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달러의 행복 / 박금아
한 달여 미국에 머물던 어느 날, 평소 먹던 약을 잃어버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엿새나 남아 있었다. 파견 근무를 하러 간 딸을 따라간 여행이었다. 미국은 초행길인 데다가 서툰 영어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딸애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날은 딸애의 근무 때문에 혼자서 한국인 의사를 찾아갔다. 택시를 타고 한참 달리니 한글 간판을 단 상가가 나왔다.
병원은 2층에 있었다. 분위기가 우리나라 6, 70년대 병원과 비슷했다. 벽 빛부터가 옛 벽에 칠해져 있던 노르께한 색깔이었다. 그 시절, 이발소 벽에 있던 것 같은 그림 몇 점이 걸려있고, 가구들은 모서리가 깨진 채로였다. 직원들도, 진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도 옛날 사람들 같았다. 말소리도 달랐다. 한국말인데 요즘 말과는 달랐다. 풍화된 말의 빛깔이랄까.
소박한 인상의 여자 의사였다. 여행 중에 약을 잃어버렸다고 했더니 금세 우는 상을 하며 "어머나, 불쌍해서 어쩌나요." 한다. 약 이름을 알려 주며 여섯 알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행히 같은 약이 있었다. 의사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몇 가지를 물어보는 눈치였다. 전화를 끊은 다음에는 나를 향해 의자를 바짝 당겨 앉더니 메모지에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한참을 설명했다. 두 개의 처방전을 써 주었다. 한 장에는 큰 약 세 알이, 다른 종이에는 작은 약 여섯 알이 적혀 있었다. 큰 약을 사서 두 개로 쪼개어 먹는 것과 작은 약을 사서 한 알씩 먹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싼지 자신은 모르겠다며 약사와 의논해 보란다. 그리고는 문까지 나와 배웅하며 불쌍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게 아닌가.
진료실을 나오니 이십오 분이나 지나 있었다. 아까보다 많은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했지만 내 코가 석 자였다. 약국으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며칠 전에 미국에 사는 동생이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입고 이틀간 입원해서 검사를 받았는데 수천만 원이 나왔더라는.
처방전을 내밀었다. 약사는 살펴보더니 이러나저러나 약값은 같다며, 보험에는 가입했는지 물었다. 여행자 보험뿐이라고 했더니 미국에서는 약이 비싸요, 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궁금했지만 약값을 물을 수 없었다. 약 봉투를 받아들고서야 간신히 입을 뗐다.
“얼마인가요?”
“정말 미안해요.”
내 눈빛이 애처로웠던 걸까. 나를 쳐다보며 다시 한번 이러는 게 아닌가.
“여기는 약값이 아주 비싸답니다. ……. 30달러입니다.”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듯했다. 얼핏 계산해보니 한국의 세 배 정도였지만 걱정했던 것보다는 싼값이었다. 큰돈을 번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슈퍼로 달려갔다.
해산물 판매대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랍스터를 세일 중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다리가 제일 굵은 랍스터 두 마리를 집어서 주인에게 건넸다. 저울 눈금이 휙 돌아갔다. 주인이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정말 살 거냐는 듯 물었다. 나는 큰 소리로 뱉어버렸다. “오케이!” 구매를 망설이던 미국 여성들의 부러운 눈길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좀 더 호기를 부리고 싶었다. 킹크랩과 연어도 주문해서 바구니에 담았다. 스페인 단감과 망고, 파파야도 한 상자씩 샀다. 시장을 보고 나오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콜택시를 부르려니 겁이 났다. 딸애에게 전화를 걸어 불러 준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저녁을 준비하는 내내 콧노래가 나왔다. 큰 솥에 랍스터와 킹크랩을 찌고, 숙소에 비치되어 있었지만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던 양념들을 뿌려가며 연어를 구웠다. 샐러드를 만들고 망고와 파파야도 예쁘게 잘라놓았다. 딸애는 퇴근이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마중이라도 갈까 싶어 연락하려는데 아뿔싸! 전화기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집을 나설 때 메고 갔던 배낭도 없었다. 처방받은 약과 여권과 신용카드가 들어 있던 가방이었다. 택시에 두고 내린 게 분명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쯤 되니 정말이지 내가 불쌍해졌다. 딸애를 기다리는 시간이 여삼추였다. 한참 후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딸아이의 전화벨이 울렸다. 택시 회사에서 온 전화였다. 스마트폰을 보관하고 있다며 숙소까지 가져다주겠다는 게 아닌가. 등록된 고객정보로 찾았단다. 얼마 후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스마트폰을 들고 선 기사에게 얼마라도 수고비를 주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삼만 원 정도를 준다고 들었던 말이 생각나 30불을 건넸다. 기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NO!” 했다. 하도 정색을 하는 바람에 무안할 정도였다. 고마워서 그러니 받아달라고 해도 규정이라며 5불만 요구했다. 나중에 택시 회사 약관을 읽어보니 분실물 습득 처리 수수료는 5불이라고 적혀 있었다.
잠자리에 드니 여러 얼굴이 떠올랐다. 의사와 약사, 택시 운전사와 함께 "불쌍해서 어쩌나요."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30달러의 돈을 두고 왜 그리 나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말이다. 30달러라고 하면 부자 나라 사람에게도 아주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리 많은 돈도 아니지 않은가. 약값이 좀 비싸기로서니 여섯 알을 위해 처방전을 두 개나 써 주다니, 내 행색이 그 정도로 초라했다는 뜻인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거울 속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순간, 불쑥 드는 생각 하나, 그건 어쩌면 객지에서 어려움을 당한 여행자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른다는 깨우침이었다. 뭉클했다. 실은, 내가 선 모든 자리는 타관이고 잠시 머무는 여행지가 아닌가. 그러니 모두는 측은지심으로 바라보아야 할 나그네라는 깨달음이었다. 꿈을 꾼다면 그날 만난 사람들이 고향 아주머니와 이모, 고모, 삼촌이 되어 나타날 것 같았다. 허떡개비마냥 욜량욜량하다가 지옥에 든 ‘불쌍한’ 날이었지만, 몇 번이나 천국에도 든 날이었다. 잠결에서도 내내 웃었을 것이다.
그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후듯해진다.
“30달러입니다.” *