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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3,36-43
제자들의 청에 따라 주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풀이해 주십니다.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와 가라지는 함께 자라며, 수확 때 ― 곧 세상 종말에 ― 비로소 갈라집니다. 이 풀이의 마지막 한마디가 온 비유를 환히 밝힙니다.
“의인들은 해처럼 빛날 것이다.”
성 대 바실리오는 이 ‘해처럼 빛남’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희망을 봅니다. 그것은 단지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그분을 닮아 빛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모든 일은 바로 그 ‘빛남’을 향해 우리를 익혀 가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실리오는 또 일깨웁니다.
이 ‘밭’은 세상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이기도 하다고. 우리 안에도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선한 갈망과 이기적 욕망이, 기도하려는 마음과 미루려는 마음이 같은 밭에서 함께 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답은 ‘성급히 뽑지 말라’였습니다. 내 안의 가라지를 보며 절망하여 밭을 통째로 갈아엎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시간이란 바로 그 마음의 밭을 성령께 가만히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때를 따라 가라지를 가려내시고, 우리를 해처럼 빛나는 밀로 익혀 가시도록.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영성은 ‘가라지 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수확의 희망’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어도, 끝내 해처럼 빛날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 한 걸음 더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내 안의 가라지를 보며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마음의 밭을 성령께 내어 맡기는가?
나는 ‘해처럼 빛날 그날’의 희망으로 사는가?
나는 완벽이 아니라 ‘자람’을 받아들이는가?
주님,
제 안의 가라지를 보며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밭을 성령께 내어 맡기게 하시고, 해처럼 빛날 그날의 희망으로 오늘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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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악을 쓰지 않도록 참을성을 키워야>
오늘 복음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에 대한 풀이입니다. 인간이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왜 뽑으려고 들지 말아야 하는지 제자들에게만 풀이해 주시는 것입니다.
밭의 가라지는 뽑아내야 하지 않는가?
공동체에서 악을 제거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의문에 대해서 오늘 주님께서도 뽑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지금 당장 우리가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며 종말의 때에 하느님께서 당신 친히 천사들을 시켜서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먼저 지금은 아니고 종말에 하신다는 말씀인데 왜 지금 당장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지혜서와 복음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그러니까 지혜서는 11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자비로우시고, 자비로우시기에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싫어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얘기한 다음에 그런데도 죄짓는 인간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고, 복음의 주님께서도 회개의 열매를 맺을 시간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실 죄지을 때마다 다 작살을 내시면 살아남을 인간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고 악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고 악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기에 서로가 죄인이고 악인이라며 서로를 제거하려 하는 것인데 힘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이런 죄인들을 참아주실 수 있을 만큼 힘이 있고 관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참을성 곧 참을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사실 힘이 없기에 안간힘을 쓰고 악을 쓰는 것이며 이렇게 악을 쓸 때 인간이 악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참을 수 있는 힘인 참을성, 이것이 진정한 힘이고 사랑임을 가르침 받고, 그 힘을 키우겠다고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기에 지옥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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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이 세상에서 펼치시는 하느님의 선에 더 우리 마음의 시선을 더 두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설명을 찾고 있습니다(마태오 13:18-23, 7월 24일 복음 참조). 그들은 이 비유를 이해하여 밖으로 드러내 어떤 명백한 답을 밝혀내고 싶어 합니다. 설명이란 본래 그런 역할을 합니다. 물론 설명을 찾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우리가 내놓은 설명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비유는 씨앗에 관한 것입니다. 씨앗은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선과 악은 세상 끝날에야 분리될 것입니다. 곧, 실질적으로는 지금 이 시간에는 결코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영원 안에서는 그렇지만, 시간 안에서는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 일은 우리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어떤 정치인들이 "악을 근절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들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하지 않으셨고, 부처님도 하지 않으셨는데, 이 정치인이 하겠다고 하는구나!" 참된 분별은 마지막 심판에서만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악한 행위에 너무 놀라지 맙시다. 우리 자신도 그 그림 속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늘 우리가 선이라 부르는 것이 내일은 악이라 불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체 그림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것을 보십니다. 전체를 본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생각이 악을 덜 악하게 만들거나, 피해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 왜 이렇게 악이 많은가를 끝없이 묻는 대신, 왜 이렇게 선이 많은가를 묻는 데 조금이라도 마음을 쓸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더 나은 공동의 집(가정)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종종 … 고통과 시련의 길을 지나며 … 버려짐과 외로움의 상황을 맞이하고 … 악한 만남과 불의한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도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 안에 굳건히 서도록, 주님의 섭리와 능력을 신뢰하도록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하신데, 왜 당신 선으로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신비는 이해하기보다 믿음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어떤 고통은 피하기보다 용기 있게 맞서야 합니다.
