이며,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실 것이며 세세대대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겠지만 또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야겠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마르 9, 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8월6일 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마르 9, 3)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사랑은 사랑으로 빛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거룩한 변모로 주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의 힘으로 거룩한 변모가 일어납니다.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모든 변모가 지향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우리 신앙의 빛나는 최종 목적지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변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또한 서로를 빛나게하는 그리스도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우리가 거룩해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사랑의 변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변모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희망을 되찾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돈 꾸러미 : 능력의 말씀
2018년 8월6일 월요일
오늘은 “돈 꾸러미”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31절 말씀에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살얼음판 위를 걸어보셨습니까?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허리에 무거운 돈 꾸러미를 차고
살얼음판을 걷다가 그만 얼음이 깨지면서 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조금만 힘을 내면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하지만 허리에 찬
무거운 돈 꾸러미 때문에 안간힘을 써도 자꾸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 때 이 상황을 보던 사람들이 외칩니다. “버려요! 버려! 당신
허리에 찬 돈 꾸러미를 풀어버려요.”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은
싫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오히려 더 돈 꾸러미를 두 손으로 꼭
움켜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사람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세상의 것을 버리라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을 버리면 살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버리고 다시 찾으러 가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아직 놓지 못하고 있는 세상의 꾸러미가 있습니까? 있다면
오늘 미련 없이 다 내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따르는 굳센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지금 여기에서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8월6일 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르 9,2-10)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첫 번째로 예고하신 후(마태8,31-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입은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마르9,2-3).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의 빛(요한9,12)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당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을 힘겹게 따르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떨결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17,4).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영광은 차후의 일이니 거기에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얼마나 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한 체험과 뜨거운 감동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던 신앙체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입니다. 불쏘시개의
역할은 불이 붙게 하는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체험은
하느님에 대한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키우고, 그 신앙의 결실인
사랑의 봉사로 이어지는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손희송). 황홀한
체험에 집착해서도, 안주하고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상으로 내려왔듯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의미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체험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삶이 그것을
말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고린3,18).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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