어떤 문제는 해결하기보다 신앙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농부가 밀을 귀하게 여기듯,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성경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루카 15,1-7),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루카 15,8-10), 남은 빵 조각을 모으시는 예수님(마태 14,20), 자캐오를 부르시는 주님(루카 19,1-10),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요한 8,1-11), 베드로를 다시 세우시는 주님(요한 21,15-19)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죄와 악을 대할 때 인내해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 안의 불의와 추문을 보며 분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최선을 다하되, 나머지는 나에게 맡겨라. 늘 최선과 사랑을 지향하되,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에 빠지지 말아라."라고요….
초대 교회도 죄인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죄인들은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세상 끝날까지 교회 안에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배타적인 모임이 아니라, 상처 입고 부서진 하느님의 자녀들을 모두 맞아들이는 따뜻한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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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예수님께서 성경을 활용하시는 방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경 말씀을 통해, 모든 이를 품으시는 급진적인 포용의 메시지를 가르치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랑의 렌즈를 통해 성경을 읽기
예수님께서 성경을 활용하시는 방식
2026년 7월 27일 월요일
성경을 사용한다고 해서, 비록 그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곧바로 성경을 생명과 사랑, 성장과 지혜를 위해,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에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 리처드 로어,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리처드 로어 신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히브리 성경을 사랑의 눈으로 읽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히브리 성경 가운데 열아홉 권은 한 번도 인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출애굽기, 신명기, 이사야, 호세아, 시편과 같은 몇몇 책만을 즐겨 사용하신 듯합니다. 겉으로 보면 성경의 많은 부분을 외면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말씀이 예수님의 의식 전체를 형성했습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외면하신 구절들을 살펴보면, 폭력이나 제국주의, 배제, 정결 규정, 음식법 등 사람을 억누르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깊이 뿌리내리셨지만, 단순히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데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깊은 흐름, 성령의 움직임, 유다인 역사의 방향성을 붙잡으시며, 피상적인 독해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레위기를 인용하신 적은 단 한 번뿐인데, 그것은 수많은 금지 규정들 가운데 유일하게 긍정적인 계명, 곧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기 19:18 참)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이지 않은 규정들, 곧 단순한 인간의 계명이 하느님의 계명인 양 제시되는 성경 구절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견을 드러내셨습니다(마르코 7:1–23, 마태오 23장 거의 대부 참조).
그리고 613개의 분명한 율법을 단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마태오 22:34–40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성경 구절들을 과감히 생략하셨습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두루마리를 처음 읽으실 때도 마지막 반절을 빼고 읽으셨습니다(루카 4:18–19). 그리고는 두루마리를 말아 시종에게 건네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곧 성경을 조정하신 것처럼 보였기에, 회당 사람들은 그분을 노려보았을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2절 후반은 "우리 하느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라"라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는 앞부분인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라"는 부분에서 멈추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아시는 하느님을 더 잘 드러내는 구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경을 사용하시면서 언제나 급진적인 포용, 자비, 정의의 메시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배제와 종교적 의로움, 약자와 죄인, 부정한 이들을 억압하는 지배적인 종교적 메시지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셨습니다(마태오 23:23 참조). 이런 말씀들은 그분께서 가치의 분명한 서열을 두셨음을 보여줍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인의 가치 가운데 자비는 언제나 가장 으뜸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성경이 동일한 무게를 지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근본주의적 시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지요. 예수님은 선함을 단순히 행위 자체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열매로만 알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루카 6:43–45 참).
바오로 사도는 그 열매를 이렇게 나열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신뢰, 온유, 절제(갈라 5:22–23 참조).
우리 공동체 이야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이 "사랑은 곧 하느님이시다"로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큰 빛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은 곧바로 어떤 인격적 존재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무엇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모든 인간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선포하는 일은 많은 이들에게 장애가 될 수 있지만,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는 어떤 장애도 없습니다.
— Peter N.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What Do We Do with the Bible? (CAC Publishing, 2018), 45–48, 50–5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untitled (detail), 2020, photo, New Mexico.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 쓰는 안경처럼, 사랑은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 주는 렌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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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눈물과 하느님 나라의 추수>
예레 14,17ㄴ-22; 마태 13,36-43
예레미야 예언자는 참혹한 상처를 입어 고통받는 백성을 바라보며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14,17)라고 말합니다. 이 눈물은 한 예언자의 슬픔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눈물이기도 합니다. ‘상처’ 또는 ‘파멸’(שֶׁבֶר)은 삶이 깊이 부서지고 갈라진 상태를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분열과 무관심, 영적인 메마름이라는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절망하지 않고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14,19)라고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그는 죄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희망합니다. 회개의 시작은 무엇보다 자기 상처와 죄를 하느님 앞에 겸손히 내어놓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가라지’는 하느님의 작품을 왜곡시키는 모든 악을 의미하며, ‘밭은 온 세상을, ‘추수’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심판의 때를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가라지를 곧바로 뽑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가라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인내는 악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자비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하느님의 인내를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회개는 자신의 영적 가난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누지 않고,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흔적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죄를 보면서도 결코 하느님의 은총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폭력이나 배척으로 가라지를 없애려 하지 않았으며, 복음의 사랑이 좋은 밀을 자라게 한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였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참된 쇄신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이 먼저 변화되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교회의 위기와 인간성의 상실, 약한 이들을 향한 무관심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의 영적 무감각함에는 둔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먼저 자신의 냉담함을 두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초대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이웃의 구원을 함께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고백하듯이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14,22) 세상이 가라지만을 바라볼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풍성한 추수의 가능성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세 가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마음입니다. 둘째, 다른 이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인내의 마음입니다. 셋째, 누구에게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마음입니다. 다른 이를 바로잡기에 앞서 자신이 마음속 가라지를 뽑아내고, 판단하기에 앞서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세상 한가운데에서 묵묵히 선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더디게 자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비를 신뢰하고 사랑 안에 머무는 이들 안에서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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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기도와 영적 여정 7. 수도승적 기도의 출발>
성프란치스코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영성은 수도승적 기도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먼저 수도승적 기도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봅니다. 인간은 언제부터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던 순간부터였을 것입니다. 죽음을 바라보며 영원을 갈망하였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았으며,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끝내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며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크신 분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는 바로 이 갈망에서 시작됩니다.
갈망은 인간이 만들어 낸 욕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 놓으신 가장 깊은 흔적입니다. 인간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향하여 창조되었기에 유한한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도 마음 한가운데에는 설명할 수 없는 빈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이 고백은 수도승적 기도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초기 수도승들은 이 갈망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단순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분께 돌아갈 때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를 떠났습니다. 광야로 향하였습니다. 침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세상을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소음이 너무 커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느님을 기다렸습니다. 침묵 속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였고, 노동으로 마음을 다스렸으며, 금식으로 욕망을 정화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하루의 한 부분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바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찾았던 것은 특별한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순결이었습니다.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마음이 맑아질수록 하느님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붙잡으려는 집착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수도승들의 가장 큰 싸움은 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마음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교만과 탐욕, 분노와 허영, 비교와 경쟁, 명예를 향한 갈망, 자기 뜻을 내려놓지 못하는 완고함. 그들은 이러한 내면의 움직임을 '악한 생각들이라 부르며 평생 깨어 있기를 배웠습니다. 광야는 사실 사막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었습니다. 침묵은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욕망이 조용해지는 상태였습니다. 고독은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승들의 기도는 언제나 자기 마음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에는 한 가지 분명한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를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인간은 조금씩 정화되고, 조금씩 비워지고, 조금씩 하느님께 가까워지며, 마침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후에 베네딕토와 귀고, 그리고 중세 수도승들의 영성 안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들의 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이 길을 걸었고, 그 길 위에서 교회의 영성은 깊이를 더해 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3세기에 이르러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을 통하여 이 오랜 전통에 새로운 빛을 더하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승들이 올라가던 그 산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이미 인간에게 내려오셨다는 복음의 기쁨을 다시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란치스칸 기도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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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밭의 가라지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마태13,36ㄴ)
<'우리의 희망!'>
오늘 복음(마태13,31-35)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마태13,37-39)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41-43)
'우리의 희망!'
우리의 희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구원의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우리의 그 어떠한 죄 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악에서 벗어날 시간과 기회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지혜12,19-20 참조)
요즘 평일에 독서로 듣고 있는 말씀은 남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에 활동했던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어제 독서(예레13,1-11)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주님께서는 타락한 유다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마다하고, 제 고집스러운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좇아 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예배하였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띠처럼 되고 말 것이다."(예레13,10)
그러자 오늘 독서(예레14,17ㄴ-22)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쫒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예레14,20-21)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간청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살려주십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우리의 희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희망이신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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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내가 흘리는 눈물을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실까, 자주 묵상해봅니다. 천지의 창조주, 삼라만상과 우주의 지배자, CEO 중의 CEO, 너무나 크신 분이라 우리가 감히 범접하지 힘든 분, 구질구질하고 구차스러운 이 세상과는 달리 까마득한 천상, 아주 높은 옥좌에 좌정하시는 분,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는 첫 번째 독서를 통해 우리의 하느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심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계십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예레 14, 17)
보십시오. 예레미야 예언자도 안타까운 이스라엘 백성의 가련함에 눈물 흘리지만, 그 뒤에 서계신 하느님께서도 오늘 이 순간 우리를 위해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우리와 별개의 장소에서 별개의 삶을 홀로 살아가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와 더불어, 우리와 함께, 우리와 동고동락하시며 살아가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과 많이 동떨어지고 관련없는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구차스러운 현실, 부끄럽고 비참한 현실에 깊숙이 개입하고자 하십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 상이 지나치게 왜곡되고 편협화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의 하느님은 세상 자상하고 따뜻하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모델 케이스 아버지보다 천 배, 만 배 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결국 우리의 하느님은 죄인인 우리 각자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싶어하십니다. 내 상처를 눈여겨보시고, 내 고통을 안타까워 하시고, 내가 흘리는 눈물을 가엾이 여기시는 그런 인격적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생 여정을 강 건너 불 바라보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의 구차스러운 사건에 깊이 개입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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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가라지에서 밀이 되는 이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밀과 가라지는 잘 구별이 되지 않아서 다 자라고 나서 마지막 때에야 심판이 내려집니다.
지금은 두 자매가 똑같이 맷돌질한다고 하더라도, 두 형제가 똑같이 밭을 간다고 하더라도 둘 중의 하나는 밀이고 둘 중의 하나는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성당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밀이고 한 사람은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겉모양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게 밀과 가라지입니다.
내가 밀인지, 내가 가라지인지 개인적으로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작년에 밀이었으면 올해도 밀이고, 작년에 가라지였으면 올해도 가라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작은 밀이었다면 올해는 더 밀이 될 것이고, 작년에 덜 가라지 같았다면 올해는 더 가라지 같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더 그리스도답게, 그렇지 않은 가라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더 상반되게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곧 가라지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입니다. 물론 밀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 볼 때, 올해 덜 죄를 짓는 사람은 밀이고 더 죄를 짓는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에서 밀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령의 씨앗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믿음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만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아무리 많은 죄를 짓고 있어도 가라지에서 밀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변해가는데 자신이 가라지처럼 변하는지, 밀처럼 변하는지 그 기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기준은 하느님을 똑같이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15년 미국 마이애미의 한 재판장. 판사 ‘민디 글레이저’는 범죄자 ‘아서 부스’를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절도 및 도주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을 보고 판사는 느닷없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피고인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판사는 재판과 상관없는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혹시 노틸러스 중학교에 다니셨나요?”
그러자 피고인은 “오, 세상에!”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합니다. 피고인도 판사가 중학교 때 친구였던 것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노틸러스 중학교는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명문 학교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던 것입니다. 절친했던 둘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언어 과목에 강점을 보였던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기를 꿈꿨고 수학과 과학을 잘했던 아서 부스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17살이 되어 아서 부스는 도박과 마약에 빠졌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급기야 남의 돈에 손을 대며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아서 부스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해에 민디 글레이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하였습니다.
10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32세에 취직준비를 시작한 아서 부스는 범죄자를 받아 주는 직장은 찾을 수 없었고 다시 마약에 중독되어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었고 아서는 얼마 안 가 또다시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같은 중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출발한 둘은 판사와 피고인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민디 글레이저는 말합니다. “항상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중학교 때 정말 좋은 아이였습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축구도 자주 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거기서 뵙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아서 부스씨, 앞으로 당신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슬픈 건 우리가 벌써 이만큼 늙었다는 거죠. 진심으로 행운을 빌게요.”
이후 아서는 보석금 4,800만원의 판결을 받고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민디 글레이저 판사는 직접 마중을 나와 친구의 새 출발을 응원해줬습니다.
아서 부스는 말합니다. “판사가 된 친구와의 만남은 제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어요. 앞으로는 성실히 약물치료도 받고 똑바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제는 자포자기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 볼게요.”
재판을 받을 때 아서 부스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였을까요? ‘비교할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자신의 비교 대상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교해야 할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나의 삶을 비교하려면 나도 그리스도와 같은 형제임을 믿어야 합니다.
민디 글레이저 판사와 아서 부스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우등생이 아니었다면 아서 부스가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보며 오열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함께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면 그분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같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출발점이 다르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밀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라지가 밀이 될까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비교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더는 그분의 모범과 멀어질 수가 없기에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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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밀밭 사이의 가라지까지는 아니지만, 잔디 사이의 잡풀을 뽑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뽑아도 돌아서면 자라나 있는 그 질긴 생명력은 때로 화를 돋웁니다. 이를 견디다 못해서 결국 제초제를 뿌려 모두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설명해 달라고 한 비유로(마태 13,24-30) 돌아가 보면 주인은 가라지를 뽑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처럼 가라지가 악한 자의 자녀들을 상징하고 그것을 악마가 뿌렸다면 오히려 하루빨리 뿌리 뽑아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심판의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까닭은 판단의 권한이 오로지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바람직하지 않은 모든 것을 없애고 매끄러운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유혹에 빠집니다. 인간의 힘으로 모든 죄와 악을 깔끔히 없앨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거슬리는 모든 것을 매끈하게 다듬고 평탄하게 만들려는 폭력을 저지르기도 합니다(한병철, 『투명 사회』, 13-20면 참조).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죄악시하거나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결국 용서와 화해, 이해와 배려 같은 가치들은 오로지 선하다고 여겨지는 ‘우리 편’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공허한 이야기가 됩니다.
어느 공동체 안에든 선인과 악인이 공존합니다. 사실 우리는 누가 참으로 선하고 악한지를 온전히 구분할 힘이 없습니다. 그 심판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마지막 날을 향하여 나아가며, 악한 길에 든 이들마저 제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인내하며 기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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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36-43: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와 밀의 비유를 통해 세상과 교회의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추수 때에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고,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0.43절)
가라지의 비유에서 밀은 하느님께 충실한 의인들을, 가라지는 악과 죄를 따르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하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우리 눈에는 누가 선인인지, 누가 악인인지 쉽게 판단되지 않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인간의 눈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므로, 누구를 완전히 선하거나 악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다.”(Homiliae in Matthaeum 60 요약)라고 말한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 역시 이를 강조한다. 교리서는 최후 심판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완전히 드러내시고, 의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1038-1040항 참조)
사람들은 종종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 하고 서둘러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조급한 판단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가라지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삶 전체를 알 수 없으며, 순간의 행위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람은 외적 행동만 보고 심판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의 내면과 의도를 완전히 아신다.”(De Civitate Dei 20 요약)라고 지적한다.
오늘 복음은 남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 밭에는 어떤 씨앗이 자라고 있고, 어떤 열매가 맺히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순간적으로 가라지 같은 행동이나 생각을 하더라도, 하느님의 은총과 참된 회개를 통해 다시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다. 교회와 사회 안에서 “완전히 선한 사람들만 있어야 한다.”는 기대는 현실적이지 않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지켜보고 돕되, 궁극적인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는 신뢰가 필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하기를 바라시기보다, 완전함을 향해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매일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가며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 밭은 풍요롭게 가꾸어지고, 최후의 심판에서 의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세상과 교회 안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시간 동안, 충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자신을 좋은 밀알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남을 조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항상 겸손과 회개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는 의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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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여기에서 나>
마태오 13,36-43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지금여기에서 나>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1-43)
끝내
온 누리
밝음이리니
지금여기에서
나
기꺼이
밝음이리라
끝내
온 누리
기쁨이리니
지금여기에서
나
기꺼이
기쁨이리라
끝내
온 누리
착함이리니
지금여기에서
나
기꺼이
착함이리라
끝내
온 누리
나눔이리니
지금여기에서
나
기꺼이
나눔이리라
끝내
온 누리
돌봄이리니
지금여기에서
나
기꺼이
돌봄이리라
끝내
온 누리
섬김이리니
지금여기에서
나
기꺼이
섬김이리라
끝내
온 누리
살림이리니
지금여기에서
나
기꺼이
살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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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5년 전에 ‘손님’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꽥꽥!” 아침부터 거위 한 마리가 성당 마당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전날 성당으로 들어온 거위였습니다. 수녀님께서는 그 거위에게 ‘Bona’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라틴어로 ‘착한, 좋은, 선한’이라는 뜻입니다. 암컷이었기에 여성형으로 ‘Bona’라고 불렀습니다. 목에는 예쁜 리본도 달아 주었습니다. 밤에는 차고에서 잤고, 아침에는 빵도 얻어먹고, 수녀님께서 끓여 주신 라면도 먹었습니다. 참 행복한 거위였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날이었습니다. 눈은 소리 없이 수북이 쌓여 가고, 거위는 나뭇잎 위에 쌓인 눈을 먹고 있었습니다. 사무장님은 “관리인이 새로 왔다.”라고 좋아하였습니다. 저는 그 거위가 우리에게 온 손님이면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작은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새해에는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리라는 표징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우리도 다른 이웃들에게 착한 모습, 선한 모습,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하느님의 초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교우 몇 분과 수녀님은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작은 정성을 준비해서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봉고차로 나갔지만, 눈이 많이 내려서 사륜구동이 되는 차로 바꾸어 타고 나갔습니다. 문득 신학교 때 자주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Ecce Quam Bonum!” 시편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고도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 그렇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좋습니다. 함께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누군가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손님이 되고,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선물이 되는 것은 더 아름다운 일입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주교님과 신부님 두 분이 오셨습니다. 2,000년 전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렸습니다. 이번에 오신 주교님과 신부님들은 내년에 서울에서 열리는 ‘서울 세계 청년대회’를 알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교님이 오신 날, 마침 월드컵 경기가 있었습니다. 한국과 체코의 경기였습니다. 주교님은 본당 교우들과 함께 친교실에서 경기를 응원하였습니다. 경기 결과는 한국의 2대 1 짜릿한 역전승이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한국의 승리를 선물로 가져오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주일에는 주교님께서 미사를 집전하시고, 교우들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한국의 승리도 선물이었고, 주교님의 말씀도 선물이었습니다. 본당 공동체도 서울 세계 청년대회를 위해 작은 정성을 나누었습니다. 선물은 좋은 뜻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present’라는 말에는 선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오늘’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내가 좋은 뜻으로 이웃에게 나눌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밭에 좋은 씨가 뿌려졌지만,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갑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 버리자고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말합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을 너무 쉽게 둘로 나누고 싶어 합니다. 저 사람은 밀이고, 저 사람은 가라지라고 판단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서둘러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우리의 마음에도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우리 안에는 착함도 있고 약함도 있습니다. 선한 마음도 있고 이기적인 마음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망도 있고 세상 것에 흔들리는 마음도 있습니다.
죄인은 회개를 만나면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죄인이 용서받고 새롭게 변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린 뒤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젊은 날의 방황을 지나 위대한 신학자와 성인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세상의 즐거움을 따르던 삶에서 돌아서서 가난과 평화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삶에도 가라지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은총 안에서 밀은 더 크게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의 밀과 가라지는 남을 판단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 안의 밀을 잘 키우라는 말씀입니다. 내 안의 가라지를 보고 절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직 수확의 때가 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시간을 주십니다. 그 시간은 회개의 시간입니다. 성장의 시간입니다. 선물이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다면, 나는 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힘든 이웃을 위해 작은 정성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설 수 있다면, 내 안의 가라지는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내 안의 밀은 은총 안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25년 전에 손님으로 찾아온 거위 한 마리도 우리에게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먼 길을 찾아온 주교님과 신부님도 우리에게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선물은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가라지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함까지도 은총의 밭으로 바꾸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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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간의 협력도 꼭 필요하다>
장수 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이건숙-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명의를 찾고 장수를 위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간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는다.’(1요한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게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이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하자.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갈라6,8-9).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13,43).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아름답고 축복으로 가득한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엄중한 경고와 질책의 말씀도 함께 들어 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말하는 입보다 말하는 귀를, 듣는 귀보다 듣는 입을 지녔으면 좋겠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 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도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된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콩을 심은 데 콩 나고, 팥을 심은데 팥난다.” “뿌린대로 거둔다.” 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말한다.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말이다. 이 가르침은 자신의 절제와 동시에 자기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깨움을 준다. 그럼에도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앞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무상의 은총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인간의 협력도 꼭 필요하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하다. 내가 가라지가 되어도 안 되겠지만 가라지를 보고서 흔들려서도 안 된다. 세상에 담을 쌓고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피폐해진다. 그러니 결코 악에 굴복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다.”(성녀 벨라뎃다).
“주님, 의인의 삶이 빛나듯 저희의 삶이 해처럼 빛날 수 있게 지켜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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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왕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보고서는 불쌍하다면서 옆의 신하에게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고 했습니다. 이 왕은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소는 불쌍하고, 양은 불쌍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동물 애호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맹자는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영복 선생님께서도 이를 동물 사랑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만남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소를 만났기에 소를 구하고 싶었던 것이고, 양을 만나지 않았기에 만나지 않은 양으로 바꾸라고 했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만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만남이 너무 부족합니다. 스마트폰을 통한 SNS 만남만을 원하고, 실제 대면하는 경우를 기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의 만남을 요구하고 있어서, 자기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 자기 원하는 대로 해주는 사람과의 만남만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남 자체를 피하려고 합니다. 이런 자기중심적 사고가 섣부른 판단과 단죄를 만듭니다.
만남은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관계는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에서 제대로 완성됩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일꾼들이 섣불리 가라지를 뽑다가 좋은 밀까지 뽑아버릴까 염려하여 이를 원치 않으셨던 밭 주인의 인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장이 끝나는 시점, 곧 가라지는 거두어져 불에 타고 좋은 씨앗의 수확물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되는 그 마지막 때를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속한 공동체나 세상에서 ‘가라지’처럼 보이는 이들을 솎아 내고 심판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밀이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이 혼재된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인내를 배우면서 나 자신이 참된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 영글어가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특히 나를 짜증 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이들에게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가라지들과의 만남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귀한 형제자매로 여기며 인내와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선한 모범과 그들의 회심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늘 나라를 향한 올바른 길로 그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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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6-43)
1)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입니다.(마태 13,30) 그러나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입니다. 그래서 ‘가라지의 비유’는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신 말씀이고,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은 ‘하느님의 정의’에 초점을 맞추신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지만, 그 기다림이 ‘무한정’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종말이, 즉 최후의 심판이 언급되어 있지만, 우리는 심판에 공심판과 사심판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공심판은 인류 전체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고, 사심판은 각 개인이 죽은 다음에 받는 심판인데, 사심판의 선고가 최후의 심판 때 번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죽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기다림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사심판 때 유죄 선고를 받을 것이고 그 선고는 최후의 심판 때에 그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죽기 전까지’라는 것은, 사실상 ‘지금’ 회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는 동안에는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고, 아주 오만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그 회개는 ‘진정성 없는 회개’, 즉 ‘거짓 회개’입니다.
2)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의 관계에 대해서, “자비는 정의의 시작이고, 정의는 자비의 완성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라지’가 ‘밀’로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은 ‘자비’인데, 기다림이 끝나면 ‘정의의 심판’이 실행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비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자비는 ‘정의의 시작’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리면서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은 ‘정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의는 자비의 완성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고 스스로 정의의 심판을 선택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심판 때에 후회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에게 자비만 있고 정의는 없다면, 심판 자체가 성립되지 않거나 아주 불공정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에게 정의만 있고 자비는 없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고, 우리는 두려움에 숨이 막혀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정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자비의 심판대에 설 것인지, 정의의 심판대에 설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3) ‘가라지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말씀’을 대할 때, 가라지를 다른 사람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라지를 ‘남’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내가 바로 가라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나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심판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나는 절대로 가라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25)
그래도 신앙인들 중에는 주님께서 “너는 가라지가 아니라 밀이다.”라고 확인해 주시고, 보증해 주실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텐데, 그 확인과 보증은 당사자가 자기 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4) 예수님께서 내 안에 말씀의 씨를 뿌리실 때, 사탄은 내 안에 어리석고 악한 욕망의 씨를 뿌립니다. 수호천사가 나를 지켜 주면서 하느님 쪽으로 인도할 때, 사탄은 나를 유혹하면서 하느님의 반대쪽으로 유도합니다.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합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나의 공로가 되고,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것은 나의 책임이 됩니다. 죄를 짓고 나서 천사에게, “사탄이 유혹할 때 수호천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라고 항의할 수 있을까? 천사의 말을 못 들은 것은, 내가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유혹하는 말이 더 크게, 더 잘 들리는 것은, 내가 그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즐기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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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을 왜 믿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 부활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가 왜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를 잊은 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이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여 보았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많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마지막 날에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을 ‘의인’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줍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죄로 넘어질 때마다 우리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는 그 죄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회개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마지막 날에 ‘의인’으로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성찰’과 ‘고해성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를 이 신비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줍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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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사람에게는 저마다 조국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에게도 조국은 이스라엘입니다. 예언자가 비록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지만 한 순간에 적에게 무너지는 조국의 참담함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 날의 슬픔과 고통을 예언자는 잊지 못하며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예레 14,17-18)
미래가 없는 현실에서 그는 하느님께 하소연 합니다. 그의 심정은 아무래도 하느님께서 유다를 잊으시고 조상들에게 해 주셨던 약속을 미루시는 듯합니다. 모진 매를 드시며 이스라엘을 몰아 부치시는 하느님이시지만 그래도 예언자가 하소연 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 뿐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사라진 희망과 구원을 일깨우며 다시 하느님께 외칩니다.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려 줄 수 있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22절)
오랫동안 잊혀졌던 ‘피사리’ 말이 떠오릅니다. 벼 사이에 있는 피라는 잡초를 뽑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름이 지나 초가을이 시작 되면 벼들이 익어갑니다. 그런데 그 황금벌판 중간 중간에 우뚝우뚝 솟은 잡초인 피들을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이 ‘품앗시’로 돌아가며 뽑는 것입니다. 일손이 모자라면 또래의 친구들도 한 몫을 하며 피사리를 돕습니다.
여름 내내 클 때는 같았던 피들이 수확의 마지막에는 기승을 부립니다. 그런데 쌀이 떨어지고 보리로도 메꿀 수 없는 지경에는 뽑았던 잡초인 피를 모아 털어서 양식을 만들어 끼니를 떼 울 때가 있었나 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잡초인 피를 빻아 먹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을 가리켜 ‘피죽도 못었냐?’ 또는 ‘야, 피죽도 못 먹은 놈아!’라는 표현을 합니다. 잡초인 피로 만든 밥도 아니고 죽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먹을 것이 못 된다는 말이겠지요. 농경사회였던 우리 선조들에게 익숙한 벼농사의 잡초인 피라면 예수님 시대의 밀이나 보리 농사의 잡초인 ‘가라지’는 같은 맥락의 단어일 것입니다.
말은 달라도 공통적인 것은 ‘피’나 ‘가라지’가 벼나 또는 보리나 밀 밭의 잡초로 비슷하게 자라서 처음에는 구분하기가 힘들다가 수확 때가 되면 피나 가라지가 제 본색을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농부들은 벼를 뿌릴 때에도 좋은 씨를 가려서 심듯이 보리나 밀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도 않은 그 잡초가 자라나서 좋은 농사를 망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이런 광경을 보시고 마지막 심판 때에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오 13,37-40)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세상 종말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악인과는 달리 의인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새겨들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희망을 기르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비록 그것이 당장은 실망과 고통의 연속인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신앙인은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찾고 사랑의 하느님께서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는 좋은 것으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희망의 씨는 당장은 딱딱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거기에 물을 주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그 희망을 싹을 티우고 자라며 그렇게 기다리는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가라지’가 기승를 부리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기다리고 참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당장 일어나는 데에 자신들의 기를 모으지만 의인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 하느님의 손길을 끈질기게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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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가라지’일까요? ‘밀’일까요?>
우리는 때로는 이 세상에 판치고 있는 폭력과 불의와 죄악을 보면서 곧잘 흥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또 교회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서 경악하고 환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악한 생각들을 보면서 심히 좌절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고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저희를 치셨습니까?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일 하나 없고, 회복할 때를 바랐으나 두려운 일뿐입니다.”(예레 14,19)라고 하소연 하면서도,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예레 14,22)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가라지 비유’를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3,36)라고 청합니다. 겸손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종들이 집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묻자, 주인이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마태 13,37)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마태 13,40)이 되면,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가라지’와 ‘밀’을 거두어드릴 ‘때’가 따로 있으며, 그것들을 거두어드리는 일을 맡은 ‘일꾼’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이 바로 당신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세상의 종말”이 될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 속에서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라지’일까요? ‘밀’일까요? 또 우리는 41절에 나오는 ‘남을 죄짓게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일까요? 43절에 나오는 ‘의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설명을 마지막 구절에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43)는 말씀으로 결론지으십니다.
여기에서 ‘듣다’라는 뜻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신체적 청각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마음으로 깨닫고 삶으로 응답(순명과 실행)할 준비가 된 영적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세상의 가라지(악)에 휘둘리지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 의인의 길을 걷도록 깨어 있으라는 강력한 경각심의 촉구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귀를 일구어 주소서.
당신이 주신 좋은 말씀의 밀 씨를 품고 자라나게 하소서. 제 마음의 귀가 당신 말씀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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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밀밭의 가라지'(마태 13,36)
주님!
이 세상에 폭력과 불의와 죄악이 판을 쳐도, 내 안에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나쁜 생각들이 꿈틀거려도, 비록 가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빛을 가리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게 하소서.
오늘도 꺼지지 않는 빛을 밝혀 사랑의 밀밭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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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태오 13,40)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우리는 전능하신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자주 잊고 삽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보다 거룩하신 분에 대한 경외심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주님 현존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께 드리는 무한한 존경심과 찬미와 찬송입니다.
경외심은 거룩함에 대한 감각이요 어디서나 주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의식에서 시작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살피며 현존하시는 거룩하신 분 안에서 우리는 밀처럼 곱게 자라지만, 거룩한 현존을 잊으면 가라지처럼 망나니로 살게 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에 대한 현존의식과 경외하는 마음을 잊으면 우리는 어리석게 됩니다. 더 나아가 불경스럽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함부로 아무렇게 대하는 것은 무례하고 불손한 태도이지 존경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아무렇게 살아도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분께 경외심마저 잊으면 감사와 찬미와 찬송을 드리지 못합니다. 나의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끊임없이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합당한 시간에 찬미를 드리지 않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하찮게 보기 때문입니다.
밀밭의 영역을 침범하여 거룩한 영역을 무례하게 어지럽히는 가라지처럼 되면 안 됩니다. 밀밭을 침범하는 가라지와 같은 우리의 한계를 이해는 하지만, 마땅히 드려야 할 찬미와 찬송마저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세상 종말에 ‘가라지를 불에 태우듯이’ 하시는 주님께 항구한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높은 사람에게 하는 것은 때로 아부가 되지만,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드리는 찬미와 찬양은 아무리 해도 모자라고 아부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찬미가 주님께는 필요하지 않으나, 우리 구원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경외하며 찬미와 찬양을 드리듯이,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보호하며 존중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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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3,40)
세상의 종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아라는 거짓이
끝나는 종말입니다.
종말은 단순히
세상의 마지막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정의와 자비가
완전히 드러나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가라지가 타는 곳에서
밀이 자라고,
자아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비로소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종말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 죄가 사랑으로
바뀌는 순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라지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주님의 은총으로
가라지를 줄여 가는 삶입니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라지는
단지 밖에 있는 악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파괴적인
마음의 습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참된 자신을
잃어버리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밭에
불을 놓으십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길은
오늘을 하느님 나라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버릴 용기가
곧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향해
익어 가는지를
묻는 오늘의 시간입니다.
가라지를 주님과 함께
태우는 오늘이
하느님 나라를 키우는
생명의 본질이 됩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